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전설의 고향. (2)
소용녀는 격려라고 여겼는지 대수롭지 않게 바라봤다.
- 철중철은 강중강이고, 연중연이라.
철 중의 철은 강한 가운데 더욱 강하고, 연한 가운데 더욱 연하다는 뜻이다. 선문답처럼 여겨졌던 말이 낙야묵철을 대하는 풀이가 됐다.
“마치 낙야묵철을 뜻하는 듯하군요.”
한데 소용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시상이라도 떠오르신 건가요?”
남천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철신께서 남기신 구절입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육중한 체구의 소용녀가 천장에 닿을 것처럼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철신지언!”
그녀는 철신의 말이라는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더니 한참동안 상념에 잠긴 채 깨어나지 않았다. 간간히 눈썹을 꿈틀거리는 것으로 보아 작은 실마리를 잡고 해답을 찾아 헤매는 듯했다.
“으음.”
남천휘는 슬쩍 소용녀의 뒤로 돌아갔다.
그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낙야묵철을 다루느라 피폐해진 상태였다. 그러니 적선단과 벽선단으로 원기를 보하면 머리가 맑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혈인도가 뜨려나?’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널찍한 등판에서 껍질이 벗겨지듯 혈인도가 떠올랐다.
남천휘는 손이 닿지 않을 만큼 근접한 상태에서 적선단과 벽선단을 주입했다.
“흐음, 으으. 아.”
걸걸한 침음과 탄성이 몇 번이나 오갔을 때였다.
쾅!
저 소리를 정녕 자기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쳐서 만들어냈단 말인가.
“백룡암! 흑린곡!”
생소한 지명이다.
하나 소용녀는 대단한 기연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기억이 나요. 어린 시절 무진철원주의 방에서 놀 때 읽었던 책의 구절이었어요.”
소 소저는 지혜와 용력을 동시에 갖춘 재원이었구려. 다만 용력 쪽에 아주 많이 치우친 듯하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왔거든요.”
“누구?”
“불의 동반자! 철의 지배자! 청염진군.”
남천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과 소용녀의 정보에서 교차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자세히 설명을 해주세요.”
“청염진군이 양강지기의 대성을 이뤘을 때 바위가 녹고, 땅이 갈라졌데요.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바위의 형상은 용을 닮았고, 협곡의 구조는 기린을 닮았다는 말이 있었어요. 양강지기의 극한에 이르렀을 때 때마침 폭우가 쏟아졌고, 절묘하게 음양의 조화를 이뤄 흑린곡에 숨겨져 있던 낙야묵철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전설 같은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 때 청염진군이 낙야묵철을 다루며 남긴 말이 있지요.”
“설마 제가 아까 했던?”
소용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고민을 털어냈기 때문일까.
그녀의 얼굴은 불에 익은 것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아니요. 낙야묵철은 고향을 등지고서야 제 빛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이렇게 말했지요.”
남천휘의 눈동자에도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강철의 고향’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유선관은 중간 경유지일 뿐 목적지는 흑린곡인 게다.
“하면 철신께서 남기신 말은?”
소용녀는 짐을 꾸리며 말했다.
“그 분께서는 청염진군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낙야묵철을 다루셨어요. 그 분이 철중철, 강중강, 연중연을 논하신 후 청염진군의 뜻과 같다고 감탄하셨지요.”
결국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야 백룡암(白龍巖)과 흑린곡(黑麟谷)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너도 퀘스트 짜느라 많이 힘들었겠다.’
◎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지요.
점점 목소리가 간드러진다.
이러다 녀석이 여자 형체로 나타나지 않을까 우려가 될 정도였다.
‘우려인가?’
◎ 모든 것은 주인님의 뜻대로.
남천휘가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손사래를 치는 사이 소용녀가 제 덩치만한 짐을 짊어진 채 나섰다.
“갑시다!”
“지금요?”
“그럼 안 갑니까? 전설의 고향으로 가야지요!”
남천휘는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소용녀가 히죽 웃으며 말을 건넸다.
“흑린곡이라니까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아요?”
남천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귀신보다 더한 녀석이 옆에 있답니다.’
그는 소용녀에게 반 각의 시간을 얻어낸 후 황급히 황 노대의 객잔으로 돌아왔다.
“제비는 어떤가요?”
연하연의 객방 앞을 지키던 성시는 이제 제비라는 호칭이 익숙해진 듯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그저 자고 있어. 아마 많이 힘들었을 거야. 반 년 가까이 등을 대고 누워본 적이 없을 테니까.”
“흐음, 그렇군요.”
남천휘는 엄지와 검지를 낫 모양으로 편 후 꼼지락거렸다. 연하연을 두고 멀리 떠나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기에 특기 ‘추노’로 활성화되는 낙인을 찍고 싶었다.
제비 말고 성시에게.
그렇다면 미연시의 탐지와 더불어 양 쪽으로 그녀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 낙인은 적을 쫓을 때만 활성화됐다.
결국 아쉬움을 담아 말을 건넸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찌됐든 성시는 연하연의 집안 오라비였기에 최소한의 대우를 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녀오게.”
성시 또한 남천휘를 믿어줬다.
끼익-
일 갑자가 넘는 내공을 지녔어도 녹슨 문이 열릴 때의 소음은 숨길 수가 없더라.
남천휘는 조심스럽게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연하연이 무심한 표정을 한 채 누워 있었다. 잠을 자는 것도 같고, 기절한 것도 같은 묘한 상태였다.
남천휘는 연하연의 눈썹 사이를 검지로 꾹 눌렀다.
그제야 주름진 미간이 펴지며 백옥같은 피부를 드러냈다.
‘적선단. 벽선단. 적선단. 벽선단.’
몇 개나 주입했을까?
상관 없다.
연하연이 조금이나마 웃었으니까.
“홍택호 쪽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그 순간 연하연이 화답을 하듯 침음을 흘렸다.
“으음.”
잠투정을 본 듯하여 머쓱했다.
“금방 올 게요. 강남 갔던 제비가 피슝 하고 돌아온 것처럼 말이야!”
아!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다.
재이의 비웃음이 육합전성처럼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한 환청을 떨쳐낼 수 없었다.
‘뭐? 뭐? 질투 하냐?’
적반하장 전법으로 응수했다.
고금의 진리가 아니던가.
똥 싼 놈이 최고였다.
*
고대의 미녀 중 서시를 모르는 이가 없으리라.
배가 아파서 눈을 찡그리고 다녔더니 그 모습까지 저자의 여인네들이 따라했다는 일화로 유명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효빈(效顰)이다.
일원에서 산동성을 맡은 수석, 정화루주는 입꼬리를 올렸다. 호사가들이 보면 비웃음마저 아름답다고 찬양을 할 만큼 염기가 가득했다.
“두 번째네.”
남천휘가 봤다면 미연시 판독기로 미녀의 가부(可否)를 정해줬으리라.
하나 정화루주의 맞은편에 앉은 이는 상대의 비아냥거림에 반응하듯 고리눈을 떴다.
“나도 좋아서 앉아 있는 게 아니야.”
봉황곡의 장로인 백타선자는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냈다. 정화루주는 백타선자의 내력이 담긴 눈빛을 가볍게 흘렸다.
“아니, 만남이야 어떤 식으로든 이뤄지는 법이지. 길을 가다 만날 수도 있고, 외도로 인한 방사 중에도 가능해. 왜 만났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어?”
백타선자는 의아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하나 정화루주의 뒤이은 말을 듣는 순간 눈썹이 역팔자로 치솟았다.
“뭐라?”
“맞잖아. 당신이 내게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까.”
백타선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날 연하연을 잡기 위해 산동성에 난입했던 일이 있지 않은가. 본래 강호방파의 일은 내부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나 봉황곡은 강호칠대금문이 아니던가.
산동성의 삼정이 중원의 명문정파보다 약하다고 해도 명색이 무림맹에 속했다. 그러니 제아무리 봉황곡이라고 해도 제멋대로 날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크흠.”
결국 백타선자는 산동수석의 힘을 빌렸다.
그녀가 신공부와 청도문의 암묵적인 동의를 끌어냈고, 봉황곡은 산동성 남부에서 연하연을 잡기 위해 포위망을 펼칠 수 있었다.
정화루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도 빠져라?”
“내 뜻이 아니야.”
“내 앞에 있는 건 당신이지.”
“나 또한 봉황곡의 반도를 내버려두고 물러나야 했다. 네 야욕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어. 그러니 할 말이 있으면 강소수석에게 직접 하도록.”
백타선자의 날 서린 한 마디에 정화루주의 눈매는 더욱 표독스럽게 변했다.
“흥! 강호칠대금문이라고 콧대가 높더니 말이나 전하는 개가 되었군.”
“뭐라? 지금 네 년이 일원을 탓하는 것이더냐?”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한 번 목소리를 높이자, 두 사람은 당장 출수할 것처럼 살기를 드러냈다.
그 때 허락 없이 문이 열렸다.
봉황곡의 수하도, 정화루의 기녀도 아니었다.
봉도곡에서 백타선자를 부추기고, 청도문에서 남천휘를 지켜봤던 복면인이 나타났다.
그는 강소수석의 전령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황곡의 백타선자도, 정화루의 루주도 입에 자물쇠를 채운 것처럼 침묵했다.
상하관계가 명백하게 드러났다.
“안녕하셨습니까.”
백타선자는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에게는 고개만 까딱거리더니 정화루주에게는 포권을 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네. 홍택.”
강소성에는 두 개의 큰 호수가 존재했다.
북의 홍택호와 남의 태호였다.
복면인이 강소성의 북부를 책임졌기에 홍택(洪澤)이라 불리는 게다.
“만사는 일원 아래 진행됩니다. 이의 없으시지요?”
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타선자는 강소수석의 좋은 동반자입니다. 그렇기에 사문의 반도를 코앞에서 놓아주는 치욕을 감내했지요. 정화루주는 산동의 수석으로 정보를 관장합니다. 그것을 통해 신공부와 청도문을 좌지우지했고, 이제 황보세가에도 끈을 댔지요. 맞습니까?”
“핵심만 말하게.”
정화루주는 명분 타령에 짜증이 난 듯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강소수석은 대변자에 불과합니다. 이번 일의 결정은 저 위에서 내려왔어요.”
홍택의 말에 정화루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석의 윗줄이라면 무림맹에 있는 백결공이 아닌가. 그녀의 눈동자가 한순간 봄바람에 휘말린 것처럼 몽롱해졌다.
“신공부가 봉문하고, 청도문이 멸문했다. 그렇기에 나는 황보세가를 검으로 삼아 산동성을 움직이려 했어. 이제 내게 남은 말이라고는 황보세가뿐이다. 한데 공께서 정녕 내게 물러나라 하셨단 말인가?”
홍택은 복면을 풀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의 미소가 뒤이었다.
“공께서 각 성의 수석에게 부여한 임무가 무엇이오?”
“고인 물이 되어버린 강호를 뒤흔들어 바닥에 가라앉은 흙과 모래를 일으키라 했다. 흙탕물이 된 강호는 난세의 시발점이 되어 변화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습니다. 한데 당금 산동 강호의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정화루주는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강호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지만, 정파의 세상이 된 이후 유례가 없을 만큼 평온했다. 특히 강호의 명문인 황보세가와 유가의 성지인 신공부, 그리고 돈줄을 쥔 청도문은 절묘한 균형을 이루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다른 성보다 조용했고, 고정됐으며, 나약했다. 한데 그랬던 산동 강호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더라.
남천휘였다.
그가 등장한 이후 수십 년 간 고착화되었던 삼정은 줄줄이 몰락했다. 무인들은 이제 창고에 넣어뒀던 병장기를 꺼냈고, 은자나 헤아리던 문파들은 숫자 싸움이 아닌 영역 싸움을 시작했다.
“공께서 말씀하신 미꾸라지는 내가 아니라 남천휘였구나.”
홍택은 고개를 내저었다.
“미꾸라지가 되라고 한 적은 없으시지요. 그저 미꾸라지가 살 수 있는 흙탕물을 만들라 했잖습니까. 수석께서는 훌륭하게 산동성을 흔들었어요.”
정화루주의 얼굴에서 고집과 분노가 사그라졌다.
“그렇군. 잘 되었어. 잘 되었구나.”
백타선자가 손을 모았다.
“축하하오. 루주. 내가 알기로 강북에서 산동만큼 변화가 큰 지역은 없었소.”
“후우.”
정화루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봉황곡의 반도는 잡아야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요. 예전처럼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지만, 정보라면 기꺼이 건네주리다.”
“강소 강호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홍택은 두 여인의 담소를 들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습니다. 일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 비교하면 작금의 강호는 천양지차요. 이렇게 일원의 의지가 만천하에 퍼진다면 혁명도 꿈이 아니외다.”
그렇다.
반역이 아니라 혁명이다.
썩어빠진 강호를 예전으로 되돌리는 대업은 꿈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정화루주는 진심으로 웃었다.
“생각만으로도 좋군.”
일원의 의지가 강호 전체에 퍼진다면 구파오가 또한 의미를 잃게 될 터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강호에서는 누구나 일원 아래 평등하리라.
짝!
홍택이 박수를 쳤다.
“이제 남천휘와 같은 미꾸라지는 잊고, 대업에 동참하시지요.”
“내가 할 일이 있는가?”
“강소수석께서 봉황곡과 더불어 큰 일을 준비 중입니다. 산동수석께서 하오문의 힘을 좀 빌려주셔야겠어요.”
그제야 멀뚱히 앉아 있던 백타선자의 표정도 폈다.
“그 일이라면 산동수석의 힘이 절대적이지.”
“고작 해야 기녀의 입담일 뿐인데요.”
홍택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입담을 빌려주셔야겠습니다. 보물찾기는 많은 사람이 함께 할수록 즐겁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