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57화 (157/305)

71, 주인공은 언제나 맑은 뒤 흐림. (4)

하나 회회회판 앞에 머물렀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뼈다귀만 보면 침을 흘리는 개도 아니고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후우, 일단 침착하자. 내가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침착하게 인벤토리를 살폈다.

안한다고는 안했다.

그저 침착하게 할 생각이다.

‘일단 주머니는 두둑한데······.’

이번 퀘스트를 통해 레벨을 20개 정도 올렸다.

그러니 보상으로 지급된 자수정은 어땠겠는가.

남천휘는 50000개 넘게 쌓여 있는 자수정을 확인하는 순간 절로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장성한 자식을 보듯 뿌듯하기만 했다.

그 순간 뒤통수를 타고 스며든 무언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래, 몇 개 정도는 괜찮겠지.’

회회회판을 한 번 돌리는데 소모되는 자수정은 300개다. 한데 특별 행사로 인해 이 할 가량 감소가 된다니 240개 소모될 터였다.

현재 남천휘가 소지한 자수정의 총량은 51600이다.

4번 돌려봤자 1000개 사라질 뿐이다.

‘6개 정도는 시험 삼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연말 특별 행사라지 않던가.

그 말인즉슨 오늘이 지나면 다시 오지 않는 기회라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인을 위해 멀뚱히 앉아 있는 건 지루했다.

“딱 여섯 번만 돌리고 밥을 먹으러 가자.”

물론 당첨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기껏 해야 숫돌이나 몇 개 던져주겠지.

회회회판을 켜는 순간 흰 상의에 붉은 치마를 입은 작달만한 인형이 생글거리며 등장했다. 녀석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만 믿으라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안 믿어.

이내 인형이 제 몸집만한 활을 꺼낸 후 화살을 걸었다. 동시에 회회회판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준비 됐으면 쏘세요!

‘돌려돌려 돌림판!’

핑-

《 B급 무작위 보급 상자를 획득했습니다.》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B급이면 영웅이 아닌가.

지금껏 십만 개 넘게 자수정을 소모했음에도 서너 번 정도 봤던 B급 보급 상자에 한 방에 나와 버렸다.

‘B급이면 축 주문서나 특기 승급권일 수도······.’

남천휘는 당장이라도 보급 상자를 열고 싶은 욕망을 억눌렀다. 인벤토리에 넣은 후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회회회판을 응시했다.

‘후훗. 말년에 운수대통이네.’

그러고 보면 신공부주를 쫓던 날부터 대길(大吉)이 아니던가. 이 정도면 나머지 다섯 번의 기회를 허공에 날려도 이득일 터였다.

남천휘는 즉묵노주를 들이켠 후 육포를 입안에 넣었다. 육포를 오물거리며 돌려돌려돌림판을 중얼거리는 순간 인형이 활을 쐈다.

《C급 무작위 보급 상자를 획득했습니다.》

《숫돌 30개를 얻었습니다.》

《적선단 10개를 얻었습니다.》

《오감증폭제 3개를 얻었습니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더니······.

처음을 제외하면 모조리 꽝이었다.

남천휘는 마지막 돌림판을 돌리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대충 마무리하고 자리를 정리하려는 게다. 하나 그는 몸에 힘을 빼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또 떴다.’

《특기 1회 승급권을 획득했습니다.》

당첨 확률은 2할 정도 증가했을 뿐이다.

한데 영웅 등급 보상이 여섯 번 중에서 두 번이나 뽑혔다.

이쯤 되면 되는 날이 확실했다.

‘대길이잖아.’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운수 좋은 날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천휘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어느새 아랫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기왕 돌릴 거면 그냥 돌릴 수 없지.’

이래서 사람은 머리가 좋아야 한다.

특기 ‘지모’를 얻고 지혜 수치가 급상승했기 때문일까.

마음이 들뜬 와중에서 머리는 냉철했다.

‘열 번 동시에 돌리면 한 번은 공짜잖아. 그렇다면 열 개씩 돌리는 게 이득이다!’

남천휘의 눈빛이 번뜩이는 순간 자수정의 앞자리가 5에서 4로 바뀌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열한 번 연속으로 돌린 회회회판은 똥을 선사했다.

“으아아아!”

잠시 엉덩이를 들썩이던 남천휘는 억지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흥분하지 말자. 돌림판은 눈보다 빠르다.

놈에게 당했던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더냐.

정심을 잃고 이성을 잃었을 때마다 놈에게 희롱당하지 않았던가. S급 특기인 불굴조차 이럴 때에는 발동하지 않았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괜찮아. 아직까지는 내가 이득이야.’

남천휘는 한 손에는 골패를, 다른 손에는 은자를 쥔 도박꾼처럼 붉어진 눈을 빛냈다.

‘한 번 더!’

잠시 후 남천휘는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열한 번의 돌림판 중 B급 무작위 보급 상자가 두 개나 뜬 것이다.

이제 스물여덟 번 중 네 번의 당첨.

지금껏 이런 횡재는 없었다.

남천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수정의 개수를 살폈다. 4만7천개 남짓한 자수정을 보고 있자니 입 안이 쓰다. 본래 삐뚤어진 것은 바로 놓고, 빈 것은 채워 넣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였다.

남천휘에게 있어서 4와 7은 안심이 되는 숫자는 아니었다.

언제부터였냐고?

오늘부터 그랬다.

‘2400개씩 3번을 더 돌리면······.’

자수정은 3만대가 될 터였다.

남천휘는 3이라는 숫자에서 삼재(三才)를 연상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

마치 맑은 하늘과 뜻깊은 땅 사이에 있는 자신을 가리키는 듯하지 않은가. 게다가 돌림판을 돌리는 횟수도 세 번이었다.

그래, 이건 해야 해.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하지 않던가.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린 채 회회회판을 연속으로 돌렸다. 눈은 점차 충혈 됐고, 손과 발은 일체화가 된 것처럼 달달 떨기 시작했다.

“그렇지!”

“아······. 개똥같은 돌림판.”

“되는 날이로구나!”

광녀가 꽃을 찾아 헤매듯 열성적인 혼잣말이 이어졌다. 그러고 마침내 꽃을 귀에 꽂은 광녀처럼 자문자답의 경지에 이르렀다.

“어차피 당분간 쓸 일도 없잖아?”

“3이나 2나 차이 없지.”

그렇게 앞자리가 2로 변했다.

잠시 후 마치 하루가 반복되듯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단지 달라진 건 자수정의 앞자리가 2에서 1로 변했을 뿐이다. 해를 밀어낸 달이 어둠의 장막을 하늘에 드리웠을 무렵 남천휘는 모든 걸 하얗게 불태웠다.

“하아.”

*

새해가 밝았을 때 가족이 모여 안부를 묻는 건 그리 낯선 광경이 아니다. 하나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특별히 모인 건 평범한 광경이 아니리라.

하나 십여 명 남짓한 복면인들은 갑작스런 소집에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수하고 싶은 건 만인의 공통적인 희망사항이 아니던가.

“쓰흡.”

흰 망사로 복면을 대신한 사내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심스럽게 분재를 다듬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창과 문을 활짝 열었기에 시시각각 찬바람이 처소를 가득 채웠다가 사라졌다.

하나 사내와 복면인들 중 누구도 추위를 논하는 자가 없다.

딸깍-

잔가지를 쳐낸 사내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제야 복면인들을 인식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돌아앉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복면인들 중 가장 앞줄에 홀로 부복한 자가 대꾸했다.

“백결공께서 오랜만에 집중하시는 모습을 보았더니 저희의 마음도 편해졌습니다.”

백결공(白潔公)이라 불린 사내는 하관을 가린 망사를 풀었다. 그러자 여인처럼 백옥 같은 살결이 드러났다. 게다가 눈초리에 검은 선을 그었고, 입술에는 분을 바른 것처럼 홍조가 가득했다.

가느다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산서수석의 화술에는 저조차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니 백파집회의 회주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군요.”

산서수석(山西首席)은 고개를 조아린 채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이름만 들어도 그가 산서성의 무언가를 담당하고 있을 터였다.

한데 백결공의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말뜻은 엄청난 사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백파집회(百派集會)라면 산서성 내에서 으뜸가는 방파가 아니던가. 오태산을 근거지로 한 백여 개의 사찰이 뭉친 거대방파였다. 강북에서 남쪽에서 소림(少林)이 있다면 북쪽에 백파(百派)가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지 않던가. 그런데 산서수석이 백파집회의 회주들을 쥐락펴락한단다.

“모든 것이 공의 은덕이옵니다.”

말하는 자의 표정과 듣는 자의 표정으로 보았을 때 농으로 던진 말이 아닐 터였다.

백결공은 송년회에 참석한 것처럼 복면인들을 한 명씩 거론하며 덕담을 건넸다. 각 지역을 호명하고, 백파집회에 버금가는 방파의 이름이 술안주처럼 불렸다.

“그리고 산동수석.”

가장 말석에 앉은 복면인의 체구는 호리호리했다.

아니나다를까 여인의 다소곳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하명하시옵소서.”

“신공부주가 죽었다지요.”

여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하나 백결공은 마치 서재의 책 한 권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신공부를 빼앗겼고요.”

여인은 오체투지를 하듯 몸을 낮췄다.

“죽여주시옵소서. 모두 제 불찰입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백결공의 앞길에 방해가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크게 상심한 듯보였다. 자신의 생사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은 광신도를 연상케했다.

그 때 여인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어느새 백결공이 다가와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킨 것이다.

“아아, 공.”

“산동수석. 그리고 여러분. 잘 들으세요. 우리가 이처럼 수많은 사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까닭은 말입니다.”

잠시 말을 끊는 것만으로도 복면인들은 홀린 것처럼 백결공의 입만 응시했다.

“더 큰 권세를 얻거나, 더 큰 이득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어요. 수석도, 그리고 수석에게 제공된 졸(卒)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실수해도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성공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어요.”

백결공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복면인들은 백결공을 향해 오체투지를 하며 외쳤다.

“일원(一元) 앞에 모든 것이 평등합니다.”

“맞아요. 올 한 해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삼 년 안에 우리의 대업이 완성되기를 기원하며 자리를 파하도록 합시다.”

백결공의 말에 복면인들이 일제히 대꾸했다.

“존명!”

특히 산동수석의 외침은 그 누구보다 컸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백결공의 달콤한 한 마디가 흘러들어왔다.

“신념은 우리를 갈라놓지만, 꿈과 분노는 우리를 하나로 만듭니다. 청도문주에게 신념이 아니라 꿈과 희망을 심어주세요.”

산동수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의 눈동자는 꿈과 분노로 인해 번뜩이고 있었다.

“네, 그리 하겠습니다”

백결공은 자리를 파한 후 처소를 떠났다.

그 또한 회합을 위해 잠시 장소를 빌렸을 뿐이다.

“귀협이라는 후기지수가 있다면서요?”

어디선가 전음이 들려왔다.

[어디에나 있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일뿐입니다.]

“사람을 보내세요.”

[죽일까요?]

백결공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너무 무서운 사람들 같잖아요. 그냥 어떤 사람인지 알아만 보세요.”

처결은 맡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대답과 함께 전음의 주인공이 멀어졌다.

백결공은 저 멀리 우뚝 솟은 전각군(殿閣群)을 향해 나아갔다.

“하나가 되어야지. 모두가.”

잠시 후 그는 황금빛 현판 아래를 지나쳤다.

현판에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무림맹(武林盟)이라 적혀 있었다.

*

“무림맹에 언제 가냐?”

남천휘는 자정을 앞두고 불려나왔다.

그렇기에 천수련에게 인사 대신 건넨 한 마디는 불퉁스럽기 짝이 없다. 마치 지금껏 내버려뒀다가 이제 와서 찾느냐는 듯한 질책성 투덜거림이었다.

하나 천수련은 강한 여자였다.

이미 남천휘에게 단련이 될 만큼 되어버린 여인이 아니던가.

“바로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연평 쪽에 들려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신공부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앉아요.”

“어, 그래.”

남천휘는 왜인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천수련의 분위기에 압도됐다. 결국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엉덩이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공 소협은 내일 떠난대요.”

“아하, 어디로 가는데?”

“비밀이래요.”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관심 없어. 그 놈 성격에 어디 가서 당하고 살지는 않겠지.”

그러자 천수련이 남천휘를 바라보며 취조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요?”

“응.”

“진짜, 진짜?”

남천휘는 검지로 천수련의 이마를 밀어냈다.

“저녁을 잘못 먹었냐? 왜 이래?”

“헤헤, 아니에요.

천수련은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싼 채 발끝을 까딱거렸다. 뒤에서 슬쩍 밀면 언덕 아래까지 굴러갈 수도 있을 듯했다.

“그나저나 왜 부른 거야?”

남천휘의 말에 천수련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냥요. 조금 있으면 자정이잖아요. 오늘 같은 날은 남 소협과 함께······.”

이쯤 되면 제아무리 눈치가 없는 남천휘라고 해도 짚이는 바가 있지 않겠는가. 여전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둥그런 달은 새해를 준비하듯 이리저리 달빛을 흩뿌리느라 여념이 없다.

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술을 마시자!”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 즉묵노주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남천휘는 천수련이 눈을 끔뻑이는 사이 술병을 꺼내 흔들었다.

“후훗, 내가 다 준비해놨지.”

천수련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네. 그러시군요.”

그 사이 저 멀리서 삼경을 알리는 딱따기 소리가 울렸다. 마침내 길고 길었던 한 해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자! 빨리 한 잔 해.”

남천휘는 황급히 술잔에 술을 따랐다.

하나 그는 잔을 가득 채운 후에도 술병을 들지 않았다. 잔을 가득 채운 술이 흘러내리는 가운데 천수련이 짜증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어, 뭐해요?”

하나 남천휘는 허공에 떠있는 알림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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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요즘 유례없이 날이 맑더라.

잠시 후 원망 가득한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이런! 빌어먹을 개똥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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