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올 때는 혼자였지만.
54, 올 때는 혼자였지만.
금곽의 내부를 보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이런 씨.’
VR 모드를 통해 봤던 칠야와 창월이 확실했다.
다만 두 동강이 났을 뿐이다.
그러니 금곽 안에는 네 개의 고철이 나뒹굴고 있는 셈이다.
“아.”
결국 참다못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남천휘는 한순간 말을 잇지 못한 채 고철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해보였던 걸까. 신풍수사가 나직이 읊조렸다.
“맙소사. 어쩐지 황보세가에서 순순히 넘긴다 싶었더니 이런 짓을······.”
잘린 부분의 흔적을 보아하니 하루 이틀 전에 부러진 것은 아닌 듯했다. 애초에 부러진 도를 구해 와서 창고에 넣어놓은 것이 아닐까 싶다.
“남 소협, 차후에 내가 쓸 만한 도를 줌세. 이거 참, 나도 당황스럽군.”
신풍수사는 그답지 않게 곤혹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하나 천위검호 유백하는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사내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 그것이 자네의 운일세. 수사도 괜히 말이 나올 행동은 자제하시오.”
어째 말에 뼈가 있다.
재이야. 저 아저씨, 무서워.
천위검호는 신풍수사와 달리 천위검호는 쌍도의 상태를 알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띠링-
한데 더 이상의 잡념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재이의 알림이 울렸다. 백파도 남추의 쌍도에 남아 있는 영상을 재생하겠냐는 물음이었다.
그것도 무려 두 개의 영상이 존재한단다.
‘해야지! 일단 해.’
지난 두 번의 경험을 통해 VR에서 보낸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같지 않음을 깨우친 상태였다. 그래서 신풍수사와 천외검호를 앞에 두고도 개의치 않았다.
《남추의 세 번째 생전 영상이 재생됩니다.》
이번에 본 할아버지는 아주 젊었다.
언뜻 봐도 몽산에서 수련하기 이전의 기억인 듯했다. 무엇보다 남추의 허리춤에는 쌍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노인이 칠야와 창월을 내밀었다.
남추는 만족스러워 했다.
한데 노인은 스무 자루의 수련용 직도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 노인은 수련용 직도를 확인했을 때 거론된 철장경이라는 야장이 분명할 터였다.
- 삿된 마음으로는 결코 휘두르지 않을 겁니다.
- 자네를 믿네. 혹여 직도에 문제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찾아오게. 나는 언제까지나 유선관에서 자네를 위해 숫돌을 갈고 있겠네.
유선관(遊仙觀)이라.
‘최근에 어디서 들었는데?’
그 순간 천성혈법을 전한 단양자가 떠올랐다.
그가 묫자리로 삼겠다는 곳이 바로 유선관이었다. 심지어 시스템은 단양자가 떠난 유선관과 남추가 향한 대설산을 선택지로 제시할 정도였다.
그만큼 유선관은 중요한 곳이리라.
그리고 남천휘는 그 실마리를 지금 발견한 것이다.
영상은 남추가 칠야와 창월을 허리에 매고, 수련용 직도를 짊어지고 떠나면서 끝났다.
《칠야와 창월에 깃든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물건에도 ‘VR‘이 적용되는구나.
‘하지만 지금은 됐어.’
그건 나중에 확인해도 될 듯했다.
그 때 신풍수사의 걱정스런 한 마디가 들렸다.
“크흠, 남 소협.”
남천휘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 쌍도의 상태를 확인했을 때와 다르게 미소가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선대의 유품을 접했더니 감회가 새로워서······.”
눈을 있는 힘껏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왠지 눈시울이 붉어진 듯했다.
신풍수사가 천외검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괜찮은가?”
남천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거면 충분합니다.”
아니, 이거여야 합니다.
천불이 날 것만 같았거늘 이제는 시원한 바람을 마주한 것처럼 상쾌했다.
단양자의 유선관, 철장경의 유선관.
결국 남천휘가 향할 곳은 유선관인 셈이다.
만든 사람이 있으니 붙일 사람도 있을 터였다.
‘느낌이 좋아.’
지금껏 선대(先代)의 기억을 읽을 때마다 승승장구하지 않았던가.
남천휘는 애써 웃음기를 지웠다.
이렇게 된 이상 좋은 인상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금곽을 품에 안은 채 명숙들을 향해 돌아섰다.
부러진 쌍도가 명확하게 보였다.
명숙들은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아! 이런.”
하나 남천휘는 눈시울을 붉힐 뿐 입가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러 어르신들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본가의 시조는 백파도라는 별호를 쓰셨습니다. 그분의 행적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이러한 특수 병기를 사용하셨다고 하더군요. 한데 이곳에 와서 그분의 유품을 마주했고, 신마대전 당시 협의지심이 투철했던 선배가 남겼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명숙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성을 내뱉었다.
신마대전을 겪지 못한 그들이었으나, 강호의 정세를 건 한판 승부를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는가.
그 날 정파를 위해 싸웠던 사람이라면 응당 존경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명숙들은 공태령이 모조품을 보고 공경의 마음을 표현했듯 너나할 것이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름 모를 고인의 정체가 곡부남가의 시조셨구려. 신공부는 그런 귀인을 몰라봤으니 나부터 사과를 하겠네.”
신풍수사는 장삼의 앞자락을 걷어 올린 채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신공부의 이총관인 신풍수사 서림(徐林)은 백파도 남 대협의 협의지심을 뒤늦게나마 접했으니 이제라도 인사를 올리려 합니다.”
역시 화법의 대가답게 어조부터 능수능란했다.
그가 남천휘에게 주는 또 하나의 배려였다.
그가 생각했을 때 부러진 도는 상징이 될 뿐 실질적인 이점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백파도 남추의 협의지심이라도 널리 알리려는 게다. 그렇게만 된다면 곡부남가는 예전과 다른 대우를 받을 수도 있으리라.
서산노옹 역시 기꺼이 합류했다.
그가 무릎을 꿇은 채 예를 올리자, 명숙들은 멀뚱히 서 있기도 뭐한 상태였다. 결국 하나둘 씩 예를 표했고, 결국 천외검호까지 마뜩찮은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도의와 예법을 상징으로 하는 신공부였기에 가능한 기사였다.
남천휘는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았다.
‘어이쿠! 인사 잘하시네.’
명숙들이 무릎을 꿇을 때마다 명성이 상승한다는 재이의 알림이 연이었다.
남천휘는 목례로 감사함을 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명성이 일정 수준을 넘어섰다는 알림과 함께 새로운 호칭이 등록됐다.
《추억 팔이》
- 특정 인물과 조우할 시 신뢰도 대폭 상승.
호칭명은 좀 그렇다.
하나 내용은 쓸 만한 듯했다.
일견하기에도 백파도 남추와 관계된 사람을 만났을 때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일단 철장경의 후손한테 먹혀야 할 텐데.’
남천휘가 자리로 돌아간 후부터 전공연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천수련이 은하검후의 후손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기에 공태령은 마린보의를 택했고, 천수검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용봉쟁투는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하나 원래의 목적처럼 훌륭한 후기지수들을 대거 발탁했으니 성공적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자! 내년에 있을 두 번째 용봉쟁투를 기원하며 전공연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신풍수사의 외침이 대전 곳곳에 퍼졌다.
명숙과 무인들의 환호성이 뒤따랐다.
하나 두 번째 용봉쟁투가 열릴 공산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애당초 용봉쟁투를 끝낼 때 후기지수들은 철저히 배제되지 않았던가.
후기지수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저 세간에 삼정의 굳건함을 알리기 위한 겉치레에 불과했다.
‘그래도 불만을 가지는 녀석은 없겠지.’
어차피 대부분 삼정 휘하 방파에서 파견 나온 녀석들이 아니던가. 삼정에서 어느 정도 보상을 해줬을 테니 웃으며 용봉평을 떠날 수 있으리라.
전공연이 마무리 되는 순간 무인과 명숙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어찌나 빨리 자리를 비웠는지 악사들이 악기를 챙기는 사이에 대전이 텅 비었을 정도였다.
남천휘가 대전 밖으로 나서자, 서산노옹이 다가와 진심이 담긴 축하를 건넸다.
“잘 됐구나.”
“용봉쟁투 우승은 못했지만, 원하는 것은 얻었습니다. 그러면 됐지요.”
서산노옹은 남천휘의 어깨를 다독였다.
“내 마음 속의 일위는 너란다.”
부담스러우면서도 기분 좋은 칭찬이 아닐 수 없다.
자! 지금이 기회다.
남천휘는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글쎄다. 본래 봄이 올 때까지 용봉평에서 머물고자 했었지. 한데 이처럼 끝이 났으니 어디든 가야하지 않겠느냐.”
얼씨구나, 좋구나!
재이야, 풍악을 울려라!
‘그렇다고 진짜 틀지는 말고!’
남천휘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르신과 이대로 헤어지기가 너무 아쉽습니다.”
“하하, 나도 그렇단다. 너처럼 마음에 쏙 드는 후학을 만난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란다. 하나 우리의 연이 이대로 끝날 리 없으니 때가 되면 다시 보지 않겠느냐?”
“그 때를 지금으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서산노옹은 남천휘의 속내를 짐작한 듯 침음을 흘렸다.
“흐음, 곡부남가에 의탁을 하라는 게냐?”
남천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리 거창하게 초빙을 할 만큼 대단한 곳이 아닙니다. 그저 말학후배가 작은 가르침이나마 얻고 싶어서 떼를 쓰는 거라 생각해주십시오.”
서산노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래와 달리 치기 어린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구나. 신공부보다 더 신공부에 걸맞은 언행이 아니던가. 이런 아이가 제대로 자라면 정파의 큰 기둥이 되어줄 텐데.’
그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마음을 정했다.
“좋다. 하나 친우에게도 물어봐야겠구나.”
남천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산노옹의 친우라면 곤륜산인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 백주검이 아니던가. 서산노옹이 인자함과 공명정대한 명숙이라면 백주검은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을 지녔다.
“묻기는 뭘 물어봐.”
남천휘는 고개를 숙여 백주검을 맞이했다.
그는 두 사람만 보고 대화의 내용을 유추했나 보다.
“어차피 갈 곳도 없잖아. 우리 나이에 눈밭에서 잠들면 그대로 가는 거야. 흰소리하지 말고 오라고 할 때 가세. 비싼 척하다보면 안 팔려.”
호탕하다 못해 자유분방한 한 마디였다.
남천휘는 손을 모은 채 빙긋 웃었다.
“두 분께서 와주신다면 저야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저는 바랄 것이 없지만 곡부남가는 바랄 것이 아주 많답니다. 곡부 남부에 갇혀 지내는 가솔들에게 강호의 경험도 전해주고, 무공까지 손봐준다면 그것이야 말로 호박이 넝쿨 째 들어온 것이 아니겠는가.
“쯧쯧, 경박한 어투 하고는. 손자뻘 되는 아이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손자뻘 되는 아이한테 밥도 얻을 먹을 거라네.”
백주검은 배를 두드리며 웃었다.
“으이고, 친우라고 하나 있는 것이. 크흠, 천휘야. 짐을 정리해야 하니 반 시진 후 입구에서 만나자꾸나.”
남천휘는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두 사람이 처소로 떠난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서산노옹과 백주검의 레벨은 각기 77과 86이다.
하나 저들의 진정한 무기는 공명정대함과 오랜 경험이 아닐까 싶다.
‘선대의 유품을 얻은 것만큼이나 횡재한 거지.’
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한데 예기치 못한 사람이 앞을 막아섰다.
지금쯤 신공부의 철수를 도맡아야 할 신풍수사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 가는가?”
“네, 돌아가야지요.”
그는 아쉬움이 가득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자네한테 관심이 가. 아주 흥미롭거든.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알려주고 싶은 것도 적지 않지. 참으로 아쉽군. 아쉬워.”
알려주고 싶다는 게 살짝 궁금하기는 했다.
하나 그거 하나 듣자고 밑천을 탈탈 털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노옹과 백주검은 자네와 함께 가시는가?”
“예, 그리 되었습니다.”
신풍수사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 모인 명숙들은 대부분 이권과 명예를 위해 모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나 저 두 분은 일체의 사리사욕 없이 대의를 위해 기꺼이 본가를 방문하셨지. 좋은 분들이다. 예를 갖춰 모시도록 해라.”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럼 가마. 언제고 신공부 근처를 지나게 된다면 찾아 오거라. 내 박대하지는 않으마.”
그를 만난 이후 지금껏 들은 말 중에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신공부의 이총관이라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세가 아니던가. 그런 사람과의 연줄을 공짜로 얻었으니 이 또한 횡재나 다름없었다.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아쉽게 신풍수사는 ‘인맥’에 등록되지 않았다.
남천휘는 신풍수사를 배웅한 후 한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계산은 바로 해야지.’
개똥이를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