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두려울 것이 없었다. (2)
말투가 묘했다.
평소 같지 않게 가까운 느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려는 듯한 결심.
‘하지 마. 뭐가 됐든 하지 마!’
남천휘는 상체를 바로 했다.
허리를 펴는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공태령과 거리를 벌렸다.
공태령은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불야성처럼 빛나는 용봉평 너머를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용봉쟁투는 끝났어요.”
예상치 못한 한 마디에 팽팽했던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가뜩이나 호감도가 아슬아슬했던 녀석이 아닌가.
그렇기에 남색임을 털어놓던가, 최악의 경우 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할 줄 알았다.
아니네.
남천휘는 헛기침을 했다.
오전에 만났던 서산노옹에게도 그랬지만, 자신의 예감이란 동전 한 푼의 가치도 없을 만큼 엉터리였다.
“그래, 끝났지.”
남천휘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지 않아도 세 사람이 모여서 술을 마신 까닭은 용봉쟁투의 종결이 선언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음 편히 술 한 잔을 나누며 지난 며칠을 추억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본래 이처럼 여유롭게 술을 마실 때가 아니었다.
용봉쟁투의 종결은 예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용봉쟁투는 애초에 삼정의 후계자를 소개하기 위한 자리였다.
한데 그 중 한 명이 죽었다.
그것도 살해당했다.
그러니 용봉쟁투를 계속할 이유가 없어진 게다.
남천휘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용봉쟁투에서 우승한 후 칠야도(漆夜刀)와 창월도(暢月刀)를 획득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 하여 술을 마실 시간에 월담이라도 계획했어야 했다.
그래야 했던 그가 이처럼 여유로울 수 있었던 건 공교롭게도 정파의 병폐(病弊)였다.
‘명분과 체면치례가 복으로 돌아왔지.’
과는 공으로 덮고, 현상 유지를 목적으로 했다.
이미 청도문의 음모와 초류혁의 억울한 죽음은 양민들의 입을 통해 용봉평 밖으로 퍼져나간 상태였다.
그렇기에 신공부는 숨기는 것을 포기하고, 더 큰 사건으로 덮으려 했다.
바로 영웅 출현이다.
공태령과 남천휘, 그리고 천수련의 영웅적인 행위를 대대적으로 알린 후 전공을 포상하겠다는 것이 삼정의 발표였다.
면면(面面)만 봐도 예쁜 구도가 나왔다.
공태령은 가문에 누를 끼칠 것을 알면서도 협의지심을 발휘했다. 이것이야 말로 대협의 기상이라며 칭송이 자자하더라.
‘게으름뱅이 녀석.’
천수련은 청초하고 신비한 외모와 맞물려 억울함의 대명사처럼 포장이 됐다. 강호사에 미인이란 포기할 수 없는 양념이 아니던가.
‘개똥이 주제에.’
남천휘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떠올리며 한 숨을 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암중에서 계획을 세우고, 공태령을 보조한 기재.
이게 끝이다.
‘이게 끝이냐고? 서산노옹께서 그처럼 자랑을 해놨음에도 이게 끝이야?’
이미 항간에는 공태령과 천수련의 애틋함을 알리기 위한 경극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생각은 전무했지만,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한데 그 모든 감정을 한데 모아 하늘로 날려버릴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전공연(戰功宴)이다.
전공에는 당연히 포상이 따를 터.
용봉쟁투를 통해 내릴 수 있는 포상이라면 당연히 우승 상품이지 않겠는가.
영웅과 미인, 거기에 보물까지 더해진다면 정마대전 급 음모가 아니라면 묻히는 것이 당연했다.
아마 내일이 지나면 초류혁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 사라질 것이다. 대신 세 명의 후기지수를 찬양하고, 신병이기의 주인이 정해진 것을 축하하리라.
공태령은 생각에 잠겼던 남천휘를 기다려줬다.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했다.
“전공연에서 우승 상품을 포상으로 하사하게 될 거예요.”
“청도문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황보세가가 용케 동의했네.”
“그만한 것을 내줬겠지요. 신공부의 체면과 명예는 그만큼 소중하거든요.”
그래, 청도문이야 어쩔 수 없이 내줬을 것이고, 황보세가는 기보에 버금가는 이권을 얻어냈을 터였다.
강호의 낭만을 운운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남천휘는 입매를 비틀었다.
‘황보장천만 닭 쫓던 개꼴이지.’
그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우승 상품은 세 가지.
하지만 세 사람이 공평하게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다.
남천휘는 공태령의 허리춤을 응시했다.
직도와 형태가 흡사한 두 자루의 패도.
그래, 녀석도 쌍도를 쓴다.
‘설마 양보해달라는 건가?’
불현 듯 신풍수사가 우승상품을 소개했을 때가 떠올랐다. 공태령은 모조품일지언정 쌍도를 보며 경외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름 모를 선배에게 공경의 의미를 담아 포권을 하지 않았던가.
아니나다를까 공태령은 예상했던 말을 꺼냈다.
“내일 쌍도를 고르지 마세요.”
남천휘는 발끈하려다 이내 미간을 좁혔다.
평소의 녀석이라면 양해를 구하거나, 자세한 설명으로 설득하려 했을 것이다. 한데 이처럼 직접적으로 포기를 종용하는 건 녀석 답지 않았다.
“이유는?”
그 때 예기치 못한 말이 이어졌다.
“저도 모릅니다.”
“너 많이 피곤하냐?”
공태령은 자신이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말이 남천휘를 통해 흘러나오자 쓴웃음을 지었다.
“위에서 그러더군요. 다른 걸 골라도 좋으니 쌍도는 선택하지 말라고요.”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신공부 내에서 직접 지시가 내려왔다면 쓸데없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우승 상품은 어디서 가져온 거지?”
“신공부는 마린보의를, 황보세가는 쌍도, 그리고 청도문이 천수검을 내걸었습니다.”
남천휘는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쌍도가 황보세가였어? 각자 후계자에게 줄 것을 준비한 줄 알았는데.”
“저도 정확한 내막은 몰라요.”
그 말을 할 때의 공태령은 참으로 쓸쓸해보였다.
“남 소협의 병기로 봤을 때 상품으로 내건 쌍도와 관련이 있겠지요. 하나 이번만은 실리를 택하도록 하세요. 마린보의는 귀한 물건입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숨기는 것도 무의미하리라.
남천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칠야와 창월은 선대의 유품이야. 훔쳐서라도 가지고 돌아갈 거다.”
공태령은 탄성을 흘렸다.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녀석은 다시 발을 내딛었다.
하나 이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남천휘를 향해 돌아서더니 눈높이에 손을 모았다.
“그간 즐거웠어요. 무사히 돌아가시기를.”
전공연이 끝나면 곧장 해산이다.
삼정으로서는 용봉쟁투의 기억을 한시라도 빨리 지우고 싶을 테니까. 한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헤어짐의 인사가 너무 빠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불야성처럼 일렁이는 저자의 풍광을 등진 공태령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보였다.
“야.”
“그럼 이만.”
남천휘는 경공까지 펼치며 멀어지는 공태령을 보며 한참동안 인상을 썼다.
“아씨, 찝찝하게 왜 저래?”
*
전공연은 생각보다 화려했다.
가기(歌妓)와 무희(舞姬)가 없는 것을 제외하면 수십 명의 악사가 악기를 다뤘고, 산해진미가 팔선탁 위를 가득 채웠다.
심지어 화공까지 불러다 그림을 그렸을 정도였다.
그 덕에 효과는 확실했다.
신공부나 황보세가의 실무자들은 물론이고, 명숙들마저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웃음꽃을 피웠다. 청도문을 대표해 참석한 흑검만이 좌불안석으로 억지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다.
‘빌어먹을! 이런 자리까지 참석해야 하다니.’
하나 성질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도 그럴 것이 초류혁의 죽음은 청도문에서 쫓겨난 섬예검귀 갈벽의 단독범행으로 결정이 난 상태였다.
소문도 그렇게 날 것이다.
‘태산의 반대편까지 빼앗겼으니 본문의 위세가 확연하게 줄어들었어. 빌어먹을! 이제 좌천은 물론이고, 파문까지 걱정해야 할 상황이 아닌가.’
흑검은 자신을 향해 눈인사를 하는 신공부의 ‘공’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 사이 전공연이 시작됐다.
신공부의 이총관인 신풍수사가 직접 나서서 세 명의 후기지수를 선보였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답게 칭송의 수준이 상당했다. 모르는 자가 보면 세 사람이 세상이라도 구한 줄 착각할 정도였다.
“공 소협, 남 소협, 천 소저는 앞으로 나오시게.”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공부에서 마련해준 백의 무복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게다가 전공연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백의를 걸친 건 세 사람이 유일했다. 그러니 그들의 움직임은 단박에 명숙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일 년 내내 제사만 지내서 그런가? 제례를 이렇게도 응용하네.’
남천휘는 탄성을 흘렸다.
이름도 모르는 명숙들이 포권을 한 채 손을 흔들며 세 사람을 반겨줬다. 하나 남천휘의 기를 살려준 건 서산노옹의 흐뭇한 미소가 유일했다.
‘아! 볼수록 욕심이 난다.’
남천휘는 눈인사를 한 후 연단 앞에 섰다.
그는 연단 위에 놓은 세 가지 기물 중 가장 왼쪽에 있는 것을 응시했다.
금곽의 겉면에는 두 자루의 도가 교차된 문양을 수놓았다. 일견하기에도 칠야와 창월이 담겨 있을 터였다.
‘하아, 생각보다 빨리 저걸 얻는 구나.’
한데 상품을 수여해야 할 신풍수사가 한쪽으로 비켜서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명숙들을 향해 말했다.
“장차 산동강호를 짊어질 후기지수들을 축복하기 위해 귀한 분을 모셨습니다.”
명숙들도 모르는 눈치였다.
남천휘가 의아해하는 사이 주렴이 걷히며 건장한 체구의 장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남천휘는 탄성을 흘리며 눈을 끔뻑였다.
장년인 또한 세 자리 레벨의 고수다.
그것만이라면 놀랄 이유가 없다. 한두 명 본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나 장년인의 레벨에는 테두리가 존재했다.
입 구(口)자를 길게 늘려놓은 후 안쪽에 레벨이 표시되는 형식이다. 흰 색 테두리를 보고 있는 사이 재이의 알림이 울렸다.
◎ 200레벨 이상의 고수를 대면했습니다.
- 선연과 악연에 대한 구분이 명확해집니다.
-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가 영향을 받습니다.
- 레벨에 대한 표시 형태가 공개됩니다.
허, 200 레벨이 넘어가면 테두리가 생기는 거였더냐. 그렇다면 지금껏 만난 고수 중 백타선자나 연하연조차 200레벨을 넘기지 못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럼 300레벨도 달라지냐?’
재이는 정보 공개를 선언했듯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 테두리는 무백흑은금(無白黑銀金)으로 표시됩니다.
역시 재이다.
남천휘는 재이의 행동습성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녀석은 뭐든 숨기는 척하면서 조금씩 단서를 제공했다. 두 자리 레벨과 세 자리 레벨을 구분하기 위해 ‘??’와 ‘???’로 표시한 것부터 그런 의미였을 터였다. 이제 같은 세 자리라고 해도 저런 식으로 확인할 수 있게 편의를 제공한 것이 분명했다.
새침 떨면서 부끄러워하는 녀석 같으니라고.
‘그나저나 선연과 악연에 대한 구분이라.’
눈앞의 고수만 해도 신공부의 수뇌부가 분명했다.
그런 사람과 얽혔을 때의 파급력은 예상 외로 클 것이다. 만에 하나 인연이 악연으로 이어질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엮이지 않는 편이 낫겠어.’
남천휘는 헛기침과 함께 표정을 수습했다.
장년인이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재이를 떠올리며 웃는 모습을 본 듯했다.
첫 인상부터 좋지 않았을 테니 더더욱 엮이지 말아야겠다. 장년인은 신풍수사의 소개가 있은 후에야 찌를 듯한 시선을 거뒀다.
“천위검호께서 우연히 근방을 지나시다 함께 해주셨습니다!”
여기저기서 탄성을 쏟아져 나왔다.
천위검호라면 남천휘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고수였다.
천위검호(天衛劍豪), 유백하(劉柏廈).
그는 신공부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가 아니던가. 게다가 그가 속한 천위장 또한 공문십철 중에서 으뜸이라 자부했다. 그러니 신풍수사가 아랫사람을 자처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소. 이번 일로 장래가 기대되는 후기지수들을 얻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을 게요. 그러니 강호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이 아이들에게 찬사를 보내주시오.”
짧고 굵은 한 마디.
거기에 더하여 천위검호의 매서운 눈빛까지 발산되니 호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후기지수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간간히 신공부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하나 유일하게 표정을 굳히는 자가 있었다.
흑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곤륜산인과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그런데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다가 들렀다고?’
그가 의아해하는 사이에도 전공연은 아무 문제없이 진행됐다.
그만큼 아무도 청도문을 신경쓰지 않았다.
“남 소협이 먼저 고르겠는가?”
남천휘가 먼저 호명됐다.
이건 신풍수사의 호의였다.
실상 사건을 해결한 건 남천휘였지만, 소문은 공태령을 중심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남천휘는 망설일 것 없이 쌍도 앞에 섰다.
“후회하지 않겠는가?”
신풍수사가 질문했다.
어라, 왜 저런 질문을 하지?
지난 밤 공태령의 말에 의하면 신공부는 쌍도를 낮춰보지 않았던가. 그러니 신풍수사라면 당연히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했다.
‘저 사람은 모르는 건가?’
남천휘는 속내를 숨긴 채 빙긋 웃었다.
“네, 선대의 유품입니다. 이렇게나마 되찾게 되어 참으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왕대만은 남천휘의 의젓한 모습에 혀를 찼다.
‘에라이! 빌어먹을 놈, 꽝이나 뽑아라!’
남천휘가 금곽을 열었다.
그러자 금곽의 내부가 명숙들에게 공개됐다.
“어!”
왕대만은 양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고개를 움츠렸다.
‘진짜 꽝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