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신교대(新橋隊). (2)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위강이었다.
‘그 사이 정이라도 들었나?’
하긴 첫 대면에 질질 짜는 녀석이 잊힐 리 만무했다.
《위강(威講)- 19세, 월봉(은자1냥)》
- 20세 이하 강호초출입니다.(발굴)
- 곡부남가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 곡부남가에서 성장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 신체와 내공이 조화롭지 않습니다.
- 남천휘를 약간 좋아합니다.
자식, 이 정도로 감동했을 줄이야.
‘그나저나 발굴이라고 표시된 건 뭐야?’
◎ 20세 이하이면서 강호에 처음 등장한 무인을 등용한 경우 ‘발굴 무인’으로 표시됩니다.
- 높은 충성도를 지녔으며, 대부분의 경우 하락하지 않습니다.
무인은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는 건가?
어찌됐든 위강의 경우 호의적인 내용이 다수를 이뤘다. 기본 정보를 시작으로 장단점이 끝없이 나열됐다. 이것만 있어도 녀석의 수준을 어느 정도 끌어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나 남천휘의 싱글벙글 웃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탐색 보고서의 마지막 구절이 안타까웠다.
- 월봉 3냥 정도로 등용이 가능합니다.
‘하아, 막 총관은 얼마나 후려친 거야?’
남천휘는 월봉 3냥으로 등용이 가능하다는 문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역시 막 총관에게 계약을 맡긴 건 신의 한수였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미안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죄책감을 남에게 떠넘겼다.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형이 알아서 챙겨주겠지.”
무책임한 한 마디였지만, 그렇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형은 그런 사람이니까.
*
남천홍은 예상하기 쉬운 위인이다.
그는 남천휘가 맞은편에 자리하자마자 걱정스런 한 마디를 건넸다.
“힘들지는 않냐?”
“무슨 소리야?”
“네가 데리고 온 사람들. 조 대주가 하는 말에 의하면 눈빛이 좋고, 저마다 한 수가 있어 보인다고 하더라. 괜찮겠어?”
남천휘의 무위를 몇 번이나 지켜본 그였다.
그러니 휘둘릴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아니나다를까 예상했던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누군가를 돕는 건 쉬워. 하지만 책임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너는 곡부남가의 작음을 안타까워하겠지만, 나로서는 이만큼 건사하는 것도 힘에 부친단다. 내가 아는 너라면 누군가를 데리고 와서 부려먹기만 할 성격은 아니야. 정말 그들을 책임지려고 하는 거야?”
입을 벌려줬으니 떠먹여주면 될 터였다.
“형이 도와줘.”
남천휘의 말에 남천홍은 인상을 썼다.
“나는 지금도 힘들다. 고기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어. 이러다 졸도할 수도 있다고.”
이상한 논리에 휘둘리면 안 돼.
“형, 곡부남가는 이미 상단의 규모를 뛰어넘었어. 강호라는 물결에 올라탔다고. 이제 곡부남가가 의도했든, 시류가 원하든 나아가야 해. 이대로 멈춰 있으면 끝이 좋지 않을 거야.”
자신의 행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애써 내뱉지 않았다.
남천홍은 생각에 잠겼다.
이미 곡부남가는 기호지세가 아니던가.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선택지는 둘 뿐이다.
내리거나, 털을 잡아 뜯거나.
전자는 모든 걸 버리고 낙향하는 걸 의미했다.
강호에서 어중간한 은거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럴 수는 없지.’
누대(累代)에 걸쳐 이뤄온 가산을 정리하는 것이 가능할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찌됐든 곡부남가가 중흥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돈? 수련장? 병장기? 무복?”
남천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돈은 충분해.”
“네게 돈 나올 구석이 있더냐?”
강호는 무공을 중시하지만, 무공만으로 헤쳐나갈 수 없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부호의 밑에 고명한 무인이 의탁하기도 하고, 관부에 투신하기도 했다. 남천휘를 따라온 무인들 역시 곡부남가의 훌륭한 환경에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만큼 고수라고 해서 늘 풍족하지는 않다.
하나 남천휘는 호언장담을 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형이야 말로 표국과 상단을 확장할 때 말 해. 내가 지원해줄 테니까.
남천휘는 생각한 바를 가감 없이 말했다.
“사실 크게 도와줄 일은 없어. 가솔들과 서로 낯선 상황일 거야. 날을 잡아서 연회를 열어주는 건 어떨까?”
남천홍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건 좋지! 돼지를 잡자! 고기야. 고기.”
“형, 살 뺀다고 하지 않았어?”
남천휘가 곡부남가를 떠났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데 그 사이 남천홍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것은 물론이고, 더욱더 인덕을 쌓지 않았는가.
“생각해보니까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그건 당신 생각이고.
“형, 외모는 그렇다고 쳐도 건강 생각도 해야지.”
남천홍은 몸을 일으켰다.
도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는 남천휘를 지나치며 한 마디를 건넸다.
“맛있게 먹으면 괜찮아. 이 녀석아.”
남천휘는 육중한 체구로 빠르게 도주하는 남천홍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형은 정말 맛없게 먹었나 봐.’
어찌됐든 새로 들어온 식구들의 보살핌을 맡겼으니 이제는 수련에 대한 고충을 해소할 시간이다.
남천휘는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 근처의 연무장은 낯선 이들로 북적였다.
곡부남가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스스로 찾아온 자들이다. 곡부남가의 그늘로 찾아들어온 자들답게 무위는 그리 대단치 않았다.
하나 백 명이 넘는 숫자는 충분한 의미를 지녔다.
북풍대에 이어 북악대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삼공자.”
남천휘가 연무장을 지날 때 벽추가 달려왔다.
그는 북풍대의 부대주 자리를 내어놓고 북악대주가 되어 있었다. 직위 상으로는 영전(榮轉)이었지만, 예전보다 수척했다. 그만큼 수하들을 거느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증거이리라.
‘나도 빨리 떠 넘겨야지.’
남천휘는 진저리를 치면서도 웃음으로 벽추를 맞이했다.
“북악대는 별 일 없습니까?”
벽추는 쓴웃음을 지었다.
“삼공자의 위명으로 모여든 자들입니다. 삼공자를 뵐 수 없기에 불평을 늘어놓기는 하지만, 대부분 잘 따라와주고 있습니다. 심성이 좋지 않거나, 출신이 불분명한 자들은 미연에 걸렀으니 문제를 일으킬 것도 없고요. 대신 거르고, 걸렀더니 수준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형이 아낌 없는 지원을 약속했다면서요?”
“흐흐, 먹을 걸로 달래서 끌고가는 형편입니다.”
벽추는 수척한 가운데 미소를 잃지 않았다.
“고생하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주고요.”
“삼공자께서 한 번 정도 손을 봐주시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기꺼이요.”
잠시 후 연무장에 돌아간 벽추가 남천휘의 말을 전했나 보다. 북악대의 무인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더니 일제히 남천휘를 향해 포권을 했다.
남천휘는 슬쩍 목례를 한 후 후원에 들어섰다.
바둑판을 가운데 두고 마주앉은 서산노오과 백주검이 보였다.
‘아.’
남천휘는 두 사람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본래 두 사람이 곡부남가에 왔을 때만 해도 77과 86의 레벨을 지녔다. 한데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았거늘 서산노옹은 85를 넘겼고, 백주검은 100에 근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저 정도면 재이로 인해 폭발적인 레벨 업을 하는 자신의 성장 속도에 뒤지지 않을 터였다.
서산노옹이 남천휘의 표정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이내 한 숨을 흘리며 감탄의 한 마디를 건넸다.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라더니. 너는 그 사이 더 큰 성장을 이뤘구나.”
“허허, 이거 하늘이 차별이라도 하는 건가?”
두 사람의 악의 없는 한 마디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두 분께서도 깨달음이 있으셨나 봅니다.”
서산노옹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고, 백주검은 술잔을 기울이며 투덜거렸다.
“다 늙어서 손자뻘 되는 아이에게 자극을 받았다지 뭐라더냐? 허구한 날 수련을 하자고 불러내는 통에 작은 깨달음을 붙잡았지. 대신 골병이 들었으니 오히려 손해가 아니더냐?”
남천휘는 자극이라는 단어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자신과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급격히 성장을 하지 않았던가.
단순히 그들의 재능이 발동했다고 여겼다.
한데 백주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저 말이 맞는 듯했다.
당금 강호는 평화롭다.
힘을 기른다고 해서 쓸 곳도 없을 만큼 고여 있는 세상이었다. 한데 남천휘로 인해 고여 있던 못에 파장이 일어났다. 잠시 수련을 등한시 하던 이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성장하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터였다.
남천휘는 빙긋 웃었다.
자신으로 인해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니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기왕 움직이셨으니 힘 좀 더 써주시지요.”
“어허, 또 무슨 일거리를 맡기려고?”
백주검이 눈치 빠르게 선수를 쳤다.
하나 서산노옹은 할 일이 생겼다는 말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막 총관도 그러더니 서산노옹도 일거리를 기다렸던 사람들 같다. 마치 자신이 아직 쓸모 있음에 기뻐하듯 말이다.
“제가 이번에 데리고 온 무인들을 좀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어려운 부탁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남천휘는 마흔여덟 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익힌 무공의 장단점만 전해줘도 충분히 가르칠 수 있을 터였다.
한데 서산노옹은 난색을 표했다.
“가르치는 머리는 따로 있다고 했어.”
그는 쓴웃음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나나, 저 친구나 누구를 가르치는 재능이 없네.”
“하나 모든 과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백주검이 서산노옹의 말을 받았다. 그는 장난기를 지운 채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의도는 알겠다. 하나 단순히 강한 무인을 원하는 것이라면 낭시에 가서 낭인을 사는 편이 낫다. 가격만 맞으면 제 몫을 할 자들이 수두룩해. 하나 너는 백년지대계의 초석을 세우고자 함이 아니더냐?”
“그건 그렇습니다.”
남천휘의 자신 없는 한 마디에 서산노옹이 다독이듯 말했다.
“네가 저들을 하루종일 붙잡고 있을 수야 없겠지. 그러니 좋은 사범을 찾아봐. 아까 말했듯 익히는 머리와 가르치는 머리는 따로 있는 법이야. 네 말처럼 모든 과정이 준비되어 있다면 가장 먼저 사범부터 구해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데 그런 사람을 갑자기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
남천휘의 처소에는 늦은 밤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쉴 새 없이 붓을 놀렸다.
잠시 허공을 쳐다보다가 몇 줄의 문구를 추가하는 행위가 반복됐다.
“후! 이제 서른두 명인가.”
남천휘는 현재 탐색 보고서를 토대로 무인들의 정보를 정리하는 중이다. 그가 일일이 붙잡고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식이다. 하나 사정상 그리 할 수 없기에 책자로 만들어 나눠줄 계획이었다.
남천휘는 슬쩍 허공을 건드렸다.
그러자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제 2막 ‘중원행’의 해금이 대기 중입니다.
- 잔여시간은 72일입니다.
남천휘는 한 숨을 내쉬었다.
‘저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이 모든 것은 신공부주 공후탁의 때 이른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
시스템이 제 1막 강호행의 마지막 퀘스트인 ‘중간보스’의 제한 시간 확보한 시간은 백일이다.
한데 남천휘가 재기를 발휘하여 수십 일 만에 끝을 냈다. 어떤 의미로는 무적자로 전직했을 때처럼 시스템의 예상을 뛰어넘은 셈이다.
그렇기에 재이는 당시 남천휘에게 선택지를 줬다.
제 2막으로 진행할지, 잔여 시간을 활용할지에 대한 선택이었다.
남천휘는 신중히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곡부남가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제 1막만 해도 산동 강호의 판도가 달라졌다.
아니, 아예 뒤집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제 2막은 어떠하겠는가.
최소한 집단속 정도는 해둬야 두고두고 마음이 편할 듯했다. 그 결과가 바로 선발전을 통해 추려낸 유망주들이었다.
‘시간은 충분해보이지만······.’
칠십이 일 동안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았다.
유선관에 가서 단양자의 흔적을 찾고, 동시에 철장경의 후손도 만나야 했다. 그로 인해 봉인된 항아리의 비밀을 풀고, 부러진 창월과 칠야도 수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며칠이 걸릴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니 새로 받아들인 무인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쏟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아, 갑자기 사범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 거야?”
그 때 문이 열리며 소혜가 들어섰다.
“사람이 필요하세요? 주변에 잘 찾아보세요. 요즘 곡부남가만큼 살기 좋은 곳이 어디 있어요? 분명 좋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을 거예요.”
아주, 과년한 처자가 제 방처럼 드나드는구나.
하지만 전담 시비인 것을 생각하면 트집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안 찾아봤겠냐?”
남천휘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문파 관리를 이리저리 뒤적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인재 목록의 변화를 눈치 챘다.
‘어, 파란색이 언제 이렇게 늘었지?’
본래 곡부남가 주변에 재야인사는 다섯 명이 전부였다. 하나 그들 중 세 명은 등용이 모호한 상태였고, 두 명은 등용이 불가능했다.
한데 그가 신공부에 다녀온 사이 등용이 가능하다는 표식이 곳곳에 나타났다. 그것도 십여 개 넘게 번쩍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라도 나셨어요?”
소혜가 커다란 눈을 끔뻑였다.
남천휘는 소혜의 양 어깨를 감싼 채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하하! 찾았다. 찾았어.”
소혜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금덩이를 주운 사람처럼 기뻐했다.
“진짜요? 아! 잘 됐다!”
“그래, 네 덕이다. 개똥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