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92화 (192/305)

86, 동만추.

86, 동만추.

괴겁천마와 사령신이 군림하던 시절.

사마외도는 양지를 만끽하며 태평성대를 빗대어 사마천세(邪魔千歲)라 칭했다. 사파와 마교가 천년 동안 중흥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리라.

하나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리고 괴겁천마와 사령신은 하늘과 신을 자처할 만큼 강했지만, 인간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 그러나 사마외도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당시의 강호를 즐겼다.

그 중심에 사성신위(四聖神位)와 광혈오주(狂血五主)가 존재했다.

백명괴군은 소속을 따졌을 때 천사련에 가까웠다.

광혈오주에 속한 천명지괴의 사손(師孫)이기 때문이다. 천명지괴(千命之怪)는 광혈오주 중에서도 광기로 수위에 꼽히는 자였다. 천이라는 숫자에 대한 집착은 목숨을 걸 정도였다고 한다. 일례로 새로운 기관을 만들기 위해 수백 명을 학살했던 전적이 있다. 그러나 기관이 완성됐음에도 천이라는 숫자를 채우기 위해 학살을 자행했던 대마두였다.

“그래서 백 명을 채웠군.”

소용녀는 설명을 이어갔다.

“백 명도 백 명이지만, 천명지괴의 재주 중 일할만 익혔어도 이곳은 위험해.”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공동에 모인 무인들의 표정에는 경계의 빛이 가득했다. 하나 함정에 들어왔다는 위기만 엿보일 뿐 두려움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동의 구조는 생각보다 탈출이 용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굴의 입구는 층으로 따지자면 일층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백명괴군이 서있는 중턱의 입구 근처만 해도 십여 개의 동혈이 뚫려 있었다.

마치 개미굴처럼 백여 개의 입구가 존재했다.

게다가 천장이 뚫린 분지형 구조였다.

그러니 칠보자령초를 한 번 더 태운다고 해도 금세 바람에 휘말려 사라지리라. 무엇보다 바닥에는 묵빛으로 번들거리는 붕초가 가득했다.

“아까 네가 그랬잖아. 입구 근처에 화약이 있다고. 그거 터지면 다 죽어.”

남천휘도 그게 의문이었다.

그 때 남궁소가 다가와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건넸다.

“천명지괴는 독심과 달리 자신의 목숨을 끔찍하게 아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을 채우기 위해 목숨을 거는 걸 보면 미친놈이 확실하지요. 백명괴군도 마찬가지랍니다. 지난 날 백부께서 백명괴군을 죽이려 했을 때 놈은 오줌을 싸고, 똥을 지렸어요. 게다가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지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잠시 틈을 보인 사이 도망쳤지만요. 그런 자가 저렇게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곳에 화약이 있을 리 만무하잖아요. 설령화약이 있다고 해도 놈은 터트리지 못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검 남궁재야에 대한 신뢰가 가득했다.

“백부에게 저 정도 거리는 코앞과 같아요. 지금이야 만병보고의 함정을 꾸민 이유를 찾으려고 일부러 화난 척 하시는 거라고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남천휘는 주변을 둘러봤다.

백여 명의 무인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을 뿐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또한 무림맹과 남궁세가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감정인 걸까.

‘어처구니없군.’

남천휘로서는 헛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강호의 변방 취급 받는 산동의 삼정만 해도 음험한 귀계로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미끼로 내걸고, 문파를 위해 천인공노할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동네 병정놀이도 이것보다는 치열하겠네.’

남천휘는 이검 남궁재야를 보며 슬슬 뒷걸음질 쳤다.

남궁소의 말처럼 남궁재야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기를 기원했다. 하나 큰 그림의 등장인물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나도 그림 좀 그려봤다. 이거지!’

그는 눈여겨봤던 장소로 기척 없이 이동했다.

일견하기에는 돌무더기에 불과한 폐허였다.

주변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 그 앞에 예(乂)자 표식이 존재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성소를 획득하고 유지 자격만 갖추면 만병보고가 내 손에 들어온다.’

그렇게만 된다면 적의 음모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리라.

이처럼 쉬운 영웅행이 어디 있으랴.

‘그러고 보면 특기 유지가 제일 꿀이네.’

사실 모든 특기가 그러하지 않던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특기로 인해 남천휘의 강호행은 오늘도 쾌청했다.

*

남궁재야의 무명은 일신의 무위뿐 아니라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가문의 명성이 더해진 결과였다. 대쪽 같은 성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굴곡 없는 삶의 영향도 컸다.

한데 그런 그에게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이 존재했다.

삼십 년 전 강호에서 한창 두각을 드러낼 때였다.

양민을 학살하는 마두를 눈앞에 뒀다.

그가 백명괴군이다.

강호가 평화로울수록 사마외도는 숨을 죽였다.

그 말은 곧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든 것과 일맥상통했다.

그런 상황에서 광혈오주의 사손을 만났으니 하늘을 향해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광혈오주가 세 명의 제자를 뒀고, 그 제자들이 다시 몇 명의 제자를 거뒀음은 개의치 않았다. 어찌됐든 백명괴군은 당시 강호에서 가장 소문난 먹잇감 중 하나였다.

하나 백명괴군은 악명과 달리 너무나 천박했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사마외도에 대한 기준이 무너질 만큼 충격적이었다.

한데 잠시 눈을 돌린 사이 놈을 도망쳤다.

그리고 놈은 남궁재야를 비웃듯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후 자취를 감췄다.

“죽기 전에 네 놈을 다시 만날 줄이야.”

그는 분노했다.

삼십 년 간의 역린을 제거할 마지막 기회라 여겼다.

반면 백명괴군은 느긋했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이검을 다시 보니 참으로 반갑군. 요즘도 얼뜨기처럼 넋을 놓고 다니는가?”

“이 놈!”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말이 너무 심하군. 나는 옛 친우에게 만병보고의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는데 말이야.”

남궁재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백명괴군을 앞에 두고 시간을 끈 이유가 바로 저것이다. 하나 무언가 수를 쓰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겠다니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크하하! 그래, 저거야. 저거. 내가 술을 마실 때마다 말했던 다정검의 그 때 표정이 저랬다니까.”

백명괴군의 곁에 있던 복면인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남궁재야는 얼굴을 붉혔으나, 분노를 토해내지 못했다. 어찌됐든 놈들의 음모를 알아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닥쳐라! 도대체 애꿎은 사람들을 이곳까지 유인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그냥.”

남궁재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백명괴군은 장내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여기까지 와서 느긋한 네 놈들을 보니 복장이 터진다. 이렇게 등신 같은 놈들만 가득한 강호를 어째서 빼앗지 못한 걸까? 자괴감이 들어. 너희들은 뭐라도 되는 것 같으냐? 무림맹이 끼고, 남궁세가가 보이니까 뭐든 해결 될 것 같아?”

지금껏 느긋하던 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백명괴군의 조롱에서 불길함을 느낀 게다.

“이곳은 만병보고가 맞아. 하지만 비었지. 그리고 너희들의 시체로 다시 채워질 게다. 아! 물론 온전하게 채워지지는 않을 거야. 나는 만병보고 전체를 폭파시킬 계획이거든.”

무인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흥! 네 놈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게다.”

백명괴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능글맞은 표정으로 조롱하듯 말을 이었다.

“나는 나갈 거야. 이 동굴은 보고 밖까지 뚫려 있거든. 아! 아! 너희들의 생각이 여기까지 들린다. 내가 움직이는 즉시 함께 움직일 생각이겠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내 사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야? 제갈세가조차 넙죽 엎드린 채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천명지괴다! 기관진식에 대해서는 고금제일로 칭송받는! 아, 칭송은 좀 그런가? 악명이라고 하지. 어쨌든 내가 움직이는 순간 네 놈들의 눈에 보이는 모든 입구가 무너질 거다. 하지만 바닥에 깔린 화약은 터지지 않아. 내가 조율했거든. 그 정도는 해야 천명지괴의 재주를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하하하!”

무인들은 눈을 부릅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천명지괴의 기관진식이라면 화약을 나눠서 터트리는 것이 가능할 터였다.

“이제야 위기감이 생기는 건가? 괜찮아. 늦지 않았어. 어차피 여기 들어온 이상 이미 죽은 목숨이거든. 구십구에 일을 더한다는 심정으로 한 가지 더 알려주지. 여기 벽에는 말이야. 소우액이라는 것을 발라놨어.”

그는 말을 이어가던 중 소매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마개를 뽑고 기울이는 순간 몇 방울의 피가 흘러내렸다.

치이이이이익-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멀쩡하던 벽이 붉게 번들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역병처럼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순이 채 지나기도 전 공동의 모든 벽이 피처럼 붉게 번들거렸다.

“소우액에 단혼사를 더하면 뭐가 되는 줄 아나? 아! 모르겠군. 내가 처음 만들었거든. 사실 이름을 정하지 못했었어. 그런데 옛 친우를 보니 절로 멋들어진 이름이 떠오르는군. 다정독. 어때?”

“이 놈!”

남궁재유가 천영검을 뽑았다.

당장이라도 몸을 날릴 것만 같았던 그가 주춤거렸다. 벽 근처에 있던 낭인 중 한 명이 머리를 흔들더니 그대로 꼬꾸라지는 것이 아닌가.

백명괴군은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다른 손으로 무인들을 향해 내저었다.

“훠이! 훠이! 꽤 독하니까 멀리 떨어지는 게 좋을 게야. 어차피 죽을 거지만,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 게 사람이잖아.”

무인들은 무림맹 강소지부의 무인들을 바라봤다.

강소지부의 무인들은 남궁재야를 응시했다.

신뢰의 눈빛.

남궁세가라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백명괴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쯧, 기분이 더럽군. 너희들이 뭐라도 되는 것 같더냐? 만병보고의 핵심은 나간 자들이다. 그들은 너희들이 들어간 것을 보았고, 이곳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를 힘을 얻겠지. 구파오가는 생각보다 의지가 되지 않고, 저마다 힘을 비축해야 함을 깨우치겠지. 그 때가 되면 일원이 등장하여 천하를 평탄할 것이다!”

무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 잘난 맛에 여기까지 왔거늘 미끼에 불과한 신세였다.

백명괴군은 무인들의 표정을 보고 혀를 찼다.

오랜 세월 억눌렸던 분노를 표출하다보니 말이 길어졌다 여긴 것이다.

‘쯧, 어차피 죽을 놈들이니.’

그는 몸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일각 동안 잘 생각해 봐라. 최후의 순간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봉쇄하라!”

남궁재야가 뒤늦게 움찔했으나, 이미 굉음과 함께 모든 입구가 무너져 내렸다.

콰콰콰콰쾅!

백명괴군의 장담은 사실이었다.

만병보고 전체가 흔들릴 만큼 거대한 충격파가 사방에서 몰아쳤다. 하나 바닥은 멀쩡했다. 그리고 흙먼지가 잦아드는 것과 동시에 칠보자령초로 만들어진 독무가 솟구쳤다.

“이검!”

“이검!”

“할아버지!”

모든 이의 시선이 남궁재야를 향했다.

그라면 분명 답을 줄 것이라 여긴 게다.

하나 이검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무력할 줄이야.’

그는 허공을 올려다봤다.

백명괴군의 말이 사실이라면 폭파까지 남은 시간은 일각이다.

그 안에 천장을 통해 탈출하는 것이 가능할까?

바닥에는 칠보자령초가, 벽에는 다정독이 가득하지 않은가.

그 순간 여인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나는! 철신 철장경의 후손이다.”

철신은 사마천세의 시절, 정천칠공에게 무기를 만들어준 고금제일의 야장이 아니던가.

무인들의 시선이 꽂혀들었다.

쿵!

소용녀가 사람의 몸통만한 철항아리로 바닥을 내리치며 재차 외쳤다.

“이곳은 본래 청염진군과 제룡검야가 사령신의 무기를 봉인했던 장소요. 조상의 옛 터를 추억하고자 찾아온 길이 이처럼 횡액을 당하게 되었소. 하나 이 또한 선조가 이끈 것이 아닐까 싶소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정말 이러면 되는 거야?]

남천휘는 예(乂)자 표식을 밟고 선 채 벽에 손을 대고 있었다.

[잘하고 있어. 잘한다. 우리 용녀!]

소용녀는 용기를 얻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내게 사지를 벗어날 방법이 있소이다. 따르시겠소?”

무인들은 웅성거렸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소용녀의 정체를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때 남궁재야가 그녀를 도왔다.

“일전에 철신의 초상화를 견식한 적이 있다. 소 소저에게는 미안하지만, 선대의 외형을 꼭 빼닮았군.”

그제야 무림맹 강소지부장이 말을 보탰다.

“유선관의 철가철방이라면 산동지부를 통해 듣고 있었소. 무진철원의 진짜 주인인 소 소저의 말이라면 한 번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게요.”

소용녀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여장부가 백만대군을 호령하듯 당당했다.

[나 한다. 진짜 해. 진짜 해도 돼?]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진행됐다.

성소의 동조화는 하루가 걸렸다.

일각 후에 만병보고가 폭발하겠지만, VIP 포인트를 사용하면 동조화 시간의 단축이 가능했다. 게다가 근래에 얻어낸 것이 많기에 VIP 포인트는 지금껏 유례가 없을 만큼 풍족하지 않던가.

한데 한 가지가 예상 외였다.

‘빌어먹을! A급 성소라니.’

만병보고의 가치를 논하자면, A급인 것이 당연했다.

한데 A급 성소의 시간 단축을 위해서는 예상보다 많은 VIP 포인트가 소모됐다.

[빨리 해! 시간 없어.]

소용녀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모두 무기를 내게 주세요.”

그녀는 남궁재야를 지목해서 말을 이었다.

“천영검은 필수에요.”

답은 적립뿐이다.

‘일단은 무기부터 적립하자.’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무인들을 응시했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