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96화 (96/305)

49, 유관장. (5)

남천휘는 거골혈(巨骨穴)을 두드리려 했다.

어깨와 팔 사이에 위치한 혈도를 찍는 순간 최소한 오른팔은 마비가 될 터였다.

그러려고 했을 뿐인데.

누가 보면 점혈이 아니라 지법(指法) 내지는 조공(爪功)으로 오해할 만큼 파괴적인 일격이었다.

이건 마비가 아니라 불구의 문제인 걸?

그러고 보니 자칫 잘못했으면 공태령 또한 크게 다칠뻔하지 않았던가.

남천휘는 진저리를 쳤다.

남은 인생을 공태령에게 저당잡힐 뻔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놈의 어깨를 꿰뚫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 아닐까 싶다. 놈의 머리 위에 시뻘건 이름표가 있는 이상 경험치를 제외하면 쓸모가 없는 존재였다.

나쁜 놈에게 해혈은 사치다.

이제는 해줄 수도 없고.

솩.

살을 파헤치고, 뼈를 부순 것과 달리 뺄 때의 소리는 평범했다. 대신 평범함을 무너트리는 절규가 들려왔다.

“아아아아악!”

사내의 눈시울을 붉힌 채 비명을 내질렀다.

한데 그 모습은 안쓰럽기보다 혐오스러웠다.

수많은 악행을 벌였으면서 이런 고통조차 참아내지 못하는 건가.

지금껏 남천휘가 만난 악인들은 남에게 고통을 줄 뿐 자신의 고통은 이겨내지 못했다. 이것이 뒷골목 쓰레기라 부르는 삼류 흑도의 진짜 모습이리라.

“아혈을 짚어야겠어. 어떻게 하는 거더라?”

비록 사내의 혈인도를 띄울 수는 없지만, 이미 침술과 점혈법에 관한 모든 지식이 머릿속에 있지 않은가.

아!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단양자의 명복을 한 번 더 빌어드리고, 손가락을 오므렸다. 한데 사내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딸꾹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비명 대신 울먹이는 한 마디가 들려왔다.

“씨벌, 누가 아혈을 건드릴 때 손가락 세 개를 써?”

그건 아예 목젖을 터트리겠다는 의미가 아니냐는 발악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다.

일견하기에도 눈앞의 청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남천휘는 어정쩡한 자세로 멈췄다.

상대가 비명을 그쳤으니 새삼 아혈을 건드리기도 애매한 상황이 아닌가.

그래서 질문했다.

“용봉쟁투의 후기지수가 무슨 의미지?”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 지혜 수치가 급상승하면서 두뇌 회전의 속도가 달라졌다. 그저 본능적으로 용봉쟁투의 후기지수를 알아보게 된 이유가 알아야겠다는 호기심이 강하게 일어난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사내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러더니 입을 닫은 채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닌가.

‘됐다.’

뭐가 됐냐면 합법적, 도의적으로 점혈을 시험해볼 기회가 열린 게다.

다른 말로는 고문이라고 하지.

‘아까 공태령을 건드렸던 기분으로 살살.’

빡!

남천휘가 사내의 왼쪽 팔꿈치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그그그!”

한데 그건 그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사내는 턱을 달달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

마치 학질에 걸린 환자가 경련을 일으키듯 격렬한 반응이다.

“이상하네. 곡지혈을 짚으면 마비가 와야 하는데. 이쪽이 아닌가?”

남천휘가 이미 쓸모가 없어진 팔을 바라보는 순간 사내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나, 나도 잘은 몰라. 오늘 원후봉에 너희들이 온다고 했어. 그리고 부잣집 공자인 너희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어.”

그래, 그래보였다.

흑도가 생각할 법한 흉계다.

한데 그게 전부일 리가 없잖아.

“혈랑회는 어찌 알았는데?”

사내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남천휘가 짐짓 모른척하자 놈은 금세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누가 우리 낭야당을 고용했어. 한데 여기 협곡에 오니까 우리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 산동성에서 난다긴다하는 흑도가 죄다 모였어. 한데 혈랑회도 산동에서 유명한 흑도잖아. 그래서 없다고 한 거야. 진짜야. 내가 고용주한테 무슨 의리가 있겠어?”

사내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나 남천휘의 눈동자는 흐릿했다.

눈으로는 사내를 보고 있으나, 머리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혈랑회, 몽산, 화전민, 비밀 기지, 그리고 세 무리의 흑도 세력이 이러 저리 뒤섞인 채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냈다.

화룡점정이라.

그림에 점을 찍듯 용봉쟁투를 대입했다.

‘용봉쟁투의 후기지수를 죽여서 무언가를 꾸민다면?’

남천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비록 열 곳의 흑도가 같은 뿌리라는 건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예지(叡智)가 아니라 신기(神氣)의 영역에 속한 깨우침일 터였다.

하나 어느 정도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고용된 흑도 세력이 몇 곳이지?”

사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을 만큼 입을 놀리지 않았던가. 고통이 잦아들면서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게다.

“내가 오늘 점혈을 배웠어."

남천휘는 혼잣말을 했다.

“그래서 연습을 좀 하고 싶어. 아까처럼 힘 조절을 못하면 안 되잖아.”

그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뒤이어 사내를 경악하게 만드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침술의 대가니까. 게다가 사람의 몸을 꿰뚫어 볼 수 있어. 혈도와 혈맥, 내력의 흐름까지 훤히 보이지!”

“미, 미친놈! 앞뒤가 맞지 않잖아.”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내의 반응처럼 미친 소리가 분명했다.

한데 사실인 걸 어쩌라고.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증명을 해야겠네.”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양 손을 펼쳤다.

이내 실습이 시작됐다.

머릿속의 지식을 손으로 펼쳐낼 때마다 사내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니까 누가 장천회, 오룡방, 청사당, 괴흑당, 낭야당을 고용했다는 거지. 산동성의 흑도 중 절반을 모아놓고 후기지수의 주머니를 털겠다고? 그 말을 믿고 왔다는 거지?”

혈도를 찌르고, 때리고, 쑤셨다. 같은 혈도라고 해도 힘의 배분을 통해 위력을 확인했다. 그럴 때마다 천성혈법에 대한 놀라움으로 인해 탄성이 흘러나왔다.

◎ 천성혈법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인체의 오묘함이란 끝이 없구나.

남천휘는 혈도를 건드리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그럴 때마다 사내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산인이 있어. 누군지는 몰라. 한데 산인이 고용을 했다고 했어.”

남천휘가 점혈을 멈췄다.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라 사내가 기절했기 때문이다.

‘흠, 이런 짓을 통해 건드릴 만한 대상은 넷.’

삼정의 후계자와 천수련일 터였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꾸몄을까? 산인은 또 누구고?"

한데 그 순간 천릉곡의 입구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를 찾아 온 듯 같은 무복을 걸친 낭야회의 낭인이었다.

“엇!”

남천휘가 인상을 썼다.

혼절한 사내에게 집중하다보니 천릉곡의 입구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적이 호각을 힘차게 불어재끼는 것을 막지 못했다.

삐이이이이이-

남천휘는 황급히 적을 쫓았다.

하나 협곡의 좁은 입구와 곳곳에 즐비한 이끼가 방해였다. 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천릉곡 내부로 자취를 감췄다.

“빌어먹을! 흑도의 의리.”

남천휘는 적을 쫓지 않았다.

천릉곡 내부에는 흑도가 다섯 곳이나 잠복한 상태였다. 어림잡아도 수백 명은 족히 되리라. 그러니 부나방처럼 달려들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뜨지 마. 뜨지 마라! 퀘스트 떠도 안 할 거야!’

재이가 계속 침묵하기를 기원하며 돌아섰다.

“아! 깜짝이야.”

남천휘는 인상을 쓰며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새 공태령이 천릉곡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어났냐?”

“호각소리에 깼습니다.”

남천휘는 공태령의 유달리 매끈한 피부를 떠올리며 헛기침을 했다.

“천 소저는?”

“천 소저도 깨어난 듯합니다.”

호오, 이거야말로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천수련 역시 세 자리 레벨의 고수가 아니던가.

게다가 지금까지의 행적을 살피면 정종의 상승무공을 익힌 것이 분명했다.

‘미환비림의 여파에서 스스로 깨어날 만큼 고수였던 건가?’

공태령은 혼절한 사내에게 다가갔다.

“누굽니까?”

“낭야회라고 하더군. 그리고 저 안에······.”

남천휘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알려주려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공태령이 다짜고짜 패도를 뽑더니 사내의 목을 베어버렸다.

“야! 너 뭐하는 짓이야?”

공태령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낭야회가 양민을 참살하고, 표물을 털며, 어린 아이들을 납치한 것만 수 년 째입니다.”

“아! 그랬냐?”

전혀 몰랐다.

남천휘가 한 발 물러서는 사이 공태령은 씹어뱉듯이 읊조렸다.

“악인은 죽어 마땅합니다.”

불현 듯 미환비림 내에서 환각을 보던 공태령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향해 용서하지 않겠다고 울분을 토해내지 않았던가.

무언가 나쁜 일이라도 겪은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처럼 단호하게 살수를 펼칠 수 없으리라.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야.”

여기서 경험치를 아까워하면 정말 인간 말종이 되는 게다. 그렇기에 담담한 어조로 알아낸 정보를 전달했다.

한데 공태령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철면호협이라는 별호와 어울리지 않게 분노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러더니 천인공노할 한 마디를 읊조리는 것이 아닌가.

“다 죽여야겠군요.”

뭐라는 거야?

남천휘는 슬쩍 한 걸음 물러섰다.

불현 듯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어째서 내 주변에는 정상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거지?’

공태령은 빈말이 아니었나 보다.

그는 두 자루의 패도를 양손에 나눠진 채 천릉곡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잠깐! 잠깐!”

남천휘가 황급히 공태령의 앞을 막아섰다.

“너 미쳤어? 수백 명이라고.”

“협의지심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협의지심에 불가능은 없지만, 인간에게는 불가능이 있단다.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아. 강호행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강호를 너무 우습게보지 마!”

제정신이 아닌 이상에야 스스로 사지에 발을 들일 까닭이 없지 않은가.

‘아!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랬었네.’

몽산에서 화전민을 구하기 위해 재이의 권고마저 무시했던 일이 떠올랐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말을 철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또한 책으로 강호를 배우지 않았던가.

인정할 건 인정하는 대인이 되고 싶었다.

“돌아가자. 천 소저를 챙겨서 이 자리를 뜨자고.”

하나 공태령은 단호했다.

“지금껏 그들이 산동성에서 저지른 패악은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입니다.”

이놈도 보면 볼수록 웃긴 놈일세.

알고 있었으면 미리미리 섬멸하지 그랬냐.

“한데 한 자리에 모였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입니다. 남 소협!”

남천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무슨 말을 할지 빤히 보이잖아.

“함께 하시지요.”

그럴 줄 알았다.

에라이, 철면은 개뿔!

생각하는 게 빤히 얼굴에 나타나는 백지 같은 인간아.

남천휘는 한껏 상승한 지혜 수치의 힘을 빌렸다.

자! 레벨 2의 변설을 맛보여주마!

“놈들은 모략을 꾸미고 있어. 분명 용봉쟁투의 후기지수들을 노리겠지. 한데 그들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해. 진짜 목적은 삼정의 후계자를 노리는 것이 아닐까?”

공태령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삼정의 후계자가 용봉쟁투 중에 사망한다. 그렇다면 바짝 말라붙은 산동강호에 거대한 불씨가 떨어지는 거야. 모든 걸 불태울 화재가 일어날 게다. 그럼 우리가 뭘 해야겠어?”

남천휘의 단호한 어조에 공태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해야 할까요?”

“가서 알려야지. 어차피 놈들이 이곳에 모인 이상 쉽게 흩어질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삼정과 명숙들에게 알려 후기지수를 보호하고, 악인을 징치하는 것이 후기지수인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공태령은 탄성을 흘리며 수긍했다.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남 소협이 아니었다면 큰 실수를 할 뻔했군요.”

임마, 웃지 마!

괜히 호감도 오를라.

남천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좋아! 어서 천 소저를 챙기고, 여기를 뜨자.”

그 때 천수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로 가시게요?”

그녀는 평소의 청초한 모습을 되찾은 후였다.

오히려 숙면을 취한 사람처럼 활력이 가득했다.

남천휘는 말문이 막힌 듯 침음을 흘렸다.

천수련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은 적이고, 뒤는 미환비림이 아닌가.

“그러네. 어디로 가지?”

그 순간 수많은 발소리가 협곡 내에 진동했다.

“저것들은 다 뭐예요?”

천수련은 백여 명 넘게 등장한 적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은 천릉곡 내에서 세 사람을 찢어발길 듯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용봉쟁투의 참가자가 맞아.”

“그렇다면 죽여야지.”

“누가 가겠는가?”

적들은 여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그 사이 공태령이 몸을 날렸다.

그는 천릉곡으로 통하는 협곡을 막아섰다.

“이곳은 한 사람이 능히 백 명을 막아낼 수 있는 요처입니다. 일단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남 소협은 어서 가세요. 당신은 저 이상한 숲을 지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뒷일은 제게 맡기고 어서 떠나세요!”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백여 명의 적과 마주한 공태령의 뒷모습이 너무나 듬직했다. 마치 조조의 수십만 대군을 막아선 장판파의 장비 같지 않은가.

“관우야!”

천수련은 눈을 끔뻑이며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그래. 개똥이보다는 관우가 낫지 않아?”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러면 남 소협은 뭔데요?”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유비를 하마.”

“왜요?”

“원래 유비는 뒤에 있잖아. 너희 둘이 입구를 막고 있어. 내가 가서 사람을 불러올게.”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예요?”

“관우는 몰라도 돼. 저 놈들은 절대 이리로 못 넘어와. 우리가 넘어가지만 않으면 위험할 일이 없다고. 그러니 공태령과 함께 길만 막고 있어.”

천수련은 여전히 영문 모를 표정으로 검을 뽑았다.

남천휘는 두 사람에게 눈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렸다.

두 사람 없이 미환비림을 지난다면 일각도 되기 전에 사람들과 만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천릉곡의 반대편으로 공격하면 모두가 만족할 만한 해법이 아닌가.

“금방 돌아올게!”

띠링-

잠시 후 남천휘가 천릉곡으로 통하는 협곡으로 몸을 날렸다. 직도를 횡으로 그으며 적을 밀어내는 순간 악에 바친 일갈이 뒤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빌어먹을 퀘스트!”

그가 길을 여는 순간 관우와 장비가 뒤따랐다.

어쩔 수 없지.

세 자리 레벨의 덕 좀 보자!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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