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올 때는 혼자였지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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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련은 뜻밖의 방문자를 맞이했다.
“신공부는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던데요.”
방문자는 다름 아닌 공태령이다.
“제가 직접 짐을 싸면 수하들을 욕보이는 행위가 되니까요.”
그는 오랜만에 소부주 다운 모습을 보였다.
신공부의 무복(武服)을 걸쳤기 때문이다.
유가(儒家)를 뿌리로 하는 신공부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무복 자체는 학사의를 개량한 것처럼 헐렁했다. 혹자는 실전에 불리한 복장이라지만, 근 백 년 가까이 조금의 변화도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공부의 위세가 드높을수록 호사가들의 주장은 힘을 잃었다. 그러나 무복으로서 볼품이 없는 건 피할 수 없으리라.
한데 공태령의 모습은 꽤 볼만했다.
본래 팔다리가 길고 호리호리한 체격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조금만 움직여도 동작이 시원시원했다.
물론 시체처럼 딱딱한 표정만 봐도 답답한 것이 현실이었다.
“찾아올 사람이 잘못된 건 아니고요?”
공태령은 천수련의 웃음기 섞인 한 마디에 미간을 좁혔다. 그 역시 때때로 천수련의 신기를 방불케 하는 눈치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제대로 찾아왔을 겁니다.”
그는 금곽을 내밀었다.
천수련은 쉬이 금곽을 받아들지 못한 채 눈을 깜빡였다.
“이거 지금 제가 생각하는 게 맞아요?”
“네, 천 소저가 남 소협에게 좀 전해주세요.”
금곽을 열었다.
아니나다를까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마린보의(磨鱗寶衣)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천잠사보다 한 단계 위급이라는 용린사로 짠 보의(寶衣)가 아닌가. 아닌 말로 외딴 곳에 던져놓으면 혈사가 일어나기 딱 좋을 만큼의 기보(奇寶)였다.
“진심인가요?”
공태령은 표정의 변화 없이 대꾸했다.
“저는 피곤해서 거짓말 못합니다.”
천수련은 눈을 흘겼다.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요?”
공태령의 철면에 잠시나마 금이 갔다.
애매모호한 한 마디에 허점을 찔린 듯했다.
하나 그는 금세 표정을 수습한 후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피곤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피곤한 상황이 있을 뿐이지요.”
천수련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졌다.
지난 며칠 간 동고동락했다고 벌써부터 살갑게 여겨지는가 보다.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나요?”
“마린보의를 건네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아!”
공태령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걸 막아주는 건을 풀었다. 며칠 전 천릉곡에서 빌린 천수련의 봉황건이다. 녹빛 봉황이 새겨진 띠는 일견하기에도 아주 여성스러웠다.
“잘 썼습니다.”
천수련은 손사래를 쳤다.
“그냥 가져요. 내키지 않으면 이것과 물물교환이라고 생각하시고.”
그녀는 마린보의를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천진난만하여 공태령마저 잠시나마 입꼬리를 올렸을 정도였다.
“천 소저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어머, 제 목표를 아세요?”
“그럼요. 천 소저의 눈동자에는 진정한 대의가 담겨 있어요. 맑고, 빛나고, 따르고 싶어지는.”
천수련은 한참을 웃었다.
“그걸 공 소협이 어찌 아세요?”
공태령은 잠시 쓴웃음을 지은 후 다시 철면으로 돌아갔다.
‘당신과 정반대의 위선자를 알고 있거든요.’
그는 말없이 포권을 하며 헤어짐을 알렸다.
“남 소협은 안 보고 갈 거예요?”
“어제 밤에 인사 했습니다.”
“그걸로 되겠어요?”
천수련의 한 마디에 처소를 떠나던 공태령이 잠시 멈칫했다. 하나 그는 다시 걸음을 내딛었고, 다시 멈추지 않았다.
“강호라…….”
그녀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사이 누군가 굴러들어오듯 처소에 발을 들였다.
“개똥아!”
남천휘의 반가운 한 마디에 천수련의 청초하던 분위기가 산산조각 났다.
“그, 렇, 게, 부르지 마세요!”
한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천수련이 당황스러울 만큼 남천휘는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를 했다.
“그래, 너도 한 사람의 성인인데 내가 말을 너무 함부로 했구나. 진심으로 사과할게. 앞으로 우리의 관계가 조금 더 가깝고, 어른스러울 수 있도록 노력하마. 그러니 기분 풀어.”
“아, 뭐. 네.”
남천휘는 천수련이 표정을 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건 뭐야?”
마린보의를 숨길 까닭이 없지 않은가.
천수련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린보의요.”
하나 남천휘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너 설마…….”
천수련은 고개를 내저었다.
전공연에서 봤을 때에는 대협의 기상이 철철 넘쳐흐르지 않았던가. 하나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가벼운 모습에 절로 한 숨이 흘러나왔다.
“공, 아니 공 소협이 두고 갔어요.”
“왜?”
“남 소협에게 선물하겠대요.”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녀석 금강불괴였어?”
“그냥 준데요. 받으세요!”
천수련은 마린보의를 짐짝 취급하듯 건넸다.
그리고 몇 개 되지 않는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남천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린보의를 내려다봤다.
‘부러진 도를 줘서 미안했나?’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귀한 물건을 선뜻 내줄 줄 누가 알았으랴.
‘역시 진짜 명문거파의 후계자는 씀씀이가 다르네.’
집에 가면 마린보의 같은 기물이 서너 개쯤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일단 확인.’
《마린보의》
- 용린사로 만든 보의.(가치: 800)
- 하급의 검기를 삼 회에 걸쳐 방어합니다.
- 방어구 등급 : 영웅(英雄)
- 착용 시 특기 ‘철벽’과 ‘활기’가 활성화.
- 착용 시 체력 회복 +10% 증가.
- 착용 시 내공 회복 +10% 증가.
- 내구도(89/140)
※ 절단 시 복구 불가.
오호, 이것 봐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은가.
물론 같은 영웅 등급의 무기인 질풍뇌격궁과 비교했을 때 가치는 높지만, 부가 기능은 낮다. 게다가 추가 능력치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특수한 상황에서만 활용이 가능한 활과 달리 보의는 열두 시진 내내 착용이 가능했다. 활용도만 따져도 활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상급의 기물이다.
《철벽(鐵壁)》
- 외문기공 ‘철포삼’이 등록됩니다.
《활기(活氣)》
-내력의 운용이 소폭 활발해집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을 만큼 좋았다.
‘공태령! 네가 그래도 치졸한 녀석은 아니었구나. 나 때문에 협명을 얻었으니 이 정도는 선물해야 진정한 사내가 아니겠어.’
불현 듯 다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 아니겠지?’
하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랬다면 직접 주는 편이 효과적이었으리라.
게다가 지난 밤 이별을 고하지 않았던가.
그래, 아닐 거야.
앞으로도 너를 싫어하지는 않으마.
‘아주 멀리서나마 항상 응원할게.’
남천휘는 마린보의를 품에 안은 채 신공부가 있는 방향을 보며 세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마린보의가 돌발 퀘스트였다면 이제 메인 퀘스트를 진행할 시간이다.
‘S급 특기인 통찰은 놓칠 수 없지!’
때마침 짐을 싸들고 나선 천수련과 마주했다.
“개똥, 아니 천 소저.”
천수련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눈치가 귀신같은 녀석이 아니던가.
그녀는 남천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공을 날렸다.
“나한테 바라는 거 있어요?”
남천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천수련이 보타암 재건에 실패한다면 새로운 직업으로 복자(卜者)나 간자(間者)를 추천할 생각이다.
아주 떼돈을 벌 거야.
‘그래, 때로는 돌아가는 것보다 직접 마주하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는 거지.’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버릇처럼 읽던 서책 어딘가에 적혀 있던 구절이었다.
이런 말도 있더라.
사내라면 직도였다.
아마 백파도 남추가 어디선가 했던 말 같다.
“탈각진체법은 어떻게 수련해야 하냐?”
남천휘는 말을 내뱉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건 너무 대놓고 요구하는 행위가 아니던가.
타인의 무공을 논하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강호의 법도였다.
천수련이 자신을 능욕했다며 당장 검을 빼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한데 그녀는 남천휘를 빤히 쳐다볼 뿐 화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뜬금없는 한 마디를 내뱉는 것이 아닌가.
“좋아요. 같이 가요.”
“어?”
“결론은 배우고 싶다는 말이잖아요.”
툭 터놓고 얘기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 경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남천휘는 겸연쩍은 마음에 헛기침을 했다.
통찰에 대한 욕망이 너무 컸나 보다.
정신을 못 차리고 나댈 정도로 말이다.
“크흠, 뭐 그렇기는 한데.”
천수련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탈각진체법을 원하는 자가 지금까지 남 소협뿐이었겠어요? 하지만 이건 하루 이틀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버틸 수 있겠어요?”
말투가 가르쳐줄 것 같은데?
좋아! 시키는 거라면 뭐든 할 수 있단다.
“네가 나를 개똥이라고 불러도 참을게!”
“또! 그 개똥이 소리!”
천수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한 숨을 흘렸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남천휘는 천수련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좀 그렇다. 사문의 비전인데 이렇게 막 알려줘도 돼?”
천수련은 웃음기를 지웠다.
“은하검후 이전에 보타암을 대표하던 천봉검후께서 말씀하셨지요. 불가의 무공으로 태어났으나, 불가가 아닌 만천하를 비추기 위해 사용하라. 양민을 이롭게 하고, 약자를 도울 수 있는 자라면 가르침에 인색하지 말라. 이것이 천봉검후께서 전하신 가르침이랍니다.”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
명문 거파에 속한 무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입에 담아봤을 법한 성어였다.
하나 언행일치를 보이는 자가 몇이나 될까.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내쫓을 때에나 써먹는 변명거리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아! 괜히 겸허해지네.”
“제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준 것을 돌려주는 것뿐이랍니다.”
크큭! 하늘이 주는 거라면 내가 아주 잘 받지.
남천휘는 빙긋 웃었다.
“오늘 개똥이한테 좋은 거 하나 배운다.”
“또!”
천수련이 새치름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하나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폭소를 터트릴 뿐이다.
“좋아! 가자. 우리 집에 맛있는 거 많다.”
이렇게 또 한 명의 동행이 늘었다.
남천휘는 앞서 가는 천수련의 정보를 확인하며 침음을 흘렸다.
‘호감도가 또 올랐네.’
현재 그녀의 호감도는 ‘70’이다.
이러다 ‘80’까지 올라버리면 강제로 미연시가 발동될 터였다.
남천휘는 소리 없이 다짐했다.
‘조심하자.’
용봉쟁투를 통해 얻어낸 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하나 딱 한 사람만은 남천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혜소였다.
믿을 수 있는 녀석이기에 함께 하고 싶었다.
하나 혜소는 강호를 동경하지 않았다.
오히려 헤어진 여동생을 찾아 심산유곡에 은거하고 싶어 하는 녀석이 아니던가. 여동생을 찾아줄 방도가 없으니 녀석을 붙잡을 명분도 없었다.
결국 혜소와는 꼭 다시 만나기를 약속한 후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전낭 속에 천품 육포 한 꾸러미와 은자 천 냥을 몰래 넣어주는 것이 호의의 전부였다.
‘그래도 용봉쟁투를 통해 많이 성장했으니.’
남천휘가 모든 것을 독식한 듯했으나, 혜소도 많은 발전을 이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공만 뛰어날 뿐 무공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명목상일지언정 수십 명의 사부를 얻게 된 자리가 바로 용봉쟁투였다.
그들은 기초적인 것을 가르쳤겠지만, 혜소에게는 그 마저도 가뭄의 단비 같았다. 분명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몇 단계 성장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찌됐든 남천휘가 봤던 사람 중에서 가장 운이 좋은 녀석이 아니던가.
‘혜소야 건강하게만 돌아와라. 여동생이야 언젠가는 찾을 수 있지 않겠냐?’
결국 네 사람만이 용봉평을 떠났다.
돌아가는 길은 심심할 만큼 평화로웠다.
‘내가 레벨이 낮지, 돈이 없어?’
남천휘는 서산노옹과 백주검을 배려하여 값 비싼 마차를 빌렸다. 그리고 그를 포함한 네 명은 마차를 타고 편안하게 이동 중이다.
한데 오직 남천휘만 편치 않았다.
서산노옹은 자신과 천수련을 번갈아보며 흐뭇한 미소를 연발했다. 백주검은 아예 대놓고 좋을 때라며 술을 물처럼 들이켰다.
‘아니, 그렇게 마시면 술맛은 납니까?’
막 총관에게 일러서 술 싸움이라도 시켜야 속이 풀릴 듯했다.
술을 레벨로 마시냐?
‘술은 근성으로 마시는 거야!’
◎ 대상자의 근성 수치는 평균 이하로서…….
어쩐지 네가 조용하다 싶더라.
‘내가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안 마시는 거야!’
남천휘는 재이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채 천수련을 바라봤다. 재이에게 놀림을 당하느니 천수련을 놀리는 편이 나을 듯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냐?”
“공 소협 생각이요.”
되로 주고 말로 받았습니다.
기껏 꺼져가는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게 누굽니까?
‘개똥이, 너!’
서산노옹과 백주검은 서로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벌써 치정이라니.”
“자칫하면 칼부림이라도 나겠구만.”
아주 활활 잘 타는군요.
남천휘는 애써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 채 창밖을 쳐다봤다. 그러던 중 익숙한 풍격에 몸을 내밀고 환하게 웃었다.
곡부남가가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몇 년만에 마주하는 것처럼 감회가 새로웠다.
‘아! 진짜 새 건물 있네.’
하여간 돈 버는 건 귀신이라니까.
그 때 곡부남가의 정문에 나와 있는 소혜가 보였다.
남천휘는 그제야 자신이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소혜가 아주 펑펑 울겠는 걸. 자식, 오늘은 이 오라버니가 넓은 마음으로 용서를……. 응?’
한데 소혜는 다른 볼 일이 있었는지 저자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왜 따귀라도 맞은 사람처럼 울상이에요?”
천수련의 말에 힘없이 대꾸했다.
“오늘은 비가 왔어도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