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88화 (188/305)

84, 무인무명무대(武人無名舞臺). (2)

*

강소성에는 두 개의 호수가 있다.

북쪽의 홍택호와 남쪽의 태호.

두 곳의 풍광은 같은 지역이니만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태호는 남쪽의 절강성과 연결되는 만큼 상인과 표사들의 이동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낭인과 양민 또한 사방에서 몰렸다.

반면 홍택호는 알려진 위상에 비해 고요했다.

한 마디로 시인묵객이 고아한 정취를 찾아 저마다 배회가리를 즐기는 장소였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서 무인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난입한 불한당이나 다름없었다.

이름 없는 시객이 한탄을 하며 읊조렸다.

- 지팡이 대신 칼을 차고, 방갓 대신 복면을 둘렀으니 무인이라. 숲과 강을 즐기지 않고, 피냄새만 쫓으니 이름 없이 사라지리라. 무희가 뛰어놀아야 할 곳에 무뢰배만 들끓는구나.

이름은 없을지언정 시재(詩才)는 뛰어났다.

시객의 한탄은 금세 퍼져나갔고, 시제(詩題) 또한 회자됐다.

- 무인무명무대(武人無名舞臺).

알려지지 않은 무인들이 싸우는 장소라는 의미였다.

하나 정작 무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홍택호의 새로운 지명이 아니라 만병보고의 위치였다.

“젠장! 이쪽은 남궁세가가 진을 쳤군.”

“저쪽도 무림맹이야.”

소속 없는 무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정처 없이 산길을 헤맸다. 대략적으로 알려진 만병보고의 입구는 열 곳이다.

“빌어먹을! 칠계가 움직였다.”

누군가의 외침에 낭인들은 한 숨을 내쉬었다.

산동성에 삼정이 있다면 강소성에는 칠계(七契)가 존재했다. 일곱이나 존재하는 이유는 강소무림이 산동성보다 약해서가 아니다.

강소성의 재화는 산동성의 몇 배였다.

그렇기에 삼정에 미치지 못할 뿐 그에 준하는 자들이 일곱이나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삼정과 달리 몇 겹의 혼인으로 동맹을 공고히 한 상태였다. 그들마저 만병보고의 입구를 차지했으니 낭인들이 갈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강소성에게 칠계에게 밉보이면 칼밥 먹기 힘들지.”

몇몇 낭인들이 홍택호를 등졌다.

하나 모든 곳이 그렇지는 않았다.

“다행히 백룡암은 거대방파가 손을 뻗지 않았네.”

남천휘와 소용녀는 수십 명의 낭인들 사이를 지났다.

이곳은 소용녀의 말처럼 거대방파가 없기에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낭인들은 저마다 편한 위치에서 편한 자세로 대기했다. 하나 딴청을 피우는 듯하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어정쩡한 애들만 모여 있네.”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딱 봐도 잔악무도한 놈들이면 다 쓸어버리면 되는데······.’

덕분에 짜증 섞인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도대체 흑린곡은 어디에 있는 거야?”

백룡암은 호수와 육지의 경계에 존재했다.

주변에는 암석만 즐비할 분 계곡이라고 불릴 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남천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하나 퀘스트를 받을 수 없으니 믿을 것이라고는 일전에 받아놓은 ‘강철의 뿌리를 찾아서.’가 유일한 실마리였다. 그렇기에 남천휘는 백룡암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지도를 최대한 확장했기에 작은 장소였다고 해도 지명이 드러났다.

‘분명 강철의 고향과 관련된 장소라면 반응이 있을 거야.’

하나 백룡암을 제외하면 어느 곳 하나 특출하지 않은 장소였다.

그렇기에 생각의 방향을 바꿔봤다.

‘지도의 목적지에 백룡암까지 있어. 그런데 흑린곡은 없어.’

남천휘는 대수롭지 않게 주변을 살폈다.

육십 명 정도였던 무인들이 어느새 구십 명까지 늘었다. 이곳은 거대방파가 장악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았나 보다.

‘하지만 이 일을 꾸민 새끼들이 있지.’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이 외로워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이런 일을 꾸미지는 않았을 터였다. 사령신의 만병보고를 내세웠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원하지 않겠는가.

‘이곳만 백 명 가까이 됐어.’

알려진 입구만 열 곳이 넘었다.

그렇다면 만병보고를 노리는 무인의 숫자가 천을 넘겼다는 의미리라. 사령신의 만병보고와 함께 무덤으로 삼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어딘가 섞여 있을 거야.’

그렇기에 장소가 아니라 사람을 찾았다.

이럴 때에는 없어진 신안의 기능이 못내 아쉬웠다.

그랬다면 레벨의 색으로 악의를 지녔거나, 적대하는 자를 찾을 수 있었으리라.

남천휘는 일부러 공터의 중앙을 배회했다.

이 정도 위치라면 수상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리라.

‘저 놈은.’

묘한 사내였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사내였다.

장내에 모인 낭인들 중 흉악하게 생기지 않은 자가 몇이나 되랴. 하나 사내는 흉측한 얼굴과 달리 눈빛이 평온했다. 말년에 귀의한 것이 아니라면 범인은 아닐 터였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입 모양이.’

아무리 봐도 숫자를 헤아리는 듯했다.

남천휘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기에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숫자를 헤아린다.

그는 황급히 공터에 모인 자들을 손꼽았다.

‘백!’

열은 작고, 천은 허황되다.

백은 일을 꾸몄을 때 도모하기에 적당한 숫자였다.

남천휘는 더 생각할 것 없이 사내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사내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놈도 백 명인 것을 확인했다.

콰직!

주먹으로 바위를 내리쳤다.

한데 놀랍게도 바위는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바위처럼 보이지만, 바위가 아닐 터였다. 분명 사람의 손이 닿은 기관이리라. 그 순간 이장 넘게 솟구쳤던 절벽에서 불똥이 튀었다.

파스스슥!

그 순간 이끼와 돌이 흘러내렸다.

그 너머로 묵빛의 철문이 드러났다.

애초에 돌과 나무로 위장을 해놓은 게다.

“엇! 입구다!”

누군가의 외침에 백여 명의 무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철문의 상단에 새겨진 네 글자를 보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만병십사(萬兵十四).

만병보고의 열네 번째 입구임을 누가 모를까.

“와아아아아!‘

무인들은 아귀가 먹을 것을 발견한 것처럼 서로를 밀치며 철문으로 달려갔다. 사령신의 만병보고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손쉽게 철문이 열렸다.

‘이미 열어놨어.’

남천휘는 이를 갈았다.

혈겁과 관련이 된 듯한 사내는 이미 철문 뒤로 사라진 후였다.

“용녀!”

남천휘는 소용녀를 불렀다.

그녀가 움직이는 순간 등에 맨 철항아리는 훌륭한 무기로 변화했다.

퍼퍼퍼퍼퍽!

“뭐야?”

철구에 밀쳐진 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남천휘와 소용녀는 뻥 뚫린 길을 통해 철문으로 향했다.

“이거 들어가도 돼?”

소용녀는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남천휘가 가짜와 함정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지 않았던가.

“들어가! 들어가!”

남천휘는 소용녀의 손목을 잡아채고 철물을 지나쳤다. 그가 적의 함정임을 알면서도 담대하게 들어선 이유가 눈앞에 나타났다.

◎ 천혜의 인공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 퀘스트 《강철의 뿌리를 찾아서》가 던진 진입으로 인해 재활성화됩니다.

남천휘는 황급히 남위기를 통해 던전의 정의를 검색했다. 기관진식을 통해 만들어진 거대한 함정을 뜻한단다. 그러나 한 번 치솟은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천혜의 인공던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말인즉슨 원래 있었던 동굴에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는 뜻이리라.

‘진짜 만병보고였군.’

퀘스트도 하고, 보물도 얻고, 나쁜 놈도 때려잡을 수 있는 일석삼조의 기회였다.

“여기는 뭐지?”

소용녀는 언제 불안해했냐는 듯 호기심을 드러냈다.

일견하기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은 듯한 동혈은 백여 명을 먹어치웠음에도 공간이 여유로웠다.

하나 아무 것도 없었다.

무인들은 텅 빈 공동을 수색하다가 뒤늦게 목소리를 높였다. 화를 내는 자도 있었고, 불안해하는 자도 있었다.

“엇! 저기 글자가 있다.”

공동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지도에서 본 것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 두 줄이 추가됐다.

- 둘 중 하나가 되어야 자격을 갖추리라.

- 만병의 정수를 얻는 자, 신이 되리라.

폭풍처럼 몰아치던 온갖 감정이 하나로 뭉쳤다.

탐욕(貪慾).

만병보고 안에서 신을 거론한다면 천사련의 사령신일 것이 분명했다. 사령신은 공식적으로 단 한 명의 제자도 두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만병보고 안에 그의 무공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무인들이 잠시 넋을 잃은 사이 사달이 벌어졌다.

입구의 상단부에서 단두대처럼 철문이 내리꽂힌 것이다. 잠시 후 바깥쪽에서 좌우로 활짝 열어둔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뭐, 뭐야?”

바위틈으로 들어온 한 줄기 빛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시야 확보가 가능했다. 하나 내공이 일천한 자들은 벌써부터 무기를 뽑아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때 상황판단이 빠른 몇몇이 외쳤다.

“청양쌍귀다!”

“홍련사웅!”

제각기 자신의 무용을 자랑했다.

그리고 무인들은 청양쌍귀와 홍련사웅와 거리를 벌렸다. 사파나 다름없는 자들이기에 가까이 있다가 눈 먼 칼에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 쇠를 긁는 듯한 한 마디가 덧붙여지는 순간 모든 이가 움직임을 멈췄다.

“무흔사.”

무흔사(無痕士)는 배분이 높은 노고수였다. 보법 중에서도 은밀한 움직임으로 명성이 높았다.

“둘 중 하나가 되라는 뜻을 모르지는 않을 터, 지금부터 모두 벽에 붙어라.”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청양쌍귀, 홍련사웅. 우리끼리 다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선배의 말이 옳소. 이곳에서는 선배의 뜻을 따르겠소. 그나저나 자격을 갖추려면······.”

청양쌍귀가 말끝을 흐리자, 홍련사웅이 마무리를 했다.

“쓸모없는 자를 죽이라는 말이겠군.”

죽인다는 말에 다시 한 번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쿵!

무흔사가 지팡이로 바닥을 찍었다.

“살고자 한다면 말을 들어라. 그렇지 않은 놈들부터 머릿수를 줄여주마. 당장 벽에 붙어라!”

그가 재차 지팡이를 찍으려 했다.

어둠에 뒤섞인 채 무언가 꽂혀들었다.

콰직!

그 순간 무흔사의 머리가 호박처럼 터져버렸다.

무인들은 무흔사 때와 달리 입을 닫았다.

어둠 속에서 목표를 맞추는 궁술이라면 신위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상대의 다음 화살이 자신의 머리통을 노리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모두 무기 넣어.”

동혈 어딘가에서 퍼져 나온 목소리였다.

쾅!

철시가 동혈의 천장에 꽂힌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넣으라고 했다.”

무흔사를 죽인 고수의 명령이다.

무인들은 무흔사 때보다 빠르게 무기를 거뒀다.

하나 몇몇 무인은 오히려 경계의 빛을 드러냈다.

“청양쌍귀, 홍련사웅. 선배 대접 받고 싶어?”

저잣거리의 왈패처럼 상스러운 한 마디였다.

하나 청양쌍귀와 홍련사웅은 눈을 부릅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고수의 목소리는 사방팔방에서 들려왔다.

단순히 동굴의 구조로 인해 퍼져 나온 울림이 아니었다.

‘이거 설마 육합전성인가?’

육합전성은 초절정의 고수가 자신의 위치를 밝히지 않고, 말을 건넬 때에나 사용되는 상승의 무공이다.

그런 고수의 명령이라면 듣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배분이나 명성을 따지지만, 결국은 강자존이 강호의 법도였다.

“아, 아닙니다.”

“벽에 새겨진 글귀 아래를 살펴봐. 철문처럼 위장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청양쌍귀와 홍련사웅이 어기적거리며 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남천휘는 그 사이 입구에서 철문을 살폈다.

내공을 사용해봤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거 재질이 뭐야?”

소용녀는 철문의 겉면을 쓰다듬더니 아예 혀로 핥기까지 했다.

“두세 가지를 섞었네. 강기라면 잘릴 지도 모르지.”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내력을 모조리 쏟아부어도 강기를 생성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적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전을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데 철문 앞에 있다보니 어딘가 모르게 낯익은 냄새가 나는 듯했다.

‘이걸 어디서 맡았더라?’

금세 답을 찾았다.

제룡장의 정자다.

자신이 제룡장의 보고를 살필 때 장주가 앉아 있던 정자에서 이런 향이 나지 않았던가. 그리고 제룡장 아래에는 만근의 화약이 묻혀 있다고 했다.

‘강제로 열면 폭발하는 건가?’

하나 불안함보다 기쁨이 앞섰다.

제룡장의 창고를 만든 것은 청염진군이다.

남천휘가 해결해야 할 마봉파를 만든 것도 청염진군이다. 그리고 의문의 상대가 죽음의 덫을 깔아놓은 천혜의 인공던전도 청염진군의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청염진군이 만들어 놓은 것을 누군가 활용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누군지 몰라도 빨리 봤으면 좋겠다.

놈들을 찾으면 퀘스트와 상관없이 엄청난 레벨 업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쯤 해서 기연 한 번 정도는 나와 줘야 하는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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