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항아리. (2)
*
“철추인가요?”
“묵철이로군. 병장기보다 돈을 택한 겐가?”
비인부전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이 말처럼 스승은 제자를 선택할 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자신과 어울릴만한 자를 고른다.
그걸 인연이라고 포장하기도 했다.
검후와 천수련의 인연은 무지함에서 비롯됐나 보다.
그래도 묵철을 알아본 검후가 철추의 줄을 찾으며 두리번거리는 천수련보다 나았다.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아! 검후가 되겠구나.
어찌됐든 평소와 달리 검후 앞에서 천수련을 타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천휘가 자신의 배려와 배포에 스스로 감동하는 사이 묘한 시선이 꽂혀들었다.
“그걸 고른 건가?”
제룡장주의 말에 남천휘는 탄성을 흘리며 항아리를 건넸다.
“장주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덕에 인연이 닿은 좋은 물건을 얻었습니다.”
노인들이 좋아할만한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감사를 표했다. 원래 나이를 먹을수록 인연이 닿았거나, 운명에 이끌렸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던가.
한데 제룡장주는 그리 녹록한 위인이 아니었다.
“인연이라는 말을 쉽게 가져다붙이는 건 좋지 않은데······. 자네의 말이 진심이라면 그 인연이라는 걸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사람 좋아 보이던 노인네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왔다. 명치가 얼얼할 만큼 갑작스런 일격에 남천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이걸 뭐라고 설명해?’
제룡장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 아무 것도 모르고 들고 온 것이라면 줄 수 없네. 좋은 검과 도가 많아. 그 중에 하나 골라가시게. 먼지만 털어내면 지금도 쓸 만한 무기라네.”
이게 아닌데.
남천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봉인된 항아리에 숨겨져 있던 퀘스트를 떠올렸다. 수락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해야 한다는 제약은 없지 않던가.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일단 퀘스트를 생성시켰다.
띠링-
《강철의 뿌리를 찾아서.》
- 강철의 고향에서 항아리의 봉인을 푸세요.
※ 철장경 왈(曰) ‘철중철(鐵中鐵)은 강중강(剛中剛)이고, 연중연(軟中軟)이라.’고 했습니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아! 철장경이 여기서 또 나오네!’
철장경이라면 백파도 남추에게 칠야와 창월을 만들어준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인벤토리 안에 잠들어 있는 몇 자루의 직도 또한 그의 선물이었다.
당시 그가 남추에게 칠야와 창월을 선물하며 건넨 한 마디가 뇌리를 스쳤다.
- 직도에 문제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찾아오게. 나는 언제까지나 유선관에서 자네를 위해 숫돌을 갈고 있겠네.
남천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인벤토리 구석에 놓여 있는 칠야와 창월은 여전히 반토막이 난 상태였다.
어차피 칠야와 창월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가려고 했었는데······.’
게다가 단양자가 묏자리로 삼은 곳도 유선관이었다.
한데 이제 봉인된 항아리까지 그를 유선관으로 인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야 말로 노인들이 좋아하는 운명의 이끌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였을까.
제룡장주의 표정이 예전처럼 마냥 순해 보이지 않았다.
“제룡검야와 청염진군께서 이걸 봉인한 연유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예기치 못한 이름의 등장이었을까.
검후와 화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 제룡장주는 마치 죽은 자식이 살아돌아온 것처럼 눈을 빛냈다.
“어찌 청염진군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가?”
남천휘는 항아리를 매만졌다.
울퉁불퉁한 겉면으로 굴곡이 가득했다.
대장간에서 사고팔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닐 터였다.
그가 정답을 유추하려고 애쓰는 사이 특기 ‘지모’가 발동했고, 지혜 수치는 눈에 띄게 소모됐다.
“강호에서 묵철을 진흙처럼 주물럭거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한데 제룡검야께서 이것을 제룡장에 두셨다면 그분과 가까운 사람이었겠지요.”
“하면······.”
통했다.
제룡장주는 한층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봉인한 연유를 알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인가?”
이쯤 밑밥을 깔았으면 통할 것이다.
“그냥 이끌렸다고 할까요.”
그러자 제룡검주는 남천휘가 원했던 한 마디를 읊조렸다.
“허허, 운명의 이끌림인가.”
검후는 마치 자신이 인정받은 것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천수련 또한 그에 뒤질세라 어깨를 활짝 폈다.
도대체 왜?
남천휘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제룡장주가 다시 항아리를 건넸다.
“자네의 것이야. 가져가시게.”
“고맙습니다. 아! 한데 창고를 저렇게 두셔도 되는 건가요? 따로 진법이나 경계를 서는 것 같지 않던데요.”
“진법도 없고, 보초도 없지.”
“하나 안에는 기물이 꽤······.”
“그분의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제룡장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저 창고를 만든 건 청염진군이시네. 그분께서 창고 바닥에 만근의 화약을 깔아놓으셨어.”
그는 정자의 바닥을 두드리며 말을 덧붙였다.
“내가 왜 이렇게 추운 날 허허벌판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것 같은가?”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고 보니 제룡장에서 땅굴을 통해 비스듬히 내려가지 않았던가. 대충 창고의 입구와 정자의 거리 정도였으리라.
진법과 보초는 없을지언정 기관은 존재했다.
‘여기도 마냥 허술한 곳은 아니군.’
그저 낙향한 노문사의 처소 같았던 장원이다.
한데 제룡검야와 청염진군의 손길이 닿았다니 어딘가 모르게 신비로웠다.
“그런데 그분이 누군가요?”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천수련이 물었다.
남천휘 또한 궁금했던 차였다.
“작금의 강호를 만든 것이 정천칠공이라지? 하나 어찌 일곱 명이 신마를 징치했을까. 수많은 기인이사가 불구덩이를 향해 달려드는 하루살이처럼 제 몸을 돌보지 않았지.”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옛 이야기를 하듯 말을 이었다.
“그 중에서 몇 명은 누구보다 강했고, 누구보다 열정적이었어. 각자 목적하는 건 달랐지만, 신마를 물리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지. 하나 신마대전이 끝났을 때 정파는 정천칠공을 만들었네. 정파에 속했으면서 세력을 이루지 않은 자들을 솎아냈지. 정치적인 이유였어. 결국 정천칠공이란 그리 멋진 의미는 아니었다네.”
남천휘는 어깨를 들썩였다.
어쩌면 백파도 남추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것이라는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하지만 명확한 건 없어.’
남추는 전진칠자에 이어 팔진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쌍도로 대강남북을 종횡했을 터였다. 그리고 신마대전 당시 자연스럽게 합류했으리라.
물론 산적의 혐의 또한 완벽하게 벗은 아니었다.
남천휘는 곡부남가의 비운고에서 발견했던 낡은 서책을 떠올렸다.
‘빌어먹을 산적 십계명!’
어찌됐든 남추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유선관에 가야해.’
특급강호인이나, 퀘스트와 관계없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나서는 길이 될 터였다.
남천휘는 허공을 힐끔 바라봤다.
‘그래서 퀘스트 안 줄 거야?’
*
남천휘는 목적을 이뤘지만, 곧바로 제연평을 떠나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떠날 수 없게 되었다.
용봉쟁투 이후 산동의 외곽은 흑도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다. 본래 공후탁의 밀명을 받았던 곤륜산인은 수십 개의 흑대 세력을 관리했다. 그들 중 쓸 만한 세력을 골라 신공부주를 위해 움직였다. 그러니 곤륜산인이 죽은 이후 사방에서 모여든 흑도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건 놀랄 일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오의당이네. 청도문 영역 근처에서 날뛰던 놈들이잖아. 도대체 청도문은 뭐하고 있는 건데?”
남천휘의 짜증 섞인 한 마디에 천수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청도문도 어쩌면 신공부의 하부 조직일 수 있다면서요?”
“정확히는 공후탁이지.”
“어쨌든요. 그러니 청도문은 공후탁이 죽은 이후 흑도에 대한 관리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요?”
“내 탓이라는 거야?”
천수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분이 있다는 거지요.”
남천휘는 발끈하려다 한 숨을 내쉬었다.
슬슬 장내가 정리되었기에 도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납도했다. 애초에 그와 천수련이 함께 움직이는 이상 중견 방파의 토벌대보다 나을 터였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흑도의 등장은 끊임없이 전달됐다.
하오문에서 무상으로 흑도에 관한 정보를 알려줬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도 돈이 되지 않는 화적떼가 자신들의 영역에서 날뛰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았으리라.
“산 하나 넘으면 이름 없는 촌락이 있어요. 이틀 전 이십 명 정도의 마적들이 들이닥쳐서 먹을 걸 쓸어갔데요.”
“쉴래?”
천수련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하기는 네가 이거 했다고 쉴 만큼 약하지는 않지. 힘들면 말해.”
적선단이라도 몰래 넣어줄 테니.
남천휘은 그 말은 남기고 바로 발길을 돌렸다.
천수련은 헤죽 웃더니 잰걸음으로 그를 따라잡았다.
‘힘들지 않아요.’
남천휘가 나타나는 순간 시선이 집중됐다.
그가 산동에 퍼져있는 흑도세력을 소탕하는 행위 자체가 협객행이었다. 그러니 날이 갈수록 철귀협의 이름은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누군가 의도하여, 누군가 돈을 써서 만들어진 명성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양민들의 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퍼졌다.
백협은 자취를 감췄고, 황보장천은 은둔했으며, 초류혁은 죽었다. 삼정의 후계자로 대표되던 후기지수는 이제 남천휘를 가리켰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남천휘는 대꾸하지 않았다.
천수련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별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요?”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맞아. 한데 고민거리가 따로 있어. 그런데 네 눈에도 보여?”
“하루 종일 투덜거리던 사람이 조용하니까 이상하잖아요.”
남천휘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가 협객행을 꾸준히 이어가는 까닭은 명성이나, 퀘스트로 인함이 아니었다.
‘유선관에 가고 싶은데······.’
훌쩍 떠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신공부, 엄밀히 따지자면 곡부남가의 안위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그렇기에 신공부의 영역 근처에서 협객행을 빙자한 소일거리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리라.
‘내가 없어도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어야 하는데.’
하나 곡부남가는 이제야 문파의 흉내를 내고 있지 않은가. 쓸 만한 무인이란 돈으로 구하기 힘들었고, 믿을 수 있는 자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다고 벽선단과 적선단으로 하루아침에 고수를 찍어낼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방법이 없네.’
남천휘는 입맛을 다시며 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철편을 박아 넣은 몽둥이가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적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대뜸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하,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안 돼.
“고향으로 돌아가서 착하게 살겠습니다.”
돌아갈 수 없어. 죗값은 치러야지.
남천휘가 손짓을 하자, 무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적들을 포박했다
“나한테 말해 봐요.”
천수련이 찰싹 달라붙어서 칭얼거렸다.
“어허, 개똥이 주제에. 건방지다!”
남천휘의 말에도 천수련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천휘가 민망할 만큼 개똥이라는 별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이제 받아들인 거야?”
천수련은 배시시 웃었다.
“받아들이고, 말고 할 것이 있나요. 나도 남 소협의 별명을 찾고 있어요. 예를 들면 말똥 같은?”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자신도 모르게 마분(馬糞)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모습을 떠올린 게다.
‘견분과 마분이라니. 강호사를 통틀어 이처럼 더러운 별명이 있을까?’
있을 리가 없지.
그것만은 막아야 해!
남천휘가 천수련의 머리카락을 잡아채려는 순간 하오문도가 등장했다. 외간 남자 앞에서 여인의 머리채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어딘데?”
한데 천수련의 표정이 어색했다.
“돌아가야겠는데요.”
“어디로?”
“신공부요. 신규 무인을 뽑는데요.”
남천휘는 미간을 찡그린 채 천수련이 건넨 쪽지를 살폈다. 천수련의 말처럼 신공부가 새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무인을 모집한다는 내용이다. 한데 산동 각지에서 몰려올 무인에 대한 선별을 맡긴다는 말이 사족처럼 붙어 있었다.
“아! 내 나이에 무슨 심사위원이야.”
하나 천수련은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동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안 하면 누가 해요?”
그건 그러네.
검후와 두 사람은 그 날로 제룡장을 떠났다.
다행히 세 사람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뛴 덕에 대부분의 흑도들은 산동성 밖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철귀협께서 돌아오셨다!”
누군지도 모를 무인의 환영 인사를 억지웃음으로 화답했다.
한데 남천휘가 신공부가 발을 들이는 순간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정확히는 특기 ‘유지’가 발동하면서 알림이 울렸다.
띠링-
남천휘는 재이의 알림 중 상단에 적힌 ‘신인 지명’이라는 네 글자를 보고 히죽 웃었다.
“해결책이 나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