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유관장. (4)
특기 목록을 새로 고쳤다.
그러자 서책을 얻으면 생성된 네 개의 특기와 의원을 대신해 얻은 의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 보다 좋아!’
특기 점혈(點穴)은 혈도를 찍어 강직, 속박, 봉인, 통증을 유발하는 기술이다. 내력의 강하게 운용하여 혈도를 찍는다면 대상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전음과 더불어 고수라면 반드시 익혀야 하는 상승무공이 아니던가.
등급은 아쉽게도 전음과 마찬가지로 A였다.
특기 활인(活人)은 협객이나 의원을 비롯해 정파에 속한 직업군에게 허용됐다. 사람을 살릴 때마다 명성의 증가폭이 상승한단다. 반면 사람을 죽이면 명성의 하락폭도 컸다. 다만 무적자라는 직업으로 인해 단점은 삭제된 상태였다.
‘보면 볼수록 무적자만한 것이 없구나.’
무적자(無籍者)보다 좋은 거라면 무적자(無敵者)뿐이지 않을까 싶은 농담이 떠오를 만큼 기분이 좋았다.
반면 투척과 감응은 호불호를 따지기가 애매했다.
암기술의 하위 특기로 보이는 투척(投擲)은 대침이나 우모침을 던질 때 속도와 정확도가 소폭 상승한단다. 한데 애초에 암기술을 익히지 않았으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특기 감응(感應)은 설명 자체가 아리송했다.
오감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에 대한 집중도 상승한단다.
다행히 의원을 대신해 생긴 특기 ‘의술(醫術)’을 확인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S등급이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불굴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얻어낸 S급 특기였다.
《의술》
- 의원의 모든 치료 행위를 포함합니다.
※ 특기 ‘감응’, ‘활인’, ‘침술’이 생성되면 자동으로 의술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하며 의원의 기본 설정인 ‘혈인도’가 활성화됩니다.
이제야 직업이 어떤 방식으로 설정되는지 알 듯 했다. 만약 남천휘가 협객으로 전직했다면 불굴과 협심, 연민의 특기가 자동으로 5레벨까지 찍힌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건 협객 고유의 공능일 터였다.
그리고 의원을 전직했다면 자동으로 감응과 침술을 비롯한 여러 고유 특기를 얻었을 게다.
그리고 혈인도라는 것도 자동으로 활성화됐으리라.
‘아쉬울 건 없지.’
자신은 무적자가 아니던가.
얽매이지 않기에 한계가 없는 존재였다.
또한 그 증거를 손에 쥐고 있기도 했다.
“흐음.”
남천휘는 특기 침술을 떠올리며 서책을 내려다봤다.
단양자의 신위와 서책의 표제만 봐도 침술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역시 나야 말로 하늘의 선택을 받은······.”
남천휘는 희희낙락하다가 헛기침을 했다.
재이의 행동습성으로 봤을 때 초를 치거나, 쓸데없이 방해를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러니 흥분을 가라앉히자.
‘나는 침묵과 평정을 금처럼 여기는 사나이.’
특기 ‘불굴’을 지닌 강호의 유일무이한 특급 강호인 후보생이 아니던가. 하여 최대한 평온한 심경을 유지한 채 서책을 펼쳤다.
사라락-
그 순간 책에 빛이 뿜어 나왔다.
묵향을 물씬 흘려내던 글자가 저마다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허공에 줄지어 자리를 잡았고, 이내 금빛 광휘와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마치 진짜같은 환각이 아닌가.
“하아, 실감나네.”
남천휘는 탄성을 흘리며 서책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이내 눈을 부릅뜬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급은 새 책처럼 깨끗하지 않았던가. 한데 서책은 세월의 흐름을 직격탄으로 맞은 듯 빠르게 부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천휘가 두어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남천휘는 빈 손을 보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
침술은? 비급은?
전진교의 이대 교조가 남긴 비급인데 이렇게 사라지는 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단양자의 비급을 흡수했습니다.
- 무공총람의 천성혈법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 비급 흡수로 인해 지혜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 특기 ‘침술’이 등록되었습니다.
◎ 단양자의 기록이 하위 목록 ‘인맥’에 등록됩니다.
◎ 특기 ‘감응’, ‘활인’, ‘침술’이 상위 특기인 ‘의술’에 흡수됩니다.
◎ 특기 ‘의술’이 3레벨까지 상승합니다.
◎ 고유 공능인 혈인도가 활성화됩니다.
◎ ‘혈인도’가 무공총람에 등록됩니다.
쉼 없이 쏟아지는 알림으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일단 처음으로 활성화된 인맥을 가볍게 두드려 확인했다.
《단양자(丹陽子)》
- 이름 : 마옥(馬鈺), 자 : 선보, 현보
- 전진교의 이대 종사로 산동 영해 출생.
- 도가(道家)의 전설적인 인물.
- 왕중양에게 입도한 후 유선곡에서 사망.
‘아! 진짜 유선곡에서 돌아가셨구나.’
동굴의 명칭인 현보동은 단양자의 자에서 따온 듯싶다. 인맥에 등록되려면 이 정도는 되야 한다는 듯 마옥의 엄청난 일대기가 상세히 기록됐다.
그가 동굴을 떠나기 전에 남겼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남추가 그러했듯 단양자의 행적 또한 삼교일치의 법통을 만천하에 알렸을 만큼 공명정대했다.
영웅의 일대기를 한눈에 본듯하여 절로 경외심이 일었다.
“후우.”
남천휘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가볍게 확인할 수 있는 상태창을 펼쳤다. 지혜 수치의 증가폭을 보는 순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하아, 오늘 진짜 무슨 날이냐?”
근력(筋力) : 367 민첩(敏捷) : 410
체력(體力) : 388 지혜(知慧) : 626
내공(內功) : 1370.
지혜 수치가 단박에 200이나 올랐다.
동시에 능력 수치의 총합이 3000을 넘겼다.
이제는 동급 최강을 넘어 세 자리 레벨조차 가볍게 뛰어넘지 않았을까 싶다.
‘가진 건 세 자리 레벨 이상! 하지만 쓸 수 있는 건 아직 두 자리 수준이네.’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특기 신속을 깨우칠 때 내력의 흐름을 고스란히 기억하지 않았던가.
이대로라면 진짜 절정이 머지않았으리라.
“가 아니라 혈인도라면 지금 당장도 가능하지 않겠어?”
이럴 때 대답 좀 해라.
혼잣말만 하니까 미친놈 같잖아!
앓느니 죽지.
남천휘는 한숨을 내쉬며 무공총람을 열었다.
《비천무상도》《오행군림보》《섬영검》
《천성혈법》《혈인도》
두 개가 늘어났더니 무공총람이 한결 풍성해진 듯했다.
남천휘는 뿌듯한 마음으로 혈인도를 펼쳤다.
《혈인도(穴人圖)》
- 친밀 단계 이상의 대상에게만 활성화됩니다.
- 대상의 혈도가 시각화되어 표현됩니다.
- 혈도와 혈맥을 통해 기의 흐름이 색으로 표현됩니다.
이제는 놀라기도 지칠 지경이다.
혈인도는 말 그대로 사람의 혈도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남천휘는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나는 나랑 친밀 이상이겠지?’
아니면 이거 정말 이상한 거다.
남천휘 안에 또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는 단양자와 시선이 마주쳤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 순간 불현 듯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귀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행히 혈인도가 활성화됐다.
동시에 남천휘의 눈앞에 인체의 모형도가 등장했고, 내부에 수많은 점과 선이 그어졌다. 숨만 쉬어도 이름조차 모를 혈도들이 반응을 했고, 침을 삼키는 순간 혈맥이 요동을 치며 내력의 흐름을 표현했다.
‘붉은 색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없다.
남천휘의 온 몸은 정상을 알리는 청색으로 가득했다. 이래서야 혈인도의 공능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지 않은가.
‘뭔가 실험체가 필요한데······.’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천릉곡 밖에는 더없이 훌륭한 실험체가 두 구나 존재했다.
남천휘는 혈인도를 지우고 동굴을 나섰다.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기 전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단양자의 명복을 기원했다.
‘저승 대신 선계에 계실 거라 확신합니다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
남천휘는 간절히 기원했다.
이번에는 단양자의 명복을 빌지 않았다.
‘제발 위험한 부위만 아니기를······.’
시선을 슬쩍 내리는 순간 혼절한 천수련이 보였다.
입을 다물고 있으니 처음 만났을 때의 묘한 분위기가 절로 일어났다.
청초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신비로운.
천수련은 작은 체구조차 아름다웠다.
그래서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
하여 만만한 공태령부터 살피려 했다.
한데 녀석과 친밀 이상의 관계일 리가 없지 않은가.
당연하게도 혈인도는 발동하지 않았다.
“에잇! 쓸모없는 놈.”
결국 천수련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혈인도.’
그 순간 인체의 모형도가 등장했다.
아까와 달랐다.
아무래도 대상자의 외형과 비슷하게 구현되는 듯했다. 남천휘는 초조한 눈빛으로 천수련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가슴은······.’
없다.
‘아랫배도······.
없다.
‘그 아래가······.’
붉은 점은 찾을 길이 없다.
다행이기는 한데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남천휘는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붉은 점을 찾아 그녀의 몸을 훑어봤다. 그리고 귀 뒷부분과 상박 안쪽에서 붉은 점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정말 애매한 부분을 건드려야 하네.”
가슴이나 둔부처럼 누가 봐도 부도덕한 위치는 아니었다. 한데 귀 뒤쪽이나 겨드랑이 아래를 타인에게 맡기는 것 또한 그리 흔한 일은 아닐 터였다.
“후우.”
남천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의원이 환자를 대하듯 평온한 마음을 유지했다.
하나 섣불리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죄 짓는 것 같으냐?’
결국 그는 천수련을 뒤로 한 채 공태령을 내려다봤다. 혈인도로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미환비림에서 함께 기절한 상태가 아니던가.
그러니 깨우는 방법도 같으리라.
‘아니면 말고.’
공태령한테는 조금 실수해도 괜찮을 듯했다.
남천휘는 공태령을 두 다리 사이에 눕힌 채 허리를 숙였다. 귀 뒷부분을 가볍게 두드린 후 상박 안쪽을 깊게 누르면 혈이 풀린다 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다.
단양자가 남긴 비급을 흡수하는 순간 혈도와 침술에 대한 이론이 머릿속에 기록됐다. 그렇기에 남천휘는 혈을 짚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타탁!
귀 뒤를 찍고, 이내 상박 안쪽을 두드렸다.
이제 혈을 통해 내력을 흘려넣으면 정신이 들 것이다. 한데 상박 안쪽의 감촉이 생각보다 거칠지 않고 부드러웠다.
‘이 자식은 무슨 영약을 먹었기에 이리 피부가 부드러운 거지?’
남천휘는 사내로서 참 못할 짓이라며 혀를 찼다.
그리고 조금의 질시를 담아 내력을 흘려넣었다.
그 순간 공태령의 눈매가 꿈틀거리며 비음을 토해냈다. 전신이 통나무처럼 굳더니 이내 목욕이라도 한 사람처럼 축 늘어지는 것이 아닌가.
남천휘는 공태령과 거리를 벌리며 한 숨을 흘렸다.
‘진짜 됐네?’
지금 당장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니지만, 표정이 돌아온 것으로 잠에서 깨어나는 과정이 분명했다.
이제 천수련 차례였다.
남천휘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천수련의 몸 위로 올라탔다. 제대로 찌르기 위해 일부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줬다.
어쩔 수 없이 거리가 좁혀졌다.
그 순간 체취(體臭)인지, 방향(芳香)인지 모를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쳐갔다. 어여쁜 얼굴에 은은한 향이 더해지니 입을 닫고 있는 천수련은 가히 천상의 선녀를 연상케 했다.
“아······.”
남천휘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아직도 미환비림의 여파가 남은 것일까.
오감이 제멋대로 반응했다.
‘내 의지가 아니라고.’
그 순간 천릉곡으로 통하는 좁은 통로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감이 제멋대로 반응한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증폭된 듯했다.
남천휘는 귀식을 발동시킨 후 이동했다.
부쩍 늘어난 지혜 수치로 인해 향상된 상황 판단력이 만들어낸 쾌거였다.
‘아! 퀘스트를 잊고 있었어.’
천릉곡에 적대 세력이 대거 유입됐다고 하지 않았던가. 단양자의 비급을 획득하면서 잠시 그들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파팟!
“이런 곳에 통로가 있다니. 어! 너 뭐야?”
험상궂은 사내는 갑작스레 튀어나온 남천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남천휘는 빠르게 사내의 머리 위를 살폈다.
레벨은 낮고, 색깔은 붉다.
일단 얼굴만 봐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뻔히 보였다. 한데 놈과 같은 부류를 몽산에서 만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때 만난 놈들은 전멸을 했기에 비슷한 놈을 거론했다.
“혈랑회냐?”
사내의 직위는 그리 높지 않았나 보다.
남천휘의 당당한 한 마디에 눈을 끔뻑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혈랑회는 안 왔지. 우리는 저쪽에······. 어! 너 용봉쟁투에 참가한 후기지수냐?”
사내가 뒤늦게 남천휘의 무복을 확인하고 박도를 뽑았다.
남천휘는 직도를 뽑는 대신 사내와 거리를 좁혔다.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된 점혈을 시도하려는 게다.
콰직!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비명이 천릉곡에 쩌렁쩌렁 울렸다.
“으아아아아악!”
사내가 놀란 만큼 남천휘도 놀랐다.
그저 혈도를 찍으려 했을 뿐인데.
‘손가락이 박혀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