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이게 고수의 맛이로구나. (3)
호사가들은 무림맹 외원의 오단 중 정무단(正武團)을 가리켜 칼로 사용할 뿐 법봉(法棒)으로 쓸 수 없다고 했다. 즉 싸움은 잘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전형적인 타격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곳의 책임자인 정무단주가 무를 숭상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여 별호가 천승일휴(千勝一休)였다.
천 번의 승리 후에야 한 번 쉬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러나 그를 아는 이들은 뭔가 있어 보이는 천승일휴 대신 광패검(狂覇劍)이라 불렀다.
그렇기에 강자라면 사마외도라고 해도 최소한의 배려를 해줄 만큼 강함을 으뜸으로 쳤다.
“단자경이라 하네.”
정무단주가 검배에 손을 얹은 채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남궁재야는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을 쳤다.
“참관인의 역할은 내가 하겠네.”
정무단주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적무대주는 마뜩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참관인이 인정되는 순간 비무는 공식적인 행사가 된다. 그렇게 되면 승패와 과정이 알려질 것이니 더 이상 남천휘를 핍박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빌어먹을! 저 늙은이가 남천휘에게 단단히 빠졌구나.’
이검 정도 되는 명사는 엉덩이가 무겁다.
그렇기에 격이 있는 자리가 아니라면 참석하지 않았고, 급이 되지 않는 비무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터였다. 한데 그런 그가 참관인을 자처했으니 앞으로 중원의 호사가들은 득달같이 몰려들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되면 백결공의 명을 수행하기가 어렵게 되는데...’
그는 정무단의 대주들을 살폈다.
황무대주는 후방으로 후송된 상태였고, 백무단과 흑무단의 대주는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아마 정무단주가 명령만 내리면 당장 남천휘와 비무를 하기 위해 뛰쳐나올 기세였다.
‘저것들에게서는 기대를 할 수 없어. 결국 억지를 써야 하는 건가?’
그는 기득권층으로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을 이어갔다.
그 사이 남천휘도 준비를 끝냈다.
◎ 호각이라고요?
검을 맞받아치는 순간 느껴졌다.
정무단주 단자경은 진짜 고수다.
천위검호를 능가하고, 어쩌면 남궁재야와 비견될 만큼 고수가 분명했다.
‘응. 호각.’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이템 없이는 호각이지.’
그는 사자탈에게 집중 관리 받는 내내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았다. 물약은 물론이고, 특기와 회회회판까지 봉인했다. 오직 육신과 내공, 그리고 무공만을 전부라 여기며 수련하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전신 세맥에 흩어졌던 내공과 잠력을 끌어들이는 것에 성공했다.
계왕권 10 배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 아이템을 제외해도 호각은 아닌 것 같지만요.
녀석이 웬일로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걸까.
‘무슨 흉계를 꾸미는 거야?’
◎ 저야 늘 주인님의 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주세요. 원하시면 시각적으로 구현화하여 응원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남천휘는 안개가 사람의 형태로 뭉쳐든 후 응원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그리고 이내 오한이 이는 것처럼 진저리를 쳤다.
‘사양할게.’
단자경은 인상을 쓰는 남천휘를 보고 겁을 먹은 것이라 여겼나 보다.
“하하,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호기가 넘치던 후배께서 갑자기 주눅이라도 든 건가?”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도발하는 재주도 제법이 아닌가.
기꺼이 호응했다.
“맛이 없을까 우려가 되어서요.”
남천휘는 저잣거리의 왈패나 할 법한 언사를 이어갔다. 한데 정무단주를 비롯한 백무대주와 흑무대주는 오히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개싸움이야 말로 싸움의 정수라고 믿는 사내들의 삐뚤어진 감정 표현이었다.
“자! 그럼 어디 맛 좀 볼까!”
정무단주 단자경이 아랫입술을 훑더니 미끄러지듯 접근했다. 남위기에 따르자면 단자경은 낭인 출신이라더라. 그처럼 예법을 따지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은 사내의 열기가 가득했다.
하나 남천휘는 단자경의 기세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쪽은 싸우고 난 후에 하하호호 거리면 되지만, 이쪽은 아니라고!’
남천휘는 적선단을 흡입했다.
생명력 100을 채운 후 벽선단을 이용해 내공도 2갑자에 맞췄다. 마치 꿀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심신이 상쾌했다.
“양보는 바라지마라!”
단자경의 외침이었다.
하나 그는 지쳤을 남천휘를 배려하여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수십 일 동안 동굴에 갇혀 있다가 벗어났으니 심신이 피폐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또한 갑작스런 대치로 인해 싸움까지 했으니 최소한 힘을 비축할 시간을 주려 했다.
정상적인 사람과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리라.
하나 상대가 남천휘였다.
매일같이 먹고 마시며 휴양생활을 보냈다.
게다가 물약으로 심신마저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지 않았던가.
‘엇, 조금 전보다 느린데?’
남천휘는 단자경의 검격을 마주하기 전 위화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배려에 감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싸움을 길게 끌어 봤자, 남을 것도 없다.
이미 자신에게 홀라당 빠져 있는 남궁재야가 알아서 포장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궁신탄영! 잔영은무!’
오행군림보의 스킬을 연이어 펼쳤다.
파팟-
남천휘의 신형이 빠르게 접근하는 순간 시야에서 자취를 감췄다. 물거품처럼 한순간에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단자경을 눈을 가늘게 떴다.
본능적으로 남천휘가 주저앉거나, 비켜선 것이 아님을 눈치 챘다.
‘전력이라? 역시 청춘의 힘이란!’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기파가 뭉쳐드는 좌측을 향해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전방을 향해 독아를 드러냈던 검 끝이 자연스럽게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허공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한데 그 순간 남천휘가 뻥 뚫린 공간에서 솟구치듯 모습을 드러냈다.
‘피하지 않아?’
단자경은 연이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검격 안으로 몸을 던지는 남천휘의 호방함에서 재차 청춘이 열기를 느꼈다.
챙!
남천휘의 도가 단자경의 검을 쳐냈다.
‘좋구나!’
단자경은 예상했다는 듯 손목을 휘돌렸다.
그 순간 튕겨나간 검끝이 처음과 마찬가지로 남천휘를 겨눴다.
채채채채챙!
남천휘는 쌍도를 물레방아처럼 휘돌리며 단자경의 검끝을 치우려 했다. 그러나 단자경의 검은 자철이라도 되는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예상보다 강하군! 아주 좋아!’
단자경은 남천휘가 마지막 힘을 짜낸 것이라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 일 동안 갇혀 있던 사람에게서 예상되는 힘의 척도가 있지 않던가.
타탓-
남천휘가 잠시 멈칫했다.
아무래도 힘이 바닥 난 듯보였다.
한데 물러서기는커녕 재차 쌍도를 휘돌리며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재기 넘치던 모습과 달리 우직한 도법에 기특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단자경은 입꼬리를 올렸다.
‘무리를 하는 것도 청춘의 좋은 버릇이지!’
이렇게 된 이상 자신 또한 전력을 다해 무릎 꿇리는 편이 상대를 위한 예우가 아닐까 싶다.
그는 가볍게 자세를 바꾸고, 새로운 검초로 남천휘를 압박하려 했다. 한데 자세를 바꾸려는 순간 벼락같은 도기가 꽂혀들었다.
‘엇! 이것 봐라?’
아직 숨겨둔 한 수가 있었던 걸까.
단자경은 귀여운 후배라고 읊조리며 다시 자세를 바꾸려 했다. 하나 이번에도 그는 자세를 바꾸지 못한 채 처음과 같이 검을 겨눴다.
‘어라?’
그는 완숙한 절정의 고수로 수십 번의 혈전을 거친 무인이다. 오랜 경험으로 인해 상황을 금세 정리할 수 있었다.
다만 믿기 힘들 뿐이다.
‘거미줄에 걸린 건 나였던가?’
지금까지 자신이 남천휘의 공세를 막으며 지켜보는 것이라 여겼다. 후배의 힘을 최대한 끌어내어 멋들어진 싸움을 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남천휘가 먼저 자신이 하려던 것을 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거미줄에 걸린 자신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동수(同手)라면 결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나보다 강하다니.’
정무단주 쯤 되면 강호 정세를 상세히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그는 삼정으로 대변됐던 산동강호의 변화를 모르지 않았다. 심지어 남천휘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산동의 패주로 대두된 것까지 파악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이렇게 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동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표정을 굳혔다.
이제 비무가 아니라 생사결이라 생각했다.
남천휘는 단자경의 변화를 금체 눈치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자경의 눈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하아, 벌써 눈치 챈 건가?’
고수는 고수였다.
그는 단자경이 방심한 틈을 노려 비천무상도의 스킬인 ‘질풍난무’를 연이어 펼쳤다. 전방의 적을 2초 간 도풍과 도기로 공격하는 질풍난무는 연환격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본래 남천휘의 질풍난무는 2초 간 14회의 공격을 성공시켰다. 한데 레벨을 올리고, 잠력을 끌어내는 순간 히든 스텟이 엄청나게 상승했나 보다. 질풍난무의 스킬 레벨은 4가 되었고, 2초 간 27회의 공격을 가는 것이 가능했다.
결국 남천휘는 단자경을 상대한 것이 아니라 질풍난무를 익숙하게 펼치기 위한 연습을 한 셈이다. 그리고 질풍난무가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내력을 더했다.
단자경이 오해할 만큼 적절한 분배였다.
쩡-
마침내 단자경이 남천휘의 거미줄을 끊고 날아올랐다. 그의 얼굴은 술에 취한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만큼 전력을 다했다는 증거이리라.
그리고 전력을 다해야 했던 울분을 검에 그대로 담았다.
촤라라라라락!
구룡검(九龍劍)이라 불릴 만큼 변화가 막측한 검법이다. 그리고 구룡검의 절초인 구두룡섬이 펼쳐지는 순간 아홉 마리의 용이 동시에 독아를 드러낸 것처럼 시야가 어지러웠다.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변화가 심할수록 과정은 복잡했다.
그리고 제아무리 빠르게 펼친다고 해도 일반적인 검초보다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일기당천.’
남천휘는 구두룡섬으로 인해 광풍이 몰아치는 순간 나직이 읊조렸다.
그 순간 단전에서 한 움큼의 내력이 빠져나갔다.
그것은 임독맥을 따라 빠르게 질주하더니 양 팔을 타고 흩뿌려졌다.
솨아아아아-
양팔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가 바람 빠진 공처럼 가라앉았다. 이미 직도로 스며들어간 내력이 뇌전처럼 도신을 휘감은 채 번쩍였다.
남천휘는 벼락에 휘감긴 직도를 내리그었다.
그 순간 광풍과 낙뢰가 충돌했다.
쩡-
“막아!”
백무대주와 흑무대주가 동시에 외쳤다.
그 순간 남천휘와 단자경으로 인해 만들어진 충격파가 군웅을 휩쓸었다. 문제는 자갈밭이다보니 충격파에 자갈과 흙이 잔뜩 섞였다.
퍼퍼퍼퍼퍼퍼퍼퍽!
반응하지 못한 자들이 자갈에 얻어맞고 튕겨나갔다.
반면 흑무대와 백무대의 무인들은 누구 한 명 다친 자가 없다. 정무단의 진짜 힘이 어느 쪽인지를 증명하는 광경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남궁재야였다.
그는 흙먼지에 휘감긴 단자경과 남천휘의 충돌을 고스란히 목도했다. 가볍게 손을 내젓자, 흙먼지와 자갈이 튕겨나갔다.
그 와중에 웃음기 섞인 한 마디가 들렸다.
“본가의 섬전십삼검뢰에 뒤지지 않는 절초로구나!”
광풍과 낙뢰 중 후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먼지구름이 걷히는 순간 우열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남천휘는 그대로였다.
반면 단자경의 오른손은 소매가 찢겼고, 훤히 드러난 손목과 손등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무림맹 외원의 단주를 이길 수 있는 자가 저 나이에 몇이나 될까?’
단자경 또한 남궁재야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는 패했음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대단하다! 네 나이에 너처럼 강한 녀석은 보지 못했어! 그래, 이것이야 말로 고수의 맛이로구나! 크하하하!”
남천휘는 직도를 감춘 채 공수했다.
이제 단자경의 무위를 추켜세운 후 함께 어깨동무라도 하면 되는 게다. 더불어 술도 한 잔하면서 어떤 새끼가 자신을 노렸는지 캐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한데 남천휘가 입을 떼려는 순간 뾰족한 외침이 들려왔다.
“남 대협을 괴롭히지 마세요!”
여자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익숙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자가 두 명이었고, 목소리도 두 개였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