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금의환향할 뻔. (2)
*
남궁재야가 주최한 연회는 밤새 계속될 듯했다.
하나 남천휘는 적당히 분위기만 띄운 후 자리를 떴다. 알림에 의하면 성소가 위험에 빠졌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데 주빈이 일어나니 연회가 계속될 리 없다.
남천휘가 일어나는 순간 자연스럽게 연회가 끝났다.
“날이 밝은 후 떠나는 것이 어떻겠는가?”
단자경은 대화가 즐거웠던 듯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 같이 가시던가요.”
남천휘의 말에 단자경은 입맛을 다셨다.
정무단의 공식 임무는 만병보고의 붕괴를 조사하는 것이다. 한데 남천휘를 통해 저간의 사정을 파악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는 맹으로 돌아가 무상에게 직접 보고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적무대주가 슬쩍 앞으로 나서며 끼려 했다.
하나 그가 발을 내딛기 전 남천휘의 단호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아니외다. 남 소협에게 결례를 범했으니······.”
미련 가득한 한 마디에 대한 대꾸는 단호한 거절이었다.
“괜찮아요.”
“하지만.”
남천휘는 적무대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불편한 동행은 사양입니다.”
단자경이 남천휘를 거들었다.
“자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결국 적무대주는 꼬리를 만 개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때 백무대주가 손을 번쩍 들고 나섰다. 그 또한 남천휘의 무위에 관심이 깊었던 듯 동행하고자 했다.
“오호, 그래. 너라면 나쁘지 않지.”
남천휘에 대한 정보도 얻고, 덩달아 교분도 맺는다면 향후 정무단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백무대의 강천입니다.”
강천은 정무단주를 빼다 박은 듯한 무인이다.
무공에 대한 갈망과 강자에 대한 숭상을 형상화하면 그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정무단 내에서도 정예라 불리는 백무대의 합류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해도 좋을 터였다.
하나 남천휘는 웃는 낯으로 사양했다.
성소와 성소 사이의 길목은 체력 소모 없이 이동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몽산의 대두동으로 향한 후 곧장 곡부남가로 내달릴 요량이었다. 그러니 일행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불편할 따름이다.
백무대주는 아쉬움이 남는 듯 연방 입맛을 다셨다. 하나 당사자가 싫다고 하니 달리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한데 놀랍게도 예기치 못했던 존재가 방법을 찾아냈다.
“저는 언니와 함께 가기로 했어요.”
남궁소가 환하게 웃으며 소용녀의 팔짱을 끼는 것이 아닌가. 남천휘는 물론이고, 소용녀까지 눈을 끔뻑일 만큼 갑작스런 등장이었다.
“응?”
“무진철원에 대해서 얘기해주셨잖아요. 초대해주신다고 했으니 이번 기회에 가고 싶어요!”
소용녀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저 깜찍한 계집이 나를 이용해?’
그녀는 술자리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남궁소는 연회 내내 부외자처럼 어울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노리던 남천휘와 연하연이 정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짝 붙어 앉았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다가갈수록 손해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러니 우회하여 소용녀를 노렸으리라.
“언니, 언니! 저도 데리고 가주실 거지요?”
소용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어쩐지 친한 척하면서 달라붙는다 했더니 이런 노림수가 있었던 게다.
‘그저 빈말로 고개나 끄덕여준 것인데······.’
하나 잘생긴 사내도 아니고, 얄미운 계집애의 농간에 휘둘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소용녀는 남궁소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려 했다.
한데 그 순간 남궁재야가 슬그머니 끼어들면서 소용녀에게 공수를 하는 것이 아닌가.
“소아가 지난 번 용봉쟁투를 구경하면서 아쉬움이 많이 남은 듯하네. 소 소저가 괜찮다면 우리 소아를 잘 부탁하네.”
소용녀보다 두 배분 이상 높은 남궁재야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로서는 더 이상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이고, 네 녀석 덕분에 저 깐깐하던 사람이 허리를 숙이는 구나.’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철원까지는 함께 가보겠습니다.”
“고맙네. 고마워. 소 소저.”
마치 천하를 얻은 듯 즐거워하는 남궁재야를 보고 있자니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단지 남궁소를 떼어놓고 싶었던 건 아니겠지?’
남천휘는 혹이 붙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내 손님은 아니잖아?’
◎ 하루 전만 해도 용린쌍도를 함께 만든 동지에게 너무 하시는군요.
‘각자 원하는 바가 맞아떨어진 거지.’
남천휘가 애써 모른 척했다.
◎ 본가의 명사들을 위해 무기도 만들어줬잖아요.
‘제값을 치르면 될 일!’
◎ 주인님의 호방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남천휘가 눈을 흘기며 신호를 보냈다.
너 차단?
◎ 현재 위치에서 대두동까지의 예상 소요 시간은 일곱 시진 반입니다. 내공을 사용했을 때의 소요 시간을 계산해 드릴까요?
남천휘는 의문의 1승과 함께 걸음을 내딛었다.
“남궁 노야, 그리고 단 단주. 조만간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 소협의 건승을 빌겠네.”
그렇게 짧은 만남은 끝이 났고, 흥이 깨진 무인들은 처소로 돌아가려 했다. 만약 전령이 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헤어졌으리라.
“대별산의 전언입니다.”
대별산은 곧 무림맹을 상징했다.
정무단주는 서찰을 펼치며 미간을 좁혔다.
‘흐음.’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다.
강호칠대금문에 속한 봉황곡이 봉문을 깨고, 산동의 변경에서 활동을 하고 있단다. 그로 인해 산동 지부가 곤혹을 겪고 있으니 정무단의 일대를 보내어 지원하라는 내용이었다.
남궁재야가 나직이 읊조렸다.
“단주, 큰일이라도 생긴 겐가?”
단자경은 눈을 가늘게 떴다.
“봉황곡이 산동성에 나타났답니다. 정무단이 지원하라는 군요.”
두 사람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마주하고 있던 봉황곡의 소곡주를 떠올렸다.
‘남천휘, 곡부, 봉황곡, 소곡주. 거기에······.’
단자경은 한쪽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적무대주를 흘겨봤다.
‘저 자까지.’
참으로 공교로운 상황이 아닌가.
적무대의 파견을 거부하자마자 상부에서 같은 명령이 내려온 게다.
그는 더 이상 뻗대지 않았다.
“적무대가 산동으로 간다.”
상대의 의도를 모를 때에는 함께 휩쓸린 채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단자경은 지켜보는 역할을 백무대주에게 맡겼다.
“자네도 곡부로 갈 준비를 하게.”
“존명!”
적무대주는 난색을 표했다.
“적무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니야. 강호칠대금문인 봉황곡의 저력을 확인하지 못했어. 그러니 백무대도 함께 파견하겠네.”
단자경은 적무대주의 입을 닫게 만든 후 그를 노려봤다.
‘네 놈의 뒤에 누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구나.’
백무대주가 소리 없이 눈짓으로 동의했다.
남천휘가 백룡암을 떠나고, 한 시진 후 이백여 명의 무인들이 북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곡부로 간다!”
*
백결공은 언덕 위의 제단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동그란 달이 손에 닿을 것처럼 지척에 이르렀다. 맑은 물이 담긴 대접 안에 맺힌 달 또한 일그러지지 않은 채 원형을 유지했다.
“억조창생의 염원을 담아······.‘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손을 모았다.
‘일원의 뜻이 만천하에 퍼지기를 기원하나이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피와 원한은 산처럼 높을 것이고, 바다처럼 넓으리라.
백결공은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대접을 들어올렸다.
마치 제를 올리듯 경건한 자세로 달이 담긴 물을 입 안에 흘려 넣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사라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그 피와 원한을 제 숙명이라 받아들이겠습니다.’
양 손에 힘을 더했다.
콰직!
대접이 깨지며 파편이 흩날렸다.
백결공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안의 말을 건넸다.
“또 헤쳐 나가는 것도 제 몫이겠지요.”
그는 마치 천명을 받은 사람처럼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파스슷-
파편은 가루가 되도록 짓이겨졌다.
백결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변수마저 통제한다면 하늘과 같은 것을 볼 수 있겠지.”
혼잣말처럼 들렸다.
하나 제단 아래서 담담한 한 마디가 돌아왔다.
“모든 것이 사형의 눈 아래 있으니 머지않아 스승께서는 하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겁니다.”
백결공의 조각 같던 미소가 깨졌다.
그는 북풍의 한설처럼 서늘한 눈빛으로 어둠을 노려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병약한 안색의 학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원좌사 휘하 망월량이 사형께 인사 올립니다.”
“오랜만이구나.”
“아직 살아 있었냐는 책망으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흥! 크게 다를 건 없지.”
“하나뿐인 사제에게 너무 하시는군요.”
백결공의 눈매가 더욱 일그러졌다.
“스승이 같다고 해서 네깟 것과 형제의 연을 맺고 싶지는 않구나.”
평소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똥오줌을 지릴 만큼 살기등등한 모습이다. 어쩌면 평소의 온화한 모습이 가면인 것처럼 실제의 모습은 더욱더 깊고 어두울 터였다.
하나 망월량은 벽을 보고 대화하듯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 또한 일원좌사의 세 제자 중 한 명이 아닌가.
대제자가 몰래 힘을 기르고, 백결공이 맹에서 힘을 퍼트렸다면, 망월량은 힘을 사용하는 쪽이다.
“우애는 포기하도록 하지요. 다만 십이망자 중 몇을 내어주셨으면 합니다.”
백결공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일원좌사가 총력을 기울여 모아놓은 것이 바로 십이망자(十二忘者)였다. 그리고 십이망자는 언제고 하늘이 천하를 차지했을 때 일원우사와 대적하기 위한 비장의 한 수이기도 했다.
“네가 감히 십이망자를 노려?”
망월량은 고개를 조아렸다.
“산동의 남천휘가 만병보고에서 살아나왔다지요. 만병보고는 단순한 창고가 아닙니다. 사령신의 기억과 역사가 깃든 장소지요. 한데 남천휘 또한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저간의 행적만 돌이켜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장했지요. 그래서 사형께서는 결정하셨을 겁니다.”
그는 백결공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십이망자 중 둘을 보내셨지요.”
“그렇다.”
“십이망자라면 무림맹 외원의 단주 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거기에 음험한 심계와 잔혹한 기병이 더해졌으니 동수보다 강할 테지요. 남천휘를 베기 위함이라면 과한 칼이 아닐는지요?”
백결공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과하다.”
“그런데도 보내셨지요.”
“그렇다. 놈은 변수다. 하나 내가 만들지 않았고, 통제할 수도 없는 변수다. 그리고 급격하게 거슬리는 변수지. 그런 변수는 미연에 잘라내야 한다. 전력을 다해!”
백결공은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역공을 당할 만큼 어수룩한 자가 아니었다. 열로 하나를 깰 수 있다면 애초부터 오십이나 백을 보내서 깨버리는 것을 추구했다. 그렇기에 강호칠대금문인 봉황곡을 동원하고도 십이망자의 봉인까지 푼 게다.
타초경사의 우는 멍청이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사형의 뜻이 옳습니다. 그러니 제게도 십이망자를 내어주십시오.”
백결공은 미간을 좁혔다.
그제야 망월량의 혓바닥이 향하는 곳을 눈치챈 게다.
“흥! 남천휘에 버금가는 존재가 있다는 게냐?”
“다릅니다. 너무 달라서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뭐라?”
“남천휘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움직입니다. 마치 이야기 책의 주인공처럼 수순을 밟아나가지요. 하나 제 앞의 상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백결공은 사태의 심각함을 받아들였다.
망월량을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그의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강남에 괴인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괴인입니다. 그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뜁니다.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강자와 약자 또한 구분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미친 괴인입니다. 그 자가 북상하고 있습니다.”
“강호의 근간을 흔드는 변수라면 환영할만하지 않은가?”
“한데 변수가 일원에게 집중되었다면 변수라 할 수 없겠지요.”
백결공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를 갈았다.
“말도 안 돼. 일원은 점조직처럼 퍼져서 나조차 끝을 알 수 없다. 한데 놈이 누구이기에 일원을 노린단 말인가?”
망월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마치 표식이라도 붙은 것처럼 골라내어 쳐 죽인다고 합니다.”
“그가 누구냐?”
“스스로를 가리켜 사파의 아비라 칭하더군요.”
백결공은 지난 번 회의를 떠올렸다.
만병보고의 소요와 백화교의 준동을 주요 안건으로 처리했다. 그 와중에 처리된 몇 개의 작은 안건 중 하나가 바로 강소성의 괴인이었다.
‘그 자가 ’사부‘라고 했었지.’
백결공은 소매를 흔들었다.
그러자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묵빛의 명패가 솟구쳤다.
“가져가라.”
망월량은 세 개의 명패를 받아들고도 떠나지 않았다.
“사형.”
그는 마치 무언가를 예견한 사람처럼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만약 제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정(正)과 반(反)의 만남을 가장 경계하소서. 두 개의 변수가 조화를 이룬다면 병법으로는 파해할 방도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