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남남 對 남녀.
59, 남남 對 남녀.
곡부남가의 중심부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데 곡부남가 주변을 맴돌 뿐 일정 거리 이상 퍼지지 않았다. 마치 사발로 곡부남가를 덮은 것처럼 안개가 갇혀 있었다.
하나 이미 곡부남가로 진입한 혈인검을 비롯한 무인들은 그것을 알 리 없다. 오직 멀찍이서 나설 차례를 기다리던 황도쌍노만이 진법의 존재를 눈치 챘다.
‘놀랍군.’
황도쌍노의 감상은 그 정도였다.
오히려 그들은 진법의 존재를 알리기보다 묘한 호승심을 드러냈다.
‘호오, 제법 잔꾀를 부리는군.’
그들은 곡부남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본래 적당히 살육을 끝낸 후 섬예검귀를 죽게 만든 후기지수들을 처리하려 했다.
용봉삼협이라니.
그들에게는 우스운 별호였다.
그저 칼질 몇 번이면 목을 벨 수 있는 애송이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산동 강호란 벽촌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강호칠대금지인 자하림에서 훔친 환혼검을 익히기 위해 잠시 쉬워가는 장소에 불과했다.
한데 전장을 지켜볼수록 입꼬리가 치솟았다.
남천휘의 궁술은 일절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안개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기감과 신법을 지녔다.
게다가 동판을 활용해 적을 희롱하는 모습에는 폭소가 터져 나올 뻔했다.
‘바람이나 쐬러 나왔거늘…….’
좌노가 왼 허리에 찬 검을 매만졌다.
‘환혼검을 시험해볼 수 있겠구나.’
우노가 오른 허리에 찬 검을 매만지며 좌노에게 눈짓을 했다.
“섬예검귀는 죽어서도 우리를 돕는군.”
“클클, 환혼검의 완성도 자축하고, 섬예검귀의 복수도 할 수 있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때마침 안개가 걷혔다.
황도쌍노는 그제야 전장에 들어섰다.
무인과 낭인의 죽음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짧은 대화 끝에 쌍노와 남녀가 마주했다.
“용봉삼협이라지?”
“우습군.”
쌍노는 셋을 거론하는 남천휘를 비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동성 밖에는 천외천의 고수들이 즐비했다. 그런 고수들이 키워낸 제자들 역시 한두 명이 아닐 터였다.
그들 중에는 쌍노를 뛰어넘는 고수도 존재했다.
결국 황도쌍노가 자하림의 추격을 피해 벽촌까지 도망친 이유는 그런 자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입니다.”
쌍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전까지 백여 명을 베어버린 놈이 아닌가.
갑자기 순순해지니 의아할 따름이다.
남천휘는 이를 갈며 말했다.
“백협이나 화협같이 좋은 건 저들끼리 다 하고 말이야. 귀협이라니. 듣기만 해도 음침하잖아. 안 그렇습니까?”
천수련의 검 끝이 흔들렸다.
“그걸 마음에 담고 있었어요?”
“화협은 빠져. 술 잘 마시니까 주협이라고 부르면 좋겠냐? 개똥이니까 변협이라고 할까?”
“아! 싫다.”
남천휘의 으름장에 천수련은 진저리를 쳤다.
“진짜 짜증나.”
“거 봐라. 귀협의 서글픔을 함부로 재단하지 마.”
그 순간 좌노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닥쳐라! 감히 이 연놈들이 어디서 말장난을 해.”
“곱게 죽지 못할 줄 알 거라.”
남천휘가 입꼬리를 올렸다.
“곱게 죽으면 덜 아프다더냐?”
동시에 양 팔을 떨쳤다
그 순간 소매 속에서 미끄러지듯 직도가 나타났다.
“그럼 너희들은 비참하게 죽여주마!”
파팟!.
남천휘는 황도쌍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빛살처럼 꽂혀드는 공세에 황도쌍노는 몸을 돌려 팔 (八)자 형태로 남천휘를 맞이했다.
스스로 호구에 들어서는 형국.
하나 당황한 쪽은 황도쌍노였다.
‘혼자?’
‘계집은?’
그 때 천수련은 이미 반대편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남천휘가 황도쌍노를 도발하는 척하며 전음을 보냈기 때문이다.
혈인검을 비롯한 오십여 명의 적.
안개가 걷힌 이상 저들이 도주를 한다면 후환을 남기는 셈이 아니겠는가.
하여 남천휘는 그들의 처리를 천수련에게 맡겼다.
그것도 친절하게 꼭 쓰러트려야 할 적을 지명하기까지 했다. 혈랑회주를 비롯해 레벨이 높거나, 색이 빨간 자들이다.
‘세 번째, 네 번 째, 여섯 번 째, 열두 번째는 꼭 잡으라고 했지.’
천수련은 레벨을 볼 수 없다.
하나 적이 흩뿌리는 기세만 읽어도 강약의 구분이 가능했다. 정순한 내력을 지녔기에 기의 흐름에 민감한 탓이다.
“화협이다! 죽여라!”
혈인검은 혈랑회의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황도쌍노가 나선 이상 남천휘는 이미 죽은 묵숨인 아니겠는가. 그러니 두 번째 목표였던 화협(華俠) 천수련이라도 베어서 곤륜산인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다.
“죽여!”
양 손에 단도를 쥔 혈랑회의 무인이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하나 저들은 이미 남천휘로부터 전력 외라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천수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수십 명을 동시에 눈에 담은 채 슬쩍 몸을 비틀었다. 그 순간 합을 맞춘 것처럼 무인의 단도가 공간을 찢어발겼다.
“엇!”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천수련과 교차했다. 그 순간 천수련의 검이 자연스럽게 무인의 옆구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내공을 사용하기는커녕 초식조차 펼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는 무인이 스스로 천수련의 검에 몸을 던진 형국이었다.
촤악!
군더더기 없는 검술.
화려하거나 강렬한 대신 단순했다.
하나 일검에 한 명씩 반드시 쓰러졌다.
애초에 세 자리 레벨에 오른 검수의 일격을 삼사십 대의 레벨이 상대할 리 없지 않은가.
푹푹푹푹푹!
혈랑회의 낭인들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호랑이가 양떼를 덮친 것처럼 압도적인 무위에 혈랑회주를 비롯한 낭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렇게 강해?’
남천휘는 멀리서 활을 쏘고, 안개 속에서 날뛰었다.
그렇기에 강함의 척도가 쉬이 와 닿지 않았다.
하나 무심한 표정으로 일검에 한 명씩 쓰러트리는 천수련은 그들에게 있어서 사신이나 마찬가지였다.
“크흑! 악독한 년!”
“계집이 저리도 잔인하다니!”
그 때 천수련의 서늘한 눈빛이 낭인의 폐부를 헤집을 것처럼 꿰뚫었다.
“너희들을 보고 피눈물을 흘렸던 그들을 대신하여 징치한다.”
악인은 지옥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증오하지도,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저 하늘의 검을 자처할 뿐이다.
그렇기에 검후의 신물이 ‘하늘의 손’이라는 천수검(天手劍)인 게다.
천수련은 ‘검후는 교화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몸소 선보였다. 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 졸릴 때 잠을 자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저쪽도 걱정 되고.’
황도쌍노의 경박한 언사와 달리 그들의 몸에서 절로 흘러나오는 기도는 진짜였다.
강자의 기운.
천수련조차 처음 마주할 때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남천휘는 그런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지 않은가.
‘위험해지기 전에 도와줘야 하는데…….’
그녀는 잠시 짬을 내어 남천휘를 힐끔 바라봤다가 그대로 멈췄다.
“어! 왜 저렇게 잘 버텨?”
남천휘의 숨겨둔 한 수는 안개가 걷힘으로서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남천휘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이리저리 뛰며 황도쌍노의 공세를 피해내고 있지 않은가.
채챙!
천수련은 미간을 좁혔다.
잠시 넋을 놓은 탓에 혈랑회주와 검을 섞었다.
‘이런, 수련이 부족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상대해야 할 적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그녀의 매서운 눈빛이 혈인검을 향했다.
하나 혈인검은 기습이 실패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지 않은가.
저 자는 놓치지 말아야 할 대상이다.
남천휘가 신신당부를 했다.
만약 혈인검이 도망간다면 개똥이가 어떤 별명으로 바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건 싫어!’
천수련은 황급히 심호흡을 했다.
찰나간 두 번이나 평정심이 흐트러졌다.
검후의 무공을 펼칠 때 평정심의 유지는 필수가 아니던가. 코앞에서 벼락이 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전대 검후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그래도 코앞에서 벼락이 치면 좀 그렇지 않나?’
그녀는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두 번이 세 번으로 늘어났다.
이러다 잡념이 버릇이라도 되면 검후의 비전인 용화수주공 자체가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심호흡을 하자.
“후우! 후우!”
혈인검은 천수련이 대놓고 숨을 몰아쉬자, 눈을 빛내며 외쳤다.
“저 년이 지쳤다! 죽여! 발부터 끊어! 쓰러트려라! 일단 자빠트려!”
십여 명이 동시에 들려들었다.
분명 저들이 쥐어짠 마지막 기세일 터였다.
하나 천수련은 무참할 만큼 단순하게 십여 명의 적을 튕겨냈다. 그들은 경련을 일으키며 꿈틀거릴 뿐 일어나지 못했다.
타탓!
천수련은 가볍게 바닥을 박찼다.
남천휘가 안개를 깔아놓은 탓에 대지는 물을 잔뜩 머금은 진흙탕이 됐다. 흙탕물이 튀었다가 사라지는 사이 또 한 명의 적이 쓰러졌다.
“끄으.”
천수련의 검은 혈인검의 오른 어깨를 관통했다.
비파골을 끊었으니 평생 오른손으로 검을 휘두를 수 없으리라.
‘흉수는 잡았고.’
그 순간 혈인검이 원통한 눈빛을 줄기줄기 뽑아내더니 일갈을 내질렀다.
“크아아아! 원통하다! 나는 죽어도 섬예검귀의 한을 이어받은 자들이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더니 대뜸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것이 아닌가.
푹!
혈인검은 기괴한 웃음을 지은 채 허물어졌다.
한데 그는 숨이 끊기기 전 몸을 부르르 떨더니 피거품을 쏟아냈다. 몇 남지 않은 수하들은 혈인검이 자결을 하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기 때문이다.
“끄으으으.”
혈인검의 한 맺힌 일갈이 무색할 만큼 빠른 도주였다.
천수련은 한 숨을 내쉬었다.
섬예검귀를 거론한 이상 저들 또한 천릉곡에서 마주했던 낭인들과 같은 부류일 터였다.
‘결국 저들도 청도문과 연결됐구나.’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청도문에 대한 대비책은 남천휘가 알아서 세우지 않을까 싶다. 자신에게 말도 안하고 모든 일을 진행할 만큼 재수 없는 작자가 아니던가.
개똥이는 개똥이의 역할 정도면 충분했다.
‘개똥이라는 걸 인정한 건 아니야.’
남천휘가 그리 생각하니 그만큼만 반응할 셈이다.
‘서운한 것도 아니라고!’
천수련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초에 이런 고민을 왜 하는 건데?’
이러다 진짜 주화입마에 빠지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 정도였다.
그 때 남천휘의 다급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야! 이 개똥아, 함께 할 때 두려울 것이 없다며? 구경할 때 두려울 것이 없는 거였냐?
천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경박하기 짝이 없는 한 마디에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고민이 산산이 흩어졌다.
‘진짜 분위기 깨는 건 중원제일이 아닐까?’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가 아닐까 싶다.
“갑니다. 가!”
마치 심부름을 가는 사람처럼 잰걸음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긴장감을 찾기란 요원했다.
*
남천휘가 여유로웠던 건 사실이다.
어차피 천수련이 몇 수 아래의 적도들을 처리할 때까지 버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제아무리 저들이 강하다고 해도 잠깐을 버티지 못할까 싶었다.
한데 쉽지 않더라.
황도쌍노는 한 사람처럼 움직였다.
마치 쌍검을 쥔 적이 분신술을 펼치며 양쪽에서 공격하는 듯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합격술을 상대하려니 창졸간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활을 조금만 사용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일 정도였다.
결국 비장의 한 수를 사용했다.
수백 명의 적을 상대하며 쌓은 성소 포인트를 활용한 것이다. 100 포인트도 안 되는 적이 수두룩했지만, 쌓아놓으니 만 점을 훌쩍 넘겼다.
◎ 성소 포인트를 소모하여 풍혈을 활성화합니다.
◎ 성소 포인트를 소모하여 풍혈을 활성화합니다.
◎ 성소 포인트를 소모하여 풍혈을 활성화합니다.
중첩될 때마다 적의 움직임이 느려져야 했다.
한데 체감이 되지 않았다.
결국 재이를 독촉한 결과 놀라운 알림이 이어졌다.
◎ 고 레벨의 적이 풍혈을 무효화했습니다.
어, 이건 계획에 없던 건데.
남천휘는 울화가 치민 상태로 씹어뱉듯이 읊조렸다.
‘야! 임마, 그런 건 빨리 말해줬어야지.’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내면 경험치 증가권을 모조리 사용해서라도 100레벨을 넘기기로 결심했다.
‘저렙은 억울해서 살겠냐?’
남천휘는 성소 포인트 목록으로 구매할 수 있는 몇 가지 공능을 활성화했다.
하나 황도쌍노는 개의치 않았다.
귀곡성은 미풍처럼 가볍게 흩어졌고, 발목을 붙잡는 압력은 먼지처럼 털어냈다.
결국 포인트만 소모한 채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남천휘는 천수련이 혈랑회를 모조리 쓰러트린 것을 보며 혀를 찼다.
‘젠장! 개똥이만 이득 봤네.’
그 때 천수련이 합류했다.
황도쌍노가 펼치는 환혼검은 귀기(鬼氣)가 일렁일 만큼 현묘한 변화를 선보였다.
“클클! 이제야 제대로 놀아보겠구나!”
저들은 아직도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은 게다.
한데 천수련은 개의치 않았다.
황도쌍노의 검격이 교차하는 가운데 자신의 검을 꽂아 넣었다.
탈각진체법을 통해 가장 약한 부분을 찌른 게다.
그러나 환혼검은 매순간 변화가 막측하여 천수련의 탈각진체법이라 해도 곧장 따라붙는 것이 불가능했다.
채채챙!
좌노의 검이 원을 그렸고, 우노의 검이 사각에서 튕겨 나와 천수련의 검을 걷어 올렸다. 자칫하면 검을 놓치고 원을 그린 좌노의 검에 손목이 잘릴 뻔했다.
쇄애애액!
그 순간 남천휘의 주먹이 우노의 검 위에 나타났다.
마치 천수련을 돕기 위해 자신의 손을 희생하는 형국이다. 하나 남천휘가 손을 폈다가 주먹을 쥐는 순간 직도가 등장했다.
“흡!”
우노는 눈앞에서 벌어진 기사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남천휘는 직도의 홈을 이용하여 우도의 검을 긁었다.
그그그극-
그 순간 천수련의 신형의 미끄러지듯 남천휘를 스쳐갔다. 마치 음양(陰陽)과 요철(凹凸)의 조화처럼 맞물리는 공수교대였다.
그녀의 검 끝은 꽃봉오리가 만개하는 듯했다.
총채처럼 번뜩인 십수 개의 검영은 한순간 환혼검의 변화를 짓누를 정도였다.
터터텅!
황도쌍노가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들의 얼굴에 처음으로 곤혹스러운 감정이 드리워졌다.
“이 놈들이.”
반면 천수련은 한순간 호흡이 가빠지는 듯했다.
남천휘와 따로 합을 맞춘 것이 아님에도 한 몸처럼 움직이지 않았던가. 강호의 기공(奇功) 중에는 사랑하는 남녀가 한 쌍의 원앙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펼치는 무공이 존재했다.
천수련은 생전 처음 겪는 묘한 감흥에 자신도 모르게 읊조렸다.
“이거 혹시…….”
남천휘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통찰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