92, 우리 집에 왜 왔니?
92, 우리 집에 왜 왔니?
강호칠대금문(江湖七大禁門).
그들은 명문거파에게 있어서 똥 같은 존재였다.
두렵지는 않지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딱 그 정도의 존재라고 여겼다.
하나 강호에 퍼져 있는 대부분의 세력은 강호칠대금문을 두려워했다. 강호의 법도와 상리를 무시하고, 내일이 없이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칠대금문은 그것을 잘 알았다.
그것은 곧 자부심이 되어 그들의 보무를 당당하게 만들었다.
하나 봉황곡(鳳凰谷)의 곡인들은 야음을 틈 타 은밀하게 움직였다. 수십 명으로 이뤄진 무리가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그렇게 공터에 모인 자가 무려 이백여 명이다. 그리고 은밀한 곳에 십여 명의 여인이 둘러앉았다.
가장 상석에 앉은 여인이 시선을 끌었다.
봉황태후(鳳凰太后).
봉황곡의 새로운 곡주였다.
오십 대의 나이에도 중년의 미부(美婦)를 방불케 할 만큼 고운 외모를 자랑했다. 흰 얼굴과 길게 늘어진 눈초리로 인해 처연함이 물씬 풍긴다.
하나 눈빛만은 장부에 뒤지지 않을 만큼 뜨거웠다.
그만큼 그녀는 야망과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이것이 본 곡의 현실이다.”
봉황곡의 팔 장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백타.”
백타선자가 고개를 들었다.
“반 년 전 그대가 본 곡의 반도인 백봉을 쫓을 때 어찌했던가?”
“거침이 없었습니다.”
“산동의 그 누가 본 곡의 행사를 방해했던가?”
“삼정 또한 불만을 가질 뿐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봉황태후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뜩였다.
“한데 지금 우리가 짓밟으려는 대상이 누구인가?”
백타선자는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곡부남가입니다.”
“신공부의 속가도 아니고, 그 밑이라고 하더군. 본 곡이 언제부터 벌레들까지 신경 썼단 말인가.”
팔 장로가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일원은 이번 일을 통해 강소성의 수석 자리를 약속했다. 수석만 되면 봉황곡은 봉문을 풀고, 칠계 위에 군림할 것이다. 수십 년 간 은거했던 본 곡의 시작으로 나쁘지 않아.”
팔 장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노파가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은 것으로는 부족하지요.”
봉황태후가 입꼬리를 올렸다.
“장로원주는 마치 내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군. 나는 최상을 원한다. 나는 최고를 원한다. 누가 봉황곡의 첫 걸음을 화려하게 장식하겠는가?”
백죽선자가 나섰다.
무공은 중간 정도였지만, 독심만은 최고였다.
“제가 곡부남가의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겠습니다.”
“혼자 가능하겠느냐?”
곡주의 말에 백죽선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자신 없는 모습에도 타박은 없다.
곡주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세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탐욕을 부리지 마라. 모든 것은 곡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그러니 백타가 함께 하라.”
백타선자가 일어났다.
“곡주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제게 매혹대를 모두 주십시오.”
“가져가라. 곡의 모든 재화를 쏟아 부어 곡부남가를 강호에서 지워버려라.”
잠시 후 소복처럼 하얀 무복을 걸친 백여 명의 여인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숲 전체가 일렁이며 수백 명의 험상궂은 사내들이 자취를 감췄다.
“곡주.”
장로원주가 찾아왔다.
“홍택의 서찰입니다.”
봉황태후는 미간을 좁혔다.
“홍택이 왜?”
“전서응까지 보낸 걸로 보아서 중요한 내용인 듯합니다. 당장 살펴보시지요.”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다.
연하연의 생존과 남천휘와의 합류가 적혀 있을 뿐이다. 한데 그것만으로도 봉황태후의 눈동자에 살기가 가득 맺혔다.
“빙정지를 맞고도 살았다니. 그 년의 명줄이 길기도 하구나.”
장로원주가 목소리를 낮췄다.
“무림맹과 남궁세가 앞에서도 함께 했답니다. 이제 남천휘와 연하연의 관계가 공론화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훗, 그렇다면 이것은 일원의 문제가 아니라 본 곡 내부의 문제로 삼아도 되겠구나.”
“산동성은 남천휘로 인해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곡부남가를 짓밟고, 강소수석이 되는 걸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이걸 명분으로 삼아 신공부까지 처리하신다면······.”
봉황곡주는 입꼬리를 올렸다.
“강소성에 이어 산동 남부까지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겠구나.”
“그렇습니다.”
“역시 원주는 내 속에서 사는 듯하이. 지금 당장 장로들을 부르고, 무희들을 총 동원하라. 우리는 신공부로 간다.”
봉황곡은 여인들의 문파로 알려졌다.
그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리다.
여인들로 이뤄졌으나, 곡 외부에는 봉황곡을 추종하는 사내들이 무리를 이룬지 오래였다. 본래는 제멋대로 모여들었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곡주가 체계적으로 관리를 할 만큼 가까워졌다.
하여 봉황곡에 매혹됐다고 해서 매혹대(魅惑隊)라 칭했다.
백타선자는 곡부남가를 지척에 두고 매혹대주를 불러들였다. 깡마른 체구에 흐릿한 눈빛을 지닌 장년인이 맞은편에 자리했다.
앵속과 음욕에 젖은 폐인처럼 보였다.
하나 장년인은 한때 장강 일대에서 알아주는 무인이었다. 약관의 나이에 절정에 올라 장강의 수로를 제패했을 만큼 위명을 떨쳤다.
“부르셨습니까.”
그러나 초절정을 앞뒀던 교룡기검(蛟龍奇劍) 사마갈은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은 그저 봉황곡의 치마폭에서 허우적거리는 일개 사내에 불과했다.
백타선자는 자신의 신발이라도 핥을 것처럼 굽실거리는 사마갈을 보며 경멸의 시선을 내비쳤다.
“몇 놈이나 모았는가?”
사마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손하게 대꾸했다.
“쓸모없는 것들을 외곽 관도에 배치했습니다. 칼로 쓸 만한 자들은 삼백이십 명입니다.”
“백여 명으로 장원 외곽을 포위해라.”
“그리 하겠습니다. 공격은 언제가 좋겠습니까?”
백타선자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지금 당장.”
사마갈의 눈동자는 살기가 아닌 음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백타선자의 싸늘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일이 끝나면 언제나처럼 포상이 주어질 것이다.”
사마갈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표정으로 희희낙락하며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구릉 전체에 살기가 충천했다.
곡부남가 쯤은 한 호흡에 날려버릴 것처럼 거대한 살기였다.
*
남천휘는 산동성에 발을 들였다.
평범한 관도에서 영역을 파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눈앞에 존재했다.
◎ 강소성에서 탈출했습니다.
◎ 메인 퀘스트 2-1, 도주행이 완료되었습니다.
◎ 특기 ‘통찰’이 승급합니다.
- 사태의 본질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 특기 ‘억압’이 승급합니다.
- 정무단과 별동대에 대한 억제력이 증가합니다.
◎ 특기 ‘지모’가 승급합니다.
- 변별력이 상승하며 대책 마련에 큰 재주를 보입니다.
남천휘는 다급한 와중에도 탄성을 흘렸다.
억압과 지모는 그렇다손 치자.
한데 통찰은 S급 특기가 아닌가.
본래 천수련을 통해 익힌 검후의 비기였으니 성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데 예기치 못한 순간 승급이 되었다.
‘그만큼 내가 잘 해결했다는 뜻이겠지?’
◎ 시스템의 해결 수치를 큰 폭으로 뛰어넘었습니다.
남천휘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려 할 때였다.
◎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했습니다.
- 적대 세력의 시선을 끌수록 행동의 폭은 좁아지고, 퀘스트의 폭은 넓어집니다.
이번만은 재이를 타박할 수 없었다.
정무단 적무대주의 언행만 봐도 자신을 적대시하는 세력이 존재했다. 적은 안개 속에 있고, 자신은 밝은 곳에 있으니 자중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리라.
‘도광양회의 고사를 쫓아야 하는가.’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가 곧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촉도(蜀道)에 몸을 숨기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 타박하지 않을 뿐 따를 생각은 전무했다.
이미 신공부 사태 때 적도는 곡부남가를 침범하지 않았던가.
남천휘는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듯 이미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였다. 이쯤 해서 몸을 사린다면 오히려 우습게 보는 자들만 늘어나리라.
‘돌로 정을 깨면 되는 거지.’
◎ 주인님의 호방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 PS.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
그럼 지난번에는 거짓말이었구나.
남천휘는 요망한 것을 침묵시킨 후 전방을 응시했다. 직진하면 추성을 지나 곧장 곡부였고, 우회하면 몽산이 보일 터였다.
‘본가에 갔는데 위기에 빠진 곳이 아니라면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그러니······.’
몽산에서 각 성소의 상황을 파악한 후 이동한다면 체력 소모 없이 대응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 헤어지자.”
소용녀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숙원을 해결했으니 무진철원으로 돌아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조만간 양질의 무기를 납품해주기로 했으니 등을 떠밀어서라도 보내야 할 상태였다.
“너라면 뭐가 됐든 다 이겨낼 것 같으니 별 말하지 않을게. 몸 조심해라.”
“너야말로.”
두 사람은 잠시 눈짓을 주고받았다.
성별을 뛰어넘은 우정이 이런 것일까 싶을 만큼 눈빛이 따뜻했다.
“간다.”
“가라. 나는 밥 먹고 간다.”
이쯤 되니 부외자처럼 한쪽에 서 있던 남궁소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남천휘에게 거절당했던 그녀는 소용녀를 핑계로 함께 하지 않았던가.
‘어, 어.’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남천휘와 연하연이 자취를 감췄다. 이제 관도에 남은 건 소용녀와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전부였다.
“언니, 남 소협은 어디로 가신 거예요?”
소용녀는 육포를 물에 불리며 대꾸했다.
“집에 갔겠지.”
“알았어요.”
남궁소는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소용녀는 철 그릇 안에 뽀얗게 내린 흙먼지와 멀어지는 남궁소의 뒷모습을 번갈아 봤다. 그녀는 눈을 끔벅이며 한 숨을 내쉬었다.
“너, 내 이름은 아니?”
*
남천휘는 몽산에 들어섰다.
안개는 예전보다 더욱 짙어진 듯했다.
성소 포인트가 누적될 때마다 일정 비율을 떼어 진법에 투자한 결과였다.
현재 대두동 인근에 펼쳐진 무혼진의 레벨은 5다.
약초꾼이나 사냥꾼과 같은 범인은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안개가 짙었다. 무혼진의 레벨이 7에 이르면 절정 고수도 찾을 수 없고, 9를 넘기면 유지인 남천휘조차 정해진 자리를 밟은 후에야 들어설 수 있다고 하더라.
“괜찮아?”
남천휘는 안개 속에서 연하연을 향해 말했다.
“네. 손 좀 잡아달라고 약한 척을 하고 싶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서 참고 있습니다.”
군사야, 안개에 미혼약이라도 넣은 게냐?
갑작스런 연하연의 한 마디가 점혈보다 더 무서웠다. 잠시 후 당황스러워하는 연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내에게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성시 오라버니가······.”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런데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잖아.’
연하연의 순수함을 넘어 백치미에 가까운 한 마디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크흠. 크흠. 유지 발동 안 되냐? 빨리 목록 띄워야지. 뭐하는 거야?’
머쓱한 마음에 만만한 재이를 닦달했다.
◎ 특기 ‘유지’가 발동합니다.
녀석은 웬일로 투덜거리지 않고 성소의 목록을 띄웠다. 한데 목록을 살피고 나니 재이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성소 ‘곡부남가’에 대규모 공세가 시작됐습니다.
◎ 성소 ‘신공부’에 대규모 공세가 예정되었습니다.
남천휘는 성소 목록을 치운 후 곧장 특기 목록을 활성화했다. B급 특기 ‘운행’은 성소와 성소 사이를 이동할 때 최단거리를 표시해준다. 그리고 최단거리를 나타내는 붉은 선을 따라 움직일 때에는 체력의 소모가 전무했다.
‘특기와 특기를 합성할 수 있다고 했지?’
◎ VIP 포인트를 소모하여 합성이 가능합니다.
‘운행을 5레벨까지 승급. 신속도 5레벨까지 승급.’
VIP 포인트가 눈에 띄게 줄었다.
하나 남천휘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 집을 또 건드려?’
◎ ‘운행’과 ‘신속’을 합성하시겠습니까?
남천휘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두 개의 특기가 형상화하여 눈앞에 등장했다. 그리고 두 개가 충돌하더니 엄청난 빛에 휘감겼다.
띠링-
◎ A급 특기 ‘신행(神行)’이 등록되었습니다.
- 성소간의 이동시 체력 소모는 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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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km 이상 연속 질주 시 내공과 체력의 소모가 20% 감소합니다.
원하던 것 이상이 등장했다.
“제비야. 가자.”
연하연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남천휘의 뒤를 따랐다.
‘은공의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