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동만추. (3)
생각해보라.
일원이라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이 함정을 준비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만 이렇게 끝나면 뒷말이 나올 게 뻔했다.
본래 물에 빠진 놈을 구해줬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칭얼대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던가. 이대로 위기를 넘겨버리면 무기를 돌려달라고 징징 거리는 놈이 나올 것 같단 말이지.
‘특히 저 영감.’
천하오대명검으로 알려졌지만, 실상 십팔대명검 정도인 천영검(千影劍)은 보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조금 더 긴박한 느낌을 전해줘도 좋지 않을까 싶다.
◎ 조금만 더 노력하시면 악당의 특기도 구현하실 수 있을 듯합니다.
닥쳐! 네가 제일 나빠.
지금까지 남천휘가 얻은 성소는 두 종류였다.
산지형(山地形)과 문파형(門派形).
대화동과 대두동은 전자였고, 신공부와 청도문은 문파형이다. 한데 만병보고는 세 번째 유형인 요새형(要塞形)으로 등록됐다.
그렇기에 특기 ‘유지’로 발동된 관리 목록 자체가 달랐다.
(기관류)(물품류)
기관 목록을 건드리는 순간 만병보고의 구조도에 수많은 점과 선이 덧씌워졌다. 점마다 매설된 화약의 양과 기관의 형태가 상세하게 표시됐고, 점과 점 사이의 선은 숫자를 통해 연계성을 드러냈다.
‘외부의 도화선을 끊고, 동굴 쪽만 가볍게 폭파시키자. 가능하겠지?’
◎ 주군! 군사인 제가······.
닥쳐. 이제 와서 군사 흉내를 내는 건 너무 속보이잖아. 어차피 재이가 군사처럼 말하며 성소의 정보를 관리했을 것이라 예상했던 바였다.
◎ 시스템이 2.0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제게 군사의 정보가 흡수됐을 뿐입니다.
네, 네. 그렇다고 치고요.
‘돼? 안 돼?’
◎ 쳇, 됩니다.
뭔가 재이가 변한 듯했지만,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쿠쿠쿵!
그 순간 동굴 전체가 요동을 쳤다.
동굴의 수많은 입구 중 무인들과 가까운 쪽에 매설된 화약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내부로 이어지는 도화선을 끊었기에 연쇄적인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 무인들을 당황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터, 터진다! 남 소협! 남소협? 아직 멀었소?”
아! 이 분위기가 왠지 마음에 든다.
남천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외쳤다.
“거의 다 되었습니다. 잠시 후면 다정독을 무력화 할 수 있어요.”
“빨리 하시오. 마두가 예고했던 시간이 다 된 듯 싶소이다. 이러다가 우리 다 죽어!”
아직 1분 14초나 남았구만.
하긴 이런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한 채 남은 시간을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리라.
“모두 진정하시오! 아직 괜찮아. 약간의 시간이 남았소. 흥분해봤자 좋을 것이 없어. 남 소협이 독무를 무력화하면 당장 벽에 붙어서 출구를 찾아야 하오!”
남궁재야가 무인들을 다독였다.
하나 그조차 마냥 편안하지는 않은 듯했다.
[남 소협. 시간이 없네.]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자가 자신을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던 중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던 소용녀와 눈이 마주쳤다.
남천휘는 소용녀의 ‘뭐해?’라는 눈빛에 ‘뭐?’라고 답해줬다. 그러자 지금 이게 장난 같으냐는 눈빛이 날아들었다.
[천영검을 살피고 싶지 않아?]
안정적인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천영검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까?
뭐가 됐든 소용녀는 철항아리를 감싼 채 딴청을 피웠다.
신뢰받는 기분이 이런 거였구나.
그러니.
‘한 번 더 폭파시키자. 그리고 입구 중에 외부로 통할만한 곳을 찾아줘.’
◎ 즐기시는 듯합니다만, 찾아보겠습니다.
남천휘는 그 사이 만병보고에 깔려 있는 기관과 화약의 위치를 눈에 담았다.
결과적으로 백명괴군은 호언장담을 할만 했다.
만약 남천휘가 없었다면 화약의 양과 기관의 절묘한 조합으로 인해 이곳은 무림맹주라고 해도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정교한 무덤이 됐을 터였다.
고마운 만큼 제대로 활용해줘야겠다.
‘일원이라······. 어쩌면 쓸 만한 녀석들일지도 모르겠어.’
콰콰콰쾅!
이차 폭발이다.
한데 이번 건 예상보다 여파가 컸다.
절벽 위가 완전히 무너졌고, 사람의 머리통만한 돌이 비처럼 쏟아졌다. 하나 절정의 무인들에게 눈에 보이는 돌은 위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콰직!
저마다 근처에 떨어지는 바위를 후려쳤다.
사방에서 각종 절기가 펼쳐졌지만, 화려하기보다 처절하기만 했다.
‘너무 과한 걸?’
◎ 죄송합니다. 저도 조금은 즐겼나 봐요.
남천휘가 재이의 탈선에 헛웃음을 짓는 사이 남궁재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 소협!”
남궁재야마저 흔들렸으니 연극은 여기까지 하자.
그러지 않아도 만병보고의 물품 내역을 보는 내내 심장이 터질 듯하지 않던가.
‘다정독을 없애.’
◎ 칠보자령초도 없애시겠습니까?(y/n)
으음, 그건 그냥 두자.
이내 남천휘의 눈에만 보이는 신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사방에 퍼져 있는 나노 플레이트가 독기를 흡수한 채 하늘로 솟구친 것이다.
남천휘는 다정독이 완전히 증발했다는 알림을 듣는 순간 외쳤다.
“됐습니다! 됐어요!”
남궁재야는 슬쩍 손을 뻗어 본 후 화색을 띄었다.
“독이 중화됐어. 모두 입구를 찾아봅시다!”
미심쩍어 하던 무인들은 남궁재야가 벽에 달려드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미루지 않았다.
“완전히 막히지 않은 곳이 있을 거야!”
“독무의 흐름을 눈여겨보라고! 바위 뒤에 공간이 있을 거야.”
◎ 출구로 삼을 수 있는 지점을 발견했습니다.
‘표시해봐.’
붉은 점이 초록색으로 변하며 출구를 표시했다.
자! 이제 방해꾼들을 내보낼 시간이다.
남천휘는 완전히 막히지 않은 출구를 알려주려다 미간을 좁혔다.
‘잠깐! 나까지 나가자고 하면 곤란한데······.’
*
소용녀는 작금의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은 적진의 한가운데였다.
독무가 몰아치고, 폭파가 예고됐다.
당장이라도 산이 무너지고, 강이 뒤집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다.
저들을 보라.
이검(二劍)이라는 단순한 별호와 달리 무림맹에서도 당주 급만 상대한다는 남궁재야가 꼬리가 불 붙은 망아지처럼 벽에 달라붙어 있지 않은가.
‘으음, 망아지보다는 원숭이 같을지도······.’
뭐가 됐든 손톱이 으깨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돌을 파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한데 자신이 있는 곳만은 마치 봄바람이 부는 들판처럼 평온했다. 정확한 위치를 꼽자면 남천휘 주변만 그랬다. 그리고 봄바람처럼 보이는 건 독무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저거 지금 자는 건 아니겠지?’
남천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무언가를 읊조렸다.
한데 그 모습은 묘하게도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하나도 위험하지 않은 것 같아.’
덩달아 소용녀까지 철항아리에 몸을 기댄 채 멀뚱히 지켜봐야 했다. 마치 한 편의 재미있는 경극을 구경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순간 남천휘가 입술을 달싹였다.
‘오라고?’
소용녀는 남천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망설임 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 때 남천휘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외쳤다.
“독무가 저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어요!”
무인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아니나다를까 일층의 동굴 입구 중 한 곳에는 팔뚝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노 플레이트를 집중시켜 바위를 분쇄했기에 만들어진 출구였다.
“엇! 저기는 조금 전에 내가 살펴봤는데.”
“멍청이! 똑바로 봤어야지.”
누군가의 의구심 섞인 혼잣말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타박에 자취를 감췄다. 무인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돌을 치우고, 흙을 걷어냈다.
“됐다! 됐어.”
“나갈 수 있어!”
남궁재야는 뒤늦게 대협의 성품을 보였다.
“모두 빠져나가시오! 어서!”
그는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남천휘에게 손짓했다.
“남 소협. 갑시다!”
하나 남천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눈시울을 붉히며 내뱉은 한 마디에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아무래도 제 삼의 독이 있었던 듯합니다. 제 쪽은 독기가 가득하니······.”
남궁재야는 결연한 표정을 짓더니 다가왔다.
남천휘가 당황해할 만큼 거침없는 움직임이다.
‘엇, 저렇게 좋은 사람이면 곤란한데.’
그는 황급히 입술을 달싹였다.
‘녹린탄! 녹린탄! 녹린탄!’
녹린탄은 용봉쟁투 당시 모인적이 남천휘에게 살포했던 독이다. 그것을 주변에 흩뿌려놨으니 남궁재야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남궁재야가 표정을 굳힌 채 물러섰다.
“큭! 눈과 귀가 마비되는 듯 하군. 설마 이것은 운남 오독교의 녹황사린인가?”
사실은 모인적의 집안에서 녹황사린을 흉내 내어 만든 모조품에 불과했다.
하나 남궁재야는 백명괴군이 모조품을 사용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렇기에 비슷한 독성을 감지하는 순간 오독교의 녹황사린임을 확신했다.
“이런 개종자 같은 놈! 무림맹에서 금지한 독까지 사용하다니.”
남천휘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만한 상황이다.
“남궁 대협! 가세요. 어서! 제가 다정독을 계속 막겠습니다. 그러니 떠나십시오.”
남궁재야는 눈을 질끈 감았다.
“크흑! 미안하네. 미안해. 자네의 의기 높은 행동을 잊지 않겠네! 자네가 우리를 살렸어.”
그 때 누구도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동굴을 빠져나가려던 남궁소가 남천휘를 향해 달려든 것이다. 그녀는 눈시울 붉힌 채 정인을 대하듯 외쳤다.
“아아! 안 돼요! 남 소협만 두고 갈 수는 없어요.”
◎ 광적인 1호 팬이로군요.
◎ 저런 여자를 표현하는 새로운 용어가 있습니다.
닥치고, 준비해!
바로 터트린다!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제가 함께 할 게요!”
누가 보면 정혼자로 오해할 만한 상황이다.
남천휘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남궁소를 걷어차며 외쳤다.
“동굴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돼!”
동시에 엉덩이를 얻어맞은 남궁소가 뾰족한 비명과 함께 일장이나 튕겨나갔다. 남궁재야는 애지중지하던 남궁소가 얻어맞았음에도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이런 식으로 소아가 상처 받지 않게 해주는 건가?’
진정 대협의 그릇을 지녔는데 아깝다는 말을 읊조리며 남궁소를 안아들었다.
남천휘는 남궁소가 동굴 입구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읊조렸다.
‘폭파.’
콰콰쾅!
그 순간 남천휘와 소용녀가 서 있던 지반이 무너졌다. 동시에 두 사람은 흙먼지에 뒤섞여 시야에서 자취를 감췄다.
“크흑! 남 소협. 결코 자네를 잊지 않겠네!”
남천휘와 소용녀는 추락했다.
흙먼지가 가득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오히려 편안해보일 정도였다.
“저기 말이야.”
소용녀가 추락하는 와중에 물었다.
남천휘는 지도를 띄워둔 채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했다.
“응?”
“아까부터 내가 있었던 걸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
“······.”
잠시 후 남천휘가 무언가를 건넸다.
“천영검 만져볼래?”
그 순간 녹빛의 연못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첨벙!
*
콰콰콰콰콰콰쾅!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충격이 연이었다.
그리고 시야를 가득 채우던 높다란 산이 통째로 주저앉기 시작했다. 나무와 바위가 함몰되고, 흙과 모래는 화산이라도 터진 것처럼 흩날렸다. 한 곳에서 시작된 폭파는 홍택호를 끼고 수백 장이나 연이었다.
“하아, 엄청나군!”
백명괴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만병보고 아래 얼마나 많은 길이 있었기에 저 많은 지역이 한꺼번에 무너진단 말인가. 역시 사령신은 인간의 탈을 쓴 신이 분명해!”
그러니 저런 만병보고 아래 깔린 이들은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채 가루가 되었으리라. 그는 일원의 첫 번째 계획이 성공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자리를 떴다.
*
콰콰콰콰콰쾅!
소용녀는 굉음이 울릴 때마다 몸을 웅크렸다.
연못에서 빠져나온 직후 시작된 폭발은 아직도 끝날 줄을 몰랐다. 제아무리 불과 철을 다루며 대장부 못지않은 철심을 자랑해도 견뎌내기 힘든 충격이었다.
“하아, 다 젖었네.”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반면 남천휘는 연못에서 나오자마자 주먹을 불끈 진 채 입꼬리를 올렸다.
◎ 강철의 고향을 발견하셨습니다.
◎ 퀘스트 ‘강철의 뿌리를 찾아서.’가 완료되었습니다.
※ VIP 포인트와 자수정이 지급됩니다.
앓던 이가 빠진 듯했다.
마봉파를 해결하면 칠야와 창월의 수리도 순조롭게 진행되리라.
왜냐고?
남천휘는 지하로 내려오면서 변경된 지도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동굴의 형태는 외뿔에 긴 허리를 지닌 네 발 동물과 흡사했다.
남천휘의 예상대로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A급 성소 ‘만병보고’의 핵심에 발을 들였습니다.
- 이곳의 명칭은 ‘흑린곡’입니다.
- 메인 퀘스트의 목표 지점을 선점했습니다.
- 보상이 미리 지급됩니다.
온 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퀘스트 보상 알림이지.’
소용녀는 그런 남천휘를 보며 마침내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우리 갇혔다고! 제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먹지 못하면 죽어! 연못물만 가지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 먹고 싶어? 오늘은 내가 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