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두려울 것이 없었다.
53, 두려울 것이 없었다.
신풍수사(新風秀士).
듣기로는 한림원까지 드나들었던 석학이란다.
한데 삼십 대의 나이로 관직에 염증을 느끼고 낙향.
신공부에 의탁한 후 이총관의 자리까지 차지한 입지전적인 존재였다. 총기를 숨기는데 능하고, 남의 의견을 귀담아들으며, 공을 탐하지 않는 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런 사람이 남천휘를 빤히 쳐다봤다.
첫 느낌은 묘했다.
마음을 꿰뚫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도 아니고,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려는 몽롱한 눈빛도 아니다.
그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반짝였다.
호기심 가득한 아이를 보듯 말이다.
그렇기에 남천휘는 대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그야말로 아이를 상대하듯 ‘너는 몰라도 돼’를 시전 해봤다.
안 통하더라.
“후훗, 나는 이런 대화가 참 좋아. 머리 굴리는 재미가 있거든.”
신풍수사는 싱긋 웃더니 손짓을 했다.
그러더니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 아닌가.
그 후 시비를 불러 차와 다과를 내오라 명했다.
아니, 잠깐만요.
방금 청도문의 봉공이었던 섬예검귀를 잡았잖아요. 저기 끌려가는 사람이 그 놈인데 이렇게 여유로워도 되는 겁니까.
‘아! 나만 빼고 다 여유롭네.’
남천휘는 헛웃음을 흘렸다.
신공부의 무인들이 곤륜산인을 끌고 가는 사이 청도문 소속의 문도들은 대책을 마련하려는 듯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황보세가는 강 건너에서 불이라도 난 것처럼 멀뚱히 지켜보다가 자리를 떴다. 그러자 명숙들은 좋지 않은 꿈에서 깨어난 듯 빠르게 장내를 정리했다.
마치 어른들이 결정을 내리니 아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뒤따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앉게.”
다행히 서산노옹도 동석했다.
남천휘는 어쩔 수 없이 신풍수사의 맞은편에 반만 엉덩이를 붙였다.
“어디서부터인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신풍수사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만 봐도 그가 사건의 전모를 알았을 때의 반응이 예상됐다.
하나 저 자 또한 신공부의 일원이다.
그렇기에 입을 닫았다.
하나 신풍수사는 이런 상황조차 즐거운 듯했다.
“곡부남가라면 노국장 계열이지? 장주께서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한데 불과 반 년 전까지만 해도 무위도식하던 한량이 무공을 익힌 것도 모자라 흉수까지 잡았으니 내가 궁금할 수밖에.”
“운이 좋았지요.”
“무공이?”
남천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가전무공을 익혔을 뿐입니다.”
“들리던 것과 조금 다른 듯 하던데?”
들린 게 아니라 조사해봤겠지.
용봉쟁투의 책임자로서 남천휘의 약진은 예상 밖이었으리라.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운이 좋았지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대뜸 표정을 구겼으리라.
하나 신풍수사는 표정의 변화 없이 되물었다.
“그럼 오늘 일도 운이 좋았던 게로군.”
화법만으로도 사람을 이렇게 지치게 만들다니.
신공부는 경전 대신 도발을 가르치나 보다.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지요.”
“조금 전에는 노옹께서 다 하셨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면 오늘 노옹의 공명정대함 또한 운이었던 겐가?”
말 꼬리 잡기인가.
신풍수사는 화제를 빙빙 돌리면서 상대방의 실수를 유도하려는 듯했다. 저 자처럼 머리가 좋은 자는 상대방이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를 규합하여 정보를 완성시키는 재주가 상당할 터였다. 촌철살인의 기지로 논객을 자처하는 유자(儒子)가 세상을 좌지우지 했던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의 일이던가.
‘그래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남천휘는 시야 상단에서 반짝이고 있는 특기를 확인한 후 미소 지었다.
특기 ‘변설’과 ‘집중’이 활성화된 상태였다.
신풍수사와 말싸움을 해서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하나 더 이상 어린 아이 혼을 빼는 듯한 화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수사께서도 사건의 전모를 어느 정도 파악하셨겠지요. 초 소협은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한 겁니다. 별 생각 없이 길을 걸어가다가 벼락을 맞은 것과 다를 바가 없지요.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살인사건을 서산노옹께서 해결하셨으니 어찌 운이 나쁘다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하늘이 도왔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신풍수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나 좁은 눈매 사이로 흘러나오는 눈빛은 더욱 매서웠다. 사건에 대한 호기심이 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옮겨 붙은 듯했다.
“그래, 자네의 말이 옳아. 노옹, 하마터면 미궁 속으로 빠질 뻔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삼정이 반목하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수도 있지요. 미연에 막아주신 점,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하여간 유자랍시고 말하는 본새를 보라.
청도문에서 일을 꾸몄건 사실이다.
다만 실패했을 뿐이다.
한데 신풍수사는 말 몇 마디로 삼정 전체가 피해자인 양 얼버무리고 있지 않은가.
서산노옹처럼 노회한 노강호가 신풍수사의 말뜻을 모를 리 없다. 그러니 신풍수사 또한 서산노옹에게 넌지시 덮어줄 것을 강요한 것이리라.
어른의 세계는 오늘도 참 편하구나.
서산노옹은 빙긋 웃었다.
“천휘의 말처럼 하늘이 도운 게지요.”
덮자는 뜻이다.
하나 남천휘로서도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번 일은 천수련을 통해 얻어낼 것이 있기에 개입하지 않았던가.
‘일이 더 커지면 나도 피곤해지니까.’
만약 오늘 일로 삼정이 칼을 겨누고, 내일 당장 산동강호에 피바람이 부는 상황은 원하지 않았다. 강호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이 한 몸 불사를 것도 아니니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이 바람직했다.
무엇보다 남천휘도, 곡부남가도 혈란(血亂)에 휩쓸린 후 생존을 자신할 만큼 굳건하지 않았다.
‘싸움은 너희들끼리 하라고.’
신공부든, 황보세가든, 청도문이든.
누가 산동강호에 군림하듯 정파의 껍질마저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세 방파에 속하지 않았다면 뭐가 어찌 되었든 알게 뭐란 말이더냐.
‘이 기회에 외조부께서도 노국장을 정리하고 신공부에서 빠져나오시면 좋을 텐데.’
남천휘가 입맛을 다시는 사이 신풍수사가 침음을 흘렸다. 일차전이 무승부로 끝났으니 이차전을 시작하자는 신호라도 보내는 듯했다.
“수사. 잠시 내 말 좀 들어보오.”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던 서산노옹이 입을 열었다.
신풍수사로서는 방금 전 빚을 지었으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천휘의 무공은 수사도 보아서 알 것이외다. 용봉쟁투에 참가한 후기지수 중 수위에 꼽히지. 한데 지식의 해박함과 판단의 재빠름은 또래보다 훨씬 윗줄이더군. 천휘는 단순히 같은 조원으로서 천 소저를 돕기 위해 나선 것이 아니외다.”
남천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르신이 그걸 어떻게?’
반면 신풍수사의 눈이 반짝였다.
만류할 것이라 여겼던 사람이 아예 토설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이유를 저도 알 수 있을까요?”
남천휘 역시 신풍수사와 같은 마음이다.
‘생각해보니 어르신이 퀘스트를 알 리가 없잖아.’
서산노옹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덧붙였다.
“용과 봉이 만난다고 해서 늘 싸우란 법이라도 있소이까? 용과 봉이 어우러져 꽃을 피우는 것 또한 후기지수만의 낭만이 아니겠소.”
으웩!
남천휘는 황망함을 금치 못했다.
이건 남녀의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신풍수사는 수긍을 하는 것이 아닌가.
“선남선녀가 모였으니 정분이 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군요. 하면 남 소협이 천 소저를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군요.”
“클클, 하늘의 별을 따주는 것보다야 혐의를 벗기는 쪽이 쉽지 않겠소?”
남천휘는 어색하게 웃었다.
여기서 반박을 하면 다시 원점이다.
결국 초연에 빠진 총각을 연기하듯 뒤통수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간절하면 하늘이 나서서 도와주는 법입니다. 절실했으니 남이 놓친 단서를 찾아냈고, 작은 단서를 모아 흉수에 이르렀겠지요.”
아!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았는데.
하나 남천휘는 맞장구를 쳤다.
“그냥 드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청도문을 흉수로 지목한 상태에서 움직였기에 섬예검귀 갈벽의 은신처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놈이 용봉평을 빠져나가지 않았다면 청도문 실무자의 처소만큼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풍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긴 그 누가 삼정의 거처를 수색하자고 할 수 있었겠는가.”
서산노옹은 남천휘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 입으로 흉수를 잡았지만, 천휘가 아니었다면 결코 잡을 수 없었을 것이외다. 이 아이의 무공과 재지는 후기지수의 수준을 넘어섰소. 향후 신공부도 곡부남가와의 관계를 재고하는 것이 좋을 게요. 이 아이는 정말 대단한 아이가 될 게요.”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남천휘를 잡아끌었다.
신풍수사는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흉중의 의문을 열에 하나도 해소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을 뒤따라갈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지적 유희’의 시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정치 살육’의 시간이었다.
‘남천휘. 기억해두도록 하지.’
서산노옹은 남천휘의 어깨에 올린 손을 풀지 않았다. 그는 전방을 응시한 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서운하더냐?”
아니, 핑계를 대도 정분(情分)이라니.
하지만 그렇다고 서산노옹을 탓하기도 뭐했다.
어쨌든 흉수와 신풍수사를 상대할 때 큰 도움을 받지 않았던가.
한데 서산노옹은 이미 천수련과의 관계를 기억에서 지운 후였다.
“작금의 강호는 평화롭다. 하나 겉으로 보이는 것만 그럴 뿐 사람 사는 세상이 어디 쉽게 변하겠느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약자가 살아가기 힘든 세상임은 매한가지다. 그러니 힘을 숨기고, 여력을 두고, 한 발 떨어지라고 가르치지.”
어! 천수련 얘기가 아니네.
서산노옹은 손자에게 충고하듯 말을 이었다.
“하나 마냥 숨기고, 남기고, 떨어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다. 너는 이미 용봉쟁투를 통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제 와서 우연이나, 운이었다고 우겨대도 사람들은 의심할 뿐이야. 그러니 차라리 드러내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남천휘는 얼굴을 붉혔다.
서산노옹의 걱정을 눈치 채지 못하고, 착각이나 했다는 자괴감이 물심 밀려왔다.
“네 무위와 지혜, 그리고 잠재력을 알렸으니 저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게다. 너는 강하다.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강하겠지. 그리고 내가 아는 것 이상의 재주를 지녔을 게야. 하나 끊임없이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 그러면 너는 정말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게다.”
남천휘는 서산노옹의 진심어린 충고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가 대협(大俠)이나 영웅(英雄)이 아니라 대인(大人)을 논했기 때문이다.
몇 번 마주치고, 두어 번 대화한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산노옹은 남천휘의 성향을 정확히 짚어냈다.
남천휘 역시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정천칠공이 평화와 안정을 선사했어도 지키고, 가꾸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다.”
그는 서산노옹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 용봉쟁투에 참가하기를 잘했다.
저런 좋은 어른도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
달이 크고 밝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했다.
‘하지 말아야지.’
애도 아니고 저런 짓을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그런데 있더라.
남천휘는 팔을 길게 내뻗은 채 바동거리는 천수련을 보며 한숨을 흘렸다.
‘넌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천수련은 갑자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는 놀랄 만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는 어른이 될 거예요.”
이 녀석이 또 무슨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가?
이거야 말로 자신이 연하연을 대상으로 미연시를 발동했을 때에나 겪을 법한 상황이 아닌가.
하나 천수련의 뒤이은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
“훌륭한 어른이 될 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을 돕고, 많은 사람과 웃을 수 있는 멋진 어른이 될 겁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공태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눈썹까지 들었다.
“천 소저는 훌륭한 어른이 될 겁니다.”
천수련 또한 배시시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공 소협의 응원을 들으니 정말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둘이 그 사이에 정분이라도 났더냐?
남천휘는 화기애애한 두 사람을 보며 술병을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만 아까부터 자작(自酌)을 하는 듯하지 않은가.
‘쯧, 달은 더럽게 밝네.’
남천휘는 정자의 기둥에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고요함 속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공태령과 천수련의 목소리도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흐음.”
이틀 동안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천릉곡과 용봉평의 사건을 통해 무언가를 얻은 건 자신뿐이다. 공태령과 천수련은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온갖 고초를 겪지 않았던가.
‘고생들 했다.’
그 때 천수련이 남천휘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 보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었네요.”
“뭐, 등을 맡길 만은 했습니다.”
남천휘는 명확하게 드러나는 두 사람의 성향을 보며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두렵지는 않더라.”
술자리는 길지 않았다.
천수련을 위로하기 위해 모였다가 우연히 만들어진 자리였다.
그러니 술자리는 길지 않았다.
천수련이 처소로 향했고,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어둠 속에 발을 들였다.
“남 소협.”
공태령의 목소리에는 취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하나 취기가 사라진 것은 아닌 듯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피부가 좋은 녀석은 술을 마셔도 빛이 나는구나.
남천휘가 투덜거리는 사이 공태령이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할 말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