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74화 (174/305)

77, 사실 난 의사가 아니다. (3)

연하연은 혈검살의의 소매를 잡았다.

“아닙니다. 이제 겨우 봉황곡의 추격을 뿌리치고, 산동 남부에 이르렀잖습니까. 한데 태산을 지나 유선관이 있는 기수까지 갈 수 있을까요? 오라버니도 아시다시피 청도문까지 우리를 쫓고 있잖아요.”

혈검살의는 말을 아꼈다.

그는 지친 연하연의 얼굴을 보며 섣불리 독촉을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이번 겨울은 참으로 지독했고, 잔인했을 터였다.

봉황곡의 소곡주에서 하루아침에 도망자가 된 것이 시작이다. 그 후 전대 봉황곡주의 친인들을 만나 봉황곡을 되찾으려 했다. 하나 섣부른 도전은 실패로 끝났고, 이제 홀로 수백 명의 추적을 받는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만약 혈검살의가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면 연하연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봉황곡 어딘가에 버려졌으리라.

“나는 혈검보다 살의라는 별호에 자부심을 가졌다. 살려야 할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살려. 나는 너를 살리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혈검살의는 고개를 내저었다.

“너와 내가 친남매는 아니지만, 너와 나의 어머니는 의자매를 맺으셨다. 장부 부럽지 않은 기개를 자랑하시며 유관장이나 관포의 의기를 본받으셨지. 미안하다. 네가 힘들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연하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을 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피도 많이 뿌렸지.”

혈검살의의 농에 연하연은 힘든 와중에도 입꼬리를 올렸다.

“어쨌든 빈말이 아닙니다. 저는 오래 버틸 수 없어요. 빙정지가 뇌와 심장을 파고들어 죽을 수도 있고, 저를 쫓아온 봉황곡의 무희들에게 죽을 수도 있지요. 그건 피할 수 없어요. 그러니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설마 복수는 아닐 테고?”

“봉황태후는 이미 봉황곡의 모든 것을 틀어쥐었어요. 외부의 세력까지 끌어들였으니 원래의 봉황곡보다 강성해졌습니다. 이제 저 혼자 어찌 해볼 수 있는 곳이 아니게 되었어요.”

“하면?”

연하연은 북쪽을 바라봤다.

“복수를 할 수 없으니 은혜라도 갚으려고요.”

혈검살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도문은 동쪽이고, 봉황곡은 남쪽이다.

북쪽에 뭐가 있기에 은혜를 운운한단 말인가.

연하연은 숨길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 남천휘와의 만남을 알렸다.

“허, 해독을 했다고? 그것들이 쓰는 독이 빙정지만큼은 아니더라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남 가라고 하셨으니 아마 곡부남가 출신이 아닐까 싶어요.”

혈검살의는 어색하게 웃었다.

“모르는 곳이군.”

연하연은 겨울 내내 쫓겨 다녔고, 혈검살의는 강소성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니 남천휘와 곡부남가의 급격한 성장을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혈검살의는 미간을 좁혔다.

지금껏 초췌했던 연하연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드리워져 있었다.

‘설마?’

그는 연하연의 뒷목을 두드렸다.

연하연의 눈동자가 풀리며 풀썩 주저앉았다.

“네 얼굴만 봐도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구나. 내가 살려주마. 그러니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가 네 속마음을 전하거라.”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더 이상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연하연을 어깨에 짊어졌다.

대들보처럼 큰 녀석이 가볍기는 깃털에 버금갔다.

“쯧! 이런 연약한 아이를 꾀어내다니.”

혈검살의는 연하연의 부모를 대신하여 눈을 빛냈다.

파팟-

두 사람이 떠나고, 일각쯤 흘렀을까.

백의를 입은 여인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가장 앞에 선 중년 미부는 남천휘가 천향루에서 만났던 백타선자였다.

그녀는 매혹대가 전멸했음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쯧쯧, 모자란 것들.”

대나무처럼 삐쩍 마른 중년 여인이 곁에 섰다.

“이쯤 되면 매혹대를 운영할 필요가 있을까 싶소. 오히려 봉황곡의 명성을 깎아먹기만 할뿐이잖소.”

그녀 또한 봉황곡의 장로였다.

봉황곡의 새로운 곡주인 봉황태후(鳳凰太后)의 팔장로 중 백죽선자는 호전적인 성정으로 유명했다.

“사자, 어서 갑시다. 그 연놈을 빨리 죽여야겠소.”

“혈검살의는 만만찮은 상대가 아니야. 혹시라도 마주하게 된다면 섣불리 나서지 말게.”

백죽선자는 불만 섞인 표정을 지었으나, 백타선자에게 맞서지 않았다.

봉황태후가 정해준 서열은 절대적이다.

“동쪽에 퍼트려 놓은 매혹대 중 일부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잠시 후 봉황곡의 무희가 다가와 보고했다.

“태산으로 갔군.”

“클클, 어리석게도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꼴입니다.”

백타선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를 남겼다.

“청도문에 연통을 넣어라. 연하연을 잡는 순간 봉황곡은 청도문을 도와 산동을 압박할 것이라고.”

“존명.”

백죽선자가 선봉에 섰다.

“가자! 청도문의 냄새 나는 사내들에게 우리의 먹잇감을 빼앗길 수는 없지 않더냐!”

그녀를 닮은 수하들이 빠르게 내달렸다.

백타선자는 백죽선자와 달리 수하들을 먼저 보낸 후 잠시 공터를 거닐었다.

“왔는가?”

그녀의 읊조림에 어둠이 반응했다.

우거진 수풀이 일렁이더니 흑의를 입은 복면인이 튀어나왔다.

“강소 수석께서 산동 수석과 합류하여 일을 진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원께서 내리신 명인가?”

복면인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청도문보다 황보세가와 발을 맞추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산동수석이 황보세가를 움직였으니 기회를 보아 청도문의 뒤를 잡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백타선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우리는 하나이기에 기꺼이 따르도록 하지.”

복면인이 일원(一元)의 가르침으로 화답했다.

“일원 앞에 모든 것이 평등할 것입니다.”

*

오랜만에 마주한 부호의 삶이었다.

화려한 침상에서 깨어났고, 향긋한 음식으로 배를 채웠고, 질 좋은 비단을 몸에 걸쳤다.

남천휘는 자신의 체질을 직시했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보다 배에 기름을 칠하는 것이 즐겁지 않은가. 오늘도 황 노대가 추천한 유선관의 주변의 명소를 관광하려던 참이다. 한데 낯익은 녀석이 이른 아침부터 남천휘를 불러냈다.

“너로구나.”

철가철방에서 관람비를 받던 시동이다.

“소용녀께서 대협을 찾으십니다.”

녀석은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사무적인 어투를 유지했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상인의 자질을 보이니 막 총관에게 보내면 잘 클 듯싶었다.

하지만 하지 말아야지.

얄미운 놈이니까.

‘상인이 아니라 야장이 되고 싶을 수도 있잖아?’

남천휘는 시동의 야망을 존중하며 말없이 뒤를 따랐다.

철가철방은 그 날 이후 완전히 장사를 접었다.

마치 칠야와 창월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기 위해 억지로 운영했던 것처럼 말이다.

시동과 함께 뒷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황급히 호흡을 조절했다. 피부를 태울 듯한 열기와 자욱한 연기로 인해 헛기침이 날 정도였다.

솨아아아아아-

소용녀가 집개를 물에 넣는 순간 안개는 배가 됐다. 하나 천장의 통로를 개방하는 순간 안개와 열기는 탈출구라도 발견한 듯 휘몰아치며 자취를 감췄다.

“오셨군요.”

그녀는 이틀 전에 보았을 때보다 정중했다.

이거 불안한 걸?

“그 사이 황 노대를 구하고, 객잔가를 정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어쩌다보니.”

소용녀는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대부분의 일은 어쩌다 보니 일어나는 법이지요. 그 안에 인연이 숨어있음을 숨긴 채 아주 은밀하게요.”

이 여자는 조만간 철방을 때려 치고, 서원을 차려야 할 것 같다.

남천휘는 화제를 돌렸다.

“벌써 고쳤습니까?”

그리고

애초에 이쪽 화제가 맞기도 했다.

소용녀는 미소를 지웠다.

“못 고쳤습니다.”

당당한 한 마디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남천휘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소용녀가 장정의 몸통만한 항아리를 가져왔다.

‘아.’

또 물어봐서 미안하지만, 양 교두 보고 있나?

자네를 능가하는 팔뚝이 여기 있어.

백 근은 족히 넘을 항아리를 공깃돌처럼 가져오는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텅!

철이네. 철 항아리야!

남천휘는 신력이나 다름없는 소용녀의 용력(勇力)을 보며 다시 한 번 양 교두를 부르짖어야 했다.

그녀가 내온 항아리에 부러진 칠야와 창월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집개를 이용해서 도를 꺼내는 것으로 보아 특수한 용액이 분명했다.

“칠야와 창월이 흑수에 반응했어요.”

“전문적인 용어는 피해주시고.”

“칠야와 창월이 녹기 시작했어요. 한데 제가 지닌 것을 모두 사용했지만, 붙지 않네요. 처음 말했던 것처럼 낙야묵철이 필요합니다.”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없나요?”

“있어요. 하나 부족합니다.”

지금껏 당당하던 소용녀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난해한 부탁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낙야묵철을 구해야 하는데······.”

남천휘는 잠시 후 이어진 소용녀의 말에 눈만 끔뻑였다.

“무당파가 내가 아는 그 무당이 맞지요? 호북성 북부의 무당산. 장삼봉이 개파한 그 무당산!”

“맞아요. 다른 곳도 있지만, 무당산이 가장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가능성이 있기도 하고요.”

“팔까?”

소용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 철신께서 백파도에게 칠야와 창월을 만들어줬다면 분명 무당파의 도움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인연이 된다면······.”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야말로 백 년 전의 일이었다.

한데 무당파에서 이름만 들어도 기물(奇物)이 분명할 낙야묵철을 내어줄 리 만무했다.

‘업데이트가 끝났으면 딱 퀘스트가 뜰 순간이네.’

남천휘는 입맛을 다셨다.

하나 낙야묵철이 아니면 붙일 수 없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천 리 밖 무당산을 찾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남천휘는 황망한 와중에도 헛웃음을 지었다.

‘퀘스트 없이 제 2막 중원행을 시작하는 건가?’

재이가 옆에 있었다면 분명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을 터였다.

“어쩌시겠어요?”

소용녀는 다급히 물었다.

멀쩡한 칠야와 창월이 있어야 무진철원을 되찾을 수 있다니 저처럼 안달이 났으리라.

“어쩔 수 없지요. 성사 여부는 둘째 치고 직접 맞닥트릴 수밖에 없잖아요.”

남천휘의 말에 소용녀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흥! 나 없는 동안 폭 쉬게 할 수는 없지.

“다녀올 동안 이것 좀 조사해줘요.”

그는 마봉파를 꺼냈다.

소용녀는 마봉파를 보는 순간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색깔도 그렇고, 겉면에 새겨진 악귀만 봐도 그리 호감 가는 물건은 아닐 터였다.

‘철 소저에게도 의외로 여성스러운 면이······.’

남천휘가 피식 웃는 순간 소용녀가 십 년만에 고기를 본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그녀는 마봉파를 들더니 마치 하늘에 봉양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외치는 것이 아닌가.

“낙야묵철이라니!”

응? 이게 그거였어?

소용녀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항아리를 껴안았다.

“그것도 통짜로 된 낙야묵철이야.”

그럼 이제 말 좀 해!

낙야묵철의 같은 무게의 뭐랑 같은 가격인지!

열흘 정도 필요하단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아직도 소용녀의 우렁찬 외침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봉파를 얻은 그녀는 제갈량을 얻은 유비처럼 자신만만해 했다. 원래의 것보다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며 호언장담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망가트리지 말고 제 모습이나 찾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무래도 안 그럴 것 같지만······.’

남천휘는 불현 듯 허기를 느꼈다.

그러고 보면 아침부터 끌려오느라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어느 객잔에 가서 밥을 먹을까?”

남천휘가 눈앞에 펼치진 객잔과 다루를 보며 입맛을 다시던 순간이었다. 지도 외곽에 붉은 점이 나타났다. 그리고 미친 듯이 번쩍이는 것이 아닌가.

‘응?’

처음에는 개똥이인가 싶었다.

검후를 따라 하남으로 가야 할 그녀가 자신을 보고 싶어서 달려올 수도 있지 않은가.

하나 재이의 뒤이은 알림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미연시 1호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강남으로 갔던 제비가 돌아왔다.

◎ 유선관 영역에 대상자와 적대적 관계인 불특정 다수의 적이 진입했습니다.

그것도 엄청 긴 꼬리와 함께.

남천휘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읊조렸다.

‘내가 꼬리는 짧을수록 좋다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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