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신공부 탈출. (1)
67, 신공부 탈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인피암어는 위아래가 똑같았다.
좌우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시스템이 광목재사의 팔뚝에서 뜯어냈기에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남천휘는 인피암어를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결론을 낼 수 없었다.
결국 재이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거 어쩔 거야?”
◎ 금고에 충격을 가하면 내부에 숨겨진 진천뢰가 폭발합니다.
남천휘는 눈을 질끈 감고 뒷목을 부여잡았다.
“누가 부순다고 했냐? 이거 어쩔 거냐고?”
하나 재이는 제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침묵했다.
남천휘는 재차 재이에게 따져 물으려다 한 숨을 내쉬었다. 놈들의 말처럼 기름을 먹은 기둥은 아무런 저항 없이 불길을 받아들였다.
그 덕에 벌써 사방에 불길이 가득했다.
열 수도 없고, 부술 수도 없는 상황.
앞뒤가 꽉 막힌 듯했다.
그러다 불현 듯 한 가지 묘수가 뇌리를 스쳤다.
‘인벤토리에 넣으면 되잖아.’
지금껏 열쇠나 다름없는 인피암어를 지녔기에 신의 선물이나 다름없는 인벤토리의 공능을 잊고 있었다.
지붕도 넣었거늘 이깟 금고쯤이야!
“크큭! 요건 몰랐을 거다.”
남천휘는 희희낙락하여 금고에 손을 댔다.
하나 몇 번을 외쳐 봐도 금고는 사라지지 않았다.
◎ 퀘스트 관련 물품입니다.
- 귀속이 불가능합니다.
꼼수는 통하지는 않는단다.
‘하아, 그냥 때려치울까?’
하나 금고에서 실마리를 얻지 못한다면 ‘중간보스’의 난이도가 대폭 상승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남천휘는 인피암어를 금고에 댄 채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광목재사의 시신에서 확인했던 팔뚝의 흔적을 떠올랐다.
‘손목 쪽이 길었어.’
남천휘는 인피암어를 팔뚝 안쪽에 대고, 이리저리 방향을 맞춰봤다. 한데 팔뚝을 옆으로 눕히거나, 세울 때마다 위쪽의 방향이 달랐다.
‘둘 중 하나인데.’
남천휘가 고민하는 사이에 불길은 이미 기둥을 타고 올라가 지붕까지 번진 상태였다.
‘어쩔 수 없지!’
남천휘는 자신이 가장 먼저 취했던 자세를 선택했다. 별다른 계획 없이 자연스럽게 취한 자세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광목재사도 다른 의도가 없었다면 마찬가지였기를 기원했다.
‘안 되면 신공부주 목이라도 따야지.’
난이도 대폭 상승보다는 그 편이 나을 터였다.
남천휘는 팔뚝을 세운 채 금고로 다가갔다.
그리고 백여 개의 막대를 인피암어에 새겨진 부분만 골라서 눌러버렸다.
마흔세 번을 누르는 내내 심장이 쫄깃했다.
회회회판을 연속해서 돌릴 때보다 긴장되더라.
그리고 모든 표식을 눌렀을 때 경쾌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됐어! 나는 되는 놈이야!’
남천휘는 주저앉을 뻔한 것을 겨우 참고 금고의 문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무겁기는 더럽게 무겁네.’
한데 금고의 내부를 보는 순간 짜증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손바닥만한 금원보가 바닥부터 겹겹이 쌓여 있었고, 유명 전장의 전표가 가득했다. 백 장으로 이뤄진 묶음이 일견하기에도 수십 개였다.
‘아! 당신은 정말 훌륭한 것을 남겼어.’
남천휘는 금원보와 전표를 모조리 인벤토리에 넣었다.
남은 건 얇은 책자였다.
노국십멸(魯國十滅)이라는 제목만 봐도 노국장을 대상으로 한 지침서가 아닐까 싶다.
남천휘는 얇은 책자를 펴고 재빨리 살폈다.
확실히 노국장을 멸하기 위한 열 가지 방안이 시기와 난이도에 따라 적혀 있었다.
“하아.”
흑도를 가장하여 노국장의 가솔들을 참살하는 방법이 여섯 번째였다. 일곱 번째부터는 더욱 교묘하고, 지독한 방법이 적혀 있었다.
하나 남천휘는 열 번째 방법을 확인한 후 입꼬리를 올렸다. 노국장을 쳐내고, 신공부주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열 번째 방책이야 말로 실마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인정, 진짜 인정.’
남천휘는 허공을 보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열 번째 방법대로만 된다면 중간보스에 대한 난이도는 충분히 하락한 셈이다.
콰쾅!
하늘을 향해 공경의 엄지를 선보였거늘.
그 순간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빌어먹을!’
일단 빠져나가자.
*
광목재사의 처소는 광안전이라 불렸다.
고루거각이 즐비한 신공부 내에서도 눈에 띌 만큼 화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공부주는 외인의 눈을 의식하여 겉치레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일인지하만인지상이라 불린 광목재사의 처소가 가장 사치스러웠다.
“건물이 큰 만큼 불길도 거세군.”
비(秘)는 팔짱을 낀 채 활활 타고 있는 광안전을 응시했다. 그는 신공부주의 여러 수족 중 부 내의 일을 도맡았다. 응(鷹)이 신공부주의 눈이라면 비는 손가락이나 다름없었다.
“준비는 끝났는가?”
비의 말에 수하가 고개를 조아렸다.
“일각 후 하인들이 달려올 겁니다.”
“불타는 건 광안전만이어야 해. 신공부의 모든 건물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소다. 절대 불이 옮겨 붙으면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비는 준엄한 말투와 달리 여유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건물 한 채를 태우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는가. 그저 기름을 붓고, 황과 인을 도처에 깔아놨을 뿐이다. 불길을 당기는 순간 저절로 거대한 화마로 성장하지 않았던가.
다만 여유로운 표정과 달리 눈빛은 매섭다.
혹여나 광목재사의 금고가 남아 있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회수해야 했다.
한데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콰쾅!
지붕이 무너지는 순간 굉음이 일었다.
동시에 야행의를 입은 자가 화마를 뚫고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어!”
분명히 기름을 뿌리기 전만 해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외인의 출입은 통제했으니 상대는 동료가 아닐 터였다.
불현 듯 금고가 뇌리를 스쳐갔다.
비는 황급히 일갈을 내질렀다.
“잡아!”
하나 야행의를 입은 자가 내려서는 순간 어디선가 칼이 등장했다. 그리고 앞을 막아서는 비의 수하들을 일합에 도륙하는 것이 아닌가.
수하들이 쓰러지기도 전에 상대는 숲으로 사라졌다.
비는 품속에서 명적을 꺼낸 후 허공으로 쐈다.
삐이이이이이-
“지금 당장 금삭령을 내려라! 나는 주군께 간다!”
*
공후탁은 늘 쪽잠을 잤다.
산동강호를 일통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전에는 숙면을 취하지 않겠다는 맹세 때문이다.
그는 유자로 태어나 유자로 자라왔기에 무인이 되기를 한평생 꿈꿨다.
하나 강하다고 해서 무인이 아니더라.
막강한 권세를 얻고, 고강한 무력을 챙겼지만 여전히 뿌리는 유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빌어먹을 공맹의 논리!”
그는 인상을 쓴 채 술 잔을 꺾었다.
천하명주를 물처럼 마실 수 있는 부와 명예를 지녔으나, 술잔에 담긴 건 평범한 물에 불과했다.
이 또한 맹세의 하나였다.
그 때 장막 속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마신다고 취하기나 하오?”
“분위기로도 충분해.”
공후탁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놈은 자신의 허락 없이 대전을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닌가. 천위검호보다 윗줄에 놓인 놈의 정체는 피붙이였다.
천라쌍익(天羅雙翼) 공후탄
그는 삼유기 중 한 명이며 공가제일도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양 허리에 맨 곡도를 덜렁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물이 든 병을 기울여 형의 잔을 채웠다.
“그 놈의 분위기, 잔뜩 내시구려.”
공후탁은 술잔을 드는 대신 물었다.
“왜 왔느냐?”
“노국장주의 명줄이 길다기에 궁금해서 왔소. 귀협이라는 애송이한테 당했다면서요??”
공후탄은 신공부주를 앞에 두고도 거침이 없다. 형제의 연을 믿기보다 자신의 무위를 믿기 때문이다.
신공부주는 코웃음을 쳤다.
“너라면 어떻겠느냐?”
“뭘 말이오?”
“귀협.”
공후탄의 입매가 길게 찢어졌다.
귀에 닿을 것처럼 늘어진 입술 사이로 서늘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왜? 지금 죽여줄까?”
신공부주는 고개를 내저었다.
“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시선을 끌 것이야. 조만간 때를 봐서 모조리 쓸어버려야겠어.”
공후탄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가 신공부주에게 애걸하듯 말했다.
“형님, 더 이상 재지 말고 그냥 끝냅시다. ‘그곳’을 움직이면 유가의 교리고, 뭐고 간에 그냥 전면전이야.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니 무가로 우뚝 설 수 있지 않겠소?”
하나 신공부주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건 안 된다. ‘그곳’을 움직이는 순간 황보세가도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산동성를 황보세가와 나눠먹어야 해. 그건 용납할 수 없지.”
공후탄은 웃음기를 지웠다.
“유가가 싫다면 하는 짓은 전형적인 유생이구려.”
신공부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아무리 혈육이라고 해도 언사가 과했다.
한데 그 순간 명적이 울리며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주군! 비입니다.”
신공부주가 출입을 허하는 순간 비가 구르듯이 달려와 부복했다.
“광안전을 불태우던 중 의문의 적이 나타났습니다.”
“외형은?”
“야행의를 입고 있어서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아! 쌍도인지, 쌍검인지를 쓰는 듯했습니다. 금삭령을 내렸으니 놈은 신공부를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신공부주는 비를 물린 후 공후탄을 바라봤다.
“때가 왔네.”
“무슨 소리요?”
“귀협이 찾아왔으니 네가 목을 베어 오거라.”
공후탄은 입꼬리를 올렸다.
“무기는 나도 두 자루요. 그것만으로 귀협이라 할 수 있겠소?”
“광목재사가 행방불명되자마자 도둑이 들었어. 더 할 말이 필요하더냐?”
신공부주의 말에 공후탄은 물이 든 병을 낚아챘다. 그는 목울대를 꿀렁거리며 병에 든 물을 모조리 마셨다. 그리고 술이라도 들이켠 사람처럼 탄성을 흘리더니 말했다.
“크하! 애송이의 목 값이외다.”
“기꺼이.”
공후탄은 어슬렁거리며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신공부주는 보료에 몸을 누인 채 잠을 청했다. 쪽잠에서 깨어나면 눈앞에 귀협의 목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남천휘는 시야 상단을 힐끔거리며 읊조렸다.
‘빌어먹을!’
돌발 퀘스트가 등장했다.
《공부지망》
- 신공부 내에 금삭령이 선포됐습니다.
- 기관진식이 발동합니다.
- 적의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탈출하세요.
- 성공 시 도적 관련 특기가 생성됩니다.
- 실패 시 사망합니다.
‘성공하고 실패 사이에 괴리가 너무 크잖아!’
하나 당연히 성공할 것이라 여겼다.
궁신탄영으로 달려나간다면 저들이 인지하기도 전에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 자부했다.
하나 남천휘는 여전히 숲속에 숨은 상태였다.
‘뭐가 이리 빨라?’
기관진식은 물론이고, 신공부 내에 있던 무인들이 개미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금삭령(禁索令)의 의미를 알 듯했다. 수십 명의 무인들이 금빛 띠를 두른 채 요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을 지나지 않으면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나 섣불리 저들을 공격했다가는 스스로 위치를 노출시키는 격이다. 마치 신공부의 내원 전체에 금빛 줄이 쳐진 듯한 광경이었다.
‘빌어먹을.’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다.
수백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쌍도를 사용했다가는 귀협이 신공부의 담을 넘었다고 소문이 날 터였다. 그랬다가는 광목재사의 비급이나 노국장주의 신망을 활용할 시간도 없이 지탄의 대상이 되리라.
‘젠장.’
쌍도를 쓸 수 없고, 스킬도 불가능했다.
그나마 야행의를 입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터였다.
남천휘는 손에 쥔 장검을 보며 인상을 썼다.
신공부의 무인을 쓰러트리고 빼앗은 것이다.
‘정 안 된다면 환마소혼검법이라도 등록해야겠어.’
환혼검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에 적당했고, 신공부의 무인들을 처리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하나 환혼검을 등록하려는 순간 낯선 무인들이 등장했다.
남천휘는 무복의 새겨진 승천이라는 글자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승천문이 와 있었던가.’
그 순간 승천문도보다 머리 하나는 큰 장신의 사내가 어슬렁거리며 등장했다.
“놈을 보면 싸우지 말고 시간만 끌어. 내가 친다.”
광오한 한 마디에 무인들은 신뢰의 눈빛을 보였다.
그럴 만한 자가 분명했다.
머리 위에 새겨진 세 개의 물음표와 검은 테두리를 보라.
‘저 새끼, 분명 천라쌍익이야.’
저런 자를 상대로 환혼검을 썼다가는 정체가 밝혀지기도 전에 목이 잘릴 터였다.
‘튀자.’
남천휘는 무작장 안쪽으로 향했다.
일단 천라쌍익으로부터 멀어져야 방책을 세울 시간이라도 벌 수 있으리라.
한데 내부로 향할수록 경계하는 무인이 줄었다.
‘왜지?’
◎ B 등급 진법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 순간 오감이 비정상적으로 반응했다.
‘아으, 그래도 차라리 진법이 낫다.’
남천휘는 한순간 시야가 어질한 것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하나 신안과 집중이 먼저 발동했고, 뒤이어 통찰과 불굴이 반응했다.
어지럼증은 사라졌다.
하나 여전히 생로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일단 움직이자.’
남천휘는 혈인도(穴人圖)를 띄웠다.
자신의 혈도를 띄워놓은 후 막히거나, 느린 부분을 주물럭거렸다.
“하아, 이 정도면 어느 진법에 빠지든 죽지는 않겠는 걸?”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나무 숲 사이에 위치한 초옥을 발견했다. 옅은 냇물이 흐르고, 작은 텃밭까지 일궈놓은 것으로 보아 잠시 머무는 장소는 아닐 터였다.
주인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풍광에 잠시나마 넋을 놓았다.
‘이런 곳에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