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그날이 오늘이야! (3)
*
붉은 옷을 입은 무인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는 검을 늘어트린 채 중얼거렸다.
“마, 마녀다.”
“대살성이야.”
그들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대전의 입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그들이 입은 붉은 옷보다 더 붉게 물든 여인이 존재했다.
천수련은 안광을 번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후우.”
그녀는 호언장담한 대로 강했다.
항주 어딘가에서 풍류공자 노릇을 하다가 고용됐던 화남은 이미 목이 잘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를 따라 난입했던 서른 명의 적도 검하고혼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 호흡을 가다듬기도 전에 두 번째 무리가 난입했다.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들이닥치더니 차륜진을 펼쳤다.
돌파나 승리보다 힘을 빼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들은 쉴 새 없이 천수련을 조롱하고, 모욕했다.
그러나 천수련의 용화수주공에 천수검이 더해진 위력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저들이 아무리 차륜전을 펼쳐도 누군가 한 명은 짧게나마 천수련을 상대해야 했다.
천수검은 그 때마다 적의 요혈을 헤집었다.
용화수주공의 상징인 일점홍이 새겨질 때마다 한 명씩 쓰러졌다.
하나 그들은 천수검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헛되이 죽어가는 동료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일점홍이 흐트러지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찍은 것처럼 작고, 붉은 점이 새겨져야 했다.
하나 천수련의 피폐해진 육신은 한계를 드러냈고, 정순한 내력 또한 바닥을 보였다. 그러던 중 천수검에 찔렸음에도 죽지 않은 자가 나타났다.
심장을 노린 검이 어깨에 꽂힌 게다.
적은 기다렸다는 듯 활개를 쳤다.
개싸움을 방불케 하는 혈투가 벌어졌고, 백의는 점차 피로 물들었다.
촤아아아아악!
검기를 흩뿌리는 순간 세 명이 쓰러졌다.
하나 두 명은 튕겨나갔을 뿐 죽지 않았다.
“저 년이 지쳤다!”
“포위망을 풀지 마라! 저 년만 죽이면 나머지는 손쉬운 상대뿐이야.”
천수련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릿한 혈향이 입안에 퍼지는 순간 잠시나마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돌파구를 찾아야 해.’
눈앞에 남은 적은 열 명 남짓.
가장 강한 자들이 남았겠지만, 수적 우위는 상당 부분 사라진 상태였다.
‘심검도래향이었다면 단칼에 모두 벨 수 있었을 텐데…….’
심검도래향(心劍到來香)은 용화수주공을 대성한 후에야 깨우칠 수 있는 초절정의 무예가 아닌가.
없는 것을 아쉬워해봤자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천수련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호흡을 조절했다.
단칼에 벨 수 없다면 두 번, 세 번이라도 휘둘러서 길을 만들 셈이다.
그녀가 얼마 남지 않은 내력을 긁어모으려던 순간이었다.
다다다다닥!
붉은 옷을 입은 적도가 담장을 넘었다.
놈을 시작으로 붉은 옷을 입은 자들이 개떼처럼 나타났다.
“아.”
천수련은 눈을 부릅떴다.
누가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 인면수심의 악인일 터였다.
백여 명의 달하는 수하를 칼받이로 내모는 악독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다.
“뭣들 하는 거냐?”
“저 년을 죽이는 자는 은자 천 냥을 받게 될 것이다!”
잠시 주춤했던 적포무인들의 투기가 들끓었다.
천수련은 왼손에 힘을 줬다.
화살촉의 뾰족한 부분이 손바닥을 파고든다.
‘부적 값은 외상으로 해야겠네.’
솨아아아아-
피에 절어 있던 천수련의 장포가 부풀어 올랐다.
진원진기라도 활용할 요량이다.
시신이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처럼 흐른다면 오늘의 혈사는 분명 전해지리라.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힘을 낼 수 없을 만큼 위기였다.
“그래, 와라. 은자 천 냥에 인간임을 포기한 자들에게 검후의 뜻을 전하겠다!”
천수련의 일갈이 울리는 순간 적의 수괴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저었다. 그 순간 백여 명의 적포무인들이 노도와 같이 몰려왔다.
삼 장, 이 장, 일 장.
꽈득-
천수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는 순간이었다.
문 밖에서 우렁찬 일갈이 들려왔다.
“궁신탄영!”
불문의 사자후라도 되는 양 내력이 담긴 일갈에 무인들이 잠시 주춤거렸다.
콰콰쾅!
그 순간 노국장의 정문이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서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남천휘가 튕기듯 모습을 드러냈다.
스릉-
주먹을 쥐락펴락 하는 순간 어느새 천하도와 제일도가 양 손에 쥐어졌다.
“이런 개호로 새끼들아! 질풍난무다!”
촤아아아아아악!
다짜고짜 초식명을 외치는 순간 바람이 뭉쳐들었다.
스물네 번의 칼질 끝에 만들어진 두 줄기의 도기가 교차하여 전방을 찢어발겼다.
“크학!”
그 순간 십여 명의 적포무인들이 피를 흩뿌리며 튕겨나갔다. 적포무인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동료들을 보며 숨을 죽였다.
남천휘는 천수련을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개똥아! 내가 왔다.”
천수련이 지금껏 들어본 개똥이 중에 가장 달콤한 한 마디였다.
그녀는 볼을 부풀리며 일갈을 내질렀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사실 올 줄 몰랐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하나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눈물이 핏물에 섞여 흐를 것만 같았다.
남천휘는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야! 내가 적선단하고 벽선단을 몇 개나 먹었는 줄 알기나 해?”
두 사람이 투덜거리는 사이 정문 쪽에 숨어 있던 적포무인이 움직였다.
타탓!
남천휘는 기세 좋게 달려드는 적포무인의 검을 고갯짓을 피했다.
콰직!
목울대를 얻어맞은 적포무인이 튕겨나갔다.
목이 완전히 꺾인 것으로 보아 절명한 것이 분명했다.
남천휘는 레벨이 가장 높은 적을 응시한 채 외쳤다.
“무릎 꿇고, 대가리 박아.”
잠시 후 담담했기에 더욱 서늘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럼 산다.”
아쉽게도 남천휘의 엄포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저들은 성취는 곤륜산인이 부리던 흑도와 천양지차였다. 게다가 저들은 아직도 백여 명에 이르는 머릿수를 자랑하지 않던가.
그들은 무릎을 꿇는 대신 숨을 죽였다.
그저 먹잇감을 노리는 승냥이 떼처럼 거리를 유지한 채 투기를 드러낼 뿐이다.
“안 꿇어?”
남천휘는 호랑이라도 된 양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적이 투기를 끌어올릴수록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래, 허무하게 무릎을 꿇는 것도 웃기겠지.
‘그리고 나도 바라지 않고.’
적포무인의 레벨은 대부분 60에서 70사이였다.
간혹 80을 넘긴 자도 보였다.
하지만 남천휘가 상대했던 흑도와는 레벨 차이 이상의 투기를 드러냈다. 그만큼 조직적으로 훈련을 받았고, 고된 수련을 거쳤을 터였다.
신공부주의 숨겨진 세력.
남천휘는 시야 구석에서 반짝이는 퀘스트 목록을 확인했다.
《1-6, 중간보스》
- 신공부주 공후탁을 척살하라.
- 제한시간(82:12:35:51)
※ 1단계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1/3)
메인 퀘스트 아래 첫 번째 보조 퀘스트에 대한 설명이 나타났다.
《1-6-1, 오늘이 그날이다!》
- 노국장주의 생존.(1/1)
- 100 명 이상의 적을 쓰러트리시오.(12/100)
- 성공 시 2단계 봉인이 자동으로 해제됩니다.
외조부의 생존은 필수였다.
‘기왕 넣는 김에 부모님하고 개똥이도 넣어주지.’
남천휘는 투덜거리면서도 전장을 한 눈에 담았다.
특기 ‘신안’을 대성했고, S급 특기인 ‘통찰’까지 익힌 상태였다. 그렇기에 백여 명에 달하는 적의 레벨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중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두 명이 있었다.
두 명 모두 120레벨이 넘는 고수였다.
저들이 적포 무리의 수장이리라.
외조부와 부모님은 물론이고, 천수련까지 죽이려 한 쓰레기들의 대장일 터였다.
“그럼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마.”
남천휘는 호기롭게 외치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자세가 미세하게 흐트러졌고, 적포무리의 수장은 레벨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했다.
“쳐라!”
붉은 물결이 노도와 같이 밀려왔다.
하지만 남천휘에게는 바라마지않던 상황이었다.
행여 도망칠까봐 얼마나 걱정을 했던가.
“궁신탄영.”
나직이 읊조리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몸이 이동했다.
남천휘는 손바닥을 아래로 한 채 양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러자 천하도와 제일도가 사라지더니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손바닥에서 구멍이 뚫린 것처럼 철시가 쏟아졌다.
푹푹푹푹푹푹!
십여 개의 철시를 땅에 박은 후 오른 손을 쥐었다 펴는 순간 질풍뇌격궁이 나타났다.
끼이이이익-
남천휘는 활시위를 당긴 채 검지를 폈다.
그 순간 새로운 철시가 나타나 활대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졌기에 적포 무리는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너무 많아서 대충 쏴도 맞겠구나!”
남천휘는 일갈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활시위에서 손을 놨다.
펑-
철시를 쏘는 순간 공간이 찢기듯 갈라졌다.
질풍뇌격궁의 진짜 능력은 따로 있었다.
바로 내공 전달력 15%였다.
내공이 일천할 때에는 몰랐다.
하나 내공 수치가 이천에 육박하는 지금 철시를 쏘는 것만으로도 공간을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쇄도했다. 철시가 지나간 자리에 바람이 휘몰아쳤다.
뻑!
철퇴를 들고 달려들던 덩치가 어깨를 통째로 잃고 튕겨나갔다. 마치 화포에 적중당한 듯한 상처에 적포 무리가 주춤거렸다.
“넋 놓고 있다가는 죽는다!”
남천휘의 일갈과 함께 두 번째 화살과 세 번째 화살이 발출됐다.
뻑! 뻑!
둔탁한 소음과 함께 적포 무인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흉측한 상태로 튕겨나갔다.
경악은 공포가 되어 전염병처럼 퍼졌다.
이번만은 적포무리의 수장들조차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남천휘는 언제 물러났냐는 듯 앞으로 내달렸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 땅에 박혀 있던 철시를 뽑아 쐈다.
그 때마다 적이 한 명씩 쓰러졌다.
“저게 뭐야?”
“활이 어디서 나온 거야?”
적포 무리는 남천휘가 열 명을 일수에 쓰러트렸을 때보다 더 동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열 명을 벨 수 있는 무공은 봤어도, 이처럼 기기묘묘(奇奇妙妙)한 궁술을 들어보지도 못했을 터였다.
“흩어져라!”
“차륜전을 펼쳐!”
천수련을 상대할 때처럼 원진을 만들었다.
하나 남천휘는 이미 양떼무리에 뛰어든 맹호나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양손에는 활과 화살 대신 잘 벼려놓은 천하도와 제일도가 자리했다.
“한 놈이든, 두 놈이든!”
남천휘가 자세를 한껏 낮추더니 상체를 비틀며 앞으로 튕겨나갔다.
촤라라라락!
톱니에 갈린 나무토막처럼 적포 무인들은 피를 흩뿌리며 나자빠졌다.
“우리 집에 들어온 이상 허락 없이는 아무도 못 나가!”
적포무리의 수장은 동료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각기 휘대(揮隊)와 교대(絞隊)를 맡은 대주였다. 그리고 신공부주가 아닌 광목재사의 명령만 듣는 충복이기도 했다.
‘어디서 저런 놈이 튀어나온 거지?’
‘그보다 진형을 정비해야 해. 그냥 두면 모두 개죽음이다!’
휘대주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휘대의 무인들이 거리를 벌렸다. 빈 자리를 교대의 무인들이 채웠다. 천수련을 난감하게 만들었던 차륜전의 시작이었다.
“차륜전이야!”
천수련이 당황하여 경고했다.
하나 적포 무인들은 차륜전을 펼치기 위한 충분한 거리를 유지한 후였다.
‘됐다! 차륜전만 펼칠 수 있으면 돼.’
‘시간을 끌면 지원군이 올 거야!’
휘대주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남천휘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천휘의 여유로움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게다. 그는 벽처럼 늘어선 수하들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 다시 모여 버렸다.’
흩어지라고 명령했던 것이 불과 조금 전이다.
“궁신탄영!”
그 순간 남천휘의 신형이 좌우로 갈라지는 듯하더니 일장 앞에서 뭉쳐드는 것이 아닌가.
휘대주는 남천휘가 처음 나타났을 때 펼쳤던 도법을 떠올렸다.
“피해!”
하나 적포 무인들이 반응하는 것보다 남천휘의 일갈이 빨랐다.
“질풍난무!”
조금은 경박하게 들릴 만큼 빠르게 읊조렸다.
하나 효과는 확실했다.
남천휘가 코앞에서 질풍난무를 시전 하는 순간 피바람이 뭉쳐들었다. 스무 명 가까이 광풍에 휘말린 채 육편과 핏물이 비산했다.
촤아아아아아악!
휘대주는 수하들의 피를 뒤집어 쓴 채 읊조렸다.
“이, 이런 잔악무도한 놈!”
남천휘의 대답은 궁신탄영이었다.
파팟!
지척에 이른 그의 도가 휘대주의 턱 밑을 스쳐갔다.
“네가 할 말은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