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44화 (144/305)

67, 신공부 탈출. (4)

*

공태령은 옷에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온 몸이 흙투성이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해혈로 인해 내공을 회복했다.

그러니 도구가 필요 없었고, 육신은 지치지 않았다.

열 번 파야 할 곳을 한 번에 파냈고, 일각 정도면 지쳤던 몸은 반 시진 가까이 버텨냈다.

“남 소협. 땅굴 파는 법은 좀 익히셨…….”

한데 남천휘는 책을 쥔 채 굳은 표정으로 탐독하는 중이다. 그가 다가선 것조차 모를 만큼 깊이 빠져 있었다.

공태령은 잠시 남천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뒷걸음질 쳤다.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 발소리까지 죽인 채 말이다.

남천휘는 공태령이 사라지자마자 비스듬히 누웠다.

‘방해꾼은 갔고.’

손가락을 튕기자 방금 부여받은 퀘스트의 내용이 나타났다.

《할아버지의 추억을 지켜라》

- 공야청과 남추의 우정은 진짜였습니다.

- 우정의 증표였던 비천무상도는 변질됐습니다.

- 비격진천도(飛擊震天刀)를 회수하세요.

- 회수 가능 인원(3/3)

※ 본 퀘스트는 2명 이상의 회수를 목적합니다.

이런 곳에서 조부의 이름을 확인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남천휘가 고른 책은 공태령의 조부, 즉 전대 신공부주였던 공평이 쓴 평전이었다.

그는 유운림에 갇힌 후 땅굴을 파면서 집안의 계보를 정리한 듯했다. 그리고 평전의 주인공은 남추의 VR에 등장했던 공야청이었다.

남추는 비천무상도를 가감 없이 전했지만, 공야청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듯했다.

그 결과가 비격진천도(飛擊震天刀)일 터였다.

그러니 퀘스트는 비격진천도를 익힌 세 명 중 두 명에게서 도법을 회수하라는 뜻이다.

세 사람의 면면은 생각할 것도 없다.

공후탁과 공후탄, 그리고 공태령일 터였다.

셋 중 둘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일단 공태령의 뒤통수를…….’

남천휘는 음흉하게 웃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제아무리 퀘스트로 인한 보상이 중요해도 이건 아니지 싶다. 이미 선인의 탈을 쓴 악인이 두 명이나 있지 않은가.

단지 퀘스트의 편의를 위해 공태령을 건드린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남천휘는 자신의 우의(友誼)에 탄성을 흘렸다.

‘정리 좀 하자.’

평전을 덮었다.

일단 히든 퀘스트인 ‘할아버지의 추억을 지켜라’는 메인 퀘스트가 끝났을 때 자연스럽게 달성될 터였다.

게다가 제한 시간도 없다. 결국 메인 퀘스트 ‘중간보스’에 얽혀 있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만약 내가 중간보스를 깨고 이 책을 봤어도 퀘스트가 발동했을까?’

◎ 퀘스트 물품은 대상자의 시간과 장소, 무위에 영향을 받아 지정됩니다.

그 후에 발견했다면 그저 조상의 이름이 적힌 평전에 불과했으리라.

재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한데 불현 듯 묘한 상상이 일었다.

‘그럼 퀘스트 자체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거야? 아니면 때와 장소에 맞춰서 지정되는 거야?’

재이는 침묵했다.

단박에 거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권한을 따져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잠시 후 제한된 정보가 전해졌다.

◎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가 인스톨 되던 시기에 대부분의 퀘스트가 지정되었습니다.

남천휘는 표정을 굳혔다.

그가 눈앞에서 검은 막대를 보았던 시기는 대략 십 년이다. 십 년 동안 하늘로 예상되는 시스템이라는 존재가 퀘스트를 만들었단다.

설마 내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하여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도 된 것일까?

신공부주의 뜻대로 평생을 살았다는 공태령의 사연을 들었기 때문일까.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사안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혼자?’

미끼를 던져봤지만, 쉽게 물지 않는다.

◎ 정보 검색 권한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불현 듯 재이에 관한 의문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마치 자신이 이런 곳에서 평전을 발견한 것 또한 재이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건 나의 의지인 건가?”

재이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 오롯이 대상자의 의지로 인한 결과입니다.

- 그 결과 대상자의 기간 대비 성장 예정치가 지난 3일 간 -1% 조정됐습니다.

하락했다는 말에 안심하게 될 줄이야.

“더 쉬운 길이 있었다는 건가?”

◎ 본래 특급 강호인 승급체계의 핵심인 레벨 업 시스템은 대상자의 성장을 위해 최적화된 루트를 생성한 후 퀘스트를 제공합니다. 그로 인해 특급 강호인의 최적화된 성장을 도모합니다.

남천휘는 표정을 굳힌 채 읊조렸다.

‘무적자인가.’

그 순간 예기치 못했던 기음이 들려왔다.

재이의 알림이 아니라 시스템의 신호가 분명했다.

《대상자의 심리 상태를 분석합니다.》

- 불안과 불신이 미약하게 확인되었습니다.

- 재이와의 원활한 신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솔루션을 제시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불안과 불신이라니.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리고 이내 솔루션이라는 것이 제공됐다.

◎ 현재 신공부 내에 존재하는 퀘스트는 124개입니다. 신공부주와 악연을 맺었기에 45개의 퀘스트가 자동 포기됩니다. 유운림에 갇혔기에 36개의 퀘스트가 삭제되었습니다. 시간제한으로 인하여 22개의 퀘스트가 자동 종료 예정입니다. 장소제한으로 인하여 17개의 퀘스트가 자동 종료 예정입니다.

◎ 유운림에서 획득 가능 퀘스트는 4개입니다.

◎ 현재 1 개의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1/4)

남천휘는 어색하게 웃었다.

솔루션의 뜻이 해결책임을 전해 듣고는 더욱 멋쩍게 웃었다. 오랜만에 진실의 몽둥이로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듯했다.

‘선택도 내 몫이고, 결과도 내 몫이란 거지?’

◎ 대상자가 특정 직업으로 전직했을 시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는 가장 빠른 성장을 위하여 퀘스트를 제공했을 겁니다. 하나 대상자가 자의에 의하여 ‘무적자’로 각성했기 때문에 레벨업 시스템은 대상자의 행동으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에 대하여만 퀘스트를 부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적자가 되었기에 의원의 특기를 획득했고, 살수나 간자의 특기 또한 등록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무적자가 된 이후 생성된 퀘스트를 보면 대부분 가족의 안위와 곡부남가의 성장을 기본으로 하지 않았던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 위주로…….’

◎ 현재 유운림에 거주하게 된 이후 획득한 퀘스트의 등급을 삭제된 신공부의 퀘스트와 비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비교하시겠습니까?(y/n)

남천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내 뜻이 아니던가.

이미 없어진 퀘스트와 비교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을 터였다. 오히려 낮으면 아쉽고, 높으면 신경이 쓰이지 않겠는가.

‘됐다.’

공태령처럼 꼭두각시가 된 듯한 기분이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씨처럼 사그라졌다.

◎ 지금까지 삭제되거나, 종료된 퀘스트의 종수도 확인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y/n)

남천휘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려다 인상을 썼다.

‘야!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이 새끼, 대답이 없다.

남천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뭐가 됐든 퀘스트를 완료하려면 한 시라도 빨리 탈출해야 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탈출 퀘스트라도 띄워주던가!’

재이는 대답이 없다.

이 자식, 아까 놀린 것 맞네.

빌어먹을! 시스템도 성장형이냐?

남천휘는 입맛을 다시며 퀘스트 내용을 복기했다.

그러던 중 묘안을 떠올렸다.

‘어!’

생각해보니 공태령과 단 둘이 있는 이 순간이야 말로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어차피 녀석은 강호를 떠난다고 했으니…….’

비격진천도의 약점을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더불어 공후탁과 공후탄의 약점까지 알아낼 수 있다면 놈들을 상대하기 한결 수월할 터였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도법이 어땠더라?’

그러고 보면 지금껏 공태령의 무위조차 제대로 확인한 기억이 없다. 애초에 남색이라는 편견에 치우쳐 본질을 보지 못했다. 그랬으니 녀석의 진짜 성격을 마주했을 때 경악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기껏 생각난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게 패도적이고, 쾌속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일단 부딪쳐 봐야지.’

남천휘는 땅굴로 향했다.

잠시 후 땅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왜 이러십니까?”

“조금만 옆으로 가봐. 같이 파보자.”

“아니, 그러니까 여기는 원래 일인용…….”

공태령이 말을 끊었다.

남천휘의 능글맞은 한 마디가 이어졌다.

“야! 남자로 보지 마라. 우리 용봉삼협이야. 셋이 함께 있어야 완성체가 되는 거라고. 네 취향을 존중하듯, 내 취향도 존중해줘야 해.”

“하아……. 진짜 피곤하군요.”

“그럼 잠깐 쉴까? 겸사겸사 비격진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때?”

잠시 후 공태령의 무덤덤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남 소협은 여자한테 인기 없지요?”

*

태산은 산동성의 중부에 위치했다.

하나 태산의 지류는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험준한 산세를 자랑했다. 동쪽으로 나아가면 청도문의 영역인 청도까지 뻗어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누군가 태산에 올랐다고 하면 정확하게 물어봐야 한다. 동산만한 곳도 태산의 지류였고, 이쑤시개 같은 험준한 봉우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명정(廣明頂)은 평평한 정상을 제외하면 어느 것 하나 눈에 띄기 힘든 장소였다.

하나 광명정은 유자에게 뜻 깊은 명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곡부의 삼대 명소 중 한 곳인 공묘를 지나면 곧장 광명정이 나타났다.

그렇기에 공부, 공묘를 지나 경기도, 광명정까지 이르는 길은 유자가 사색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잠깐! 멈추시오.”

학사의를 걸친 노문사는 앞을 막아서는 무인들을 보고 인상을 썼다.

경기도(景氣途)는 좌우에 삼림이 없어 햇살이 오롯하게 비치는 장소였다. 그렇기에 유자나 문사라면 한 번쯤 걸어보는 명소가 아니던가.

노문사의 곁에 있던 시동이 나섰다.

“무슨 일이신데요? 이분은 사학대관의 홍죽 선생이십니다.”

무인은 사학대관을 아는 듯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홍죽 선생은 무인의 예의바른 모습에 화를 누그러트렸다.

“경기도를 지나 광명정에 갈 생각이네. 한데 신공부의 무인이 앞을 막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인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이틀 전부터 광명정은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선생께서는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홍죽 선생은 미간을 찡그렸다.

“유가의 대례사나 제를 지낼 시기가 아니지 않은가. 한데 금지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무인은 비밀도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신공부주께서 긴급 대회의를 개최하셨습니다. 현재 광명정에는 공문십철의 수뇌부가 모여 신공부의 앞날을 축원하고 있사옵니다.”

홍죽 선생은 헛기침을 했다.

사학대관은 유서 깊은 학관답게 강호의 정세도 어렴풋이 전해들을 수 있었다.

‘산동성 곳곳에 악적이 횡행하고, 청도문 소문주가 암살당했다더니…….’

지금껏 잠잠했기에 그냥 넘어가는 듯했다.

하나 신공부가 긴급 대회의를 열었다면 분명 강호의 정세에 관한 사안이리라.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신공부 내에 도적이 들어 유서 깊은 고택을 불태웠다고 하지 않았던가.’

홍죽 선생은 슬그머니 발길을 돌렸다.

제아무리 명망이 높은 유자라고 해도 칼 맞으면 죽는 것이 상식이다.

‘군자가 비를 피하는 건 흠이 되지 않을 터…….’

그는 화초처럼 잘 가꾼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신공부주께서 뜻한 바가 있으시니 촌부는 이만 물러가야겠군. 돌아가자.”

무인은 시동과 함께 돌아가는 노문사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껏 수십 명의 유자들이 저처럼 핑계를 대고 발길을 돌리지 않았던가.

그는 광명정을 올려다봤다.

‘부주께서 산동강호에 군림하신다면 저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리라.’

칼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더했다.

곧 칼집 속에서 인고의 세월을 버텨야 했던 칼을 뽑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만 되면 오랜 시간 수련해온 무위를 만천하에 뽐낼 수 있으리라.

‘피로 만든 명성이야 말로 진짜지.’

그는 신공부주가 하산할 때 무인으로 등장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신공부는 광명정에서 수많은 행사를 치른다.

제례를 올리거나, 축원을 하거나, 신공부의 큰일을 논의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한데 그 어느 때보다 광명정이 부산스럽다.

광명정 주변에 위치한 수십 채의 가옥에서 유자와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시선은 광명정 안쪽의 대전에 꽂혔다.

남천휘의 어머니인 안자영과 천수련은 모녀지간처럼 손을 맞잡은 채 근심 가득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장주께서 노구에 버텨내실지 모르겠어요.”

천수련의 말에 안자영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괜찮으실 게야. 수 년 간 신공부주의 야욕을 홀로 막아내신 분이다. 괜찮으실 게야.”

하나 긴급 대회의는 공문십철의 수뇌부가 아니면 참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대전 곳곳에 포진한 무인들을 보고 있자니 불안함은 배가 됐다. 그렇기에 안자영의 손은 축축하게 젖어갔고, 천수련은 그것을 느끼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바보, 멍청이, 똥개. 어디 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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