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정상결전(頂上決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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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산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청도문을 위해서라지만, 십년을 훌쩍 넘긴 야인 생활이 즐거울 리 만무했다. 암중으로 낭인들에게 자금을 지원했고, 쓸 만한 자들을 끌어 모았다.
그렇게 열 개의 흑도 세력을 만들었다.
물론 흑도로 산동강호를 쥐락펴락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잔잔한 수면 위에 파문을 일어나게 하는 정도는 충분하리라.
그야말로 돌만 던지면 되는 행위였다.
오늘 그 돌은 던진다.
‘황보세가의 무공에 공태령이 죽으면.’
그 뒷일은 생각할 것도 없다.
체면을 중시하는 신공부가 꼬리만 개처럼 납작 엎드릴 리 만무했다. 그리고 황보세가는 신공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변명으로 일관하겠지.
청도문이 그 사이에서 양념을 친다면 산동강호가 버무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후훗.’
그 후 자신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청도문주는 그에게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를 약속했다. 한 마디로 산동강호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지고의 자리였다.
일암(一暗)이 말을 건넸다.
그는 산인의 수족을 자처하는 사암(四暗)의 수장이다.
“모든 것은 산인의 뜻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클클, 어디 그게 내 뜻이던가. 청도문의 비상을 위함이지!”
곤륜산인은 청도문을 제 몸처럼 여겼다.
권력욕도, 명예욕도 모두 청도문 아래 존재할 뿐이다. 청도문을 위해서라면 가족까지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산인이었다. 그러니 청도문 봉공의 자리를 버리고, 야인으로 강호를 떠돌았으리라.
“하아.”
곤륜산인은 몸속의 묵은 때를 벗겨내려는 듯 길게 숨을 뽑았다.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했다. 일암에게 말했듯 이제 딱 한 걸음 남았을 뿐이다.
한데 협곡 쪽에서 달려오는 이암(二暗)이 보였다.
무심하던 이암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그가 곤륜산인 앞에 무릎 꿇었다.
예감이 좋지 않다.
“산인.”
“뭐냐?”
“협곡에 일이 생겼습니다.”
곤륜산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청도문을 대표해 용봉쟁투의 실무를 책임지는 흑검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지금쯤 용봉쟁투의 후기지수들은 열심히 원후봉을 오르고 있을 터였다.
계획은 단순했다.
협곡에 대기시켜놓은 낭인들을 풀어 살육을 벌이고, 그 사이 장천회를 활용해 공태령을 죽이는 것이 오늘 계획의 전모였다.
이 과정에 일이 생길 리 만무했다.
“가자!”
협곡의 내부는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이게 무슨!”
곤륜산인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시간은 고작해야 반 시진 남짓이었다. 한데 그 사이 오룡방과 청사당, 낭야당의 무인들이 전멸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일암은 사당의 마지막 세력인 괴흑당의 무인들에게 명했다.
“살아 있는 자를 찾아봐라.”
하나 잠시 후 돌아온 그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들을 대표해 강호의 경험이 많은 이암이 보고했다.
“패도적인 도법에 죽은 자가 가장 많습니다. 시신들의 위치로 보았을 때 쌍도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시신은 육십 구 정도 됩니다. 또한 검을 사용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시신의 상태가 양호하고, 사혈만 노린 것으로 보아 섬세한 검법을 사용한 듯합니다. 검에 죽은 자는 사십 명 정도입니다.”
“크흑. 그리고 또?”
이암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보고가 그의 몫이듯 판단은 산인에게 맡길 뿐이다.
“서른 명 정도는 혈도를 노리는 공격에 당했습니다. 지법이나 조공의 고수로 여겨집니다. 상흔이 지저분하여 내력을 유추하기가 곤란할 듯합니다.”
“끝이더냐?”
곤륜산인의 말에 이암이 말을 아꼈다.
“이 짓거리를 해 놓은 게 고작 세 명이라고? 어처구니가 없군.”
그 때 협곡 안쪽에서 삼암(三暗)의 외침이 들려왔다.
“여기 산 자가 있습니다!”
곤륜산인은 장포를 휘날리며 보법을 펼쳤다.
사암과 괴흑당의 무인들이 뒤따랐다.
“헉!”
괴흑당의 무인들은 좋지 않은 곳을 맞아버린 동료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오룡방주잖아.”
“아니, 어떻게 맞아도 저기를 맞았지.”
“노리고 때린 것 같은데?”
오룡방주는 화려한 무복과 어울리지 않게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다른 곳은 모두 멀쩡했는데 사타구니만 피와 소변으로 얼룩진 상태였다.
“끄으으.”
곤륜산인이 다가오자, 괴흑당의 무인들은 길을 열었다. 이암이 자신의 진기를 불어넣자, 오룡방주가 경련을 일으켰다. 잠시 후 그가 턱을 달달 떨며 한 마디를 흘려냈다.
“산인.”
“누구냐?”
안타까움이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한 마디.
그러나 이미 삼도천을 건너기 직전인 오룡방주는 조각난 기억 중 하나를 토해낼 뿐이다.
“공태령. 놈들은 정상으로······.”
오룡방주는 그 말을 끝으로 숨을 거뒀다.
이암 또한 미련 없이 내력을 거둬들였다.
“산인.”
“잠깐!”
곤륜산인의 얼굴은 어느새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흥분으로 해결되는 일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공태령이 어떻게 이곳에?’
이암이 말을 보탰다.
“공태령과 천수련, 그리고 남천휘가 한 조를 이뤘습니다. 아마 세 사람이 나타난 듯합니다.”
삼암이 반박을 하듯 말을 건넸다.
“하나 남천휘와 공태령은 도법을 익혔습니다. 조공과 지법의 고수는 누구란 말입니까?”
“신공부의 소부주인 공태령 정도면 몰래 익혔을 수도 있지.”
“그래도 말이 안 됩니다. 그럼 남천휘가 육십 명을 죽였다는 말이잖습니까? 그가 그렇게 고수일까요?”
곤륜산인이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를 흘렸다.
“태산 초입에서 혈랑회가 손해를 본 일이 있다. 그 때 남천휘와 궁귀의 동선이 겹쳤었지. 이번에도 논리적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남천휘 쪽에 무언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 사람이 궁술과 도법, 그리고 조공과 지법을 익혔다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스무 살 갓 넘은 후기지수가······.”
그 어려운 걸 남천휘가 해냈습니다.
하나 그것을 알 수 없는 이들로서는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분 더럽군. 십 년 넘게 일을 꾸몄거늘!”
그 때 사암이 반대편 통로를 찾아냈다.
“여기 길이 있습니다.”
잠시 후 곤륜산인과 수하들은 미환비림 앞에 모였다.
“이쪽으로 길이 있던가?”
이미 실무자인 흑검을 통해 용봉쟁투의 모든 관문을 파악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대업의 시발점이 될 원후봉과 협곡 역시 몇 번이나 답사를 한 상태였다.
하나 이런 통로는 발견하지 못했다.
“살펴봐.”
괴흑당의 무인 두어 명이 발을 들였다.
하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암이 몇 명을 더 들여보내려는 순간 곤륜산인이 제지했다.
“잠깐! 비명이 들린다. 아니, 우는군. 기의 흐름도 이상하고, 이거 왠지 진법 같군. 아니! 진법이다.”
강호의 경험이 많은 이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굳이 진법을 통과해 이곳까지 올 이유가 없을 텐데요. 설마······.”
곤륜산인이 인상을 쓴 채 한 마디를 내뱉었다.
“우연이 겹친 건가?”
그는 하늘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하늘이시여, 어찌 청도문의 광영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마치 삼국시대의 주유가 제갈량을 원망하듯 한 서린 한 마디였다.
그리고 하늘이 답을 해주었다.
“청도문이었어?”
낯선 목소리.
곤륜산인이 몸을 돌렸다.
용봉쟁투에 참가한 것이 분명한 후기지수가 건들거리는 자세로 서있는 것이 아닌가.
‘말도 안 돼!’
산인은 후기지수의 등장보다 자신의 기감을 벗어났음에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후기지수 따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그도 그럴 것이 협곡은 숨을 곳이 많지 않았다.
“너 누구냐?”
당연히 남천휘였다.
하나 그가 곤륜산인의 말에 순순히 대꾸할 리 만무했다.
“너야말로 누구냐?”
남천휘의 반문에 곤륜산인은 코웃음을 쳤다.
“흥! 네 꼴을 보아하니 남천휘라는 녀석이구나. 천둥벌거숭이같은 새끼. 감히 누구 앞에서 주제도 모르고 떠드는 것이더냐?”
곤륜산인이 내공을 발출하는 순간 장포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그리고 주변의 관목이 바람에 휩쓸린 것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하나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남천휘가 주눅 들 리 만무했다.
“누구긴 누구야! 청도문이라며?”
남천휘는 이제야 조각난 정보를 규합할 수 있었다.
태산의 초입에서 만난 혈랑회, 그리고 몽산에서 만난 흑도 세력까지 모두 저들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배후에는 청도문이 있다 이거잖아.’
남천휘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신공부나 황보세가에 물어봐야겠다. 청도문의 수뇌부 중에서 당신 같은 외모가 흔하지는 않을 테니까.”
“크흑!”
곤륜산인은 이를 갈았다.
짜증이 치솟은 상태에서 별 생각 없이 내뱉은 한 마디가 최악의 실수였다.
그는 태나지 않게 지형을 눈에 담았다.
하나 뒤는 진법이 펼쳐진 숲이었고, 앞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날만한 통로가 아닌가.
빠져나갈 곳은 전무했다.
‘크흑! 통로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놀라서 스스로 사지로 들어선 셈이로구나. 시간을 끌어야 해.’
그는 평온을 가장한 채 말을 건넸다.
“정상으로 갔다더니. 거짓이었던가?”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려고 했지. 한데 생각해보니까 범인은 늘 사건 현장에 되돌아오잖아! 굳이 정상에 가서 너희들을 기다릴 필요가 없겠더라고.”
곤륜산인이 대꾸했다.
“몇 명이 올지도 모르는 곳에서 기다리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크큭, 그래서 이 통로가 잘 드러나도록 정리를 해뒀지. 그리고 너희들은 알아서 궁지에 몰려주셨고. 아! 거기 아저씨, 통로를 찾아줘서 고마워요. 내심 내력이 아슬아슬해서 살짝 힘겨웠거든.”
사암은 미간을 좁힌 채 살기를 드러냈다.
“놈!”
“진정해라.”
그 사이 협곡 쪽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칠갑을 한 공태령과 방금 단장을 끝낸 듯한 천수련이다.
두 사람이 남천휘의 뒤에 섰다.
“아! 진짜 왔네. 그나저나 남 소협의 귀식대법은 정말 대단한 걸요! 혹시나 들켜버리면 도와주려고 검을 쥐락펴락 했다니까요.”
멍청아! 적에게 정보를 전할 셈이냐.
그러고 보니 낭인들하고 아주 합을 맞춘 것처럼 재미지게 싸우더라.
너 수상해!
바보인 거냐? 바보인 척 하는 거냐?
공태령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왔으니 됐습니다. 저희야 체력을 비축했으니 오히려 잘 되었군요.”
이 녀석은 또 죽일 생각에 벌써부터 회가 동한 표정이다. 장차 공자의 후손이 대살성으로 각성해서 강호를 뒤집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관우와 장비가 이 모양 이 꼴이라니.
남천휘는 이마를 긁적였다.
‘이래서 촉나라가 통일을 못했구나.’
그 때 곤륜산인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놈! 입담만큼 배포가 있다면 건너와 보거라!”
하나 남천휘정도 배포를 지닌 인물이 건너갈 리가 있나. 기껏 적을 용담호혈로 몰아넣고, 그리로 넘어가는 건 바보천치나 할 짓이었다.
그렇기에 남천휘는 기꺼이 천수련을 내세웠다.
“네가 가라.”
천수련은 미간을 좁혔다.
혼절했을 때의 아름다움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
인상을 쓰는 모습조차 예뻤다.
하나 공은 공이고, 사는 사로다.
‘아!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도가 경전의 구절이 저절로 떠오르네.’
재이가 이치에 맞지 않다며 지혜 수치의 하락을 미끼로 협박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기껏 수치 1정도야 언제든 올릴 수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회회회판을 돌린다던가.
‘빌어먹을! 똥망 돌림판.’
남천휘는 진중한 표정을 가장하여 말했다.
“통로를 지날 필요까지는 없어. 통로에서 싸우려면 동작이 명료한 네가 제일 강할 거야.”
거짓말이다.
아까 보니까 좁은 곳에서 싸우는 건 공태령이 더 잘하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수련을 내세운 까닭은 지켜보기 위함이다. S급 특기인 통찰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한데 천수련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떻게 알았어요?”
응? 뭘?
공태령이 말을 보탰다.
“이번만은 남 소협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천 소저의 검법이 적격이지요.”
천수련이 옅은 미소를 흘렸다.
“공 소협에게는 들킨 듯하네요.”
“제연평에서 추천했고, 소개연에서 검무를 추셨을 때 눈치 챘습니다.”
너희들 나 빼고 뭐하는 거니?
“제연평의 시조인 제룡검야께서는 정천칠공 중에서도 유독 각별하셨던 친우가 있으셨지요. 보타암의 은하검후. 천 소저께서 용봉쟁투라는 진흙탕에 굳이 발을 들인 까닭은 검후의 독문병기였던 천수검을 회수하기 위함이 아니던가요?”
스릉-
천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멸문한 보타암에서 천수검을 훔쳐간 자들이······.”
그녀의 서릿발 같은 눈빛이 통로 너머로 향했다.
“청도문이지요.”
남천휘가 부외자가 된 까닭에 눈만 끔뻑였다.
그 때 예기치 못한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검후의 제자, 천수련에 대한 정보가 ‘인맥’에 등록됩니다.
야! 잠깐, 인맥에는 단양자처럼 전설적인 사람만 등록되는 거 아니었니?
남천휘는 진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천 소저. 검후의 복수를 할 기회입니다.”
마치 원래부터 알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제가 양보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