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15화 (115/305)

57, 내 땅은 내가 지킨다.

57, 내 땅은 내가 지킨다.

북풍표국은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한데 으슥한 곳을 통해 미끄러지듯 담을 넘는 그림자가 있었다.

남천휘는 북풍표국을 뒤로 한 채 움직였다.

왕망의 배신을 확신하고, 거사 일시까지 알아냈다.

하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놈에게 동조자가 있어.’

그것도 명분과 세력을 동시에 갖춘 자들이 분명했다. 가장 먼지 뇌리를 스친 건 아무래도 신공부의 공문십철 중 한 곳인 진조문(秦朝門)이다.

왕풍은 진조문의 비전인 열왕대전검을 익혔다고 자랑을 했다. 하나 남천휘가 왕풍의 말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왕망은 열왕대전검을 알고 있었어.’

그러니 남천휘의 말에 대뜸 자식의 팔을 부러트리지 않았겠는가.

단편적인 정보가 모일수록 머릿속이 어지럽다.

신공부의 진조문이 왜 끼어들었을까?

남천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래 신공부의 공문십철은 춘추전국 때 난립한 제후국의 이름을 따왔다.

즉, 노국(魯國)의 노국장이나 진국(秦國)의 진조문이라는 형식이다. 다만 세월의 부침을 겪으며 공문십철은 소속방파를 달리 했다. 천위검호의 천위장 또한 그렇게 등장한 신진세력이다.

‘그러니까 진조문처럼 유서가 깊은 방파가 왜 우리를 노리냐고?’

왕망의 수작질에 넘어갔다고 보기에는 너무 이름값이 높은 방파였다.

남천휘는 걸음을 멈췄다.

‘정보가 너무 부족해.

그는 곡부남가로 향했던 발길을 추성 쪽으로 돌렸다. 추성현에 위치한 하오문의 지부에서 정보를 얻을 요량이었다.

추성현으로 향하던 중 자연스럽게 산에 올랐다.

남천휘는 야산 어딘가에 있을 초옥을 떠올렸다.

연하연과의 짧지만, 강렬한 추억이 깃든 장소가 아닌가.

그래, 잠깐 들렀다 가자.

오늘 당장 곡부남가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잖아.

천수련이 있었다면 이래서 사내들은 안 된다며 혀를 찼을 상황이다.

‘하지만 없잖아!’

방해꾼이 없으니 발걸음은 가볍다.

그녀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기분 좋은 추억을 마주하는 건 언제나 즐거울 따름이다.

“시체가 없네.”

남천휘는 초옥을 앞두고 표정을 굳혔다.

그가 떠날 때만 해도 이곳에는 봉황곡에 영혼을 판 매혹대의 무인 열두 명의 시신이 존재했다.

하나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남천휘는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해 기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후 걸음을 내딛었다.

다행히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초옥의 입구는 연하연이 뛰쳐나갈 때 산산조각이 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텅 빈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는 초옥에 들어선 후 나직이 한 숨을 내쉬었다.

‘연 소저.’

이곳에 그녀가 누워 있었고, 자신이 치료하지 않았던가. 불현 듯 미연시가 발동했을 때의 손모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손모양을 건드릴 때마다 들려왔던 야릇한 기음도 뇌리를 스쳤다.

찡- 찡-

남천휘는 버름한 마음에 헛기침을 했다.

그러던 중 초옥에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엇!’

어찌 이런 곳에 묘한 표식(表式)이 있단 말인가.

누군가 칼로 제비를 그려 놨다.

한데 제비의 머리가 향하는 곳은 남쪽이다.

‘남, 연.’

그녀다. 그녀가 왔다간 것이 분명했다.

남천휘는 침을 꿀꺽 삼킨 후 판자의 뒷부분을 매만졌다. 그러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손바닥만한 크기의 쪽지를 꺼냈다.

‘연 소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쪽지를 펼쳤다.

「은공께.

연 모는 은공께서 주신 여벌의 목숨으로 봉황곡을 되찾기 위해 불철주야 뛰고, 또 뛰었습니다. 다행히 전대 곡주께서 안배하신 세력을 얻었고, 이제 봉황곡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있나이다. 해가 바뀌면 모든 준비가 끝나기에 잠시 시간을 내어 은공과 만났던 이곳에 서신을 남깁니다.」

역시 연하연이다.

‘내가 사람을 아주 잘 봤어.’

남천휘는 시야 상단의 지도를 힐끔 쳐다봤다.

혹여 연하연의 표식이 뜨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인해 비롯된 무의식의 발로였다.

당연하게도 발견할 수 없었다.

히든 모드인 ‘미연시’의 기척 탐지 기능은 일정 거리 안에서만 발동하지 않던가.

그러니 그녀는 이미 멀리 떠난 후였다.

남천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서신의 아랫부분을 읽었다.

「봉황곡을 되찾고, 전대 곡주의 명예를 되살린 후 은공을 찾겠습니다. 부디 천녀(賤女)가 귀의(歸依)하는 그날까지 강녕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남천휘는 얼굴을 붉혔다.

보통 부인이 남편에게 자신을 낮출 때 천첩(賤妾)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천녀라는 어휘 선택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귀의라는 어휘를 보는 순간 목이 탔다.

그녀가 돌아와 의지하겠다는 의미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크흠.”

남천휘는 쪽지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손톱으로 판자를 긁어 제비 옆에 표식을 남겼다.

사람 인(人)을 쓰고 왼쪽 위에 점을 찍었다.

그리고 절 사(寺)를 적어뒀다.

파자를 합하면 기다린다는 대(待)가 될 터였다.

재이의 알림은 울리지 않았다.

‘알아! 이런 기초적인 파자로 지혜가 올라가는 건 나도 사양이다!’

남천휘는 자신이 적어놓은 파자를 한 차례 응시한 후 초옥을 나섰다.

‘건강해라.’

*

하오문(下午門)은 천대받는 이들이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정보를 매매하며 시작됐다. 기녀, 도수, 배수, 점소이, 쟁자수를 비롯한 자들이 주축이다.

그러니 강호의 평가가 좋을 리 만무했다.

하나 대놓고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사마가 균형을 이룬 채 대립했기 때문이다.

신마대전이 있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하나 정파의 세상이 된 후 하오문만큼 처신이 애매해진 방파도 드물 터였다. 세상이 평화로우니 은밀하게 정보를 사고 팔 이유가 없어진 게다.

그렇기에 식자들은 하오문이 저절로 쇠락할 것이라 예견했다.

한데 그렇지 않더라.

오히려 하오문은 날개를 단 것처럼 성세를 이뤘다.

정사마가 대립할 때 하오문은 살아남기 위해서 대부분의 정보를 무료로 제공해야 했다. 하나 신마대전이 끝난 후 정파끼리 대립하거나, 세력 싸움을 벌였다.

물론 대놓고 할 만큼 어리석은 자들은 없었다.

그렇기에 하오문을 통해 암암리에 정보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상대의 약점을 찌르기 위해서라면 만금(萬金)도 아끼지 않았다.

결국 하오문은 정파의 세상임에도 그 어느 때보다 성세를 자랑했다.

‘그래서 그런가? 영 낯설잖아.’

남천휘는 호화로운 장원의 입구를 지나며 미간을 좁혔다. 하나 방갓을 쓴 탓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하오문도를 따라 내실로 향했다.

“늦은 밤의 손님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간사하게 생긴 사내가 남천휘를 반겼다.

“이유는?”

남천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일부러 가래 끓는 소리로 사내에게 되물었다.

“은밀하게 찾아오는 손님은 항상 은밀한 것을 원하시거든요. 그리고 은밀할수록…….”

사내는 엄지와 검지를 비벼대며 말꼬리를 흐렸다.

상대의 레벨은 40 중반이다.

격세지감이 따로 없더라.

40레벨 중반의 상대를 가벼이 여길 정도라니.

남천휘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진조문.”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남천휘를 살폈다.

어찌됐든 추성현도 신공부의 영역이다.

신공부의 영역에서 정보를 사려는 상대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듯했다.

“상세 정보는 은자 삼천 냥, 대략적인 상황은 은자 천 냥입니다. 구매하시겠습니까?”

비싸기는 더럽게 비싸구나.

다행히 진조문에 대한 상세 정보는 필요치 않았다.

남천휘가 대략적인 정보를 요구하자, 잠시 후 사내는 방금 만든 듯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왔다. 아마 안쪽에서 누군가 필사를 한 후 가져온 듯했다.

은자 천 냥을 건네고, 두루마리를 받았다.

거래는 그렇게 끝났다.

한데 사내의 시선이 묘했다.

남천휘의 허리춤을 응시하며 탐욕스런 눈빛을 번뜩였다. 남색을 즐기지는 않을 테니, 분명 허리춤의 직도를 노리는 것이리라.

‘흥! 넘볼 걸 넘봐야지.’

남천휘는 지부를 떠나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기왕 왔으니 몇 가지 더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어차피 놈들이 떼거리로 덤벼도 두려울 것이 없지 않은가.

“봉황곡의 정보도 있나?”

사내는 미간을 좁혔다.

진조문과 봉황곡의 연관점을 찾으려는 듯하다.

하나 사내가 그것을 알 리 없다.

남천휘와 연하연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두 사람만의 비밀이 아니던가.

“봉황곡이 강호칠대금문에 속한 건 아실 테고.”

그는 남천휘의 위아래를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은자 만 냥만 주시지요.”

“비싼 걸?”

사내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 바닥은 가격 변동이 심하거든요.”

남천휘는 혀를 내둘렀다.

은자 만 냥이라면 수중에 지닌 돈을 모조리 토해내도 부족했다. 게다가 사내의 말을 통해 단편적인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봉황곡의 가격이 올랐다는 건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즉 연하연으로 인해 봉황곡에 변화가 생겼음을 뜻했다.

만약 성패(成敗)가 결정됐다는 가격을 내렸겠지.

“됐어.”

한데 사내가 돌아서는 남천휘를 붙잡았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외다. 물물교환이라는 좋은 거래 방식도 있으니까.”

남천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내는 남천휘의 허리춤에 매인 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도가 상당히 좋아 보이는군요.”

남천휘는 눈을 빛냈다.

강화를 다섯 번이나 한 천하도와 제일도는 이미 수련용 직도의 예기를 뛰어넘었다. 그렇기에 안목이 있는 자라면 눈여겨볼 만 했다.

놈은 아까부터 눈독을 들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나선 게다.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좋아.”

사내는 히죽 웃었다.

‘클클, 진짜 급했나보군. 저리 귀해 보이는 것을.’

그는 자신의 안목을 신뢰했다.

지금껏 수많은 기물을 정보의 대가로 받았고, 그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하지 않았던가.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안채에 차라도…….”

하나 남천휘는 두 자루의 도를 허리춤에서 빼낸 후 앞으로 내밀었다.

“기다리지.”

사내는 남천휘와 도를 번갈아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안채에서 두툼한 두루마리를 지닌 무인이 등장했다.

무인의 레벨은 50을 넘겼다.

아무래도 무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일어날 불상사에 대비하는 듯했다.

사내가 턱짓을 하자 무인이 다가왔다.

남천휘는 빈손을 내밀었다.

무인은 두루마리를 올려놓는 동시에 손을 뻗어 도를 움켜쥐려 했다. 무인은 긴장한 듯 남천휘의 방갓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이고, 고마워라.

‘천하, 제일, 회수. 십사, 십오, 반출!’

찰나간 천하도와 제일도가 인벤토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인벤토리에서 튀어나온 수련용 직도가 차지했다. 무인이 사내의 시선을 가려준 덕분에 그 누구도 눈치 챌 수 없는 바꿔치기였다. 아니, 애초에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부터가 비정상이리라.

“그럼 이만.”

남천휘는 두루마리를 소매에 넣은 후 몸을 돌렸다.

‘십사 호, 십오 호, 행복하렴.’

수련용 직도의 행운을 빌어주며 하오문 지부를 나섰다. 사내는 남천휘가 처소를 나서자마자 무인을 향해 빠르게 손짓했다.

“줘, 줘봐! 대박이다! 야! 애들 불러들여. 저 놈이 다시 와서 강짜를 부릴 수도 있으니 철통같은 경계로…….”

사내는 무인에게서 두 자루의 도를 건네받는 순간 말꼬리를 흐렸다.

“어.”

분명 자신이 눈여겨봤던 그 도가 맞다.

한데 어딘가 모르게 조금 전과 느낌이 다르지 않은가. 두 자루의 도는 무게와 균형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명도였다.

하나 그뿐이다.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도라면 잘 쳐줘야 삼천 냥이나 받을까 싶을 정도였다.

“씨발.”

사내는 무인을 향해 일갈을 내질렀다.

“아까 그 새끼 찾아봐! 내가…….”

사기(詐欺)를 입에 담으려다 움찔 했다.

지부장이 사기를 당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좌천은 물론이고, 부족한 금액을 토해내야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일단 잡아와!”

하나 지부를 나서자마자 전력으로 신법을 펼친 남천휘를 발견하는 건 불가능했다.

‘감히 누구를 벗겨먹으려 들어!’

남천휘는 달리는 와중에 두루마리를 펼쳤다.

하오문의 정보를 확인할수록 입가의 미소가 잦아들었다. 이내 미간을 좁힌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한 마디를 흘렸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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