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78화 (178/305)

80, 2.0

80, 2.0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타인을 의식하기보다 자신의 본성에 충실한 이들이다. 만약 자유를 넘어 방종에 이른다면 사마외도 취급을 받기 십상이리라.

하나 정과 사, 그 중간쯤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혈검살의(血劍殺醫).

이들의 검법은 멋들어지고, 화려했다.

심지어 의술조차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장치로 사용했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최고의 의원일지언정 그 과정에서 휘둘리는 자들은 아주 죽을 맛이다.

하나 제 기분만 위하는 자가 휘둘리는 자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다. 아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알고 있지만, 개의치 않을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신이었으니.

‘이걸 참 뭐라고 해야 하는 건지······.’

혈검살의 성시는 입맛을 다셨다.

당해보니까 알겠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지켜만 봐야 한다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말이다. 심지어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뜰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연하연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호기심 때문이라도 남천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차라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이렇게 몸이 달지는 않았을 텐데.’

청도문에 온 남천휘는 눈을 부릅뜬 채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됐든 연하연을 살리기 위해서는 영약을 찾아야 했다.

한데 남천휘는 청도문주의 처소 앞에 위치한 작은 정자를 발견한 후 금은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허겁지겁 달려갔다. 심지어 정인처럼 애지중지하던 연하연까지 대청에 내려놓은 후였다.

그러더니 성소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정자 앞에 섰다. 그 후에는 기둥에 손을 댄 채 주문을 읊조리듯 웅얼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미친 줄 알았다.

한데 숫자를 오십 정도 헤아렸을 때였다.

갑자기 광오한 한 마디를 외치더라.

정확하게 “청도문은 이제 내 것!”이라고 했다.

미친놈 같았다.

그 후의 행동은 더욱 파격적이다.

그는 연하연을 안고, 청도문주의 침소에 난입했다.

그리고는 화려한 침상에 연하연을 눕히고, 벽을 건드려 비밀창고를 개방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자신이 만났던 자는 가짜였고, 눈앞의 남천휘가 진짜 청도문주는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였다.

‘개코인가?’

성시는 몇 번이나 비밀창고에 대한 것을 질문하려 했다.

하나 남천휘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심지어 말을 붙일 여유도 없을 만큼 빨랐다.

그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드나들만한 창고에서 수십 개의 약병을 꺼냈다. 약병의 겉면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한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약병의 내용물을 섞는 것이 아닌가.

‘독인지 해독제인지 어찌 알고?’

그 순간 친우의 대화가 들려왔다.

“야, 저 놈이 청도문주야?”

“나이로 보면 청도문주가 숨겨둔 아들일지도.”

성시는 고개를 내저었다.

남천휘가 청도문주와 좋은 관계였다면 그처럼 잔인하게 죽일 수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왜?

성시의 의문은 남천휘가 연하연에게 모종의 약을 먹이는 순간 끊겼다. 놈이 연하연에게 입을 맞춘 채 약을 먹이는 것이 아닌가.

제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야!”

성시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고자 했다.

하나 두 걸음 이상을 떼지 않았다.

연하연의 머리와 어깨 사이로 보이는 남천휘의 눈빛 때문이다.

조금의 음심도 찾을 수 없는 맑고, 투명한 눈빛.

지금 이대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성스러운 치료현장을 더럽히는 듯했다. 그가 주춤거리는 사이 남천휘는 내력까지 주입한 후 연하연을 침상에 눕혔다.

“후.”

잠시 후 남천휘가 처소 밖에 나타났다.

이미 청도문은 그들이 등장하는 순간 텅 비어버렸다. 그러니 연하연을 홀로 둔다고 해서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게다.

성시가 거리를 좁혔다.

그 때 남천휘가 선수를 치듯 말했다.

“얘기 좀 하지.”

“어, 그래.”

짧은 혀가 슬쩍 거슬렸다.

하지만 저 또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니 마냥 자신과 동류인 듯했다.

두 사람은 남천휘가 부여잡고 환호성을 지르던 정자에 마주앉았다.

“제대로 인사하지. 성시다. 하연이와는 선대로부터 인연이 있었어. 피만 섞이지 않았을 뿐 남매나 다름 없지.”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하게 알게 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안도감이 밀려왔다.

“남천휘, 곡부남가. 제비, 아니 연 소저와는 오래 전 봉황곡에 처음 쫓길 때 알게 되었지.”

성시는 손바닥을 내리쳤다.

“역시! 자네가 하연이를 구해줬다는 그 의원이었어. 직접 눈으로 보니 의술이 대단하더군. 도법은 더욱 대단했고.”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명예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철귀유협을 모른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 때 정자 근처에서 엿듣고 있던 또 다른 혈검살의 중 한 명이 탄성을 흘렸다.

“철귀유협! 당신이 진짜 철귀유협이란 말인가?”

남천휘는 그제야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맞아.”

성시는 동료에게 철귀유협의 행적을 전해듣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는 혈검살의의 이름을 파는 강호초출이라 여겼다. 한데 듣자하니 여럿의 혈검살의가 쌓아온 명성보다 훨씬 더 유명한 자가 아닌가.

게다가 불과 반 년 만에 쌓은 명성이라니 호승심이 절로 사라졌다.

‘이 정도의 사내라면 하연이가 빠질만도 하지.’

그는 조금 더 공손하게 물었다.

“자네는 청도문에 익숙한 듯해. 조금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고 말이야. 연유를 설명해줄 수 있나?”

남천휘는 곤란한 듯 침음을 흘렸다.

‘하긴 누가 보면 신내림을 받은 미친놈처럼 보였겠군.’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는 청도문에 도착하자마자 성소를 찾았다.

이미 청도문주가 죽고, 문도들은 흩어진 상황이 아니던가. 예상대로 성소는 공백지였고, 유지 자격을 획득하기 위한 제한 시간이 등록됐다.

하나 남천휘는 VIP 포인트를 소모하여 시간을 단축했고, 한순간에 청도문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 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특기 유지가 발동되는 순간 청도문의 건물과 비품에 대한 목록이 나타났다. 그러니 숨겨둔 창고를 찾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리고 약재와 영약의 배합은 남위기로 검색을 했다.

‘그러고 보면 시스템도 강호와 똑같군.’

강호는 정보를 얻기 힘든 세상이다.

그러니 강호인들은 개방이나 하오문에 거금을 주고 정보를 사야 했다. 하나 돈만 준다고 모든 정보를 얻을 수도 없지 않은가.

반면 남위기는 제한이 없다.

다만 정보가 너무 많아서 선별하는 과정이 필요할 뿐이다. 한 마디로 VIP 포인트만 있다면 무림맹주의 속옷 색깔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자동으로 비밀 보장까지 되니 하오문이나 개방보다 낫지 않은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비밀 보장이 최고였다.

“협의.”

남천휘의 한 마디에 성시는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녀석도 놀란 듯했다.

◎ 특기 ‘변설’이 발동했습니다.

- 조만간 변설 특기의 레벨이 오를 듯하군요.

야! 이거 비아냥거리는 거 맞지?

남천휘는 속내를 숨긴 채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청도문주의 악행은 오늘내일의 일이 아닙니다. 신공부의 일을 처리하던 중 청도문주와의 밀월 관계를 의심하게 되었지요. 하여 은밀하게 조사를 좀 했습니다. 이번에 우연!히 연 소저를 만나게 된 것도 그런 과정 때문이었지요.”

성시는 탄성을 흘렸다.

“아! 대의를 쫓으니 협의가 뒤따르더라. 이 구절이 생각나는군. 자네로 인해 나까지 생명을 구했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

그는 사실 공명정대한 위인은 아니다.

다만 지금처럼 말하는 것이 더 멋있을 듯하여 내뱉은 말에 불과했다.

“연 소저의 오라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은혜랄 것도 없지요.”

남천휘도 사실 성시가 그리 편치 않다.

다만 연하연과 남매와 같다니 대우를 할 뿐이다.

‘기왕 금칠을 할 거면 내가 하는 것보다 남이 하는 게 낫지.’

한 마디로 연하연이 깨어났을 때를 위한 대비책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

겉으로만 보면 조만간 의형제라도 맺을 기세였다.

잠시 후 혈검살의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이번에도 변설이 발동했다.

우연히 쓰러진 노인을 치료한 후 검법을 선보였더니 사람들이 혈검살의로 착각을 하더라.

성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검살의는 산동 남부와 강소성, 안휘에서 주로 활동했다. 게다가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이다 보니 저마다 혈검살의를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다.

그렇기에 순순히 납득해버렸다.

마지막 남은 오해마저 풀리니 분위기는 더없이 화기애애했다. 이제 연하연만 깨어나면 모두가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출 수도 있을 듯싶다.

띠링-

갑작스레 울린 재이의 알림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 적이 출현했습니다!

그 순간 남천휘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도가 확장됐다. 한데 산동성 동부 전체를 쥐락펴락하던 청도문의 영역이 아니던가.

마치 산동 전도(全圖)가 펼쳐진 듯했다.

북서쪽 경계 끝에 나타난 붉은 점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것들은 또 뭐야?’

남천휘는 지형도 옆에 위치한 십(十)자 표시를 건드렸다. 그러자 지형도가 축소되며 산과 강이 보였고, 두어 번 정도 더 누르자 적들의 숫자가 명확하게 표시됐다.

‘삼백 명은 족히 되겠는 걸?’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산동성 북쪽은 하북성이다.

장성의 경계였고, 군부의 장악한 세상이 아닌가.

그러니 북서쪽에서 접근할 무인이라면 불을 보듯 뻔했다.

‘황보세가가 왜?’

의문은 금세 해소됐다.

‘신공부가 봉문 했으니 청도문을 치고 산동성을 먹겠다는 건가?’

하나 명분이 있어야 할 터였다.

남천휘는 잠시 궁리하다가 남위기에 물었다.

‘홍문회, 쌍부파, 독단.’

그러자 홍문회가 쌍부파에게 혈무단을 팔려다 남천휘에게 몰살당했다는 정보가 떠올랐다. 다시 한 번 혈무단을 검색했다. 그리고 산동성 중부에서 들불처럼 퍼지던 혈무단은 황보세가로 인해 사라졌다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명분까지 있으니 개떼처럼 몰려왔군.’

하나 남천휘는 느긋했다.

저들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한 시진은 지나야 이곳에 도착할 터였다.

‘흐음, 이걸 어떻게 할까?’

잠시 후 계획이 섰다.

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성시에게 말했다.

“청도문의 재물은 주변 양민들에게 나눠줄 생각입니다. 다만 양민들에게 필요 없는 건 저희들끼리 나눠도 좋지 않을까 싶군요.”

성시를 비롯한 혈검살의들은 환히 웃었다.

마치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흑오와 같은 자들이 아닌가. 그러니 영웅협객이나 유자처럼 신외지물이라며 재화를 멀리 할 리 없다.

“그렇지. 병장기나 몇몇 물품은 나눠줘 봤자, 화근이 될 뿐이야.”

남천휘는 히죽 웃었다.

어차피 비밀 창고는 자신의 것이 아니던가.

외부적으로 드러난 재화라고 해봤자 청도문주의 재산 중 십분지 일이나 될까 싶다.

‘좋아. 물건은 대충 정리했고.’

그는 혈검살의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주로 혈검살의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대화였다. 애초에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자들이니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재이의 알림이 이어졌다.

◎ 방어 상태를 주의에서 경계로 격상합니다.

좋아! 시간이 됐다.

남천휘는 흰 천을 꺼내 한 글자를 썼다.

그리고 그것을 장대에 묶어 정문에 걸어놓았다.

‘질풍뇌격궁.’

히든 모드 ‘저격’은 단순히 적을 암습하는 용도 외에도 중요한 기능이 존재했다. 바로 천리경처럼 멀리 있는 적을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남천휘는 질풍뇌격궁을 쥔 채 망루에 올랐다.

‘어.’

한데 뭔가 이상했다.

그는 눈을 끔뻑이다가 질풍뇌격궁에 확인주문서를 사용했다.

《질풍뇌격궁(疾風雷擊弓)》

- 신궁천무자의 독문 병기.(가치:600)

- 무기 등급 : 영웅(英雄)

- 착용 시 특기 ‘원사’와 ‘뇌기’가 활성화.

- 착용 시 공격력 증가 +200.

- 착용 시 내공전달력 +15% 증가.

- 특수 화살 사용 시 공격력 30% 증가.

- 내구도 (76/150)

흐음, 그 사이 내구도가 76까지 떨어졌구나.

조만간 날을 잡아서 숫돌로 갈아놔야겠어.

‘소혜에게는 절대 맡기지 말아야지.’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현실 도피를 하고 싶었지만, 명확하게 보이는 변화를 도외시할 수 없었다.

‘이게 뭐야?’

본래 질풍뇌격궁의 부가 기능은 민첩 수치 +200이 아니던가. 한데 그것이 공격력 증가 +200으로 바뀌었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황망한 와중에 ‘특급강호인승급체계 2.0’에 대한 변화를 세밀하게 살피지 못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퀘스트를 떠올렸다.

1-1과 1-2는 연계됐다.

하나 1과 2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오랜만에 상태창을 소환한 후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상태창, 아니 다른 시스템의 상태창을 보는 듯했다.

‘이건 거의 대격변이잖아.’

*

황보장천은 누구보다 빠르게 말을 몰았다.

청도문이 코앞이다.

질풍처럼 들이닥친 후 불같이 휘몰아친 후에 태산처럼 진중하게 청도문을 장악할 요량이다.

하나 그는 청도문을 눈앞에 두고 고삐를 잡아채야 했다.

“저게 뭐야?”

그는 청도문의 정문에서 휘날리고 있는 흰 깃발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을 비비고 몇 번이나 쳐다봤지만, 남(南)이라는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설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