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2.0 (3)
*
남천휘는 황보황이 말머리를 돌리자마자 정문에서 내려왔다. 적이 코앞에 있음에도 개의치 않는 모습에 혈검신의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범하기가 호랑이와 다르지 않군.’
하나 남천휘로서는 지형도를 통해 적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도 좋지만, 남위기는 포대화상의 주머니 같군.’
남천휘가 황보황을 상대로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것 또한 남위기의 힘이었다.
남위기에 황보황을 검색하는 순간 수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그것을 통해 황보황의 성향을 파악했다.
‘나서기보다 암중에서 조율하는 것을 즐겨하고, 자신의 눈에 미치지 않는 분야에 대한 불안감을 지녔다지.’
이제 황보황은 야음을 틈타 기습을 통한 살인멸구를 노리거나, 무림맹을 끌어들여 땅 따먹기에 열중하려 할 터였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을까 싶다.
남천휘가 청도문의 영역을 다스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챙길 것을 챙긴 후 조용히 떠나면 되는 것이다. 누가 이곳을 차지하든 빈껍데기만 차지하게 될 터였다.
‘그렇다고 성소를 빼앗기는 것도 아니니.’
신공부의 주인이 새로 정해졌음에도 신공부에 대한 유지 자격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천휘는 그림자처럼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혈검살의를 뒤로 한 채 내원으로 향했다. 연하연이 깨어날 때까지 시스템의 변화를 파악할 계획이었다.
하나 그는 내원에 들어서자마자 멈춰야 했다.
연하연이 비틀거리며 처소를 나선 까닭이다.
그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말했다.
“혈검살의가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네요.”
거듭 말하지만 사실 나는 혈검살의가 아니다.
그러던 중 연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천휘를 살폈다. 잠시 후 그녀의 두 눈은 커다랗게 변했고, 별을 넣어놓은 듯한 눈동자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남 의원님!”
지겹겠지만, 사실 나는 의원도 아니다.
남천휘는 황보황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진심이 묻어나오는 미소를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연 소저.”
연하연의 창백하던 안색이 홍조로 인해 살짝 달아올랐다. 잠시 후 슬쩍 시선을 맞춘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는 순간 짧다면 짧고, 길게 보면 길었던 공백이 한순간에 채워지는 듯했다.
“은공을 뵙습니다. 무탈하셨는지요?”
크흠, 오랜만에 외쳐보자.
이 몸이 바로 은공(恩公) 남천휘시다.
“좋아요. 지난 번 초옥에 남겨놓은 표식을 보았습니다. 색다른 인연이었으니 언제고 다시 만날 것이라 예상했어요. 한데 생각보다 빨랐군요.”
연하연은 조금 더 얼굴을 붉혔다.
색다른 인연이라는 말에 묘한 감정을 느낀 게다.
“은공께서 저를 다시 한 번 살려주셨나요?”
성시가 슬쩍 끼어들어 저간의 사정을 알려줬다.
연하연은 설명을 듣는 내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은공의 은혜가 깊고도, 넓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군요.”
“언제고 제가 위험해졌을 때 구해주세요. 구명은 구명으로. 쉽지요?”
남천휘의 말에 연하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멀찍이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성시는 수염을 매만지며 탄성을 흘렸다.
‘저 아이가 저렇게도 웃을 수 있구나. 그러고 보면 남 소협의 이야기를 할 때만 웃었던가?’
연하연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은공께서는 무슨 일이든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저 같은 것이 어찌······.”
그녀의 눈동자가 한순간 확장됐다.
남천휘가 대뜸 그녀의 손을 맞잡았기 때문이다.
“됩니다.”
연하연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하나 손을 빼내는 대신 시선을 돌릴 뿐이다.
‘먹히네!’
남천휘는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연하연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다시 미연시가 발동했고, 첫 선택지가 주어졌다.
하나는 손을 잡고 위로를 하는 선택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독이 남았으니 침소에서 확인을 하자고 이끄는 것이다.
상처와 흙먼지로 인해 까칠한 손이 느껴졌다.
하지만 따뜻했다.
일순이 지나는 순간 알림이 울렸다.
◎ 백봉 연하연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 호감도 상승과 더불어 하트가 주어집니다.
- 자수정 1000개와 회회회판 무료 구매권이 지급됐습니다.
오홍! 하트다. 하트.
남천휘는 연하연의 이름 옆에 하트가 그려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이름 : 연하연(♡)
호감 : 91
지위 : 무소속.
미모 : 갑(甲)
몸매 : 갑(甲)
하트 다섯 개를 모으면 진정한 사랑이 시작된다니 벌써부터 이마가 간질거렸다. 게다가 미혼약에 중독되지 않았음에도 호감도가 91을 찍지 않았던가.
‘그녀라면······.’
남천휘는 숫자 3을 헤아릴 만큼 짧은 순간에 연하연과 손을 잡고 강호에 나선 후 사마외도를 척살하니, 연인끼리 익힐 수 있는 원앙검법을 창시하기도 했으며, 어느덧 전대의 은거기인을 월하노인으로 삼아 혼인도 했고, 자신을 닮은 아들과 그녀를 닮은 딸이 깔깔거리며 들판을 뛰어놀 때 황혼을 맞이한 노부부처럼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서서히 눈을 감는 먼 미래를 그렸다.
“은공? 은공? 은공!”
연하연의 연이은 부름에 남천휘는 탄성을 내뱉었다.
“손 좀.”
망상에 빠진 사이 몸에 힘들어간 듯했다.
남천휘가 손을 놓자, 잠시 연하연의 손이 허공을 맴돈다.
“몸은 어때요?”
“날아갈 것 같으면 좋겠지만, 조금 힘드네요. 오랫동안 쫓겼으니까요.”
“내가 늦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연하연은 갈 곳을 잃었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또래의 소녀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놀랐어요. 저는 영락없이 혈검신의가 온 줄 알았어요. 한데 은공께서 그 자리에 나타나시다니! 마치 천신이 은공을 제게 인도해준 것 같아요.”
뭐, 천신하고 아예 연관이 없지는 않지.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인연······.”
연하연은 말끝을 흐렸다.
감정에 북받치다보니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해버린 게다.
남천휘는 그녀가 난처하지 않도록 빙긋 웃었다.
“인연은 인연이지요.”
하나 연하연의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빨갛게 변했다.
‘제비에게 이런 면도 있었네.’
목석같던 그녀의 여린 면모를 본 듯하여 입가의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개똥이와는 다름 매력이······.’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연하연의 어깨가 축 늘어지더니 그대로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이런 똥멍청이!’
남천휘는 연하연을 부축하며 자책했다.
그녀는 이제 겨우 깨어난 상태였다.
운기조식을 통해 심신의 조화를 추구해야 했다.
한데 남천휘와 정담을 나누다보니 열기가 치솟은 게다.
《백봉 연하연이 혈기를 주체하지 못합니다.》
-> 냉기로 화기를 억누른다.
-> 이제라도 우주의 염원이 담긴 음양합일을······.
선택지가 채 끝나기도 전에 결정을 했다.
‘음양합일은 개뿔! 무적자가 아니라 무림공적을 만들 셈이냐? 닥치고 도움이 될 장소나 보여줘.’
남천휘는 청도문의 모든 것을 장악한 유지가 아니던가. 재이는 이내 구조도를 띄운 후 근처의 연못을 보여줬다. 살얼음이 낀 연못이라면 충분히 화기를 가라앉힐 수 있으리라.
남천휘는 연하연을 안은 채 연못에 뛰어들었다.
첨벙!
“호법을 서줘!”
남녀 간의 예법을 따질 겨를이 없다.
남천휘는 온몸이 젖었음에도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연못의 냉기로 인해 후끈하던 몸이 한순간에 얼어붙는 듯했다. 물론 냉기 저항을 충분히 올렸기에 느낌만 있었을 뿐이다.
반면 연하연은 달랐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정순한 내력을 운용하여 냉기를 몰아냈으리라. 하나 혼미한 상태에서는 냉기의 침습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으으으.”
연하연은 혼미니 스스로 내력을 운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물에 빠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그것은 남천휘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과 같았다. 늘씬하다고 여겼거늘 품에 들어오니 아기 새와 다를 바가 없더라.
“크흠.”
남천휘는 사심을 접고, 재빨리 혈인도를 띄웠다.
연하연의 혈도를 점하는 순간 그녀의 몸이 나무처럼 뻣뻣해졌다. 그녀의 상체가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혈검신의들은 헛기침을 했다. 가뜩이나 얇은 침의만 걸쳤던 연하연이 아니던가.
물에 젖은 이상 체형이 고스란히 비쳤다.
성시가 동료들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보지 마! 눈 돌려! 눈깔아!”
남천휘는 혈검신의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정신을 집중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이상 잠시나마 열기가 잦아들었다.
하나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결과에 불과했다.
잠시 눌러놨던 화기가 예상보다 뿌리를 깊이 내렸다.
‘젠장! 조금 전의 혈인도는 멀쩡했는데.’
남천휘는 자책했다.
연하연이 자신을 만난 후 얼마나 큰 감정의 변화를 겪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독기를 다 빼낸 상태에서 화기가 치솟았으니······.’
청도문에 처음 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양호했다.
남천휘는 적선단과 벽선단을 통해 연하연의 원기를 북돋았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에서 홍조가 사라졌고, 다시금 창백해졌다.
병약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에게는 이게 정상이다.
‘후우.’
남천휘의 추운 물속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연하연을 일으켜세웠다.
성시가 이미 솜이 든 비단을 들고 대기 중이다.
“침상에 눕히세요. 창문은 반쯤 열고요.”
“괜찮겠나?”
“이번에 깨어나면 스스로 운기조식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남천휘의 손을 떠난 연하연은 추위를 느끼는 듯 몸을 더욱 웅크렸다. 성시가 황급히 비단으로 그녀를 감싼 후 침소로 향했다.
‘한 시름 놨군.’
이제 재이를 다그쳐봐야겠다.
이 놈의 자식이 익숙했던 시스템을 어찌 바꿔놨는지 말이다.
*
남천휘는 한적한 곳에 이르러서야 재이를 찾았다.
“지금까지 쌓인 알림을 한 번에 띄워봐.”
수십 개의 알림이 쌓였다.
가장 위의 것부터 하나씩 확인했다.
많은 것이 없어지고, 많은 것이 나타났다.
‘레벨만 못 보는 줄 알았는데······.’
두 번째 보는 새로운 상태창은 여전히 낯설었다.
《남천휘》
- 소속 : 청도문(보유 지역 : 6)
- 별호 : 철귀유협
- 등급 : 161
- VIP : 4등급(잔여 점수 : 1080)
- 성소 포인트 : 112000
이것만 봐도 변화가 상당했다.
소속은 유지가 발동되는 지역의 개수가 포함됐고, 호칭은 사라졌다. 아무래도 별호와 겹치는 부분이 많고, 남천휘가 개의치 않다보니 저절로 삭제된 듯했다.
여기까지는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 상태창의 하단부를 보는 순간 한 숨이 절로 나왔다. 마치 다른 시스템의 상태창을 보는 것처럼 당황스럽기만 했다.
‘능력 수치까지 사라졌을 줄이야.’
근력과 체력, 민첩과 지혜, 그리고 내공 수치가 몽땅 사라졌다.
그 자리를 다른 것이 대신했다.
- 생명력, 내공력, 공격력, 방어력.
바보가 봐도 남천휘의 상태를 알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인 표기였다.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불편해도 익숙한 것이 좋은 사람도 있지 않던가.
◎ 시스템 중심에서 사용자 중심으로 업데이트가 진행되었습니다. 혁신은 고정되지 않은 것에서 시작되고, 변화는 익숙함의 탈피에서 비롯됩니다.
한 마디로 남천휘를 위한 변화였다.
남천휘는 어색하게 웃었다.
‘감동적이기는 한데 이렇게까지 해줘도 되는 거야?’
고금을 통틀어 전해지는 영웅담 중 하늘의 도움이 없었던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도와주기도 참 힘든데 말이야.’
◎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는 오직 주인님을 위해서는 준비된 레벨 업 시스템입니다.
주인이라니까 한 가지만 묻자.
남천휘는 지금껏 외면해왔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너는 신이 보낸 건가?’
재이가 침묵했다.
평소의 녀석이었다면 이리저리 대답을 회피하거나, 다른 소리를 했을 터였다.
그렇기에 녀석의 침묵이 더욱 불편했다.
잠시 후 기계적인 한 마디가 들려왔다.
◎ 제 이름은 ‘제이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