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79화 (179/305)

80, 2.0 (2)

그 순간 청도문의 정문 위로 한 사내가 등장했다.

예상대로 남천휘였다.

“야! 이게 누구신가?”

황보장천의 입매는 남천휘를 보는 순간부터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탄탄대로였던 자신의 삶이 비틀린 건 모두 저놈의 탓이다.

“네 놈이 왜 여기에 있는 거냐?”

남천휘는 자신을 가리켰다.

“그걸 네가 왜 궁금해 하지?”

황보장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의 남천휘는 마치 정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복색이 화려했다. 게다가 곱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은 바람이 불 때마다 간간이 살랑였다.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하나 팔짱은 낀 채 오연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모양새에서 강건함이 엿보였다.

‘크흑! 또 네 놈이.’

반면 황보장천의 옷차림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십 회가 넘는 혈투를 거쳤으니 온 몸에 흙먼지와 핏물이 가득했다.

물론 새 옷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물이 끓지도 않았는데 고기를 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도 새 옷을 입고 올 걸.’

남천휘는 점령을 한 장수 같았고, 황보장천은 패잔병 같았다.

그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 때 남천휘가 말을 덧붙였다.

“그보다 용봉쟁투의 우승자를 봤으면 사 위가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조롱 섞인 한 마디에 울화가 치미는 것은 당연했다.

다행히 숙부 황보황이 황보장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진정해라. 우리의 목표는 청도문주야.”

황보장천은 심호흡을 한 후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외쳤다.

“혈무단을 퍼트려 강호를 어지럽힌 청도문주는 당장 나오라! 일문의 문주가 겁쟁이처럼 애송이 뒤에 숨어서 뭐하는 것인가? 지금 당장 나와 무릎을 꿇고, 무림맹의 심판을 받으라!”

은근슬쩍 무림맹의 이름도 끼워 넣었다.

이제 청도문주가 등장한다면 수하들을 동원해 포박할 생각이다. 여차하면 숨을 끊어놓고 청도문을 먹어치우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나 청도문은 고요했다.

남천휘는 물끄러미 황보장천을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내던졌다.

푹!

땅에 꽂힌 검의 손잡이가 흔들린다.

먼저 알아본 쪽은 황보황이다.

“엇! 이것은 초운강의 독문병기.”

반쯤 드러난 검신은 재생이 불가능할 만큼 손상된 상태였다. 일견하기에도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아무리 봐도 진품이 맞다.

물론 진짜였다.

‘청도문의 성소를 먹지 못했으면 제 시간에 가져올 수 없었을 거야.’

남천휘는 황보세가와의 거리를 재면서 쉴 새 없이 협곡에 다녀왔던 순간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반면 황보장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침음을 내뱉었다.

“설마?”

남천휘가 입을 열었다.

황보장천보다 뜨겁고, 강렬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청도문은 전임 신공부주와 함께 산동 강호를 농락했다. 암중에 흑도 세력을 거느린 채 수많은 이권에 개입했고, 양민을 괴롭혔으며, 강호의 신성이 되어야 할 후기지수를 핍박했어. 거기에 더불어 홍문회와 정칠문, 공가방, 적수비회를 비롯한 열여섯 중소 방파를 통해 혈무단을 퍼트렸다. 게다가 사문의 일에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깨고, 봉황곡과 손을 잡았다. 무림맹이 공표하길 강호칠대금문과 손을 잡는 행위는 사마외도가 되는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니 태산의 영기와 동해의 정기를 받은 말학후배로서 협의를 위해 나서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나는 스스로!”

촤랑!

남천휘가 양 손을 뻗는 순간 두 자루의 직도가 잡혔다. 비록 수련용 직도였지만, 천하도나 제일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를 통해 퍼져나가는 맹렬한 기세로 인해 황보장천이 타고 있던 말이 콧김을 뿜었다.

“도를 쥐고 제마멸사를 다짐했다. 이제 청도문주는 죽었고, 청도문은 해산했으니 태산 동부 또한 동해의 정기를 받아 옛 기운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곡부남가의 삼남이자, 용봉쟁투의 일 위로 등극한 철귀유협의 이름으로 돕겠다!”

◎ 유려한 언변으로 인해 수백 명이 동요합니다.

- 특기 ‘변설’을 승급합니다.

- 사기꾼의 고유 특기인 ‘???’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쓸데없이 알림을 늘리지 마.

감정도 넣지 말고!

어찌됐든 남천휘의 명분은 황보장천의 명분보다 몇 배는 넓고, 깊다.

황보세가의 가솔들이야 침묵했지만, 속가의 무인들이 동요하기에는 충분했다.

황보황은 미간을 좁혔다.

남천휘는 수백 명을 앞에 두고도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장판파에서 만인지적을 자랑했던 연인 장비를 연상케 했다.

‘명분만 빼앗긴 것이 아니다. 기세까지 밀렸어.’

그는 황보장천의 등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산만한 덩치를 부르르 떨고 있으니 멀리서도 보일 상황이다.

‘저 놈이 용봉쟁투에 이어 이번에도 장천의 앞길을 막는구나.’

이미 황보장천은 강호에 이름을 알렸어야 했다. 화려하게 등장한 후 명가의 후예들과 어울려야 했다. 한데 이번에도 황보장천은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나를 아는가?”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황은 남천휘의 무례한 모습에 인상을 썼으나,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초운강이 정말 죽었는가?”

이번에도 대답 대신 끄덕임이 전부였다.

“저 새끼가!”

황보황은 황보장천을 제지한 후 말을 건넸다.

“청도문의 문도들은 어디로 갔는가?”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취조하는 것 같지만, 동도로서 대답해주지요. 봉도곡에 가면 진실을 알게 될 거요.”

이번만은 황보세가와 속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쌍심지를 켜고 노려봤다. 강호에는 배분이 있고, 정파는 그것을 더욱 중시했다.

한데 황보황은 명백히 남천휘보다 배분이 높지 않은가. 그러니 저들이 무례를 명분으로 삼아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잠깐! 성급하게 나서지 마라. 봉도곡이 어디인가? 처음 듣는 곳이군.”

“이십 리 쯤 남서쪽으로 가면 대나무 통 같은 구조의 협곡이 있을 거요. 청도문을 봉인했다고 해서 봉도곡이지.”

무인들은 미간을 좁혔다.

그 말인즉슨 남천휘가 협곡의 이름을 지었다는 뜻이 아닌가.

황보황은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수하를 향해 턱짓을 했다. 떠난 수하가 돌아온다면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그 때까지 대치가 이어질 것이라 여겼다.

하나 남천휘는 그리 녹록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깃발을 한 손에 쥔 채 외쳤다.

“물러가라! 이곳은 곡부남가의 영역이다.”

“여기가 왜 네 땅이냐?”

황보장천은 시뻘게진 얼굴로 반박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다.

문파의 영역을 넓힌다는 건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힘이나 뒷배만으로 가능하지도 않았다. 여러 방파의 이권과 토착 세력까지 얽혔기에 수많은 조율을 필요로 했다.

“청도문주가 인정했다.”

거짓말이다.

“설마 협의는 핑계였고, 청도문을 노린 거였냐?”

저건 진짜였다.

하나 남천휘는 표정 변화 없이 황보황을 내려다봤다.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지. 설마 협의는 핑계였고, 청도문을 노린 거였냐?”

황보황은 인상을 썼다.

오히려 주변의 무인들이 살기를 드러낸 채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대답해 보시지. 청도문이 운영했던 흑도 방파는 당시 황보세가의 권법을 익혀 신공부의 소부주였던 공태령을 살해하려 했다. 하여 나는 신공부의 이름으로 황보세가에 협조를 요청했지. 이런 상황일수록 힘을 합쳐 정파의 기상을 보여줘야 한다고. 한데 황보세가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무대응으로 일관했지. 그러더니 꼬투리를 하나 잡고, 몰래 청도문을 접수하러 온 건가? 야밤에 뼈다귀를 노리는 개새끼처럼?”

사방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하나 황보황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숙부! 저 새끼가 미쳤나 봅니다. 저런 개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줄 생각입니까?”

황보장천은 울분을 토하다가 미간을 좁혔다.

“혹시 저 말이 사실입니까?”

“흐음.”

황보황은 침묵했고, 그것은 곧 수긍을 뜻했다.

‘이처럼 본가를 몰아붙이다니. 정녕 끝을 보자는 건가? 철귀유협이 저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뛸 이유가 없는데.’

그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여겼다.

남천휘의 구공에 휘둘렸다가 패가망신한 자가 어디 한둘이던가. 오늘 청도문주까지 이름을 올렸으니 산동성 내에서 손해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뭔가 꿍꿍이가 더 있을 텐데.’

그는 남천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하지만 그도 몰랐으리라.

수백 명을 대동하고도 남천휘를 상대로 섣불리 공세를 취하지 못한 이유를 말이다.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단순히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었다. 개가 겁을 먹을수록 짓는 것과 다르지 않을 터였다.

“숙부!”

황보장천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때에 맞춰 봉도곡으로 보냈던 수하가 돌아왔다. 황보황은 수하의 표정만 보고도 남천휘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직감했다.

‘홀로 청도문을 무너트렸다는 건가?’

그 때 수하가 다가와 귀엣말을 했다.

“뭐라고?”

“확실합니다. 자상을 보면 검을 쓰는 자가 있었습니다. 깊이와 상처의 흔적을 보면 방조자는 한 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황보황의 눈빛이 찰나간 번뜩였다.

이제야 남천휘가 숨겨둔 한 수를 엿본 듯했다.

그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고인이 있음을 모르지 않소! 더 이상 숨지 말고 모습을 보이시오!”

그 순간 광소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육합전성과 같은 고명한 수법은 아니었다.

그저 세 명이 짜 맞춘 것처럼 웃어재끼면서 벌어진 상황에 불과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담장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오른쪽부터 한 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혈검신의가!”

“모든 것을 지켜봤다!”

“철귀유협의 협행은 하늘을 우러러 거슬리는 것이 없다!”

성시를 비롯한 두 명의 혈검신의는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천휘가 정인을 만나러 가는 복장이라면 그들은 숫제 경극에라도 나가는 배우처럼 화려했다. 지금껏 훌륭하게 연기를 해온 남천휘마저 한순간 시손을 돌릴 정도였다.

‘설마 분칠까지 할 줄이야.’

어찌됐든 저들은 청도문의 재화를 나눠준 값을 톡톡히 했다.

‘자! 이쯤 됐으면 알아서 물러갈 때가 됐지.’

남천휘의 예상대로였다.

황보황의 눈빛은 처음보다 안정되어 있었다.

남천휘의 숨겨둔 한 수를 찾아냈다는 기쁨에 화가 누그러졌다. 한 마디로 남천휘는 규격 외의 존재가 아니라 파악할 수 있는 존재라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끝을 필요도 없으리라.

‘증인까지 있으니 더 뻗대고 있어봤자 모양새만 빠지겠군.’

혈검신의의 겉모습은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다.

하나 산동남부와 강소성 일대에서 혈검신의의 무명은 생각보다 높았다. 무인보다 양민들에게 더더욱 유명했다. 사실상 강호인이 하늘을 날고, 산을 쪼개봤자 목숨을 살려주는 쪽에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심지어 무인들조차 혈검신의를 적대할 수 없었다.

누구나 칼에 맞고, 내상을 입을 수 있으니.

“돌아가자.”

황보장천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돌아가자고요? 정상이 코앞이란 말입니다!”

황보황은 미간을 좁혔다.

“한 사람만 오를 수 있는 정상에 먼저 발을 들인 자가 있다. 떨어트려야만 네게도 기회가 오지. 한데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다. 그래도 밀 수 있겠느냐?”

“저쪽은 고작 셋이란 말입니다.”

“저들 중 한 명이 도망치면 어쩔 것이냐?”

황보장천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황보황은 짜증 섞인 어투로 말을 덧붙였다.

“청도문주가 죽은 이상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야.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림맹을 개입시킨 후 태산 인근의 땅덩어리를 얻어먹는 수준일 게다.”

황보장천은 미련이 남는 듯 아쉬운 소리를 했다.

“숙부!”

그 순간 황보황은 이를 갈았다.

“적당히 해라. 네 숙부가 아니라 권무당의 당주로서 하는 말이다. 황보세가가 신공부와 곡부남가, 그리고 저 놈까지 한 번에 묻어버릴 것이 아니라면 물러나야 해. 이건 끝났어. 오늘은 우리가 진 거다.”

황보장천은 산만한 덩치를 웅크린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황보황은 굳은 표정으로 남천휘를 향해 손을 모았다.

“철귀유협의 협행으로 인해 산동 강호가 더욱 평안해졌소이다. 산동인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를 표하오.”

“뭐 그러실 것까지야.”

남천휘의 시큰둥한 대꾸에 다시 한 번 소요가 일었다. 하나 황보황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돌아가자!”

돌아선 그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았다.

‘오늘은 졌지만, 내일은 아닐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