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75화 (175/305)

78, 청도문은 '따위'였다.

78, 청도문은 '따위'였다.

솥뚜껑만한 주먹이 공간을 찢어발겼다.

영글지 않은 일격이었지만, 적의 얼굴을 뭉개기에 충분했다.

황보장천은 죽은 자의 몸을 밟고 외쳤다.

“너희들의 대장이 죽었다! 모두 칼 버려!”

그러자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목소리로 환호성을 질렀다.

황보장천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황보세가의 승리다!”

적린당이라는 명칭의 흑도 무리는 모두 칼을 던지고, 진흙탕에 머리를 박았다.

세가의 장로인 황보황이 다가와 황보장천을 다독였다.

“고생했다. 사일 째 혈투였다. 힘들지 않더냐?”

빈 말이다.

어차피 싸움은 세가원들이 나섰고, 황보장천은 궁지에 몰린 당주에게 일격을 날린 것이 전부였다.

하나 이걸 해야 했다.

그래야 세간은 황봉장천이 독탄과 관련된 악인들을 처단했다며 칭송할 것이다. 그리고 소문을 퍼트릴 입은 이곳에도 즐비했다.

“이 놈들! 먹고 살기 힘들어도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당장 일 권에 쳐 죽이고 싶지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라. 그리고 한 번만 더 내 눈에 뜨인다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황보장천의 호쾌한 일갈에 살아남은 적린당의 당원들이 개미떼처럼 흩어졌다.

“숙부, 하늘이 돕는 것 같지 않습니까? 며칠 만에 여섯 곳의 흑도 세력을 해산시켰습니다. 하늘이 황보 세가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순탄하게 풀리겠습니까?”

“그렇구나.”

황보황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이번 일은 하늘과 조금도 관련이 없다.

그저 하오문 산동지부장이 제공한 정보로 만들어진 쾌거였다. 그녀는 독탄을 지닌 세력과 근거지를 상세히 알려줬다. 그러니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터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엄청난 것을 요구하겠군. 쯧, 그런 계집과는 길게 얽히면 곤란한데······.’

하나 속내를 드러내서 황보장천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명가의 자제들이란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사는 족속들이 아니던가. 그 역시 젊을 때에는 세상이 자신의 것처럼 여기며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처럼 황보장천도 때가 되면 저절로 철이 들 터였다. 그 때까지 물을 주고, 땅을 다져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다.

“숙부, 황보세가가 이처럼 비상할 수 있는 건 숙부의 조언 때문입니다. 저는 평생 숙부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겁니다.”

소가주가 이렇게 입 안의 혀처럼 굴어주니 적당히 맞장구를 쳐야 할 터였다.

“하하! 지금껏 네 강호행을 막았던 것이 미안할 만큼 훌륭한 여정이었다. 이런 식으로 산동성에 만연한 독탄을 제거한다면 강호사에 네 이름이 새겨질 것이야.”

황보장천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크흠, 이 정도 했으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요?”

삼정의 후계자로 묶여 불렸던 청도문의 초류혁은 죽었고, 신공부의 공태령은 자취를 감췄다. 그러니 당연 으뜸이 되어야 할 것은 황보장천이었다. 한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남천휘가 모든 것을 가로챘다.

즉, 녀석도 번듯한 별호를 원하고 있었다.

황보황은 한심하게 여기는 속내를 숨긴 채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네 이름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곧 좋은 별호가 생기지 않을까 싶구나.”

거짓말이다.

부상을 당해 세가로 돌아가야 할 세가원에게 서찰이라도 들려 보내야겠다. 세가에서 사람과 돈을 풀면 황보장천의 소망은 금세 이뤄지리라.

“그런데 말이다.”

치켜세워주는 건 이쯤이면 족하다.

어찌됐든 눈 먼 칼에 죽는 것만큼 세가를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도 없지 않은가.

“내일부터는 청도문의 영역이야. 놈들을 상대할 때에는 조금 더 신경 쓰거라.”

몸을 사리라는 뜻이다.

황보장천도 청도문을 직접적으로 코앞에 두자, 전처럼 호기를 부리지 못했다.

“크흠, 알겠습니다.”

황보황은 술을 마시러 간 조카를 대신 해 세가원들을 다독였다.

“정리하고, 일찍 쉬자.”

술은 없었다.

다음 날 황보황은 미간을 좁혔다.

벽수방은 청도문의 십이속가 중 한곳이다.

한데 벽수방주를 비롯해 방도들을 무릎 꿇릴 때까지 청도문은 등장하지 않았다.

‘벽수방을 버렸을 리는 없고······.’

그는 기세등등한 황보장천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아마 조카는 자신을 두려워한 청도문이 발을 뺐다고 여기는 듯했다.

‘하나 이쯤 되면 정말 천운이 황보가에 있는 겐가?’

뭐가 됐든 손해 볼 것은 없다.

“뭣들 하는가? 사마외도를 멸절하기 위해 나선 길이 아니더냐? 속도를 낸다!”

그렇게 몇 개의 방파를 더 박살냈다.

황보장천은 산동제일고수라도 되는 양 기고만장했고, 황보황도 슬슬 천운을 믿기 시작했다.

하나 오늘은 아니었다.

그는 열창칠회(裂槍七會)의 현판이 내려오는 것을 보며 표정을 풀지 못했다. 강맹한 창술을 사용하는 일곱 개의 소방파가 모인 곳이 열창칠회다.

그리고 열창칠회는 창읍의 대지주였다.

또한 창읍과 청도문의 근거지인 청도까지는 이틀거리가 아닌가.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한데 청도문은 오지 않았어.’

이쯤 되면 천운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긴 게다.

적대적인 방파에 일이 생겼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터였다. 다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기에 모래를 씹은 것처럼 씁쓸했다.

‘이대로 가도 되나?’

그 때 황보장천이 보무도 당당하게 다가왔다.

“숙부! 가시지요.”

황보장천의 뒤에는 수백 명의 무인들이 도열했다.

황보세가뿐 아니라 속가의 무인들까지 소집된 상태였다.

황보황은 웃었다.

그래, 저들과 함께라면 본래의 청도문도 짓밟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 가자. 백 년 전 산동 강호에는 황보세가만 존재했다. 우리의 것을 찾으러 가자.”

그 순간 수백 명의 환호성이 열창칠회의 경내를 가득 채웠다.

황보황도 기세 좋게 걸음을 내딛었다.

하나 한 가지 의문만은 풀지 못했다.

‘도대체 청도문은 어디에 있는 거야?’

*

여기에 있다.

분지의 입구는 매우 넓었다.

호리병과 같은 구조가 아니라 기다란 대통과 같았다. 그러나 청의를 걸친 오백 명이 뭉쳐 있으니 허락 없이는 쥐새끼 한 마리도 지나치지 못할 듯했다.

“청도문의 위용이 호랑이처럼 대단하군.”

백죽선자는 피를 갈구하듯 입술을 핥았다.

그녀의 곁에 선 장년인은 가볍게 고개만 까딱였다.

“호랑이보다 교룡에 가깝지.”

물질을 하고 산다는 뜻이리라.

하나 백죽선자는 장년인의 혀 짧은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속 안의 말을 그대로 내뱉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청도문주 초운강.

‘한때 신공부주의 수하 정도로 여겼거늘······.’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실제로 마주한 초운강은 묘한 사내였다.

불과 얼마 전 독자를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서 슬픔을 찾기란 요원했다.

‘또한 거친 해적처럼 보이지도 않는군.’

청도문을 가리켜 삼정 중 한 곳이라 칭하지만, 세간의 평은 극과 극이다. 신공부와 황보세가는 전통의 명가로 대우받지만, 청도문은 잔악함으로 유명했다.

태산 동부는 무법천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청도문주는 무법자 중 으뜸이라는 게다.

한데 직접 본 그는 그리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전을 앞둔 전장의 장수, 또는 수많은 사지를 넘나든 노련한 낭인처럼 보였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백죽선자는 백타선자의 전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청도문주와 얽히는 순간 피곤해진다. 괜찮은 사내라고 해서 늘 건드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제가 알아서 합니다.]

백타선자가 전음에 힘을 더했다.

[태후의 행보에 누가 되는 순간······.]

말끝만 흐렸을 뿐 뜻은 전해졌다.

백죽선자는 입을 닫았다.

지금은 백타선자가 그녀보다 강했다.

“언제쯤 돌입할 예정이오?”

“언제든.”

“그럼 지금 합시다.”

초운강이 돌아섰다.

“약속은.”

백타선자가 대꾸했다.

“봉황곡은 약속을 지킨다.”

초운강은 백타선자의 눈빛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을 논하는 눈빛이 아니다.

하나 백타선자의 속내는 달랐다.

‘청도문이 남아있다면 약속은 지켜질 것이야.’

멸문한 방파와 함께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황보세가와 청도문.

봉황곡은 살아남은 쪽과 손을 잡을 것이다.

“돌입하라!”

초운강의 담담한 읊조림이 이내 열 개의 울림으로 퍼졌다. 그리고 열 개의 무리가 협곡 안으로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

혈검살의는 본래 능글맞고, 남의 시선을 즐겼으며,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혈검을 비밀리에 전해졌기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살의를 더더욱 부각시켰다.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해 나쁜 짓도 서슴지 않은 까닭은 그런 성격에서 비롯됐다.

“후우.”

하나 기름을 발라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된지 오래였다. 경국배우를 연상케 하던 하얀 얼굴은 만취한 사람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검이 아니라 두 자루의 연검이 들려 있었다.

지금껏 숨겨왔던 비의를 적도 앞에 드러낸 게다.

그만큼 전황이 불리했다.

“하아, 진짜 사내새끼들이 창피하지 않더냐? 연약한 여자 아이 잡겠다고 몇 명이나 몰려온 게냐?”

이미 혈검살의의 손에 쓰러진 청도문도 해도 세 자리 수에 이를 정도였다.

하나 누구도 혈검살의의 조롱에 발끈하지 않았다.

그저 서서히 포위망을 좁힌 채 혈검살의가 지치기를 기다릴 뿐이다.

‘젠장, 마치 군대 같군.’

혈검살의는 눈동자만 움직여 적을 살폈다.

수백 명의 적 중 그를 상대로 십여 합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나 문제는 배후에서 움직이는 놈들이다.

‘저것들이 용산십기겠지.’

청도문주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용산십기(龍山十奇)는 일신의 무위도 뛰어났지만, 용인술도 남달랐다. 그렇기에 저들은 동료의 주검을 방패막이 삼아 혈검살의의 힘을 소모시키는데 주력했다.

“후우.”

혈검살의는 양 손에서 찰랑거리는 연검을 힐끔 바라봤다. 자모검처럼 두 자루가 모여 하나의 패검이 되는 기형병기였다. 그렇기에 좋은 재질의 철로 만들어졌음에도 내구도가 좋지 않았다.

며칠 동안 이어진 혈전으로 인해 연검의 날은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여차하면 주먹을 써야 할지도······.’

최후의 비기가 남아 있기는 했다.

하나 혈검살의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자신의 뒤에는 연하연이 있다.

한데 그녀는 운기조식을 할 여력조차 없었기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헐떡일 따름이다.

‘골수까지 퍼지면 그들도 치료할 수 없어.’

때마침 연하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는 꿈을 꾸듯 몽롱했다.

“오라버니. 가세요.”

“못 간다.”

“정에 이끌리는 용렬한 사내가 되지 마세요. 천마신의의 유진이 오라버니께 이어진 것 또한 운명입니다. 천하만민을 위해 재주를 쓰세요.”

혈검살의는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알고 있었더냐?”

연하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 들었어요. 그래서 더더욱 무슨 일이 생기면 오라버니를 찾으라 하셨지요. 하나 이렇게 된 이상 저는 짐 밖에 되지 않습니다. 떠나세요.”

혈검살의는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히죽 웃었다.

“그렇다면 천마신의의 유진이 워낙 방대하여 여러 명에게 나뉘었다는 것도 아느냐?”

연하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설로 새겨진 신마대전은 강호사를 통틀어 정파를 배제한 채 벌어진 유일한 천하대전이다.

천마신의(天魔神醫) 역시 신마대전의 중요인물이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괴겁천마의 곁을 지켰던 측근이 아닌가.

“설마 혈검살의가 여러 명이라는 뜻인가요?”

혈검살의는 궁지에 몰렸음에도 여유를 보였다.

“후훗, 그렇지 않다면 불과 몇 년 사이에 강소와 산동에 혈검살의의 명성이 이처럼 퍼질 수 있었겠느냐? 하연아, 나는 너를 살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니 내 친우들도 기꺼이 도울 것이다.”

다만 그들이 제 시간에 맞춰 올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핑-

그 때였다.

잠시의 대치로 인해 만들어진 정적을 산산조각 내는 파공음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쇄애애애액!

밤하늘에 완벽하게 동화된 검은 화살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수백 명 사이에 섞인 누군가의 미간을 관통했다.

콰직!

혈검살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용산십기 중 한 명으로 추정했던 자의 머리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아군?’

그 때 협곡 위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쪽 발을 바위에 올린 채 오연한 눈빛으로 협곡 아래를 내려다봤다. 때마침 불어온 강풍이 사내를 휘감는 순간 피풍의가 터질 것처럼 펄럭였다.

“나 혈검신의가 유운관을 침범한 악적을 징치하러 왔노라!”

쩌렁쩌렁 울리는 일갈.

한데 공교롭게도 사자후에 버금갈 만큼 우렁찬 일갈은 수백 명에게 의아함을 불러일으켰다.

‘유운관은 여기서 하루거리야.’

반면 연하연의 창백한 안색에 한줄기 홍조가 일었다.

“오라버니, 친우가 오셨어요.”

혈검신의는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어, 내 친구 아닌데.”

그렇다.

그는 사실 혈검신의가 아니다.

미연시 1호를 구원하기 위해 천 리길을 달려온 남천휘였다. 그는 성소와 성소 사이를 이동할 때 체력 소모가 없음을 이용하여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대단한 묘수는 아니다.

그저 유운관과 신공부 사이의 최단거리를 띄워놓고 달렸다. 그러다 연하연의 표식이 반짝이는 곳과 가장 가까운 길에서 방향을 틀었을 뿐이다.

그 결과 몇 개의 물약을 사용한 것만으로 불가능한 거리를 주파할 수 있었다.

‘제비야.’

남천휘는 연하연에게 닿았던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어제 만난 것처럼 살가웠다.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한데 아직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알아봤다면 은공이라고 외치면서 달려왔을 터였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던 중에도 재이의 알림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띠링-

띠링-

띠링-

수많은 알림의 최상단부에는 한 줄의 문구가 생성되어 있었다.

《레벨업 시스템 2.0이 완료됐습니다.》

- 회회회판이 재활성화 됩니다.

- 퀘스트 생성이 재활성화 됩니다.

그 밖에 남천휘가 얻은 것, 얻어야 할 것에 대한 정보가 쉼 없이 갱신됐다. 하나 그는 시야 좌측에 생성된 퀘스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비 다리는 내가 고칠 거야!》

- 백봉 연하연은 미연시 대상으로 특급 관리 인물입니다. 그녀의 위기를 구원하고, 그녀의 병을 치료하세요.

- 청도문주 초운강(0/1)

- 용산십기(1/10)

- 빙정지 배출(0/1)

※ 보상은 추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남천휘의 눈매가 비틀렸다.

‘청도문 따위가 우리 제비를 괴롭혔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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