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동만추. (2)
옷이라도 벗겨야겠다.
마린보의처럼 가치를 지닌 무복이라면 분명 VIP 포인트로 적립이 가능하리라.
하나 누구도 무기를 건네지 않았다.
소용녀에 대한 신뢰와 무기를 건네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무인에게 무기란 동반자였고, 때로는 가족보다 중한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한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남궁재야는 굳은 표정을 유지했고, 남궁소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리고 무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누군가 나서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엇! 독무가 다가온다.”
무인들은 눈치를 보는 와중에도 붕초를 감으며 칠보자령초를 해독했다. 한데 벽에 발라놓은 다정독마저 희미한 독무를 동반한 채 퍼지는 것이 아닌가.
“빌어먹을! 다정독.”
무인은 짜증 섞인 푸념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남궁재야의 눈치를 봤다.
그러던 중 마침내 물꼬를 트는 무인이 등장했다.
“모두 이대로 죽을 셈이야?”
그는 비분강개하여 일갈을 내질렀다.
“젠장! 나는 살아서 옥분이를 봐야겠어.”
동시에 검이 날아와 꽂혔다.
푹-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확인 주문서를 쓸 필요도 없다.
저딴 물건에 가치를 매긴다면 1이다.
그리고 1보다 아래가 있다면 그걸 하겠어.
‘이런 걸 들고 아직까지 살아있는 게 용하네.’
다행히 사내가 던진 싸구려 검은 독무에 휘감긴 채 자취를 감췄다.
“좋아! 신외지물이라 했어.”
몇몇의 병장기가 날아들었다.
그래, 너희들은 신외지물이라고 할 만하네.
다만 대부분의 사내들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특히 값비싼 무기를 지닌 자일수록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럴 때에는 머리를 잡아야 한다.
남천휘는 소용녀를 향해 눈짓을 했다.
“오호, 통재라!”
용녀야, 그렇게 과장해서 외칠 필요는 없잖아.
“설마 내일의 수많은 기회를 도외시한 채 오늘의 작은 욕심을 버리지 않을 셈이오? 이러다가 우리 다 죽어!”
그걸 누가 모르나?
녀석들은 여전히 남궁세가와 무림맹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금껏 수많은 이권과 기회를 양보한 까닭은 이럴 때 사용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더더욱 머리를 노려야 했다.
첨벙-
소용녀는 철 항아리 속에 손을 넣었다.
정체불명의 용액 속에서 부러진 칠야와 창월이 드러났다.
“이것은 철신의 유품인 쌍도요. 사실 나는 이것을 고치기 위해 이곳까지 왔습니다. 한데 모두의 삶을 위해 기꺼이 이것을 포기하겠습니다!”
철그렁-
그제야 무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강호의 남녀가 제아무리 격이 없어도 우열은 존재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무인들은 사내가 여인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던가.
그들은 종용하듯 남궁재야를 바라봤다.
‘자! 이제 머리가 나올 차례인데.’
남궁재야의 메마른 목소리가 울렸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생각인가?”
됐다.
남궁재야처럼 명망 높은 가문의 무인은 생각보다 물렁했다. 백명괴군을 놓쳤던 일화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닌 게다.
그처럼 주변에서 떠받들어주는 자들은 대체로 변화에 둔감했다. 상대는 남궁재야와 남궁세가를 존중하여 대부분의 손해를 감수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을 모를까?
처음에 몰랐을지언정 지금도 모를 리 없다.
다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활용했을 터였다. 그렇기에 그는 난관을 마주하는 순간 평소의 습성대로 움직였다.
처음에는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 궁리했겠지.
남궁세가와 무림맹은 물론이고, 수십 명의 무인들마저 자신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한데 그것에 실패한다면 다음 수는 뻔했다.
자신보다 강하고, 유명한 자에게 의지할 터였다.
‘그래서 용녀에게 철신과 정천칠공의 이름을 계속해서 거론하게 한 거지.’
이건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강자존은 비단 육신의 힘만 가리키는 논리가 아니지 않던가. 무공, 사문, 가문, 친구, 연인까지 모든 것이 강약의 논리로 규정됐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약자가 강자에게 기대는 것은 강호의 법도였다.
‘라고 생각하겠지. 그렇다면 저 영감도 그 정도의 존재라는 뜻이고.’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예상보다 이검 남궁재야는 강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조금 전에 말했던 대로 해. 조금 더 강렬하고, 격렬하게. 울분을 참듯이!]
소용녀는 직업을 바꿔도 될 만큼 훌륭했다.
“다정독. 대협, 죄송합니다.”
남궁재야는 계속 하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었다.
남천휘는 성소의 동조화를 진행하는 도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저 심정을 알지.’
“크흠, 백명괴군이 오만하게도 독의 제조 과정을 말하고 떠났습니다. 다행히 제가 소우액의 해독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요. 제가 무진철원에 있을 때였습니다. 무진철원의 유례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만, 그만! 소 소저는 생김새와 다르게 말이 많군. 핵심만 말하게.”
그래, 말이 너무 많기는 했어.
“철로 다정독을 상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철분을 뿌려놓으면 잠시나마 다정독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도 새빨간 거짓말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성소만 차지하면 만병보고 안의 모든 걸 조절할 수 있잖아.’
비를 내리고, 안개를 부르며, 땅을 무르게도 만들었다. 독기를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니리라.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그냥 두면 어차피 죽을 자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천휘가 저들의 죽음을 도외시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였다.
◎ 이곳이 바로 대협이 탄생한 장소입니까?
아니다. 이 재이야.
그저 조상의 숨결이 닿은 곳에서 청결하게 창월과 칠야를 수리하고 싶을 뿐이다.
그 때 남궁재야가 의구심 섞인 한 마디를 건넸다.
“흐음. 검을 부러트리는 건 가능하겠지만, 가루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잖아.”
자, 선수 입장하십니다.
“제가 합니다.”
남천휘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당신 누구요?”
무림맹의 맹도로 보이는 자가 경계하듯 물었다.
이럴 때에는 본인보다 제 삼자가 소개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한데 소용녀보다 빠른 사람이 있었다.
재이에 의하여 남천휘의 1호 팬으로 인정된 남궁소였다. 그녀는 빠르게 남천휘의 신상내력을 읊기 시작했다.
“저 분이 동부에서 가장 위명이 자자한 남 소협이랍니다! 남 소협의 행적을 논하자면 가장 먼저······.”
무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철귀유협이라면 산동에서 가장 유명한 후기지수가 아닌가?”
“이미 후기지수를 뛰어넘었지. 내가 마지막 들은 소식에 의하면 청도문을 박살냈다던데.”
“남 소협! 지금 뭐하는 건가? 다정독에 중독되면 어쩌려고?”
누군가 남천휘를 보고 외쳤다.
남천휘는 벽에 댄 손을 치우지 않은 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장력을 통해 독기를 밀어내고 있습니다. 이쪽 방향으로는 잠시나마 독이 퍼지지 않을 겁니다.”
“대단하군!
무인들의 탄성에 남천휘는 미소로 화답했다.
“선인을 구하고, 악인을 지옥으로! 이것이 제 신조거든요. 어찌됐든 남궁 대협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게 철을 부식시키는 비약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품에서 호리병을 꺼냈다.
마개가 열리지 않게 조심하자.
안에는 산동성의 자부심이라 할 수 있는 즉묵노주가 듬뿍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과 언사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나는 변설이 발동했으니까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저 녀석은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소용녀는 송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남궁재야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천영검의 귀함을 모르지 않습니다. 다만 좋은 약재를 써야 좋은 효과가 나기에······.”
남궁재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대로 대화가 이어진다면 마치 자신이 검을 아까워하여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형국이 될 터였다
이쯤 되니 무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는 지척에 이른 다정독의 독기를 슬쩍 빨아들였다.
‘크흑.’
한데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질했고, 한순간 손가락 끝이 마비되는 듯했다. 황급히 내력을 운용한 후에야 소량의 독기를 몰아낼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독기를 뚫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천영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천영검을 독문무기로 삼은 게 벌써 이십 년 전이다.
그렇기에 목숨처럼 아꼈다.
하나 목숨처럼 아낀다고 해서 목숨이 되는 건 아니었다.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남궁재야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그처럼 남에게 주목받던 사람은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명분과 체통을 따졌다. 검을 아까워하여 정파인을 죽인 어리석은 자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으리라.
철그렁-
무인들은 더 이상 망설이징 않고 무기를 내던졌다.
남궁재야가 천영검을 버렸으니 그들이 무엇을 버려도 손해는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됐어!’
이미 백명괴군이 예고한 일각 중 대부분의 시간이 흘렀다.
남천휘는 슬쩍 손을 내저어 내력을 운용했다.
그러자 다정독과 칠보자령초의 독기가 휘몰아쳤다.
“어어!”
“남 소협!”
무인들의 걱정 어린 외침이 연이었다.
“괜찮습니다. 쿨럭! 괜찮아요.”
실제로도 괜찮았다.
칠보자령초는 붕초로 감았고, 다정독은 녹선단을 이용해 해독했다. 아무래도 자연 그대로의 독기는 해독할 수 없지만, 인위적인 독무는 녹선단을 사용하는 순간 그냥 안개가 되었다.
시야를 가렸으니 적립이다.
‘적립, 적립, 적립, 적립.’
남천휘는 봉분처럼 쌓인 병장기를 하나씩 쥐었다.
그럴 때마 무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바닥났던 VIP 포인트는 늘어났다.
하루의 시간을 이각까지 좁혔다.
남은 건 천영검을 비롯한 몇 자루뿐이다.
지금까지의 적립 상황으로 보았을 때 천영검만 적립하면 동조화를 마무리할 수 있을 듯했다.
하나 남천휘는 섣불리 천영검을 적립할 수 없었다.
‘이건······.’
《천영검》
- 천하 십팔대 명검 중 하나로 꼽힌다.(가치 :1500)
- 동일 대상에게 검기를 삼 회 적중시켰을 때 네 번째는 파괴력이 30% 증가합니다.
- 무기 등급 : 영웅(英雄)
- 검기 발동 시 공격력 +200 증가.
- 검기 발동 시 절삭력 +10% 증가.
- 검강 발현 시 내공 전달력 +15% 증가.
- 내구도(244/250)
좋아. 좋아도 너무 좋다.
비록 소용녀의 말처럼 오대병기가 아니었고, 십팔이라는 다소 애매한 서열의 병기임에도 명검이라 부를 만했다. 무엇보다 무공은 몰라도 병장기의 가치가 네 자리인 경우는 처음이었다.
‘일단 챙기자.’
천영검(天影劍)은 VIP 대신 인벤토리로 사라졌다.
‘이걸 대신할만한 물건이······.’
일단 B급과 C급 보도를 깡그리 정리했다.
그 외에도 쓸데없이 모아뒀던 아이템을 대부분 포인트로 전환했다.
이제 남은 건 물약과 주문서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성소의 동조화를 끝내려면 일각의 시간이 남았다.
“크헉!”
다정독이 퍼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남천휘는 천영검을 대신할만한 물건을 꺼냈다.
바로 마린보의였다.
800의 가치를 지닌 보의라면 충분히 동조화를 끝낼 수 있으리라. 가치만 따지자면 600의 가치를 지닌 질풍뇌격궁을 적립하는 것이 옳다. 하나 지금껏 공격을 허락하지 않은 남천휘가 마린보의에 애착을 지녔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질풍뇌격궁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지 않던가.
불현 듯 마린보의를 건네줬던 공태령의 얼굴이 스쳐갔다.
- 피곤하군요. 빨리 결정하고 쉬지요.
그 녀석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으리라.
남천휘는 마린보의에 손을 얹은 채 읊조렸다.
‘적립!’
그 순간 언제 들어도 좋은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동조화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공백지의 명칭은 ‘만병보고’입니다.》
《명칭을 변경하시겠습니까?》
아니.
◎ A 등급의 영역을 차지했습니다.
◎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퀘스트에 대한 보상이 미리 지급됩니다.
어쩐지 제 2막이 활성화된 것처럼 사람을 귀찮게 한다 싶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한 번쯤 와야 했던 장소였나 보다.
◎ 특기 ‘유지(有志)’가 활성화됩니다.
◎ 만병보고의 영역이 지도 상에 표시됩니다.
◎ 만병보고의 모든 권한을 이양 받고, 정보와 시야를 공유합니다.
하늘에 붕 뜬 것처럼 몽롱한 감각이 사라지는 순간 재이의 다급한 알림이 울렸다.
◎ 만병보고의 폭파가 진행 중입니다.
◎ 폭파로 인한 대량살상을 피할 수 없습니다.
◎ 폭파 잔여 시간은 00:00:02입니다.
- 폭파를 중지하시겠습니까?(Y/N)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