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금의환향할 뻔.
91, 금의환향할 뻔.
두 여인의 등장으로 장내에 훈풍이 몰아쳤다.
사내라면 손꼽히게 아리따운 여인이 등장한 이상 한 번이라도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나 그 뿐이다.
남천휘는 똥 씹은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본래 그는 적무대주를 후려친 후 여세를 몰아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정무단주의 등장으로 실패했다.
어쩔 수 없이 고수의 맛을 본 후 하하호호하며 헤어지려 했다.
한데 그것도 실패였다.
‘아! 오늘 분위기 진짜 더럽게 안 잡히네.’
뒤늦게 정무단주인 단자경에게 말을 붙이려 했지만, 소용이 없다. 단자경 또한 무인의 혼을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여인을 힐끔거리는 것이 아닌가.
‘왜 왔냐고 할 수도 없고······.’
남천휘는 슬쩍 언덕 위를 바라봤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마치 연어가 고향을 찾아가듯 강남으로 돌아온 제비였다.
백봉 연하연은 봉황곡으로 인해 피폐했던 심신을 어느 정도 추스른 듯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홍택호로 달려왔겠지.
‘괜히 알려줬나.’
하나 괜히 하는 생각일 뿐이다.
객잔에 그녀를 눕혀놓고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울 리 만무했다. 그녀의 멀쩡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짜증이 봄바람을 맞이한 눈덩이처럼 사르르 녹는 기분이다.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일까.
그녀의 이마에 가득 맺힌 땀방울과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마저 아름다웠다. 자신을 찾기 위해 쉬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 어찌 기특하지 않을 수 있으랴.
새침데기인 개똥이나 투덜거리는 개구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이고, 내 새끼. 저 헐떡이는 것 좀 봐.’
한데 오랜만에 본 연하연의 머리 위에 변경된 부분이 보였다.
《삐이이이이-》
《백봉 연하연의 미적 서열이 기준치 이상입니다.》
《히든 모드 ‘미연시’가 발동합니다.》
《미연시는 3회 발동됐고, 누적 하트는 2개입니다.》
사무치게 그립다 보니 하트가 늘어난 듯했다.
앞으로 3개만 더 모으면.
‘후훗. 그런데 저 옆에 있는 여자도 낯이 익은데.’
엉덩이를 걷어찼던 남궁세가의 그 여자다.
이름이 뭐였더라?
재이가 알려줬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말이다.
《삐이이이이-》
《혈해화 남궁소의 미적 서열은 기준치 이하입니다.》
《히든 모드 ‘미연시’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연속 탈락으로 인해 남궁소는 자동 배제됩니다.》
무진철원의 감찰단주인 유설옥에게 동료가 생겼구나. 남궁소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연시에서 배제된 두 번째 여자였다.
한데 유설옥 때와 달리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남천휘는 까맣게 잊고 있던 장면을 떠올렸다.
만병보고가 무너지던 순간 남궁소가 보였던 광적인 질척거림이었다.
‘누구 보면 정혼자인 줄 알았겠어.’
남천휘는 한순간 화들짝 놀라며 남위기를 켰다.
그리고 남궁소와 자신의 이름을 교차하여 검색했다.
신빙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잡담 목록에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빌어먹을! 이거 쓴 새끼, 누구야?’
누군가 남천휘와 남궁소가 비밀리에 혼인을 약속한 사이라는 헛소문을 써재꼈다. 게다가 ‘남남정인’이라는 별칭까지 만들어서 퍼트리고 있지 않은가.
그 순간 재이가 울화통의 심지에 불을 붙여 주었다.
◎ 최초로 찌라시에 등록되셨습니다.
- 명성이 소폭 상승합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고관대작이나 명문거파의 명사들끼리 돌려보는 비밀 월간지란다.
출처는 물론 하오문이겠지.
‘아! 하오문은 예전부터 나와 맞지 않았어.’
먼저 사기를 친 쪽은 남천휘였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좋지 않은 관계인 건 마찬가지였다.
남천휘는 시계가 미연시의 화면으로 바뀌는 걸 거부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것보다 아예 꺼놓는 것이 편할 터였다.
‘그렇다고 손자국이 변하는 것도 아니잖아?’
남천휘는 미녀의 은밀한 부분을 향해 꼼지락거리던 손 모양을 떠올리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러자 단자경이 덩달아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크흠, 자네는 여복을 타고 났군. 남궁세가의 금지옥엽과 비견될 미인이 자네를 걱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 순간 옆에서 세 번째 헛기침이 들려왔다.
남궁재야가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비견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얼굴은 어여쁘지만, 장대처럼 크기 않은가.”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어도 그렇지.
‘그건 아닌데. 개구리만 나와도 엉덩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듯.’
남천휘는 남몰래 입술을 삐죽였다.
“그나저나 남 소협은 어떻게 살아남은 건가?”
단자경이 대뜸 물었다.
남궁재야 또한 궁금한 듯 귀를 기울였다.
좋아! 오랫 동안 연습했던 걸 해보자고.
남천휘는 소용녀를 힐끔 바라본 후 한 숨을 내쉬었다.
“동굴이 무너질 때만 해도 영락없이 죽은 줄 알았지요. 한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지 뭡니까?”
요란스런 한 마디와 함께 소용녀가 끼고 있는 철항아리를 가리켰다.
“저기로 피한 건가?”
성인의 상체보다 큰 항아리라면 두 명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소용녀는 단자경과 남궁재야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찔리는 것이라도 잊는 것처럼 말을 내뱉었다.
“제가 이래뵈도 뼈는 얇습니다. 다 물렁살이라고요. 운동만 하면 금방 빠지는 물살이란 말입니다.”
그녀가 외모를 거론하는 순간 두 사람이 할 것은 변명 밖에 없었다.
“크흠, 누가 뭐라고 했는가.”
“허허, 소 소저의 준비성 때문에 남 소협이 살았어.”
좋아. 이렇게 물 타기가 되고요.
그 후의 변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바위와 바위틈으로 움직이다가 출구와 연결된 통로를 발견했고, 이슬과 버섯으로 연명했다는 그럴싸한 변명이 이어졌다.
“천우신조로군.”
“천만다행이야.”
단자경과 남궁재야는 신기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진 쪽은 적무대주다.
“잠깐만요! 이런 식으로 그냥 넘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의문을 풀어야지요!”
단자경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졌다.
애초에 적무대가 무리하게 일을 벌였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비무를 통해 깔끔하게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한데 적무대주가 기껏 빨아놓은 빨랫감에 오물을 퍼붓고 있지 않은가.
‘저 자가 정녕 다른 마음이라도 품은 건가?’
남궁재야 또한 마뜩찮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크흠! 도대체 또 무슨 의문이 남은 건가? 내가! 남 소협에게 구명지은이 있다고 말했거늘! 설마 내가 잘못 알고 있다는 겐가? 그것도 아니면 나 또한 만병보고를 무너트린 흉수와 한 배를 탔다는 겐가?”
적무대주는 남궁재야의 노호성에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하나 백결공의 엄명이 있은 이상 반드시 성과를 내야 했다.
“무림맹의 일원으로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얼핏 들으면 핑계는 좋다.
그는 두 사람의 입을 잠시 막은 사이 재빨리 말을 건넸다.
“다 그렇다고 칩시다. 한데 사람이 검을 가루로 만들어 뿌린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소. 남 소협. 그 때, 그대가 보였던 신위를 이 자리에서 재연한다면 내가 사과하고, 더 이상 길을 막지 않겠소.”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당황했기 때문이다.
‘어, 저 작자가 쓸데없이 예리하네.’
남천휘가 200레벨을 찍고, 2갑자의 내공을 지녔어도 검을 가루로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인벤토리에 쇳가루를 넣고 다닐 리가 없지 않은가.
남궁재야는 호기심을 보였다.
이미 변검술을 통해 기예가 있음을 알았으니 단순한 호기심이다. 반면 단자경은 무공의 일종이라 여겼는지 의구심을 드러냈다.
“싫은데.”
남천휘의 단호한 한 마디였다.
적무대주는 꼬투리를 잡았다고 여겼는지 환하게 웃었다. 하나 남천휘가 한 발 앞서 장내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무림맹의 대주라는 자가 타인의 비기를 함부로 알려달라고 하다니. 맹의 일원이라고 해서 군림이라도 하려는 건가? 나는 무림맹의 하수인이 아니다!”
남궁재야가 황급히 남천휘를 달랬다.
“남 소협. 무림맹이 그럴 리가 있나. 오해일세.”
단자경은 남천휘가 아닌 적무대주를 노려봤다.
“적당히 하게. 이번 일은 어차피 그냥 넘어가지 않으려 했어. 한데 진심으로 진지하게 한 번 파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군.”
적무대주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이 난관의 타개책은 오직 하나 뿐이다.
백결공을 팔아넘기면 된다.
하나 그럴 수 없기에 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렸다.
“그, 그것이.”
“그만 닥치게.”
단자경이 씹어뱉듯이 한 마디를 읊조리는 순간 적무대주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장소를 옮기지.”
남궁재야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너스레를 떨며 남천휘를 잡아끌었다.
“아, 바쁜데.”
백룡암 주변에 제대로 된 객잔이나 주루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한데 있더라.
생각해보니 정무단과 별동대만 해도 육백 명이고, 남궁세가와 칠계의 수색대는 별개였다. 일천 명이 넘는 사람이 오가니 저자가 형성되지 않을 리 없다.
“이리 오게! 생명의 은인을 만났으니 내가 오늘 거하게 쏘겠네!”
남궁재야의 호쾌한 한 마디였다.
그리고 정말 통 크게 한 턱을 냈다.
정무단과 별동대 전체에 술과 고기를 내렸고, 조장급과 관리직을 위해 몇 개의 주루를 빌렸다.
‘진짜 부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그리고 외상이었다는 말에 더욱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얼굴이 곧 신용이라니.’
남천휘는 남궁재야가 새롭게 보였다.
남궁재야가 그런 남천휘의 시선을 모를 리 없다.
서로 호감을 가진 상태로 대화를 이어가니 술자리는 즐겁기만 했다. 오직 적무대주만이 안절부절 못하며 눈치를 볼 뿐이다.
“한데 이쪽의 아리따운 소저는 누구신가?”
남궁재야가 참다 못해 물었다.
그는 질문을 한 후 슬쩍 옆을 살폈다.
자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혈해화 남궁소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애지중지하는 조카가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내의 앞이다.
‘정혼자만 아니면 되지.’
하나 뒤이은 남천휘의 소개에 한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단자경과 남궁재야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봉황곡의 소곡주라니.’
‘하필 강호칠대금문이야.’
두 사람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금 강호는 정파의 천하였다.
사마외도가 존재하지만, 야음을 틈 타 돌아다닐 뿐 감히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런 정파 세상의 상징이 곧 무림맹이다.
한데 무림맹으로서도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이 존재했다.
바로 칠대금문(七大禁門)이다.
강호칠대금문은 정사지간을 추구했다.
게다가 봉문을 핑계로 강호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하나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들의 악행은 천하에 퍼져 있었다.
다만 증거가 없을 뿐이다.
“연하연이라 합니다.”
연하연은 목석같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남천휘는 무례할 수도 있는 그녀의 언행에 입꼬리를 올렸다. 아리따운 여인이 자신에게만 미소를 보여주니 기특하기만 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이미 봉황곡에서 축출되었고, 그들과 다시 얽힐 일이 없습니다.”
남궁재야와 단자경은 그제야 웃었다.
지금이라도 관계를 끊었다니 조금은 나아 보였다.
제대로 포장을 하면 후기지수 한 명을 수렁에서 건진 상황이 아니던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남천휘의 말에 연하연은 고개를 숙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은공께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그리고 봉황곡은 이미 마음에서 지웠습니다. 그들이 저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저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어찌나 말을 예쁘게 하는지.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탁자 아래로 연하연의 손을 잡았다. 온갖 고초를 겪은 그녀였지만, 손등은 여전히 부드럽기만 하다.
미모 갑, 몸매 갑의 위엄이 아닐까 싶다.
그 순간 연하연이 얼굴을 붉혔고, 재이가 산통 깨는 알림을 울렸다.
띠링-
◎ 연하연의 하트가 +1 상승했습니다.
그래, 이제 두 개 남았구나.
그냥 그렇다고.
*
적무대주는 슬쩍 연회를 빠져나왔다.
그러자 상인으로 보이는 자가 따라붙었다.
강소수석의 대리인을 자처하던 홍택이다.
“분위기는?”
“계집의 정체는 봉황곡의 연하연이었소. 칠대금문과 반복하는 분위기로 몰아가려고 했지만, 그 년이 먼저 선을 긋더군요. 하여······.”
한데 홍택이 입꼬리를 올렸다.
“호오, 봉황곡의 명분을 무엇으로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거늘. 도망자 연하연이 등장했구려. 좋아. 아주 좋아. 하늘이 공을 돕는 것이 분명하다.”
“그게 무슨?”
홍택은 적무대주를 아랫사람 대하듯 말을 건넸다.
“남천휘의 행보는?”
적무대주는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썼다.
하나 꼬박꼬박 대꾸하며 홍택의 눈치를 봤다.
“내일 아침 일찍 본가로 떠난다고 합디다.”
“자네도 가게. 무슨 핑계를 대서든 따라붙어.”
“제가 가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홍택은 새빨간 혀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곳에 가면 마땅히 따라야 할 분들이 계실 게야. 그 분들께서 남천휘를 없애면 뒤처리를 하게.”
“아,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