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76화 (176/305)

79, 남위기(南委記).

79, 남위기(南委記).

불현 듯 지난 며칠간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백파도 남추의 유산인 ‘칠야’와 ‘창월’을 고치기 위하여 유선관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의 철가철방에서 ‘보고 있나! 양 교두.’를 몇 번이나 외치게 만든 소용녀와 조우했다.

그녀는 남추에게 쌍도를 만들어준 철신 철장경의 직계 후손이다. 그녀는 기꺼이 쌍도를 수리하겠다고 나섰다. 하나 기물답게 쌍도는 쉽게 수리할 수 없었고, 낙야묵철이라는 더 진귀한 기물을 필요로 했다.

다행히 환마소혼검법의 열쇠라 할 수 있는 기괴한 항아리 ‘마봉파’의 재질이 낙야묵철이라는 우연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도 낙야묵철을 통짜로 빚은 물건이라더라.

마봉파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소용녀를 뒤로 하고 나선 길이었다.

알림이 미연시 1호의 위험을 알렸다.

백봉 연하연은 봉황곡의 수복에 실패한 이후 빙정지(氷精指)에 중독된 상태가 아닌가.

생사가 간극에 달린 그녀 앞에 마침내······.

‘내가 돌아왔지.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을 왜 하게 된 거지?’

남천휘는 인상을 썼다.

하나 이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잡념을 털어냈다.

이 정도면 먼 훗날 집필될 자신의 대하장편 영웅담 중 팔 권의 도입부로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저 놈들을 어쩌면 좋을까?

남천휘는 여전히 시야 상단에 떠 있는 퀘스트 ‘제비 다리는 내가 고칠 거야!’를 힐끔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협곡 아래 가득한 청도문과 궁지에 몰려 있는 연하연을 번갈아볼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청도문 따위가 우리 제비를 괴롭혔다는 거지.’

남천휘에게 연하연은 특별했다.

산동 강호에서 가장 잘나가는 후기지수가 되었지만, 여인과의 접점이 많지는 않았다. 오히려 후기지수의 위치를 넘어 명숙의 반열에 오른 것을 생각하면 여인과의 접점은 오히려 없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어! 이거 혹시 개똥이가 중간에서 다 끊어 버린 건가?’

하긴 천수련처럼 어여쁜 여인이 옆에서 버티고 있으면 어지간한 미녀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검후의 후손에게 밉보이면 동부에서는 가문의 정통성이 흔들릴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이게 다 개똥이 때문이었군.’

어쩐지 산동강호에 대적할 자가 없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옆구리가 허전하다 했다.

어찌됐든 남천휘에게 여인을 논하자면 개똥이와 제비가 으뜸이리라.

소혜는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범죄의 대상이 되는 듯했고, 무진철원의 감찰단주인 유설옥은 미연시 대상에서 탈락했다.

개구리는 건드리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옆에 두고 지켜볼 거야.

‘양대안, 이 놈!’

그리고 설옥 누님.

다시 한 번 차버려서 미안해요.

그럼 두 여인만 놓고 비교해보자.

미색을 논한다면 개똥이와 제비는 막상막하였다.

물론 체형과 성품을 더하면 제비의 승.

다만 뒷배와 무위를 더하면 개똥이의 승.

물론과 다만의 어감 차이는 서로 모른 척해주자.

하나 개똥이가 제비를 따를 수 없는 유일한 한 가지가 존재했다.

바로 ‘처음’이다.

뭐든 처음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남천휘가 기억하기로 화산의 검신이 협행을 논할 때 거론했다지만, 정확한 건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하여튼 첫 만남, 첫 월봉, 첫 별호, 첫 살인, 첫 여인은 평생 잊히지 않는 법이다. 이상한 것이 끼어있는 것 같지만, 여기는 강호니까 한 번 더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이것저것 다 넘어갔지만.

‘저것들까지 넘어갈 수는 없지.’

청도문에 속한 수백 명의 무인들이 살기를 담아 그를 노려봤다.

하나 남천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력을 집중하는 순간 수백 명의 무인 중 특정인들의 머리 위헤 붉은 표식이 찍혔다.

띵- 띵- 띵- 띵- 띵- 띵- 띵- 띵- 띵- 띵-

후미에서 진형을 조율하는 아홉 명이 용산십기일 것이다. 그리고 일견하기에도 강맹한 기세를 흩뿌리는 자가 바로 청도문주겠지.

그래, 결심했어.

‘놈을 죽인다.’

청도문주를 죽일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하나 백봉을 눈앞에 둔 이상 다른 이유는 곁가지에 불과했다. 어쨌든 남천휘에게 있어서 연하연이란 특별한 존재였다.

강호에서 맺은 첫 인연이었고, 중원급이라 할 수 있는 미녀와 첫 대화였으며, 처음으로 살까지 맞대지 않았던가. 게다가 짧았기에 더더욱 강렬했던 만남은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더했다.

‘어쩌면.’

그녀는 산동강호를 등지고 홀가분하게 천하로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 족쇄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녀의 일만 해결한다면 더 이상 산동 강호에 미련은 없다.

황보세가는 대놓고 야욕을 부릴 만큼 무도하지 않았고, 신공부는 대대적인 정비로 인해 봉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곡부남가는 날이 갈수록 덩치를 부풀렸다. 내버려두면 알아서 굴러가게 만들어놓지 않았던가.

‘그러니 나는 오늘 백봉을 구하고······.’

천하로 나아간다.

아! 명쾌하다.

남천휘는 머리가 맑아진 만큼 호기롭게 움직였다.

그렇다고 해서 수백 명이 기다리고 있는 적진으로 돌진하지는 않았다.

그저 호기롭게 질풍뇌격궁을 꺼냈다.

이곳은 여전히 유선관의 영역이 아니던가.

그리고 남천휘는 자신의 영역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능력을 자랑했다.

‘저격.’

철시를 쥐는 순간 시야가 좁아지며 십장 형태의 조준선이 만들어졌다.

너도 한 방, 너도 한 방.

철시는 공평했다.

최소한 저들에게는 그랬다.

남천휘가 난사하는 순간 십여 개의 철시가 어둠과 동화하여 일직선으로 내리꽂혔다.

핑핑핑핑핑핑핑-

이미 레벨만 따져도 산동 내에서는 적수가 없지 않던가. 게다가 겉으로 보이는 레벨보다 내부의 수치는 더욱 대단했다. 남천휘의 예상으로는 200레벨 이상도 시스템의 힘을 빌리면 해볼만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 화살을 100레벨 전후의 흑도가 막아낼 리 만무했다. 비껴냈다고 해봤자, 주변에 있던 놈이 죽어나자빠질 뿐이다. 그렇기에 열 발을 쐈음에도 쓰러진 건 스무 명에 가까웠다.

불공평하다고?

‘몰랐어? 인생은 고통이야.’

고통을 겪을수록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란 말이다.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보라.

주인공이 기연을 얻을 때 어디 그냥 얻더냐?

고생이란 고생은 죄다 하다가 죽음을 각오하고서야 마주하는 것이 기연이었다. 명가의 후예로 가문의 비전과 재화를 통해 만들어진 고수는 오래가지 못했다.

남천휘가 즐겨 읽던 화산검신록과 창천마신기의 주인공들도 그러했다. 그리고 명가의 후예랍시고 고통 없이 성장한 것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주인공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지. 최소한 자신은 산동 강호 내에서 누구보다 힘들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개똥이한테 물어보라고!

쩝, 말이 길어지니까 변명 같군.

“그러니까 이 새끼들아! 그러라고 익힌 무공이 아닐 텐데! 어찌 수백 명이서 한 사람을 핍박한단 말이더냐. 나 혈검살의는 의로서 사람을 구하나, 오늘 검으로 사람으로 구하겠다!”

그 사이 특기 변설 등급이 오르기라도 한 것일까?

혀에 기름을 칠한 것처럼 매끄럽구나.

청도문도들이 웅성거렸다.

“혈검살의가 궁술에도 조예가 깊을 줄이야.”

“이쯤 되면 만능이 아닌가?”

이제야 놈들이 사람처럼 보이는구나.

조금 전만 해도 용산십기의 깃발 질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갈대 같았거늘.

남천휘는 웅성거림이 극에 달하는 순간 협곡 아래로 몸을 날렸다.

챙!

활을 넣고, 꺼낸 것은 두 자루의 직도다.

왜냐고?

이게 더 멋있을 뿐더러 한 번에 두 놈을 처리할 수 있으니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촤악!

한 방에 두 놈이 쓰러졌고, 네 놈이 뒷걸음질 쳤다.

생각보다 청도문은 약했다.

아니지.

‘내가 강해진 거지.’

이미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의 제 1막을 끝냈고, 2.0으로 업데이트까지 되지 않았던가.

산동에서만은 차고 넘칠 만큼 강했다.

“막아라!”

용산십기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비켜라!

남천휘의 목소리가 아닌 눈으로 말했다.

그리고 양측의 우열은 삽시간에 가려졌다.

퍼퍼퍼퍼퍽!

치고, 때리고, 베고, 밀치는 모든 행위가 동시에 일어났다.

단순히 무공의 우열로 인한 신위가 아니었다.

‘보인다. 느껴진다. 이게 진짜인지는······.’

남천휘는 눈을 빛냈다.

시스템이 업데이트를 시도하기 전부터 상대방의 레벨이 사라졌다. 동시에 그들의 선악을 증명할 레벨의 색 또한 자취를 감췄다. 하나 저들의 악함과 저들의 망설임이 어렴풋이 보이고, 느껴졌다.

그렇기에 적도를 판단할 때마다 손을 썼다.

판단과 처결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다.

이것은 저들보다 한 수나 두어 수 윗줄이었다면 쉽지 않았으리라. 하나 그는 이미 청도문을 ‘따위’라고 결론내릴 만큼 강했다.

“비켜라!”

남천휘는 갈대밭을 휘젓는 것처럼 청도문도들을 쓸어버렸다. 이미 용산십기의 지휘는 빛을 잃었고, 청도문도들은 오합지졸처럼 넋을 놓았다.

강호는 평화로웠고, 평화는 안주하게 만든다.

저들이 상대했던 적은 해적이나 방해가 되는 상단과 표국이었을 터였다. 그게 아니라면 청도문의 이름만으로 밀어버릴 수 있는 중소방파였겠지.

진정한 강자는 그들에게 있어서 천재지변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엇보다 진짜 혈검살의조차 포위망을 구성한 채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던가.

“크흑!”

청도문주의 가면 같던 얼굴이 산산조각 났다.

군부의 장수처럼 오연하던 표정이 위기에 처하는 순간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용평은?”

“아직 입니다.”

수하의 대꾸에 청도문주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는 의문의 사내가 등장하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활을 쏘는 모습과 언행만 봐도 남천휘가 분명했다.

자식을 죽게 만든 원수였다.

하나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

아닌 말로 자식의 시신 위에 세운 청도문이 아니던가. 한데 남천휘로 인해 자식에 이어 청도문까지 박살나게 생겼다.

“크흑! 봉황곡은 뭘 하는 거야.”

청도문이 협곡 안에서 포위망을 구성하는 사이 봉황곡은 협곡의 입구를 막았다.

한데 남천휘가 협곡 위에서 나타나는 바람에 봉황곡의 역할이 붕 떠버렸다. 그러니 그들은 당장이라도 협곡 안으로 들이쳐 남천휘를 협공해야 마땅했다.

“설마!”

도검의 울림과 생사의 비명이 협곡을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황곡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나를 버린 건가?’

신공부가 몰락했으니 남은 건 황보세가다.

하나 납득하기 힘들었다.

백봉은 봉황곡의 주적이다.

그 중에서도 최상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녀를 잡기 위해서는 산동성 동부의 지배력을 필요로 했다. 그렇기에 자신과 손을 잡았을 터였다. 한데 배신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남천휘를 두려워해서?’

그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밖에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저 멀리서 번뜩이던 남천휘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 말인즉슨 자신이 생사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뜻이리라.

“초운강!”

어린놈의 일갈에 분노보다 두려움이 먼저 일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남천휘가 동격, 그 이상임을 인정한 것이다.

터텅!

그 결과가 첫 합에 드러났다.

도기와 검기가 부딪치는 순간 청도문주는 침음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어린놈의 칼질이 이렇게 무겁다니!’

이쯤 되면 남천휘가 특기 ‘변설’을 발휘하여 청도문주의 심기를 어지럽혀도 무방하리라.

하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협곡 안쪽에서 시퍼런 안색으로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연하연을 봤기 때문이다. 빙정지에 당한 줄은 알았지만, 생사가 간극에 달렸을지는 생각지 못했다.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남천휘는 대답 대신 쌍도를 교차하여 내리그었다.

이제 오행군림보와 비천무상도는 마치 한 쌍처럼 자연스럽게 연계됐다.

그 순간 수천의 내력 중 삼분지 일이 거품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쌍도에 휘감긴 채 시퍼렇게 빛났다.

촤아아악!

남천휘는 이미 산동성 밖을 보고 있지 않던가.

그리고 청도문주는 걸림돌이 되기에는 너무 약하고, 낮았다.

“크흑!”

가슴을 십자로 베인 청도문주는 상반신의 뼈가 으스러진 채 절명했다.

남천휘는 죽은 청도문주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협곡 안으로 몸을 날렸다.

“문주!”

누군가의 외침은 청도문도들에게 선택지를 강요했다.

복수, 또는 도주.

제 삼의 선택지는 없다.

그리고 청도문주의 평소 성품을 드러내듯 대부분의 문도들이 등을 보인 채 흩어졌다.

하나 뒤가 없는 자들은 다시 검을 들었다.

“죽여!”

어느 누구 하나 복수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저 저들에게는 살육이 전부였다.

그 때 협곡의 꼭대기에서 두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형제처럼 비슷한 눈빛을 지녔고, 생김새만 다를 뿐 복장이 같았다.

“모두가 소우주를 지녔다.”

“하나 그것의 움직임은 내가 정한다!”

혈검살의 성시가 기다리던 또 다른 혈검살의였다.

하나 그들이 원했던 반응은 없었다.

“뭔가 다 끝난 것 같지 않아?”

“이래서야 일부러 높은 곳에 나타난 보람이 없잖아.”

누가 같은 혈검살의가 아니랄까봐 성격까지 성시와 꼭 닮았다.

“어! 저기 성시가 있어.”

“옆에는 여자인가? 쯧쯧, 또 여난이었군.”

하나 느긋한 대화와 달리 두 사람은 이미 협곡에 내려선 후였다.

“내 친우의 여자라면!”

“그 또한 내 여자! 아, 이건 아닌가?”

채채채채채채챙!

두 사람이 막아서는 순간 마치 철벽이 등장한 듯했다. 십여 명의 청도문도가 피를 뿌리는 사이 저들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다음 단계는 서로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청도문은 완전히 끝났다.

세 번째 혈검살의는 눈앞의 적이 사라지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두 번째 혈검살의는 연하연을 힐끔거리며 관심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우리가 모르는 혈검살의겠지.”

*

남천휘의 눈빛이 심하게 요동쳤다.

‘녹선단이 먹히지 않아.’

회회회판을 통해 얻어낸 것 중 최상품에 속하는 중급 녹선단까지 사용했다.

하나 연하연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했다.

남천휘는 산적해 있는 알림을 빠르게 넘겼다.

그러던 중 VIP 4등급을 개방했을 때 주어지는 남위기(南委記)에서 시선이 멈췄다.

‘남가에게 맡긴 정보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