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사실 난 의사가 아니다. (2)
흑랑회주는 대답 대신 비명을 터트렸다.
“크아아아아!”
남천휘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봤다.
묘했다.
머리 위에 레벨이 보이지 않고, 색깔을 확인할 수 없으면 손을 쓰기 힘들 것이라 여겼다. 하나 재이의 도움이 없어도 악인을 구별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더라.
멀쩡한 사내의 팔이 잘렸다.
겁을 먹은 놈, 어리둥절해하는 놈.
그리고 더욱 살기를 흩뿌리는 놈들이 선명하게 구분됐다.
“죽여!”
흑랑회주의 일갈.
아! 확실히 태산 서부와는 다르다.
곡부 인근의 흑도였다면 벌써 삼분지 이는 등을 보인 채 도망쳤으리라. 한데 이 자들은 피를 보고 오히려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활을 쏠까? 철시가 아깝다.
직도를 꺼낼까? 아깝다.
기껏 의원으로 오해받은 상황이 아닌가.
‘아! 그렇다고 해서 의원이 좋은 건 아니고.’
이 자리에서 쌍도를 꺼내면 철귀유협이 왔다고 청도문 영역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렇다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청도문은 나쁘다.
남천휘는 이미 악인을 그냥 두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다만 우선순위가 있을 뿐이다.
지금은 남추의 쌍도를 수리하고, 유선관의 비밀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렇다고 눈앞에서 날파리가 날아다니는 걸 그냥 두겠다는 건 아니야.”
악귀처럼 인상을 쓴 자가 도기를 뽑아낸 채로 달려들었다.
“놈! 그만 중얼거려라!”
흐음, 마치 재이가 시끄럽다고 타박하는 듯한 걸.
기분이 나쁘니까 깔끔하게 한 방.
남천휘는 흑랑회주의 검을 가볍게 내리쳤다.
팟!
희뿌연 도기가 먼지처럼 흩어진다.
그리고 흑랑회주의 검이 놈의 목을 쳤다.
확실히 검기나 도기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닌 듯했다. 내력을 외부로 유형화하여 위력을 극대화하는 것은 장점이지만, 더 강한 힘을 만나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사그라질 뿐이다. 하수와 싸울 때에는 내력 싸움보다 초식 싸움이 더 귀찮았다.
“죽여!”
“몰아붙여라!”
한데 놈들은 자신보다 강한 자와 싸운 경험이 부족한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처럼 내력으로 밀어붙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더 고맙고요.
푹푹푹푹!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악인들에 대한 감정은 전무했다. 그저 낯선 병기인 검의 편리함에 눈을 뜬 것이다.
‘확실히 격차가 날 때에는 편하군.’
베고, 찌르는 행위야 어떤 병기든 가능할 터였다.
다만 가볍게 뻗는 것만으로 적을 처리할 수 있는 건 검이 가장 우수했다.
‘모든 것이 평균 이상이니 가장 조화롭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검을 만병지왕이라 칭하겠지.
남천휘는 천위검호의 검법을 지켜보다가 얻게 된 특기 ‘검수’를 떠올렸다. 언제고 기회가 되면 제대로 검법을 배워보고 싶었다. 물론 가장 먼저 환마소혼검법을 발동시켜야겠지만 말이다.
“어!”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잡념에 몰두한 사이 대부분의 적이 항거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남천휘가 자신의 강함에 입꼬리를 올릴 때였다.
좌우에 퍼져 있던 흑랑회 중 몇몇이 벽을 따라 이동하더니 직접적으로 황 노대를 노렸다.
그리고 그 경로에 소우주가 있었다.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소우주!”
동시에 몸을 날려봤으나, 삼 장의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는 건 불가능했다. 한데 소우주를 향해 달려들던 적도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풀썩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워낙 갑작스런 죽음에 함께 달려들던 적도들이 멈칫했다.
찰나의 머뭇거림.
그 정도면 충분했다.
촤악!
남천휘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세 명이 동시에 쓰러졌다.
“은공!”
황 노대는 눈을 부릅떴다.
단순히 목숨을 구해준 반응 치고는 너무 격렬했다.
아니나다를까 멀찍이서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흑랑회주가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혈검살의!”
그게 누군데?
남천휘는 소우주를 바라봤다.
이미 그가 소매를 터는 순간 손가락 굵기의 무광정(無光釘)이 튕겨 나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암기의 일종인 무광정은 말 그대로 못이다.
소우주는 ‘너냐?’라는 눈빛에 대답 대신 울상을 지었다. 저 놈도 은근히 공태령과 비슷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황 노대 쪽에서 대답이 나왔다.
“진정 소우주를 쓰신 게요?”
아닌데. 당신 옆에 있는 사람 이름인데요. 그나저나 은공이라면서 이름도 모르는 건 너무 하잖아.
남천휘가 대꾸를 떠올리기 전 흑랑회주가 뒷걸음질 쳤다.
“크흑! 혈검살의라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이제 절반 정도 남은 흑랑회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올 때도 무례하게 등장하더니 갈 때도 무례하게 도망쳤다.
남천휘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황 노대가 양 손을 맞잡았다.
“맙소사! 은공께서 혈검살의일 줄이야. 듣던 것보다 젊어 보여서 미처 생각도 못했소이다. 하긴 고명한 의술과 잔영이 남을 만큼 쾌속한 검법. 게다가 소우주는 분명 혈검살의의 비초가 아닌가. 이 황 모의 눈이 어두워서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무례하다고 탓하지 말아주시구려.”
혈검살의(血劍殺醫)라.
별호만 들으면 피에 절은 미치광이 의원 같지만,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황 노대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경외의 눈빛을 보였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혈검살의라는 자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혈검살의는 평범한 의원이 아니다.
좌도(左道)를 추구하는 의원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불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단다. 게다가 검법까지 고강하여 한 번 칼을 뽑으면 반드시 피를 보는 절정의 고수라더라.
“네! 제가 혈검살의입니다.”
당연하게도 나는 혈검살의가 아니다.
하나 철귀유협임을 밝힐 수 없으니 며칠 정도는 혈검살의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뭐 어때?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나로 인해 협명이 올라가면 그쪽도 반색할 것 같은데 말이야.’
◎ 심각한 논리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 지혜 수치가 -20 하락합니다.
빌어먹을! 재이 놈아.
이럴 때는 그냥 재부팅인지 뭔지를 해버려.
그나저나 혈검살의의 의문이 풀린 건 좋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존재가 남아 있었다.
남천휘는 황 노대가 새로이 연회를 준비하겠다고 자리를 뜨자마자 소우주를 향해 손짓했다.
“우리 할 말 있지 않아?”
그는 큰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진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사실 나는 의원이 아니다.”
알아. 이 멍청한 놈아.
강호에 무광정을 사용하는 자들이 살수 말고 어디 있더냐.
“나도 의원이 아니야.”
소우주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실의에 빠졌다.
아니, 네가 왜 실망하는데?
“살수 주제에 설마 의원을 동경한 거야?”
남천휘의 말에 소우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멋있잖아.”
“잠깐! 설마 소우주라고 가명을 지은 것도······.”
“멋있잖아.”
그제야 소우주가 장침을 묘사하며 끼어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쯧쯧, 살수가 저리 감상적이어서야.
남천휘가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을 내비치자, 소우주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러는 당신도 혈검살의가 아니잖아.”
“네가 어떻게 알아?”
“혈검살의를 봤거든. 그는 뭐랄까.”
소우주는 찝찝한 것을 떠올린 듯 읊조렸다.
“대단히 뜨거우면서 이상한 사람이었어.”
*
사내의 머리카락은 마치 불길과 같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사방으로 뻗은 머리카락이 살아 있는 것처럼 찰랑였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대비가 될 만큼 하얀 얼굴은 경극배우처럼 매끈했다.
그가 검을 휘돌리는 순간 마치 별빛이 번뜩이듯 곳곳에 섬광이 일었다.
“네 안의 소우주를 느껴봐라!”
사내가 검을 휘돌릴 때마다 만들어진 별빛은 곧 적도의 상처를 뜻했다.
“흥! 이깟 상처.”
어깨를 살짝 베인 적도가 재차 달려들었다.
하나 그는 두어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어깨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러더니 학질이라도 일으킨 사람처럼 사지를 부르르 떨며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수십 명의 복면인들 중 유일하게 얼굴을 드러낸 자가 이를 갈았다.
“크흑! 역시 혈검살의의 절초, 소우주는 명불허전이군. 의원답게 혈맥을 공격하여 기혈을 뒤틀리게 만드는 잔악무도한 검법을 사용하다니.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익혀야 할 의술로 살인검법을 만들었어!”
혈검살의라 불린 청년은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경극을 좋아하지만, 너도 만만치 않군. 설명하는 솜씨를 보아하니 변사 연습이라도 한 게냐?”
두목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수십 명의 수하들이 만들어놓은 포위망은 건재했다. 이대로 시간을 조금만 더 끌 수 있다면 놈을 무릎 꿇리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건방진 놈! 네 놈은 이것이 장난 같으냐? 언제까지 경박하게 떠들 수 있는지 보자!”
사내는 두목의 욕설을 듣자마자 박장대소를 했다.
“크하하하! 미친 계집들의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네 놈보다 경박할까?”
두목을 비롯한 복면인들의 눈빛이 살기를 드러냈다.
그들은 강호칠대금지 중 한 곳인 봉황곡을 섬겼다.
하나 엄밀히 따지자면 여인들의 방파인 봉황곡의 하부조직에 불과했다.
매혹대(魅惑隊).
그들은 사내의 말처럼 봉황곡의 미녀들을 따라다니는 추종자에 불과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남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이 즐거울 리 없을 터였다.
“크흑! 얘들아. 어차피 저 놈은 계집을 지켜야 하니 움직일 수 없다. 무슨 수를 써도 좋아. 놈을 지나쳐 계집을 없애라. 어차피 봉황곡에는 시신만 가져가도 보상을 해줄 것이야.”
“존명!”
혈검살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사람 두엇이 들어앉으면 꽉 찰만큼 잡은 토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안색이 창백한 여인이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하연아.”
그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매혹대를 향해 읊조렸다.
“지저분한 건 내 취향이 아니지만, 저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살계를 열어야겠구나.”
두목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네 놈 손에 죽은 동료만 기십이다. 쓸데없이 겉멋만 들어서 이죽거리는 것도 이제 끝이야! 쳐라!”
꾹꾹 눌러 담았던 분노와 살기로 점철된 매혹대의 무인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혈검살의는 묵빛의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살계를 열었으니 살의를 뗀 혈검으로 남으리라.”
마치 경극의 고조된 분위기에서나 나올 법한 한 마디였다.
그는 토굴 앞에 선 채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적도가 코앞까지 들이닥치는 순간 벼락처럼 양 손을 벌렸다. 한데 그 순간 놀랍게도 한 자루의 검이 둘로 변했다. 게다가 강건함을 자랑하던 검신이 출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연검이다.
촤라라라라라라라락!
두목은 눈을 부릅떴다.
혈검살의의 무위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나 작금의 성취는 예상을 뛰어넘기에 충분했다.
“저런 기형병기를 지녔다니······.”
그의 등허리에 한순간 소름이 돋았다.
기형병기를 처음 사용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문이 나지 않은 까닭은 뻔했다. 저것을 본 자는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터였다.
‘살인멸구.’
두목은 수하들이 비단처럼 찢겨나가는 것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물러섰다.
하나 혈검살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일부러 막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이곳을 벗어나려면 협곡을 통과해야 했다.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어!’
그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한데 그 순간 혈검살의의 스산한 한 마디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혈검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
동시에 두 자루의 연검이 두목의 목을 휘감았고, 이내 팽이를 밀어내듯 떨쳤다.
촤악!
혈검살의는 연검에 묻은 피를 털고, 다시 원래의 검으로 복구했다. 그리고 그가 걸음을 내딛었을 때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두목의 목이 진창을 굴렀다.
“완벽해.”
짜릿한 심경은 토굴 앞에 선 순간 사라졌다.
연하연은 인상을 쓴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봉황곡주의 성향만큼이나 빙정지도 지독하군.’
잠시 후 연하연이 긴 숨과 함께 깨어났다.
“괜찮니?”
“한결 나아졌어요.”
하나 혈검살의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연하연의 안색은 창백한 가운데 푸른빛이 돌았다.
이미 빙정지(氷精指)가 골수를 파고들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조금만 더 버텨 보거라. 너를 치료할 수 있는 곳이 있단다.”
연하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늘 아래 제가 머물 곳이 있을까 모르겠네요.”
혈검살의는 연하연을 부축하며 말했다.
“유선관까지만 가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