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정상결전(頂上決戰).
50, 정상결전(頂上決戰).
천릉곡으로 향하는 통로는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였다. 한 사람이 지나갈 만큼 좁았고, 바닥과 벽에는 이끼와 넝쿨이 가득했다. 생각 없이 발을 들였다가는 찌르기 한 칼에 비명횡사할만큼 위험한 장소였다.
어쩌면 장판파보다 지리적 여건은 더 좋을 듯했다.
그렇기에 남천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공태령은 그렇게 떠나는 남천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생사대적을 마주한 듯 굳건한 자세로 협곡 너머를 응시했다.
“공 소협. 눈에서 힘 좀 빼요. 너무 살벌하잖아요.”
천수련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하나 공태령은 여전히 두 자루의 패도를 겨눈 채 살기를 흘릴 뿐이다.
‘절벽을 뛰어넘지 않는 한 나를 뚫고 지나갈 수는 없겠지. 하나······.’
꽈득-
그는 패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저들이 오지 못한다는 안도감보다 자신이 갈 수 없다는 답답함이 더욱 강렬했다.
‘악인은 단 한 놈도 살려둘 수 없어.’
하나 지키기만 해서야 목적을 이룰 수 없지 않은가.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협곡을 뚫고 지나가야 할 터였다.
그 때 예기치 못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뚫자!”
공태령은 돌아보는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한 한 마디의 주인공은 이곳에 없어야 할 남천휘였다.
천수련이 공태령의 예상을 확신으로 만들어줬다.
“어! 왜 다시 왔어요?”
남천휘는 잠시 멈칫했다.
왜 다시 왔냐고?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란다.
그는 시야 한쪽에 반투명하게 떠 있는 퀘스트 창을 보며 한 숨을 흘렸다.
《섬멸전》
- 천릉곡을 무대로 적과 대치 중입니다.
- 적 세력은 오룡방을 필두로 청사당과 낭야당이 좌우를 이룹니다.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총원 백서른일곱 명의 적을 섬멸하세요.(제한 시간 00:15:00)
※ 섬멸(殲滅)은 천릉곡에서 적이 사라지거나, 7할 이상의 적을 쓰러졌을 때 달성됩니다.
자수정을 준단다.
그것도 무려 3000개나 준다며 유혹을 하더라.
하나 딱히 끌리지 않았다.
3000개라고 해봤자 회회회판을 열한 번 연속으로 돌리면 끝이다. 지금까지 돌림판에 낚인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반면 퀘스트를 달성하려면 어림잡아 백여 명의 적을 쓰러트려야 했다. 제아무리 공태령이나 천수련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얻는 것이 적었다.
치졸하다고?
아닌 말로 협객이나 영웅도 아니고, 무적자니까 계산적으로 살아도 되는 거잖아.
그래서 남천휘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진정한 절정의 경지를 코앞에 둔 예비 고수가 아니던가. 그러니 더 이상 재이의 흉계에 속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퀘스트를 주는 게 자유인 것처럼 받는 것도 자유라고 항변할 속셈이었다.
하나 재이는 꼼꼼했고, 현실은 냉혹했다.
‘후우.’
남천휘의 눈동자가 슬쩍 움직였다.
그 순간 《섬멸전》이 한쪽으로 밀려나며 배후에 겹쳐졌던 퀘스트 창이 등장했다.
돌발 퀘스트였다.
《전설의 고향(庫向)》
- 최초로 전설 보상품을 획득했습니다.
- VIP 4레벨 달성 조건이 활성화됩니다.
- 대상자의 VIP 승급을 돕기 위해 한시적으로 보상품이 VIP포인트로 지급됩니다.
※ 천성혈법으로 적을 처단하세요.
- 오룡방(0/5) 청사당(0/10), 낭야당(0/10)
VIP가 3레벨이 되었을 때 회회회판이 활성화됐다.
그러니 3레벨에 영웅이면 4레벨은 전설 정도는 주지 않겠는가. 물론 전설 아이템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겠지. 하나 4레벨 회회회판을 돌리면 영웅 등급의 보상품이 제법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한시적이라니 지금 안하면 또 못한다는 거잖아.’
남천휘는 입맛을 다셨다.
결국 재이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한 셈이다.
그는 막 총관에게 들었던 거래의 덕목을 떠올렸다.
- 상대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라.
재이는 대상(大商)인의 자질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영악한 것! 못된 것! 실물은 못생겼을 것!’
결국 남천휘는 퀘스트를 수락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데 눈치 없는 천수련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 왔냐고요?”
남천휘는 협곡 너머에서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적을 바라봤다. 마치 천수련의 질문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말이다. 하나 천수련은 소혜를 방불케 하는 재주가 있지 않던가.
“왜 다시 왔어요? 숲으로 간다면서요. 왜? 왜?”
입 닥쳐, 천수련.
이 녀석은 백 명이 넘는 적을 앞에 두고 왜 이리 여유로운 건지 모르겠다.
‘철이 없는 건지, 현실을 모르는 건지.’
다행히 공태령이 그에게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줬다.
“그 말, 진심이십니까?”
남천휘는 동아줄을 힘껏 잡았다.
썩은 동아줄일지, 황금 동아줄일지는 매달려보면 알겠지.
“그래! 싸우자.”
이제 변명의 시간이다.
나와라! 변설! 집중! 불패! 또 뭐가 있냐?
하여간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걸 끄집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싸워야 하는 명분 정도는 제대로 만들어둬야 했다.
“생각해보니 협곡의 입구가 두 개잖아. 이쪽으로 건너올 수는 없지만,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는 건 가능하지. 만약 내가 숲을 통과하는 사이 저들이 움직인다면 후기지수들이 큰 해를 입을 거야.”
철면이라 불리던 공태령이 입꼬리를 올렸다.
“싸우는 편이 낫군요.”
무공광에 이어 전쟁광을 마주한 기분이다.
조 대주, 곡부남가는 별 일 없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립네.
“약자를 핍박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지요!”
천수련이 마침내 검을 뽑았다.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네가 강해도 그렇지. 대놓고 약자라고 그러면 후기지수들이 불쌍하잖아.’
스릉-
남천휘 역시 직도를 뽑았다.
5레벨까지 강화한 직도, 천하와 제일이다!
이제 너희들은 다 죽었다고 복창해라.
한데 재이의 알림이 울렸다.
◎ 병기를 활용하면 퀘스트 조건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이 놈아! 그럼 나보고 맨손으로 싸우라는 거냐?
남천휘는 입술을 삐죽이며 퀘스트 설명을 재독했다.
그리고 조용히 직도를 도갑에 꽂았다.
‘천성혈법으로만 처리하라니······.’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천성혈법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했다.
무공총람을 활성화시켰다.
《천성혈법》
- 단양자의 비전으로 침구대성의 원형.
- 침술, 지법, 조공, 장법으로 변형이 가능.
- 고정형
- 숙련도(3/100). (가치 : 3500)
“아!”
남천휘가 눈을 부릅뜬 채 탄성을 흘렸다.
다른 건 다 그렇다고 치자.
‘가치가 3500이라니.’
상상도 못했던 수치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익힌 무공 중 오행군림보는 4단계 성장형이다. 그렇기에 50으로 시작해 800으로 끝는 변동 가치를 지녔다. 조상을 통해 얻은 비천무상도는 또 어떠한가. 애초에 시작 수치가 500이었고, 3단계 성장을 완료하면 2000에 이르는 가치를 자랑할 터였다.
한데 천성혈법(天星穴法)은 그 자체로 3500의 가치를 자랑했다.
‘어마어마하네.’
가히 전설적인 인물이 남긴 전설적인 비전의 위력이 아닐까 싶다. 한데 그가 짧은 시간 얻어낸 것을 떠올려보면 일견 수긍이 갔다.
남천휘는 단순한 책을 얻은 것이 아니다.
단양자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게다.
그의 과거, 신념, 그리고 천성혈법의 이론적 지식을 모조리 전수받지 않았던가. 남은 건 활용하고, 수련하여 능숙해지는 것뿐이리라.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주인공이라 할 수 있지.’
그는 인생의 주인공뿐 아니라 강호의 주인공이 될 예비 특급 강호인이 아니던가.
‘흠, 특급 예비 강호인?’
그가 입맛을 다시는 사이 천수련이 슬쩍 밀었다.
“왜?”
“싸우자면서요. 어서 가요.”
남천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수련을 내려다봤다.
“그런데 왜 나를 밀어?”
“그럼 연약한 제가 앞장을 서요?”
천수련의 새치름한 한 마디에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안 될 이유는?”
“강호인은 노인과 아이, 여인을 배려해야 함을 모르는 거예요?”
반문에 반문이 꼬리를 물었다.
“누가 그러디?”
“몰라요. 아무튼 여자는 꽃처럼 조신해야 한다고 그랬단 말입니다.”
이제야 그녀의 양면성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본래 천방지축인 성격을 숨긴 채 조신하게 신비한 척하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나 보다.
아! 천방지축과 신비함 외에 하나가 더 있구나.
노인과 아이, 여인은 강호인이 극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란다.
이 똥멍청아.
게다가 누가 가르쳤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거면 애초에 칼을 쥐게 하지 말았어야지.
“여자는 그래도 되지만, 강호인은 그러면 안 돼!”
남천휘는 오히려 천수련을 앞으로 밀어냈다.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사이 공태령이 짜증 섞인 한 마디를 건넸다.
“언제까지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할 셈입니까?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그건 아니될 말이다.
공태령은 살육이라도 벌일 기세로 달려들 터였다.
그렇게 되면 퀘스트는 물 건너 가는 셈이다.
‘나는 종류별로 처리해야 한다고!’
그러니 유려한 검법을 펼치는 천수련이 앞장을 서야 만사가 순탄할 터였다.
“잠깐! 잠깐! 내 말부터 들어봐. 협곡은 좁아. 그러니 쌍도를 쓰는 우리가 활개를 치기 어렵지. 하나 천 소저는 가능해. 생각을 해보라고!”
남천휘의 단호한 언변에 두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천 소저가 검을 뻗으며 달려 나간다. 그 뒤를 너랑 내가 쌍도를 길게 늘어트린 따라가는 거지. 캬! 그림 좋지 않냐?”
천수련은 남천휘의 허리춤을 보며 반격의 한 마디를 건넸다.
“도는 뽑지도 않았으면서. 설마 발도술이라도 익히셨나요?”
아차!
그 사이 공태령이 혀를 차며 내달렸다.
“쯧, 제가 먼저 갑니다.”
“자, 잠깐!”
남천휘가 황급히 공태령의 뒤를 따랐다.
자칫 잘못하면 상대할 적이 부족해서 퀘스트를 실패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어?’
천수련의 여유로움이 전염된 것일까.
백서른일곱 명의 적을 상대해야 했지만, 조금도 위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타탓!
그사이 공태령이 협곡의 통로로 몸을 던졌다.
*
천릉곡을 막아선 건 주로 청사방과 낭야방의 낭인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아무리 흑도가 난장판이라고 해도 오룡방은 그들과 체급이 달랐다.
하여 청사방과 낭야방의 무인들은 호시탐탐 통로를 지나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 저 새끼, 지금 오는 거 같은데?”
낭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조소를 흘렸다.
상대가 먼저 선공을 취하며 지리적 이점을 포기한 것이다. 이제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합공만 하면 되는 상황이 아닌가.
“내가 목을 치지.”
대막의 마적들이나 사용한다는 만도를 쥔 자가 혀를 날름거렸다. 그는 칼날을 핥으며 기괴한 웃음을 연이었다.
“새끼, 그러다 혀를 잘려봐야 저 짓을 안 하지.”
“그래도 저 짓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지 않소. 저 놈이 저짓을 할 때마다 심약한 자는 아예 주저앉더라니까. 또 모르지. 오줌이라도 지렸을지.”
“크하하하!”
낭야방의 무인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하나 그들의 웃음은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태령의 보법이 심상치 않았다.
통로의 길이는 오 장 남짓이다.
보법에 능한 자라고 해도 예닐곱 번은 뛰어야 지나칠만한 거리였다.
한데 공태령이 속도를 올리는 순간 한 걸음에 일 장을 내달리는 것이 아닌가.
“어!”
“어어!”
“어어어!”
누군가 눈을 휘둥그레 뜨는 순간 공태령이 화포에서 튀어나온 탄환처럼 튕겨 나왔다.
그는 땅에 내려서기 무섭게 읊조렸다.
“강호의 이름으로······.”
동시에 그가 허리를 비트는 순간 패도가 만도를 쥔 자의 목을 훑었다.
“끄으으.”
혀가 잘리는 대신 목을 베인 낭인이 만도를 내던졌다. 그리고 목울대를 움켜쥔 채 피거품을 물며 주저앉았다.
그 위로 공태령의 서늘한 한 마디가 내려앉았다.
“처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