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이게 고수의 맛이로구나. (2)
영웅담을 보면 꼭 이럴 때 고수가 나타나서 훼방을 놓곤 한다. 하나 실제로 그만한 고수가 지척에 이를 때까지 모를 수가 없지 않은가.
빡!
황무대주의 몸이 옆구리를 경계로 활처럼 휘었다.
제아무리 직도의 날을 없앴다고 해도 재질 자체가 쇠였다. 뼈가 으스러진 것은 물론이고, 내장까지 충격이 전해졌으리라.
“크아악!”
황무대주는 체통도 잊은 채 비명을 내질렀다.
남천휘는 황무대주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순간 재차 발길질을 했다.
어깨를 얻어맞은 황무대주가 자갈밭을 굴렀다.
“대, 대주!”
황무대의 무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들의 대장이 개처럼 두들겨 맞고 튕겨나갔으니 놀란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반면 남천휘는 강호에서 단일세력을 가장 큰 위세를 자랑하는 무림맹의 대주를 쓰러트렸음에도 표정의 변화가 없다.
‘황무대주 따위.’
지금껏 남천휘에게 ‘따위’는 청도문이 유일했다.
오늘 그 명부에 황무대주를 올리려 한다.
남천휘는 저들이 포위망을 구성하던 중 남위기로 정무단을 검색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중 정무단의 연관 검색어가 눈길을 끌었다.
- 무림맹 무력 순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포인트로 결제까지 했다.
- 무림맹의 무력 순위 100위를 꼽아보자.
다분히 주관적인 한 마디로 시작된 보고서는 예상대로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누가 무슨 작전을 펼쳤는데 무슨 성과를 냈다더라. 누가 누구와 싸웠는데 이겼으니 누구는 누구보다 강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술자리에서 주고받기 딱 좋은 수준이었다.
한데 그 목록에 황무대주가 자리했다.
무림맹의 외원은 삼전사재오단(三殿四齋五團)으로 이뤄졌다. 이 중 무력을 담당하는 핵심적인 곳이 오단이다.
오단에 속한 타격대는 스무 곳이 넘었다.
황무대주의 서열은 끝에서 헤아리는 게 빠를 정도였다. 그런 자를 이겼다고 의기양양해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차라리 천위검호가 강했어.’
추억 보정이 있었을지언정 황무대주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리라.
남천휘는 쌍도를 늘어트린 채 포위망의 한 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날이 없는 도를 사용함은 불살의 의미가 아니다.”
무인들도 이미 눈치를 챈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천휘에게 얻어맞은 자들은 하나같이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지 않던가.
비명으로 생존을 알렸다.
“강호를 위해 헌신하는 무림맹에 대한 마지막 배려일 뿐이야. 명백한 증거 없이 나를 핍박한다면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
쿵!
발을 구르는 순간 주변의 자갈이 비산했다.
동시에 대지가 울리는 듯한 충격이 무인들을 휩쓸었다.
‘황무대주가 저렇게 나가떨어질 줄이야.’
적무대주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무상이 정무단을 소집하기 전 백결공의 부름을 받았다. 만병보고 주변에서 눈에 띄는 자를 이유 불문하고,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명령이었다.
얼핏 보면 말이 되지 않는 명령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백결공은 특정 인물이 등장했을 경우의 대비책까지 알려주었다.
남천휘의 등장 또한 백결공의 계산 대로였다.
하나 그의 대처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보통 근거지가 밝혀진 자는 가족 때문이라도 굽실거릴 수밖에 없거늘.’
남천휘의 지난 행적을 보면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한데 그것을 힘으로 돌파할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설마 저 어린놈이 초절정의 고수라도 된단 말이더냐?’
그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도 황무대주와 생사를 겨룬다면 필승을 자신했다.
그래도 저렇듯 압도적으로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
‘강호의 싸움법은 하나가 아니지.’
그는 수하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흥! 백여 년 간 알려지지 않았던 만병보고를 제 집처럼 드나든 자의 말을 누가 믿겠는가?”
조롱과 도발에는 조롱과 도발로.
그냥 주면 정이 없으니 열 배로 불려서 줄 생각이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다는 옛 속담을 실천할 생각에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그대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재주를 지녔군.”
“뭐라?”
“성 대주는 처음 보는 사람의 모든 능력을 알아차리는 능력이라도 지녔습니까? 심지어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사람을 의심해? 당시 그곳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곳은 진짜 사지였습니다. 그곳에서 살아돌아온 사람을 흉수라고 의심해?”
“놈!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더냐!”
적무대주는 숫제 칭얼거리듯 외쳤다.
하나 남천휘의 심경은 격앙된 어조와 달리 호수처럼 잔잔했다. 강호인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분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유? 그대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남천휘가 외치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강소성을 칠계가 다스리듯 산동성은 오랫동안 삼정이 지배했다.”
사실 지배하지는 않았다.
그저 영역을 나눠서 이권을 챙겼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과장할수록 득이 되는 상황이다.
“신공부는 공부의 위상을 빌렸음에도 적폐의 온상이 되었다. 하나 공부의 위세에 눌린 명사들은······.”
낭낭한 외침의 마무리는 신공부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잠시 후 청도문을 악의 축으로 몰아세운 남천휘의 공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신공부가 더러울수록, 청도문이 추악할수록 남천휘의 위치가 달라졌다.
“그랬던 내가 만병보고의 혈사를 일으켜 얻는 것이 무엇이더냐?”
성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아는 건 백결공의 명령뿐이다.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대응하려니 반박할 거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없다!”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상관의 명령이 있으니 검을 내리지는 못하나, 문답만 들어도 누명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때 남천휘가 특기에 내력까지 더하여 외쳤다.
“내가 산동성의 패주다!”
이 한 마디로 족했다.
남천휘가 중원 전체에 명성을 떨친 것은 아니다.
하나 강소성과 하남성 일대에는 새로운 후기지수의 탄생으로 인해 이목이 집중된 상태였다.
산동성에서 그를 막을 자가 없다.
그러니 그는 패주였다.
한낱 칼받이로 만병보고의 위험을 자처할 필요가 없을 만큼 후기지수의 위치를 벗어난 게다.
◎ 그래도 너무 강하게 나가시는 건 아닐까요?
모르는 소리 하고 있네.
중원행이 됐든, 도주행이 됐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나는 큰물로 나가야 해.’
한데 무림맹에 압송당하는 꼴로 첫 등장을 낭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림맹이어서 되는 거야.’
명분만 있다면 그 무엇도 가능한 조직.
그것이 바로 남천휘가 생각하는 무림맹이다.
아니나다를까 적무대주는 떡을 먹다가 체한 것처럼 입만 뻥긋거렸다.
“저, 저!”
남천휘는 적무대주를 응시한 채 걸음을 내딛었다.
명분도 있고,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이제 마무리를 지을 차례가 아닌가.
스윽-
누군가의 칼끝이 팔에 닿았다.
“엇!”
진위대의 무복을 걸친 무인이 오히려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그 이후로는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무인들 사이로 길이 만들어졌다.
봤지? 봤냐!
남천휘는 한껏 높아진 코를 자랑하며 걸음을 내딛었다. 재이는 장성한 아들이 금의환향을 한 듯 감격에 겨운 한 마디를 흘렸다.
◎ 한겨울 토끼를 잡겠다고 고사리 손을 호호 불던 주인님의······.
차단.
재이까지 입을 닫으니 사위가 고요하다.
자박자박-
오직 남천휘의 발소리만 청각을 자극했다.
‘오감증폭제. 청각.’
가벼운 발걸음이 지진처럼 귓가에 들려왔다.
지금까지 그 어떤 것보다도 넓고, 강렬한 일보(一步)였다.
‘강호인이 무를 숭상하는 이유.’
이것 때문이라도 남천휘는 퀘스트를 끊지 못했다.
남천휘는 자신감 있게 보폭을 넓혔다.
그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리라. 그리고 자취를 감춘 후에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헐떡이겠지. 이렇듯 강호에 큰 울림을 주며 등장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나야 나. 나뿐이다!’
그 순간 적무대주가 움직였다.
‘야, 야! 왜 그래?’
명분과 분위기가 완벽했다.
적무대주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려든다.
‘정파인이 명분을 무시해?’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무림맹 내에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적대시하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것도 타격대의 대주가 불명예를 무릅쓸 만큼 높은 위치의 누군가일 터였다.
화가 난다.
영웅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악인으로 지목당할 만큼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를 적대시 해?’
남천휘가 미간을 좁히는 순간 그의 신형이 좌우로 흩어지듯 갈라졌다.
솨아아앗!
한순간 갈라진 신형이 호선을 그리더니 일 장의 거리를 격하고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남천휘조차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건 뭐야?’
◎ 지속적인 깨달음으로 인해 궁신탄영의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이제 궁신탄영을 펼쳤을 시 두 가지 패턴으로 변형되어 발동합니다.
이동 거리는 변함이 없다.
다만 전개 과정에서 변화가 더해진 게다.
적무대주의 놀란 표정을 보니 뭐가 됐든 나쁠 것은 없다.
‘네가 정무단의 삼인 자쯤 되더냐?’
그렇다면 오래 끌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남천휘가 손바닥을 보였다가 뒤집었다. 그 순간 그의 손에 직도가 잡혔다. 적무대주를 한 번 더 당화하게 만드는 순간 지척에 이르렀다.
“크흑!”
휘리리리릭!
적무대주가 재빨리 검을 휘젓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보이는 검로가 겹쳐지는 순간 그물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다.
남천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후퇴를 위한 밑 작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를 도망가려고!’
수련용 직도였지만, 그 안에 담긴 건 비천무상도의 묘리였다. 그가 쌍도를 빠르게 휘젓는 순간 그물은 갈가리 찢겼고, 당황스러워하는 적무대주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잔영은무로 끝내자.’
평정심을 잃은 놈이라면 황무대주처럼 옆이나 뒤를 허락할 수밖에 없으리라.
남천휘는 발끝을 사선으로 두고 몸을 날리려 했다.
그 순간 적무대주의 어깨 너머로 낯익은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남궁재야가 언덕을 돌아나오자마자 다급히 소리를 내질렀다.
“멈추시게!”
하나 남천휘는 멈추지 않았다.
남궁재야와 함께 등장한 장년인의 허리에서 백흑적황의 수실이 흔들렸다.
저 자가 정무단주이리라.
만약 여기서 칼을 물렸다가 정무단주가 적대시한다면 오히려 궁지에 몰리는 꼴이 될 터였다. 차라리 두 사람에게 자신의 무위를 드러내는 편이 나았다.
파팟-
적무대주는 눈을 부릅 떴다.
한순간 남천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침묵을 지킨 채 달려오던 정무단주의 일갈이 귓가에 꽂혀들었다.
“왼쪽으로 돌았다!”
적무대주는 황망한 와중에도 검을 눕혀 좌측을 방어했다. 그 순간 남천휘의 도격이 적무대주의 검신을 두드렸다.
쩡-
남천휘는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적무대주를 쫓았다.
자세가 무너졌으니 다음 일격에 끝을 내겠다.
한데 그 순간 남궁재야의 곁에 있던 정무단주가 보법을 펼쳤다. 성큼성큼 큰 걸음에 갈지자로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저 속도는 뭐야?’
궁신탄영에 버금갈 만큼 빠르게 쇄도하는 것이 아닌가.
정무단주는 검배에 손을 올린 채 접근했다.
그것을 본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발검?’
아니나다를까 정무단주는 남천휘와 적무대주 사이에 끼어드는 순간 발검했다. 묵빛의 검이 호선을 그리는 순간 채찍처럼 검기가 흩뿌려진다.
‘쳇!’
다른 사람이었다면 불의의 일격에 당황했으리라.
하지만 남천휘는 황급히 직도를 인벤토리로 돌려보냈다. 바로 잡았던 도가 역수로 잡힌 채 소환됐다. 도를 고쳐 잡는 순간 자세를 낮춘 채 나무의 뿌리를 뽑듯 도를 올려쳤다.
콰쾅!
두 사람은 검기와 도기가 충돌하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호각.’
반면 자세는 두 사람이 상반됐다.
정무단주는 반탄력을 상쇄시키기 위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러나 남천휘는 달리 몸을 뺄 공간이 없지 않은가. 결국 엉덩이를 붙인 채 주저앉는 것이 최선이었다.
엉덩이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아팠다.
‘빌어먹을!’
◎ 생명력이 소진되지 않았습니다.
재이의 위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남천휘는 인상을 쓴 채 몸을 일으켰다.
그 사이 남궁재야가 두 사람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 다 멈추게. 이게 무슨 일이야? 남 소협이 살아돌아왔으면 축하연을 열어야지!”
적무대주가 얼굴을 붉힌 채 나서려 했다.
한데 정무단주가 나직이 읊조렸다.
“자네는 잠시 빠져있게.”
그러더니 남천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뭐가 어찌 됐든 자네를 보내 줄 수 없네.”
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란 말인가.
남천휘가 허망한 표정을 짓는 것과 달리 적무대주는 입꼬리를 올렸다,
‘백결공의 손길이 단주에게도 닿은 건가.’
남궁재야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한 숨을 내뱉었다.
“자네, 설마······.”
스릉-
정무단주는 납검을 한 후 다시 손을 검배에 올렸다.
발도의 준비를 끝낸 게다.
‘저게 무슨 의미지?’
◎ 야생에서는 수컷끼리 우열을 정할 때······.
차단.
한데 예기치 못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정무단주가 히죽 웃더니 왼손을 까딱이며 도발을 했다.
“나와 제대로 한 판 붙어보세.”
“왜요?”
이번만은 적무대주도 남천휘와 같은 표정이다.
정무단주는 혀로 아랫입술을 핥으며 묘한 한 마디를 건넸다.
“자네처럼 제대로 된 후배의 맛을 본지 오래됐거든.”
오해하기 딱 좋은 표현이다.
남궁재야가 한 숨을 쉬며 부끄러워한 이유가 저것인 듯했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정무단주의 눈을 보고 있자니 곡부남가의 무공충이 떠올랐다.
북풍대주 조상의 눈빛이 꼭 저러했지.
“좋습니다.”
남천휘가 양 팔을 늘어트렸다.
그리고 정무단주를 도발하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도 제대로 된 고수의 맛 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