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진품명품(珍品名品).
83, 진품명품(珍品名品).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군가 와서 목을 축였다.
한데 그가 두어 번 물을 뜨는 사이 그보다 많은 핏물이 샘에 흘러들었다.
“헉헉.”
사내는 옆구리에 대고 있던 손을 확인한 후 미간을 좁혔다. 고약으로 막아놨던 상처에서 피가 샘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하아! 씨, 아주 구멍을 내놨네.”
하나 사내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부스럭-
몸을 움직일 때마다 품안에서 느껴지는 소리.
“이것만 있으면 이깟 거지같은 강호도 안녕이다.”
부스럭-
사내는 겁 먹은 토끼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린 듯했다.
이미 추적자들과는 반 각 이상의 거리를 벌렸거늘.
하지만 예상은 틀렸다.
“거지같은 강호를 떠나는 방법이야 무궁무진하지.”
사내는 숲속에서 들려온 무료한 목소리에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목소리만 들어봐도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고수였다.
“누, 누구요?”
“무복을 보아하니 보경문의 문도로구나.”
의문의 존재는 자신의 할 말만 이어갔다.
사내는 다급히 외쳤다.
“강소성 서부에서 보경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 그러니 보경문을 건드린 자들의 최후를 모르지 않겠구려.”
툭-
어둠 속에서 공이 굴러왔다.
사내는 달빛 아래 드러난 공의 정체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눈가의 흉터와 욕심 많은 눈매만 봐도 보경문주가 틀림없다.
“크흑.”
사내는 문주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등을 보였다.
하나 그 순간 등에서 후끈한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아.”
사내는 자신의 가슴을 비집고 튀어나온 검 끝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인 자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축 늘어졌다.
촤악!
늘어졌던 줄이 팽팽해지는 순간 검이 빠져나왔다.
투검을 한 자는 평범한 노문사였다.
무덤덤하던 그의 표정이 죽은 사내의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는 순간 탐욕으로 물들었다.
“크큭! 만병보도가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구나.”
그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묻어날 만큼 낡았기에 사소한 행동 마저 조심스러웠다.
“재질과 묵향으로 보아 수백 년은 족히 숨겨져 있었던 것 같군.”
그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도를 찾았을 뿐 보물을 얻은 건 아니지 않은가.
자신 앞에 죽어 있는 이름 모를 보경문도 또한 방심했기에 흔적을 남겼을 터였다.
‘내가 본 것만 해도 수백 명이고, 이름을 알 만한 자들도 스무 명은 넘을 게야. 꼬리를 잡히거나, 포위당하는 순간 끝이다.’
노문사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연못을 노려봤다.
보경문도의 피가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흐른다는 뜻이리라. 그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다가 숲을 헤집고 나아갔다.
그렇게 십여 장 정도 갔을 때였다.
제법 넓은 실개천이 산 아래를 향했다.
“후훗, 천운이 내게 있구나.”
그는 비싼 가죽신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실개천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나 노문사의 천운은 기껏 해야 일각 짜리에 불과했다.
“크큭! 정말 왔네.”
“내가 뭐라고 했소? 결국은 대가리 좀 굴릴 줄 아는 놈이 얻을 것이라고 했잖아. 그러면 피 냄새를 지우려고 물길을 따라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
“잘했다. 막내야.”
시시덕거리는 세 명의 사내.
하나 웃고 떠드는 것과 달리 눈빛만은 서늘했다.
“황산삼우로군.”
노문사의 말에 황산삼우의 대형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쪽은 삼투선사겠지.”
네 명은 서로를 경계하며 기세를 가다듬었다.
만만치 않은 대치가 이어졌다.
황산삼우(黃山三友)는 안휘성 황산에 터를 잡은 정사지간의 낭인들이다. 낭인이라고 해서 무시할 실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안휘성의 패주인 남궁세가를 지척에 두고도 오랫동안 활동했을 만큼 강했다.
그렇다고 삼투선사(三投先士) 또한 무명으로는 뒤지지 않았다. 투검(投劍)의 고수로 세 번 던지면 뭐든 죽일 수 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너희 셋으로 나를 잡으려는 겐가? 어이가 없군.”
황산삼우의 대형이 어깨를 으쓱였다.
“삼투선사의 위명을 모르지 않소. 한데 이곳에 기검자와 백병살귀, 구곡마도까지 나타났다고 하더군. 선사와 비슷하거나, 조금이나마 윗줄일 게요.”
“흥! 사마외도의 조무래기들이 감히 누구를 넘봐?”
하나 삼투선사는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대형은 틈을 노려 협상을 제시했다.
“우리가 선사를 이기지 못해도 조금이나마 상처를 입히거나, 시간을 끌 수 있소. 그렇게 되면 선사도 멀리 가지 못할 게요.”
“흥!”
“좋게 생각합시다. 우리와 함께 이곳을 떠나 보물을 절반으로 나눈다면 훨씬 더 이득이지 않겠소?”
삼투선사는 침음을 흘리며 장고에 빠졌다.
한데 그 순간 그의 소매가 펄럭이더니 한 자루 검이 비조처럼 튀어나왔다.
푹!
황산삼우의 막내가 눈을 부릅뜬 채 목을 움켜쥐었다. 하나 동전만한 구멍에서 시뻘건 피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이 새끼!”
삼투선사는 조소를 머금었다.
“보물은 자식과도 나누는 게 아니라 했다.”
“놈! 네 놈의 멱을 따 막내의 넋을 위로하겠다!”
세 명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살기를 드러낸 채 맞부딪쳤다.
채채챙!
*
풀벌레마저 입을 막고 주변을 살필 만큼 고요했다.
이름 모를 야산은 어느덧 피 냄새가 가득했고, 보이지 않는 살기가 번뜩였다. 이미 시체만 수십 구였고, 죽은 자보다 몇 배나 많은 자들이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보도를 지녔을 누군가를 찾아서.
한데 지옥도가 펼쳐진 야산과 어울리지 않게 여유로운 자들이 있었다.
조손지간으로 보이는 노인과 소녀였다.
하나 눈썰미가 좋은 자들은 두 사람을 보고 경계의 빛을 숨길 수 없으리라.
은사(銀絲)를 섞어 만든 청의무복은 밤에도 빛이 났다. 또한 검집에는 은으로 새긴 소검(小劍)이 도드라졌다. 창천의 패주, 검중제일가, 또는 천하제일가로 불리는 남궁세가의 상징이었다.
“으스스하네요.”
소녀는 오한이 이는 듯 양어깨를 감쌌다.
“귀기가 감돌기 때문일 게다.”
노인의 말에 소녀는 몸을 더욱 웅크렸다.
“진짜 귀신이라도 있는 거예요?”
“살아 있으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아귀가 되었으니 귀신과 다를 바가 없지.”
소녀는 눈을 빛냈다.
“살아 있는 자라면 두렵지 않아요. 특히 탐욕스러운 악인이라면 더더욱 그렇고요.”
노인은 기세등등한 소녀를 만류하는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자세다. 본가는 오대세가의 수장이며, 검으로 천하제일을 논한다. 그러니 본가의 검을 쥔 자라면 응당 제마멸사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할아버지께 배운 무예의 십분지 일만 사용해도 두려울 것이 없어요.”
“허허, 녀석. 그건 아부고.”
두 사람의 말투는 여유로웠다.
하나 눈빛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본래 노인은 소녀의 강호행을 보조하기 위해 따라나섰다. 지난 이 년 간 하남성 무림맹의 논검대회를 구경하기도 했고, 호북의 무당과 제갈세가를 찾아 무와 문의 극을 엿보기도 했다. 또한 산동성의 용봉쟁투를 보며 응원을 하고, 박수를 쳤다.
그 와중에 수많은 산적과 비적을 징치했다.
그 결과 소녀는 혈해화(血解華)라는 별호를 얻었다.
별호만 들어도 소녀의 성향과 행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누군가는 아리따운 여인과 어울리지 않는 별호라며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으리라.
하나 노인은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 키워냈으면 가주도 숨겨둔 술을 꺼내 와야 할 것이야.’
명주를 그리며 귀가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남궁세가의 근거지인 합비를 코앞에 두고 방향을 돌렸다.
작은 마을에 들어서자 피 냄새가 가득했다.
객잔에서 수십 명이 칼부림을 했단다.
죽은 자만 십여 명이 넘었고, 다친 자도 수십 명은 족히 되었다.
혈사였다.
강호가 아무리 평화로워도 개개인의 다툼마저 없지는 않았다. 한데 백주대낮에, 그것도 양민들을 대상으로 혈겁이 일어난 게다.
노인은 무림맹의 지부에서 나온 무인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근래에 강소성의 경계를 따라 알려지지 않은 보도(寶圖)가 떠돈다는 게다. 그리고 그걸 찾기 위해 수많은 무인들이 몰려왔고, 매일같이 다툼이 끊이지 않았단다.
강호의 다툼에 있어서 미인과 보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결국 노인은 혈사를 끝내기 위해 기꺼이 강소성에 발을 들인 게다.
그랬던 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세 구의 시신이 산로에 널브러져 있었다.
“흐음, 황산삼우로구나.”
“황산삼우라면 본가에서 일부러 풀어놓은 외거무인들이잖아요. 그런데 황산에 있어야 할 자들이 왜 여기에······.”
소녀는 말끝을 흐렸다.
황산삼우의 진짜 신분은 남궁세가의 방계 가솔이었다. 그들은 외부에 기거하는 무인으로서 황산을 비롯한 합비의 경계에서 방어를 담당했다. 황산을 떠날 수 없는 이들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불을 보듯 뻔했다.
보도를 얻고자 함이다.
“쯧쯧, 방계의 슬픔을 어찌 모를까. 하나 타개책을 보도로 삼은 건 실수였어.”
“결국 본가도 이번 혈겁의 관련자가 되었네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그런데 비가 오려나? 먹구름이 사라지지를 않는 구나. 보도가 등장하면서 암운이 드리워졌으니 이 또한 혈겁을 예고하는 거겠지.”
노인은 산 정상으로 방향을 잡았다.
희미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봐! 이 길은 혈운방이 맡았다. 내려가라.”
“클클, 옆의 계집은 두고 가.”
“중요한 임무다. 계집은 일 끝내고 기루에서나 찾아.”
십여 명 남짓한 무인들이 노소를 앞에 두고 잡담을 나눴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촤라라라라락!
노인이 검을 쥐고, 뽑는 과정이 물 흐르듯 연계됐다. 검은 마치 자철처럼 손바닥에 붙은 채 회전을 했고, 두 바퀴를 도는 순간 십여 개의 검기가 번뜩였다.
그리고 열 구의 시체가 남았을 뿐이다.
“가자.”
소녀는 검의 손잡이를 쥐락펴락 하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자신이 나서서 처리하고 싶었지만, 노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부터 굳어 있었다.
‘화가 나셨어.’
그러니 오늘 이 야산에 새로이 이름이 붙으리라.
아귀산으로.
노소가 지나간 길은 시산혈해를 방불케 했다.
그리고 정상 즈음에 이르러 마침내 노인을 알아보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검!”
“이검이다. 이검이 왔어.”
“빌어먹을! 보물을 코앞에 두고 이검이라니.”
수십 명의 무인들이 주춤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장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무인 중 이검(二劍)이라는 별호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노인은 쌍검을 쓰지 않는다.
그저 두 번째 검이라 칭할 뿐이다.
남궁세가의 두 번째 검, 이것은 노인이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었다.
하나 모든 이가 알고 있을 터였다.
노인이 가주인 맏이를 배려하여 스스로 두 번째를 자청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릉-
검이 뽑혔다.
강호에서 오대 명검을 손꼽을 때마다 거론되는 천영검(天影劍)이다. ‘하늘의 그림자’를 뜻하니 이검과 어울리는 검명이다.
무인들은 보검을 앞에 두고 욕심을 낼 수 없었다. 그저 눈치를 보며 목적을 이루고자 할 뿐이다.
‘흐음.’
그것이 노인을 언짢게 했다.
도대체 어떤 보도이기에 자신을 보고도 머뭇거린단 말인가.
그는 슬쩍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더 짙어진 듯했다.
촤악!
일검을 내지르는 순간 마치 하늘에서 거대한 검이 내리꽂힌 것처럼 전방의 대지가 움푹 주저앉았다.
“보도를 지닌 자가 누구인가?”
그러자 누군가 비아냥거렸다.
“흥! 이검도 다를 바가 없군.”
검광이 번뜩였고, 머리통이 허공을 날았다.
“본가의 대의명분이 무엇이더냐?”
소녀가 대꾸했다.
“제마멸사입니다.”
“저들은 사마외도냐?”
“수많은 시신을 만들어낸 살귀요, 탐욕에 눈이 먼 아귀입니다. 그러니 사마외도입니다.”
누군가 변명을 하듯 입을 열었다.
“우, 우리는 정파요.”
이검은 혀를 찼다.
“쯧, 지금은 아니다. 한 때 정파였지. 그렇기에 너희들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게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보도를 지닌 자가 누구냐?”
쩡-
일갈이 터져 나오는 순간 성취가 낮은 자들은 귀를 부여잡고 물러섰다.
길이 열렸고, 그 끝에 있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카락은 피에 젖어 산발을 했고, 백의는 피로 인해 혈의가 된 지 오래였다. 일견하기에도 수십 명의 합공을 이겨내지 못한 듯했다.
노인은 그를 보고 침음을 내뱉었다.
“흑열섬마. 네 놈이 살아 있었던가?”
흑열섬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크흑, 이검이라니. 하늘이 나를 버린 겐가?”
노인은 살기를 드러냈다.
“하늘은 이미 백 년 전 너희를 버렸다!”
동시에 천영검이 버드나무처럼 휘어지는 검기를 발출하며 흑열섬마의 머리를 터트렸다.
그는 흑열섬마의 품에서 낡은 두루마리를 꺼냈다.
이미 수많은 주인을 거친 듯 두루마리는 피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이것을 원하는 자라면 남궁세가로 오라! 남궁재야가 상대해주겠노라.”
이검 남궁재야의 외침에 무인들은 길을 비켜설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멀어지는 남궁재야를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할아버지. 확인하지 않으셔도 되요?”
소녀는 두루마리의 내용이 궁금한 듯했다.
하나 남궁재야는 어느 때보다 침중한 표정으로 바삐 걸음을 옮길 뿐이다.
“보지 않아도 된다.”
“네?”
“이십 년 전 죽음을 가장한 채 은거한 놈이 다시 튀어나올 이유는 오직 하나다.”
“그게 뭔데요?”
“흑열섬마는 사령신의 광신도다. 누군가 사령신의 유물을 뿌린 듯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