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진품명품(珍品名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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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검 남궁재야의 협명은 대쪽 같은 올곧음에서 비롯됐다.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반드시 지켰으며, 대의와 명분을 따라 행동했다.
그는 보도를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만에 하나 사령신의 흔적이라도 등장한다면 강호 전체가 요동을 칠 터였다. 그러니 가주와 원로들을 불러모은 후에야 두루마리를 펼치고자 했다.
“흐음.”
하나 그는 남궁세가가 아닌 객잔에서 보도를 펼쳤다. 그의 눈빛에는 한 점의 사리사욕도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도를 펼치는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
“똑같구나.”
객방을 짓누르는 한 마디에 소녀는 탄성을 흘렸다.
본래 노소는 경공까지 펼쳐가며 귀가하던 중이었다.
이검(二劍)의 명성이 천하에 자자하지만, 보도는 원체 피를 부르는 기물이 아니던가.
하나 그들은 장강을 코앞에 두고 수적떼를 마주했다. 평소였다면 가볍게 징치한 후 배를 탔으리라. 그러나 수적은 그들을 노리지 않았다. 장사치의 복장을 한 청년을 공격했다. 죽은 청년의 품에서 또다시 보도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검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소녀에게 수적떼의 처리를 맡긴 후 죽은 청년에게서 보도를 얻었다.
“할아버지.”
이검은 침음을 흘렸다.
그의 눈은 보도 위쪽에 적힌 네 글자를 입안에서 굴려봤다.
만병보고(萬兵寶庫).
만 개의 무기가 숨겨진 창고를 뜻했다.
‘사령신의 유산이 잠든 곳.’
고래로부터 강호는 정과 마로 나뉘었다.
간혹 정과 사가 되기도 했고, 정과 황궁의 대립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뭐가 됐든 강호의 한 축은 언제나 정파였다.
한데 오직 한 번의 시대에는 정파가 뒷전으로 밀려났다. 정파는 지리멸렬하여 일제히 봉문에 들어갔고, 검을 차고 밖을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흔히 사마천세(邪魔千歲)라 불리던 시대였다.
장강을 기점으로 북쪽을 신교(神敎)가 군림했고, 남쪽에는 천사련(天邪聯)이 지배했다.
천사련주의 보물창고가 바로 만병보고였다.
“진짜는 아니겠지요?”
“글쎄다.”
괴겁천마와 사령신의 최후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정천칠공으로 인해 그들이 사라졌다고 알려졌을 뿐이다.
“어느 쪽이든 진짜 일 수 있고, 어느 쪽이든 가짜일수도 있지.”
지도가 가짜일수도 있고, 만병보고가 가짜일 수도 있다. 또는 둘 다 진짜일 수도 있으리라. 하나 이검이 표정을 풀지 못하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보도의 재질은 언뜻 봐도 오래 되었어. 만약 원본이 수십 장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거나, 엄청난 재력으로 이번 일을 계획했으리라.
어느 쪽이든 좋지 않았다.
달이 차면 기울 듯 평화 뒤에 오는 혼란을 마주하는 듯했다.
‘지금이라도 가주에게 가야 하는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계획을 파해하러 가야 하는가?’
그의 시선이 보도에 머물렀다.
지도에는 산과 들, 그리고 강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지명이 보이지 않으니 어느 지형에 대입해도 비슷하게 보일 터였다. 그렇기에 지도 상단에 적힌 글귀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대하(大河)가 손을 뻗으니 소하(小河)는 영락없이 갈 길을 일었다. 흉신악귀의 눈을 피해 모이고, 모였더니 손바닥은 어느새 강가의 풀을 덮는구나.
- 인연이 닿는 자는 흉신악귀의 눈을 피해 어느 길이든 찾아낼 것이고, 사이한 영혼에게 빌어 끝끝내 만병 중 하나를 얻어내리라.
중원에서 강(江)이 장강을 뜻하듯, 하(河)는 황하를 의미했다. 그러니 큰 하는 황하를 뜻할 것이고, 작은 하는 회하를 일컫는다.
‘오래 전 황하의 물줄기가 바뀌어 회하를 막았지. 갈 곳을 잃은 회하가 모여 만들어진 곳이 바로 홍택호가 아니던가.’
첫 구절의 해석은 확실했다.
게다가 강남을 지배했던 사령신의 보물창고가 강북에 있다면 흉신악귀의 눈을 피한다는 말도 해석이 될 터였다. 또한 강가의 풀은 강소성을 의미하니 보물지도의 목적지는 홍택호가 분명했다.
‘두 번째는 의미심장하군.’
흉신악귀가 괴겁천마를 의미한다면 사이한 영혼은 분명 사령신을 의미할 터였다.
‘마치 아직도 괴겁천마가 만병지고를 찾으려 다닌다는 뜻처럼 들리는군.’
하나 대부분의 강호인들은 마지막 구절만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만병(萬兵) 중 하나를 얻는 것이 자신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리라.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대는 꼴이야.’
이번 일을 꾸민 자들은 작은 규모가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하루사이에 모인 세력도 아니리라.
그러니 이번 혈겁(血劫)은 오랜 세월 암중에서 움직이던 자들이 처음으로 기지개를 켜는 것일 수도 있었다.
“먹구름이 몰려와 비를 뿌린다면······.”
정파는 과연 우산을 준비했던가?
남궁재야는 침음을 흘렸다.
그 때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지도를 살피던 소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 할아버지. 여기는 달라요.”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보도의 뒷면이다.
흐릿하게나마 숫자가 적혀 있었다.
칠과 십사.
소녀는 탄성을 흘렸다.
“맙소사! 최소한 열네 장이나 존재한다는 건가요?”
남궁재야는 침묵을 고수했다.
지도의 구절에는 어느 길이든 찾아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만병보고의 입구는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리라. 한데 지도의 내용은 같지만, 숫자가 다르다면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두 장의 지도는 같은 입구를 가리킨다.’
그 말인즉슨 입구 하나 당 최소한 열네 장의 보도가 존재한다는 뜻이리라.
“크흑!”
남궁재야는 야심한 시각임에도 짐을 꾸렸다.
“가야겠다.”
“할아버지.”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다. 단순히 수백 명을 불구덩이에 몰아넣는 혈사가 아니야. 강호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만병지고로 인해 사마의 시대를 떠올리게 됐다.
그래서 작금의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깨우쳤다.
당시 지하로 파고든 정파가 얼마나 독했던가.
사마의 세상을 깨기 위해서라면 명분이나 인륜마저 등질 자들이 수두룩했다.
“정파의 세상이 백 년 가까이 이어졌어. 그리고 사마의 독심은 그만큼 깊어졌겠지.”
자칫 잘못하면 이번 혈겁은 사마외도를 깨우는 경종이 될 터였다.
“너는 돌아가라. 가주에게 이번 일을 전해. 나는 홍택호로 가겠다.”
하나 소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남궁재야를 따라 짐을 챙기는 것이 아닌가.
“스승을 두고 도망치는 제자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저 강하잖아요. 또래에는 적수가 없다면서요?”
“그건 그렇지.”
남궁세가주의 손자손녀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혈해화였다.
삐익-
소녀가 휘파람을 불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 뚝 떨어지듯이 날아들었다. 그녀는 전서응에 쪽지를 매달고 다시 밤하늘로 날려 보냈다.
“저도 갑니다.”
“위험하다.”
남궁재야의 근심 어린 한 마디에 소녀는 치아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어차피 아들, 손자 많잖아요.”
“허허, 대찬 녀석. 사내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소녀는 눈을 흘겼다.
“이럴 때에는 사내로 태어났으면 일국을 다스릴 제왕의 된다는 의미의 말을 하셔야 되는 것 아닌가요?”
“이 녀석아. 냄새 나는 사내놈이었으면 애초에 제자로 받지도 않았을 게다.”
노소는 아귀산을 오를 때처럼 여유를 되찾았다.
하나 두 사람의 눈빛은 그 때보다 더욱 서늘하고, 깊이 가라앉았다.
“대부분의 강호인들은 의미도 모른 채 부나방처럼 함정으로 달려들게다. 그리고 몇몇은 알면서도 이 상황을 이용하려고 하겠지.”
소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 같은 사람도 있잖아요. 잘못되는 건 죽어도 못 보는 그런 사람들이요. 어리석고, 욕심 많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도 개의치 않는 협객이 우리만은 아닐 거라고 믿어요.”
“클클, 제 얼굴에 금칠 하는 재주만큼 검을 썼으면 이미 나를 넘어섰을 게다.”
하나 남궁재유의 표정은 농담을 하면서도 풀리지 않았다.
‘오랜 세월 평온에 젖어 검은 녹슬고, 협심은 빛이 바랬을 게야. 이처럼 흉악한 혈겁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자들이 몇이나 될까?’
*
“헉! 이거 보물지도야.”
소용녀는 제 덩치만한 철구를 내려놓고 뚫어져라 보도를 응시했다.
하나 남천휘는 시큰둥했다.
“보물지도라고!”
“어, 그래.”
유선관을 떠나고 삼일 째 되는 날이다.
남천휘와 소용녀는 백파도와 철신이라는 동질감으로 인해 쉬이 가까워졌다.
전대의 인연만큼 훌륭한 화젯거리가 어디 흔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철신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소용녀와 애틋한 감정이 생길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소용녀는 남천휘를 사내로 생각지 않았다.
‘아니,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
차라리 잘됐다.
남녀 간에 꼭 정분을 나눠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무진철원의 유설옥처럼 정분을 나눌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설옥 누님, 오늘도 누님에게 사과를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게 되네요.’
남천휘는 서산 너머로 사라지는 해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미 사위가 어둑한 것이 금세 밤이 찾아올 듯했다.
“여기서 노숙할 게 아니라면 어서 가자.”
그제야 소용녀는 주변을 살폈다.
공터에는 수십 구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홀로 남아 보도를 쟁취한 자를 죽인 건 남천휘였다.
피투성이의 사내가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들기에 반사적으로 심장을 후려친 게다.
그 결과 보도는 소용녀에게 전해졌다.
“잠깐! 만병보고야. 그냥 보물도 아니고 만병보고란 말이야.”
“알게 뭐야. 나는 칠야와 창월만 고치면 된다고. 이 엉터리 야장아. 철신하고 비교하면 덩치만 똑같았지, 실력은 달과 반딧불 같은 삼류 야장 녀석아.”
남천휘의 짜증 섞인 일갈에 소용녀는 혀를 찼다.
“쯧쯧, 어리석은 녀석. 모르는 게 병이라더니 너야 말로 아주 중병에 걸렸구나.”
이건 또 무슨 새롭고, 어처구니없는 소리냐?
소용녀는 만병보고의 기원을 떠들기 시작했다.
“사령신은 젊었을 때 대머리 흑오라 불릴 만큼 반짝이는 것을······.”
“가짜야.”
남천휘의 시큰둥한 한 마디에 소용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거 가짜라고.”
“이게 왜 가짜야? 재질도 그렇고, 묵향도 옛 것의 냄새가 가득해. 그리고 무림사의 정황상······.”
“그래도 가짜.”
소용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남천휘는 성격에 문제가 있을 뿐 허언을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기이한 재주를 몇 가지나 지니고 있는 기인이 아니던가.
“진짜 가짜?”
“그래, 정확하게는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칠호 입구의 열여섯 번째 보물지도’야. 퀘스트 생성 날짜가 사십이 일 남았기에 히든은 발동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사십이 일이 흐른 후 재차 보도를 만지는 걸로 퀘스트 발동이 가능하다네. 가짜 보도임에도 불구하고 희귀 등급이니 장난으로 만든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죽고,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위협이 존재하겠지?”
소용녀는 첫 마디 이후 알아듣지 못할 말의 연속이었지만,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반문을 하는 순간 더더욱 심연으로 빠져들 수박에 없음을 눈치 챈 것이다.
‘그냥 원래 저런 놈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아.’
남천휘는 멀뚱히 서 있는 소용녀의 손에서 보도를 빼앗았다. 그리고 갈가리 찢은 후 멋들어지게 날려버렸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칠야와 창월을 고치러 온 거야. 백룡암, 흑린곡에 가는 게 목표라고. 알았지?”
“응.”
남천휘는 그제야 입가의 미소를 되찾았다.
“강호의 혈겁은 무림맹에게 맡기자고. 어차피 욕심 가득한 새끼들끼리 치고받는 거잖아.”
소용녀는 미간을 좁혔다.
“왜? 내가 너무 냉정하게 얘기했나.”
남천휘의 반문에 소용녀는 한 숨을 내쉬었다.
“너무 남의 일처럼 얘기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남의 일 맞아. 우리는 백룡암!”
그 때 소용녀가 남천휘의 말을 잘랐다.
“흑린곡이 어디 있다고?”
“홍택호 북쪽이라며.”
소용녀가 철구를 짊어진 채 말을 건넸다.
“아까 보도가 가리키는 장소가 홍택호 북부더라.”
남천휘는 똥씹은 사람처럼 표정을 굳혔다.
소용녀는 쾌변 이후 세상을 마주한 것처럼 히죽 웃었다.
“자! 이제 우리 일이네.”
꽈드득-
남천휘가 이를 가는 순간 재이의 알림이 울렸다.
◎ 평정심의 깨졌습니다.
- 위기 상황으로 간주하여 S급 특기 ‘불굴’이 자동으로 발동합니다.
하나 재이의 장난기 섞인 알림도 남천휘의 표정을 풀지 못했다.
“아, 강소성에서는 조용히 지내려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