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신공부 탈출. (2)
*
무인에 대한 평가는 무위와 삶에 따라 변한다.
별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천휘의 별호가 호도에서 귀협으로 바뀌었듯 공후탄 또한 여러 별호를 얻었다.
지금에서야 천라쌍익으로 대표되지만, 이전의 별호만 따져 봐도 그의 행적을 짐작케 했다.
광호후(狂虎吼), 혈적쌍도(血積双刀), 사인도(死寅刀).
‘미친 호랑이의 울음’이나, ‘피로 산을 쌓은 쌍도’라는 별호만 봐도 음습한 느낌이 가득하다.
하나 누구도 그를 예전의 별호로 부르지 못했다.
이제는 쌍도를 펼치면 하늘의 그물이 드리워진 듯하다는 멋들어진 별호로만 불렸다.
공후탄은 자신에게 천라쌍익이라는 별호를 만들어준 신공부주를 바라봤다.
“놈이 사라졌소.”
“금삭령이 뚫린 게냐?”
“아니외다. 유운림으로 들어갔소.”
신공부주는 유운림(遊雲林)이라는 지명에 미간을 좁혔다.
“쯧, 하필 왜!”
“놈도 알고 간 건 아닌 듯하오. 이렇게 된 이상 불을 질러서 유운림 자체를 없애버립시다.”
공후탄은 불장난을 할 기대에 부푼 표정이다.
하나 신공부주는 마뜩찮은 표정을 지을 뿐 허락하지 않았다.
“유운림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이가 없다. 괜스레 불이라도 질렀다가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이야.”
“쯧쯧, 산동을 먹겠다는 사람이 그렇게 남의 눈치를 봐서야 되겠소.”
“닥쳐!”
신공부주의 한 마디에 공후탄을 입을 닫았다.
평소와 달리 신공부주의 속내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신공부주는 가족이라도 해도 득이 되지 않으면 비싼 값에 팔아먹어야 직성이 풀릴 터였다. 이럴 때에는 섣불리 나서지 말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봐야 했다.
“흐음.”
“어찌 할까요? 내가 애들이라도 이끌고 난입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신공부주는 동생의 조심스런 한 마디에 고개를 내저었다.
“잠깐, 이거 잘하면 묘수가 될 수도 있겠는 걸?”
공후탄을 말을 아꼈다.
신공부주가 광목재사에게 원한 건 군사가 아니었다. 기회가 왔을 때 모든 것을 뒤집어써줄 방패막이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는 그만큼 신공부주의 모략을 믿었다.
잠시 후 신공부주는 공후탄이 감탄할만한 모략을 뽑아냈다.
“밖에서 안을 확인할 수 없듯 안에서도 밖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니 신공부의 유자와 하급 무인들만 배치해. 그리고 내 이름으로 공문십철에 배첩을 돌려라.”
“대회의라면 노국장주가 참석할 리 없소.”
신공부주의 눈매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정기 회의라니 무슨 소리야? 백 년 넘게 외인의 출입을 엄금했던 신공부에 도적이 들었다. 신공부의 존망을 걸고 대응해야 해. 긴급회의를 소집해라.”
공후탄은 탄성을 내뱉었다.
“귀협이 나오면 도적으로 누명을 씌운 후 노국장을 압박하고, 놈이 나오지 않으면 외적으로 삼아 긴급회의를 열 수 있군요!”
신공부주의 새빨간 혀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명분으로 삼기에 부족하기는 해도 시도할만은 해. 지금 당장 시행해라.”
철그렁.
공후탄은 쌍도가 부딪칠 만큼 격하게 무릎을 꿇은 후 자리를 떴다. 그 또한 이번 일을 통해 지금까지의 머뭇거림이 사라질 것이라 확신했다.
신공부주는 유운림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야 모든 오욕을 뒤로 한 채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
신공부 내에 이런 곳이라면.
‘은거한 전대의 노학사인가?’
남천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신공부주의 성향을 확인한 이상 누가 됐든 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한데 주변을 살펴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손길이 닿은 텃밭만 봐도 누군가 있음이 분명했다.
결국 초옥에 누군가 있으리라.
남천휘는 기다리는 것과 수색하는 것 사이에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데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초옥의 문이 열렸다.
끼익-
그리고 예상치 못한 존재가 등장했다.
“뭐야?”
토인(土人)이다.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어린 아이가 하루 종일 놀다 들어왔을 때의 모습이 딱 저러하지 않을까 싶다. 온 몸에 진흙을 뒤집어쓴 존재를 마주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토인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남천휘를 바라봤다.
“하아.”
“어! 너!”
전자는 토인의 반응이고, 후자는 남천휘였다.
남천휘는 이마를 짚은 채 난감해하는 토인에게 물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토인은 불청객을 마주하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냇가로 가서 얼굴을 닦은 채 돌아섰을 뿐이다.
“여기가 제 집입니다.”
남천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용봉쟁투가 끝난 후 헤어졌던 공태령이다. 그리고 이곳은 신공부였으니 그가 나타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남천휘는 초옥과 주변의 대숲을 돌아봤다.
진법까지 펼쳐져 있는 폐쇄적인 공간.
만성피로를 주장하는 공태령과 더없이 어울리는 장소였다.
“너 같은 곳에서 사는구나.”
공태령은 세안을 마친 후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갇혀 있는 겁니다.”
야! 그런 말을 담담하게 해도 되는 거냐?
남천휘는 신공부의 소부주가 갇혀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신공부주의 이중성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더더욱 신공부주는 신공부의 상징적인 존재인 공태령을 끼도 돌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 그러냐.”
남천휘는 버름한 마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야, 그래도 풍광이 좋네. 정성들여서 가꿨나봐?”
공태령은 옷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며 말했다.
“조부께서 갇혀계셨거든요. 화초를 가꾸고, 텃밭을 일구는 것이 그분의 취미셨습니다.”
이쯤 되면 제아무리 무신경한 남천휘라고 해도 말문이 막혔다.
공태령은 냇물을 뜨더니 평상에 앉았다.
그러더니 남천휘를 향해 손짓했다.
“앉으세요. 대접할 게 이런 것 밖에 없군요.”
“…….”
“괜찮습니다. 불편해하지 마세요. 조부께서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 문제가 아니야!
공태령은 남천휘가 머뭇거리자 대숲을 바라봤다.
“아! 걱정 마세요. 유운림은 아무도 못 들어옵니다. 아예 출입이 불가능하거든요.”
그 문제도 아니야!
‘그래도 그건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네.’
남천휘는 평상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근원적인 질문을 건넸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조부께서 갇혀 계셨으면 원래 네 집도 아니잖아.”
공태령은 어깨를 으쓱였다.
“섬예검귀 갈벽을 기억하십니까?”
“응.”
“그가 협곡에서 무리를 숨겨두고 용봉쟁투의 후기지수들을 암살하려 했었지요?”
“그랬지.”
남천휘의 시큰둥한 한 마디에 공태령은 냉수가 시원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목표가 저였습니다.”
“아, 그렇구나. 뭐라고?”
잠깐, 이러면 이야기가 이상해지는데.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섬예검귀 갈벽은 청도문 소속이었다.
하나 신공부주와도 관계가 있을 터였다.
곡부남가를 습격한 혈랑회주를 통해 확인하지 않았던가.
“놈이 너를 노렸다고 치자. 그래, 그러고 보니 곡부남가를 습격한 놈들 중에 황보세가의 권법을 쓰는 놈들이 있더라. 서산노옹께서 잘못 보셨을 리 없으니 맞을 거야. 그럼 갈벽이 황보세가의 권법을 익힌 자들로 너를 죽이려 했다는 거야?”
“그랬을 겁니다.”
남천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랑 네가 여기에 갇힌 거랑 무슨 관계인데?”
“신공부주가 원했거든요.”
점점 문제가 심각해지네.
섬예검귀의 계략이 성공했다면 그 순간 신공부와 황보세가의 전면전이다. 그리고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청도문은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간을 보겠지.
그로 인해서 신공부주가 무슨 득을 보겠는가?
아니, 애초에 세상 어떤 아비가 자식을 죽여서 무언가를 얻으려 하겠어.
남천휘는 잠시 남운군과 안자영을 떠올렸다.
세상이 무너져도 자신을 품고 하늘을 받아내실 분이 아닌가.
“네가 너무 편안하게 말하니까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아. 그냥 설명해봐. 어떻게 된 거야?”
“신공부주는 저보다 그를 더 아꼈고, 제가 그의 대용품이 되어주기를 원했습니다. 하나 가짜가 진짜를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이제야 공태령이 대협의 가면을 쓴 채 투계의 본성을 숨겼던 이유를 알 듯했다. 그리고 지금의 모습은 남천휘가 당황스러울 만큼 자연스러웠다.
이게 녀석의 진짜였다.
“형제가 있었어?”
“쌍둥이였습니다. 오래 전에 죽었지만요.”
갑작스런 가족사에 한 숨이 절로 나왔다.
‘하긴 신공부주처럼 남의 눈을 의식하는 자라면 남색에 질색할 수밖에…….’
하나 공태령은 여전히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한 어조였다.
“여기까지 쫓겨 온 것으로 봤을 때 남 소협도 신공부주에 관해서 알만큼 알게 된 듯하군요. 그는 유가의 신공부가 아니라 무가의 신공부를 원했고, 산동강호에 홀로 군림하고자 합니다. 눈엣가시를 처리하고, 명분도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계획이었더군요. 제가 그 날 섬예검귀를 죽일 때 함께 하자고 했지요.”
“응, 너 혼자도 처리할 수 있는 자였는데 함께 싸우자고 했지.”
“맞습니다. 혼자 죽일 수 있었어요. 하나 청도문의 소문주인 초류혁이 죽었을 때 깨달았습니다. 그 날의 계획으로 저를 노렸음을요. 하여 신공부주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화협과 귀협을 끌어들였습니다. 하나 신공부주는 일이 실패했을 때부터 저를 용납할 생각이 없었더군요.”
“아……. 차라리 도망치지 그랬냐?”
공태령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숙부라고 칭하고, 감시자라고 표현해야 할 존재가 있었거든요. 마린보의를 넘긴 이후 곧장 이리로 끌려왔습니다.”
남천휘는 우연히 용봉쟁투를 찾아왔다던 천위검호를 떠올렸다. 그가 공태령을 감시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럼 마린보의를 넘긴 건?”
공태령은 그제야 피식 웃었다.
“어차피 신공부로 끌려오면 빼앗길 물건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빼앗기느니 남에게 주는 편이 나았지요.”
“줄까?”
남천휘가 옷을 들추며 물었지만, 공태령은 손사래를 쳤다.
“됐어요. 신공부와 관련된 어느 것도 가지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이제는 보의를 걸쳐봤자, 쓸모도 없고요.”
공태령은 자신의 가느다란 손목을 내밀었다.
손목에서 시작된 푸르스름한 힘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범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혈도를 엄청나게 찍혔거든요.”
그러고 보니 진흙을 털어낸 공태령의 얼굴은 병자처럼 창백했다.
공태령은 턱짓으로 남천휘를 가리켰다.
“이제 귀협의 차례입니다.”
“아! 내 이야기를 하라고?”
남천휘는 반문을 하면서도 의아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공태령의 말만 들으면 이곳은 출입이 금지된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는 혈도를 잡힌 채 피폐한 삶을 이어갔다. 시간이 멈춘 듯한 진법 속에서 세인에게 잊힌 채로 죽어갈 것이 분명했다.
하나 공태령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마치 이제 삶을 시작한 사람처럼 초롱초롱했다.
게다가 외부의 소식에 관심을 가지는 행위는 포기한 사람의 선택지가 아니었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개똥이, 아니 천 소저와 함께…….”
저간의 사정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녀석은 개똥이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잠깐 눈빛이 흔들렸으나, 이후로는 다시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노국장주는 쓸데없이 대단한 분이군요.”
남천휘는 외조부를 욕보이는 공태령에게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노국장주의 올곧은 신념을 인정할 뿐 받아들이지 못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깟 신공부가 뭐라고.
어차피 신공부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강호의 문파로 활동했다. 다만 유가의 교리를 바탕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것을 무가의 논리로 바꾼다고 해서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싶다.
“하나 존경스럽네요.”
공태령의 한 마디에는 진심이 담겼다.
남천휘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신념이란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것도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졌을 뿐 올곧은 신념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터였다.
“내 외조부야.”
“아! 그건 몰랐습니다.”
남천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태령이라면 알고도 저리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재단했다. 하나 그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구겼다.
“죄송합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런가봅니다.”
유가의 성지라는 신공부의 소부주가 할 말은 아니다. 하나 반박할 수 없는 것을 보니 이 또한 신공부주의 잘못처럼 여겨졌다.
“됐어. 나도 너를 그렇게 생각했잖아.”
공태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원래 저만 아는 사람입니다. 남 소협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남 소협이 이곳으로 도망쳤으니 저 밖은 신공부의 무인들이 가득하겠군요.”
남천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미안하게 됐다.”
한데 공태령은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차라리 잘 되었어요. 시선을 이쪽으로 끌었으니 다른 곳은 허술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천라쌍익까지 봤다면서요? 그는 한 번 노린 먹잇감은 절대로 놓치지 않아요. 분명 안달난 개처럼 대숲 밖에서 방황하고 있을 겁니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히죽거렸다.
공가제일도라 불리는 천라쌍익을 안달난 개 취급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공태령은 의아하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피곤하게 왜 이러실까요? 제가 여기 갇혀서 죽으려고 했다면 뭣 하러 이런 꼴을 하고 있겠습니까?”
하긴 피곤을 입에 달고 다니는 놈의 복장만 봐도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한데 이 놈은 본성이 드러날수록 묘하게 거슬린다.
차라리 피곤을 입에 달고 사는 권태로운 남색가 놈이 나을 듯했다.
하여 남천휘는 시큰둥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뭐? 땅굴이라도 파고 있었냐?”
그 순간 공태령은 양 손을 허리에 얹고,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거의 다 뚫었어요. 할아버지 때부터 팠거든요.”
남천휘는 헛웃음을 흘렸다.
‘너네 아픈 가족사를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밝히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