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주인공은 언제나 맑은 뒤 흐림. (2)
*
공후탁은 수백 명이 뒤엉킨 채 싸우고 있는 전장을 내려다봤다. 공문십철이 나란히 남천휘에게 패배했을 때만 해도 개의치 않았던 그였다.
하나 눈앞의 광경은 뼈아팠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렸던 자들이 아닌가. 자신을 경외하며 산동의 주인이 될 것이라 떠받아들었던 자들이다.
‘크흑.’
설령 남천휘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저들의 신망만 잃지 않았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하나 저들이 돌아선 이상 지금까지의 고생은 물거품이 된 셈이다.
‘수십 년의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다니.’
그는 산동의 패주가 되기 위해 술과 여자를 멀리한 채 감정을 다스려왔다. 한데 수십 년의 금욕과 노력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렸다.
꽈드득-
남천휘를 죽이고 싶었다.
심지어 천위검호와 싸울 때에는 수십 번이나 기습을 하려던 마음을 다잡았을 정도였다. 놈을 죽일 수 있다면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 정도는 기꺼이 내어줄 것이다.
‘응?’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묘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남천휘를 죽일 수 있다면 그 어떤 대가로 치르려고 하지 않았던가. 한데 남천휘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피를 토하며 주저앉는 순간 예기치 못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는 안도했다.
그리고 기뻤다.
남천휘가 건재한 이상 승패를 뒤엎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미 천위검호와 천라쌍익으로 인해 공문십철은 마음을 돌렸다. 게다가 무인들의 기세 또한 범상치 않았다. 몇 마디 말로 위로한다고 해서 고개를 숙일 것 같지 않았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그래서였을까.
공후탁은 안도하는 순간 냉정을 되찾았다.
처음 마음 같아서야 남천휘가 쓰러진 이상 여세를 몰아 적을 몰아내야 했다.
하나 그는 이성적으로 장내를 내려다봤다.
‘이미 끝났다.’
그 증거로 장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는 검후였다.
그녀는 일부러 단상에 올라 자신을 노리지 않았다.
대신 위기에 처한 무인들을 돕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하나 신공부의 최고수라 할 수 있는 천위검호와 천라쌍익은 단상 주변에서 간간히 공세를 펼칠 뿐이다.
천위검호는 가슴을 베였기에 익숙지 않은 좌수로 유리검을 운용했다. 천라쌍익은 아예 쌍도를 놓고 맨주먹으로 적을 몰아쳤다.
평소였다면 일 권에 서너 명씩 날아갔으리라.
‘끝났어.’
공후탁은 슬쩍 한 걸음 물러섰다.
수하가 의자를 놨던 자리였다.
그리고 그 아래 비밀통로가 존재했다.
그는 자세히 살펴야 알 수 있을 만큼 맞물린 청석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남천휘의 도발로 인해 의자를 부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 때부터 예상했던 것 같다.
도망치기 위해서라도 의자를 치워놔야 한다고.
꽈드득-
두 주먹을 몇 번이나 쥐락펴락했다.
도주를 떠올리는 순간 지난 수십 년의 기억이 뇌리를 스쳐갔다.
아비를 죽이고, 자식을 가뒀다.
그리고 방해가 되는 자라면 적아를 가리지 않고 묻어버렸다. 욕망을 감추고, 인의의 가면을 썼던 세월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억울하기 짝이 없다.
딱 한 걸음만 더 나아갔다면 산동 강호는 자신이 것이 되었을 터였다.
‘아니지. 아직 끝이 아니야.’
공후탁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만 살아 있다면 재기할 기회는 충분했다.
청도문까지만 가면 활로가 열릴 것이다.
청도문을 통해 그들에게 연통만 넣을 수 있다면 기회는 다시 주어지리라.
그는 비밀통로 앞에서 전장을 살폈다.
이미 전황은 패색이 짙었고, 어느새 단상 근처까지 먼지가 일었다.
가장 앞에 천라쌍익과 천위검호가 자리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뼈를 묻을 것처럼 기세를 흩뿌렸다.
공후탁은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자신이 청도문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지만, 청도문주는 진짜 수하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두 사람이 저지른 실수를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쳐 죽이고 싶었다.
하나 지금은 믿고 맡길만한 녀석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내 곁으로 와라! 탈출한다!]
잠시 후 천위검호가 전선에서 몸을 뺐다.
그는 친동생보다 천위검호를 택한 게다.
‘어차피 저건 못 써.’
폐인이 된 천라쌍익보다 고쳐서 쓸 수 있는 천위검호가 나을 것이다.
콰직!
공후탁은 다시 한 번 전장을 살폈다.
여기저기서 떼로 뭉쳐 싸우는 까닭에 단상을 주시하는 자가 없었다. 게다가 가장 껄끄럽던 남천휘도 물러가지 않았던가.
콰직!
발을 가볍게 구르는 순간 격자로 놓인 청석이 가루가 됐다. 동시에 한 사람이 겨우 내려갈만한 시커먼 동혈이 입을 벌렸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을 내딛었다.
쉬리리릭-
그리고 그 뒤를 천위검호가 뒤따랐다.
‘일각, 아니 반각의 시간만 벌어도 광명정을 내려갈 수 있어!’
하나 몇 걸음 내딛기도 전 천위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누, 누군가 쫓아옵니다.”
공후탁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막아라.”
그의 신형이 더욱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남천휘는 이미 단상 주변까지 침투했다.
게다가 아예 단상과 대전 사이로 이동했기에 공후탁의 등이 훤히 보였다. 한데 잠시 후 천위검호가 전선에서 이탈하더니 단상에 올랐다.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아비와 자식도 버리더니 이제 동생도 버리네.
‘역시 쓰레기라고 해도 일관성이 있어야 성공하는구나.’
남천휘가 혀를 차는 사이 두 사람이 단상 위에서 사라졌다. 만약 남천휘가 전장에 난입하여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면 절대로 눈치 채지 못했을 만큼 은밀했다.
파팟!
이제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다.
남천휘는 길을 막아서는 무인 두 명을 걷어찬 후 단상에 올랐다.
‘하, 이거 만드느라고 돈은 또 얼마나 썼을까?’
한 숨과 함께 동혈로 몸을 던졌다.
그 때 저 멀리 비틀거리며 도망치는 천위검호가 나타났다. 놈은 스스로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대단한 충신 나셨고요.
“놈! 나를 먼저 넘어야 할 것이다!”
끝까지 자부심 쩔고요.
하나 천위검호의 말처럼 한사람이 서면 동혈 자체가 꽉 막힐 만큼 좁은 공간이다.
그래서 감사하고요.
남천휘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질풍뇌격궁을 꺼냈다.
이제는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 신나게 철시(鐵矢)도 뽑았다.
핑-
“헛!”
천위검호의 이름값은 허명이 아니었다.
오른쪽 가슴을 베였고, 익숙지 않은 왼손으로 검을 쥐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천휘의 내력이 담긴 철시를 쳐냈다.
“크흑!”
천위검호는 신음을 내뱉었다.
남천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철시를 연달아 쐈다.
핑핑핑핑핑-
다섯 발의 화살이 어둠을 꿰뚫었다.
챙챙!
천위검호는 눈에 불을 켜고 검을 휘둘렀다.
유리검법의 신묘함으로도 두 개의 철시를 쳐내는 것이 전부였다.
푹! 푹! 푹!
나머지 철시는 천위검호의 어깨와 가슴, 아랫배를 관통했다.
“끄으으으.”
천위검호는 피를 토하며 부르르 떨었다.
“어디서 화살이 계속…….”
콰직!
일곱 번째 화살이 천위검호의 안면에 꽂혔다.
남천휘는 쓰러진 천위검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활과 화살을 인벤토리에 넣은 후 천위검호를 타넘었다.
‘죽인다.’
어둠속에서 기광(奇光)이 번뜩였다.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신속과 귀식을 통한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 어둠에 동화되어 적을 쫓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큰 위협을 느낍니다.
◎ 특기 ‘추노(追奴)’가 등록되었습니다.
- 적을 쫓을 때 이동 속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 군중 속에서 목표를 확인하기 수월해집니다.
호오, 꽤 쓸 만한 녀석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하나씩 모으다보면 정말 살수 전용특기가 개화될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런데 너 왜 이렇게 목소리를 깔아?’
동굴이라고 분위기 맞추는 것 같잖아.
특기 목록을 힐끔 쳐다본 결과 특기 추노의 등급은 ‘A’였다. 생각보다 등급이 높다. 저런 부가 효과라면 B급이 걸맞을 터였다.
아니나다를까 재이의 알림은 계속 됐다.
◎ 천성혈법과의 연계성이 발견되었습니다.
◎ 특기 ‘추노’의 부가 기능이 추가됩니다.
하늘이 보이지 않았으나, 좋은 곳에 계실 단양자를 향해 몇 번이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천성혈법으로 인해 혈인도를 얻지 않았던가.
한데 제대로 천성혈법을 수련하지도 않았거늘 추가 기능이 개화된 게다.
‘그래서 뭔데?’
《낙인(烙印)》
- 추노가 활성화되었을 때 실행이 가능합니다.
- 이십장 내에서 낙인을 찍을 수 있습니다.(0/1)
- 낙인이 찍힌 대상은 영역 안에서 지도에 위치가 표시됩니다.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낙인을 찍은 대상을 놓친다면 달포가 지나야 새롭게 표식을 새기는 것이 가능하단다. 그 말인즉슨 공후탁에게 낙인을 찍으면 추적이 가능하다는 뜻이 아닌가.
‘말 그대로 추노네.’
그 때 동굴의 구조가 일자로 변했다.
광명정을 내려가기 위한 통로였으니 미로처럼 만드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남천휘는 때마침 등장한 공후탁을 발견하고 숨소리를 죽였다.
‘낙인은 어떻게 찍어야 하는 건데?’
◎ 주먹을 쥔 상태에서 엄지와 검지를 펴세요.
남천휘는 본능적으로 검지의 끝으로 공후탁을 겨눴다.
‘이렇게 하는 거지?’
칭찬 대신 단조로운 대꾸가 돌아왔다.
◎ ‘빵’이라는 구호와 함께 반동을 주세요.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영문 모를 소리는 둘째 치고서라도,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운 한 마디가 아닌가.
이 자식이 또 장난을 치는 것 같은데.
그 순간 몇 개 되지 않는 횃불이 자취를 감췄다. 동굴의 길이 굽이졌다는 증거였다. 이대로라면 놈을 놓칠 것이 분명했다.
남천휘는 어쩔 수 없이 검지를 튕기며 나직이 읊조렸다.
띠릭-
그 순간 놀랍게도 저 멀리 보이던 공후탁의 등 한 가운데 붉은 점이 나타났다. 마치 위치를 알려주듯 점멸을 반복하는 모양새가 참으로 신기했다.
“으아아!”
공후탁은 벽을 박차고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남천휘는 공후탁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지도를 바라봤다.
‘됐다!’
낙인의 효과는 확실했다.
남천휘는 오히려 속도를 늦췄다.
어차피 전력을 다해봤자 이미 벌어진 거리를 좁히는 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공후탁은 동굴의 지리를 숙지했고, 지금껏 손 한 번 흔들지 않고 휴식을 취하지 않았던가.
‘낙인만 쫓아간다.’
진짜 도망 노비를 쫓듯 은밀하게.
남천휘는 공후탁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동굴을 주파했다. 한데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알림이 다시 한 번 들려왔다.
◎ 중요한 순간 완급을 조절하는 불굴과 집중으로 인해 은밀함을 증명했습니다.
◎ 특기 ‘잠행(潛行)’이 등록되었습니다.
오호! 오늘 왜 이래?
마치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는 듯했다.
◎ 특기 잠행과 귀식이 합쳐져 살수의 기본 자격을 갖췄습니다. 대상자의 직업적 특성으로 인해 살수 고유특기인 은신(隱身)이 등록되었습니다.
떴다. 떠버렸다!
진짜 살수가 됐다.
B급 귀식과 잠행이 합쳐져 A급 은신이 된 셈이다.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내달렸다.
마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거칠 것이 없었다.
‘오늘의 운수는 대길이로구나.’
*
공후탁은 동굴 밖으로 뛰쳐나오는 순간 길이 아닌 곳으로 내달렸다. 십여 보 정도 뛰었을까. 사냥꾼이나 약초꾼이 머물 법한 낡은 초옥이 나타났다.
“나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방갓을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공후탁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외형을 지녔다.
“주군.”
공후탁은 사내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며 관(冠)과 장포를 벗었다.
“합류 지점까지 쉬지 않고 달려라.”
“존명!”
사내는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채 공후탁의 관과 장포를 걸친 채 산길로 향했다.
공후탁은 그제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남천휘와의 거리를 이십여 장 넘게 벌린 상태였다.
놈은 동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산길 아래로 달려가는 자신을 쫓아가리라.
“내 꼴이 참으로 우습군.”
공후탁은 흙 맛이 느껴지는 침을 모아 뱉었다.
어찌나 빨리 뛰었던지 뒤늦게 수치스러움이 몰려왔을 정도였다.
그는 초옥으로 향했다.
간단하게 짐을 챙긴 후 곧장 청도문으로 갈 생각이다.
‘일 년 안에 재기하여 놈들을 쓸어…….’
끼익-
공후탁은 문을 반쯤 여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남천휘가 곡식 자루 위에 걸터앉은 채 건량을 오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퉤. 더럽게 맛없네.”
그는 육포 조각을 입에 넣은 후 공후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와. 추노꾼은 처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