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그날이 오늘이야! (2)
천외검호는 혈사가 시작됐음에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여유로웠다.
“나도 모르는 자들이 많이 늘었구려.”
광목재사는 만족스러운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지 않겠소?”
천외검호는 부외자처럼 말을 이었다.
“모든 사람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외다.”
광목재사가 코웃음을 쳤다.
“모략이란 완벽할 필요가 없소. 아니, 애초에 무슨 수를 써도 완벽한 모략이란 존재하지 않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수요. 소수의 목소리를 묻어버릴 대중의 명분이 필요한 게요.”
“확실히 사람들은 이번 일의 이면보다 남녀의 애정사에 더 큰 관심을 보이겠지. 하나 천수련은 그리 녹록한 상대가 아니외다. 저들만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어차피 한 사람이라도 도망치는 순간 소문은 퍼지게 되어 있소.”
광목재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누구도 저 문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게요.”
“천수련을 우습게보지 마시오. 검후의 검법이 일절로 꼽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게요.”
“무인이란 참으로 묘한 존재요. 강할수록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더군요.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오. 그것처럼 천수련이 아무리 강해도 계속 치면 결국은 쓰러지게 되어 있소. 신마대전의 주재자였던 사령신과 괴겁천마도 결국 정천칠공의 합공에 목숨을 잃지 않았소이까.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아낼 수는 없는 법이라오.”
천위검호의 눈빛이 한차례 번뜩였다.
광목재사의 주장은 마치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와 같았다.
‘벌써 신공부를 일통한 이후를 생각하는 건가?’
그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나는 그만 가보겠소.”
광목재사는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돌아가서 원단을 즐기시오.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웃고 떠들었으면 좋겠구려. 혈사가 일어난 밤에 검호의 행적이 밝혀지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겠소이까.”
“내가 알아서 하겠소.”
천위검호는 경공까지 펼치며 언덕을 떠났다.
광목재사의 미소가 잦아들었다.
‘너도 언젠가 내 명령을 듣는 처지가 될 게다.’
그는 지팡이를 다시 한 번 흔들었다.
그러자 숲 속에서 붉은 옷을 입은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들도 진입해라. 그리고 포위망을 더욱 좁혀라. 오늘 밤 누구도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
천수련의 안색은 초췌했다.
노국장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화살촉을 만지작거리며 웃던 그녀였다. 노국장주는 뼛속까지 유자답게 고아한 정취를 즐겼고, 장원의 조경도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게다가 각지에서 노국장주를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명사들의 면면도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논쟁을 즐겼고, 바둑을 겨루며 함께 어울렸다.
명사들은 어리고, 어여쁜 천수련을 딸이나 손녀처럼 여기며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니 천수련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만큼 노국장의 생활을 즐겼다.
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신을 화남이라 밝힌 사내는 하인들을 잔뜩 끌고 나타났다. 그러더니 한 번만 만나달라며 간절한 구애를 펼쳤다.
잠깐 동안은 으쓱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 반 시진이 지나기 전에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제아무리 끈질긴 사람이라고 해도 저렇게 열정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얼굴도 보지 못한 여인을 찾아 천 리 밖에서 찾아왔다는 소리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게다가 사내의 말투는 자신이 아닌 밖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래서 돌아가라 했다.
하나 그는 돌아가지 않았고, 밤이 늦어서야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 후로 매일같이 노국장의 정문을 점거한 채 행패를 부렸다.
천수련은 화남의 무리를 몰래 살펴본 후 저들의 음흉한 속내를 눈치 챘다. 화남은 수려한 용모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하나 그를 따라온 하인들은 하나 같이 짙은 투기를 드러내지 않았던가.
‘그 때 조취를 취했어야 해.’
차라리 정문을 열고 놈과 담판을 지었다면 이처럼 궁지에 몰리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후회는 언제나 늦다.
사람들은 저들이 매일같이 나타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결국 외부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하인들을 내보냈다.
하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쯤 되니 저들의 배후에 신공부주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 즈음부터 노국장의 분위기는 초상집처럼 가라앉았다.
긴장감이 감돌았고,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안자영과 천수련은 논의를 거듭했지만, 별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노국장의 가솔은 백여 명에 이르렀다.
한데 노국장주는 신공부 내에서도 무가(武家)가 아니라 유가(儒家)를 추종하지 않던가.
가솔 중에서 무공을 익힌 자는 드물었다.
이미 공문십철 중에서 무력을 따지자면 가장 말미에 존재할 곳이 바로 노국장이다.
그러니 만약 화남의 무리가 난입이라도 한다면 큰 화가 닥칠 터였다. 심지어 저들이 전부라는 보장도 없는 상태가 아닌가.
그 날부터 천수련과 안자영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해가 떠서야 돌아가며 조금씩 눈을 붙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외부에서 소요가 일어날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깨어나야 했다.
그런 날이 계속될수록 천수련은 지쳐갔다.
그나마 화살촉을 매만지며 운기조식을 할 때가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다.
오늘도 그러했다.
화남의 노래와 구애가 들릴 때마다 귀를 막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나 저들의 동태를 살피지 않았다가 난입이라도 한다면 큰 화가 닥칠 터였다.
그러던 중 화남이 갑자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자신을 모욕했다며 용서하지 않겠다는 핑계를 시작으로 붉은 옷을 입은 자들이 담을 넘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안자영은 노국장주와 명사들을 시작으로 가솔들까지 대전에 모았다.
이미 창은 판자로 막아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불을 지를 것에 대비하여 매일 같이 물을 뿌려두지 않았던가. 화포라도 쏘지 않는 한 적도들이 쉬이 접근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유일한 출입구를 안자영과 천수련이 막아섰다.
“크흑, 자영아. 비켜서라. 내가 나서겠다.”
노국장주가 지팡이에 의지한 채 걸음을 옮겼다.
하나 이미 노환으로 인해 마른기침을 쏟아냈다.
“아버지, 그러다 큰일 나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안자영의 말에 노국장주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크허허, 내가 고집을 피운 탓에 화를 자처했구나. 신공부를 바로 잡지 못하고, 피붙이조차 건사하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그러니 비켜서라. 내 목을 바치겠다. 공후탁이 원하는 건 신공부주의 대물림이 아니더냐. 그러니 내 목을 건넨다면 놈도 끝을 보려 하지 않을 게다.”
노국장주의 비통한 외침에 가솔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공문의 의지가 변질된 것이 어찌 장주의 탓이란 말입니까.”
“거둬주신 은혜를 갚지 못했거늘 어찌 장주 혼자 책임을 짊어지려 하시나이까.”
명사들은 오히려 담담했다.
“이렇게 될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았네. 바보가 아닌 이상 화가 닥칠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그저 이처럼 천박한 짓거리일 줄 예상하지 못했을 뿐. 이보게, 고개를 들게. 유자로서 뜻을 꺾지 않는 건 자네만이 아니야. 함께 하려 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곳까지 오지 않았을 게야. 안 그런가?”
친우의 다독임에 명사들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유자의 뜻은 언제가 됐든 드러나기 마련이야. 그게 오늘이 아닐 뿐. 격(格)을 잃지 않고, 의(意)를 유지한다면 죽어서도 부끄럽지 않을 걸세.”
노국장주는 고집스런 눈매에 어울리지 않게 눈시울을 붉혔다.
“끄응, 논쟁을 할 때 그리 말해보지 그랬나?”
“클클, 지금 한 판 붙을까? 자신 있나?”
안자영은 어울리지 않게 훈훈한 광경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신공부주는 병적으로 타인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던가.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움직였다면 외부는 완전히 차단됐을 게야.’
하나 저들은 강호인이 아니지 않던가.
그렇기에 사태의 심각성을 모른다.
그저 유자로서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
안자영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나 노국장주가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는 모습에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가솔들 또한 서로의 손을 맞잡고,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신념으로 뭉친 사람들이다.
그래, 저게 맞다.
저 모습을 틀리게 보는 자신이 잘못된 게다.
그리고 신공부의 설립 이념을 잊고, 무가로서 패권을 노리는 신공부주도 잘못됐다.
약자라고 해서, 위기에 처했다고 해서 맞은 것을 틀리다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옳은 것은 언제나 옳았고, 틀린 것은 언제나 틀렸다.
‘강호가 별거더냐? 어차피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던가.’
유가나 무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의 문제였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였다.
명사나 가솔들이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강호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굳건했다.
‘부끄럽고, 부럽구나.’
그 순간 후덕한 인상의 장년인이 안자영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막내가 아주 달라졌다고?”
곡부남가의 가주인 남운군의 물음에 안자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 아들 셋을 제대로 키웠으니 우리도 하고 싶은 대로 합시다. 나는 늘 그렇듯 자네 뒤에 숨어 있을 테니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갑시다.”
안자영은 피식 웃었다.
“오늘 고기를 자셨나? 혀가 아주 매끄럽게 돌아가시네요. 아쉽네요. 오랜만에 달달한 말을 들었는데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으니.”
“후훗, 자네가 원하면 나야 언제든 준비됐지. 아! 넷째는 딸이었으면 좋겠어.”
남운군의 능글맞은 한 마디에 안자영은 남편의 옆구리를 찔렀다.
“천 소저가 듣는데 못하는 말이 없어!”
천수련은 헛웃음을 지으며 딴청을 피웠다.
“저는! 못! 들었습니다.”
그 때 안자영이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그럼 잘 들어요. 천 소저는 떠나요. 천 소저까지 이곳에 남아서 헛되이 죽을 필요는 없어요.”
하나 천수련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넓게 봐요.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랍니다. 차라리 천 소저가 이곳을 떠나 오늘의 일을 널리 알려줘요.”
안자영의 말이 합리적이기는 했다.
하나 천수련은 고개를 내저었다.
“헛된 죽음이라니요. 저분들의 의기는 단지 유가에 머물지 않아요. 강호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의기고, 기상이에요.”
그녀는 보물처럼 등에 매고 있던 천수검을 품에 안았다.
“저분들이 헛된 죽음이라면 신마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은하검후께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고 누대에 걸쳐 검후라면 응당 마음에 새겨야 할 만민양생의 이념 또한 실현 불가능한 헛소리에 불과하겠지요.”
그 때 노국장주가 일갈을 내질렀다.
“그 말 또한 옳다!”
천수련은 화살촉을 매만지며 말했다.
“저는 도망치기 위해 무공을 익히지 않았어요. 지키기 위해서 익혔고, 지키러 이곳에 왔답니다.”
그녀는 화살촉을 흔들며 읊조렸다.
“부적 값도 치러야 하고요.”
남운군은 며칠 사이 딸처럼 여겼던 천수련을 근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괜찮겠니?”
천수련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생각보다 많이 강하답니다.”
스르륵-
천수검을 휘감고 있던 흰 면포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게 있으면 더 강하고요.”
천수련이 검을 뽑는 순간 천수검이 응원하듯 검명을 토해냈다.
찌이이이이이이이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