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94화 (94/305)

49, 유관장. (3)

이어지는 거였어?

흙먼지보다 자욱한 어둠이 드리워졌고, 마치 빛 한 점 없는 무저갱 속에 발을 들인 것처럼 오감이 마비됐다.

‘이제 곧 한 줄기 빛이 내려오겠지.’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빛이 들이쳤다.

첫 가상현실로 인해 남추의 비천무상도를 배울 수 있었다.

‘이번에는 뭡니까?’

그 순간 빛이 남천휘를 집어삼켰다.

솨아아아아악-

바람 소리가 끊이지를 않는다.

실눈을 떴더니 어느새 동굴 안쪽에 자리한 자신을 발견했다. 수많은 넝쿨과 이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동굴 밖에서 따스한 햇살이 들이쳤다.

‘뭐든 처음이 어렵다더니.’

그래도 두 번째라고 어지러움이 덜했다.

남천휘는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고 온 존재를 바라봤다.

곡부남가의 시조이자, 산적으로 알려진 사내.

백파도(百破刀) 남추(南秋).

그가 동굴로 걸어 들어왔다.

한데 할아버지의 모습이 대두동에 봤을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머리는 잿빛으로 물들었으나, 피부는 오히려 회춘한 사람처럼 매끈했다. 게다가 구도자의 행색을 했던 예전과 달리 대막에서 활동하는 마적이나 사용할 법한 피풍의로 온 몸을 감싸고 있지 않은가.

멋있었다.

‘일을 마치고 나면 옷을 훌훌 털고 나서며 신분과 이름을 자랑하지 않는다더라.’라는 협객행의 구절이 생각날 정도였다.

남추의 표정과 행색이 그러했다.

그런 그가 무릎을 살짝 굽히더니 손을 모아 눈썹 위로 올렸다.

“마 사형.”

남천휘는 황급히 방향을 바꿔 남추의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동굴 안쪽에 앉은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 보였다. 그는 넉넉한 웃음으로 남추를 맞이하며 말을 이었다.

“사제, 오랜만이군.”

“그 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돌아갈 때가 되었기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네. 자네는 잘 지냈는가?”

노인의 선문답에 남추는 쓴웃음을 흘렸다.

“삼교일치의 도리를 깨우치지 못한 무뢰배가 잘 지냈을 리가 있나요. 그저 풍진강호를 떠돌며 칼이나 팔고 지나는 처지입니다.”

“허허, 백 자루의 칼을 깬 자가 너무 겸손하군.”

“불의한 칼은 쉽게 깨지는 법이지요.”

“클클, 이 못난 사형은 삼교일치의 법통을 마음에 담았지만, 그대는 법통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자네야 말로 교조의 진실 된 제자라 할 것이야.”

한 마디로 노인은 교리를 전파했고, 남추는 칼로서 협을 행했다는 뜻이다.

남추는 멋쩍은 웃음을 짓다가 물었다.

“한데 천리 밖에서 저를 찾으신 까닭이 무엇인지요?”

노인은 품에서 유지(油紙)에 담긴 책을 꺼냈다.

저거다!

그가 동굴에서 얻어내야 할 목표가 분명했다.

남추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천성십이혈입니까?”

천성십이혈이라. 이름만 들어도 대단해보였다.

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클클, 내 가죽일세.”

명확해졌다.

단양자일 것이 분명한 저 노인은 이름 대신 천성십이혈이라는 가죽을 남기려는 게다.

“이걸 이곳에 두려 하네.”

남추는 표정을 굳혔다.

“천릉곡이 은밀하다고는 하나 외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은 아닙니다. 불의한 자가 얻을까 걱정스럽군요.”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거라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자네가 가장 칼을 잘 쓰니까.”

남천휘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남추를 바라봤다.

한데 남추는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

‘칼을 얼마나 잘 썼기에.’

그리고 그런 실력을 지녔다면 분명 강호에 큰 이름을 남겼을 터였다. 하나 강호사에 남추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생색 좀 내고 다니시지.’

앞으로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생색을 내고 살아야겠다.

남추는 담백한 어조로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키는 건 뭐든 하시겠단다.

저러니 명성을 하루살이만큼 얻으셨지.

아! 산적으로 전해졌으니 하루살이만도 못하셨구나.

단양자는 자신이 앉아 있던 바위를 가리켰다.

“이걸 좀 깨끗하게 깎아주게.”

남천휘는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천 리 밖에서 사람을 불러놓고 바위를 깎아달라니.

한데 남추는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칼을 뽑는다.

‘아! 내 칼! 머지 않아 내 것이 될 내 칼!’

칠야도가 천천히 공간을 갈랐다.

그 때마다 놀랍게도 바위가 깎여나갔다.

많이도 필요 없더라.

고작 다섯 번의 칼질로 매끈한 석탁이 완성됐다.

남천휘는 자리를 바꿔 남추의 칼질을 살폈다.

‘아.’

몇 번이나 영상을 재생했고, 그럴 때마다 위치를 바꿨다. 그럴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왔고, 동시에 탄식을 흘렸다.

남추의 도법은 너무 심오했다.

차라리 비천무상도의 초식을 펼쳤다면 멋있게만 보였으리라. 한데 단순한 칼질에 깃든 심의는 유추할 수조차 없었다. 도수에 대한 레벨이 올랐음에도 웃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예전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광경이다.

하나 레벨이 오르고, 경험이 쌓이니 남추의 칼질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

‘이게 고수의 풍모인가?’

남천휘는 쓴웃음을 흘렸다.

강호인이 발을 내딛으면 그곳이 곧 강호라고 하더라. 하나 자신이 있는 곳이 강호냐고 묻는다면 쉬이 대꾸할 수 없을 듯했다.

‘그야말로 어린애들 소꿉장난이구만.’

산동성을 쥐락펴락하는 삼정의 위세나 용봉쟁투의 화려함이 덧없게 여겨졌다.

“자! 이제 바위를 반으로 잘라주게.”

남추는 칠야도를 횡으로 그었다.

그것만으로도 석탁의 윗부분이 잘려나갔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단양자는 남추에게 잘린 석탁의 안쪽 부분을 파달라고 했다. 남추는 그제야 짚이는 바가 있었는지 책 한 권을 넣을 만큼 공간을 잘라냈다.

‘아! 저 안에 숨겼군.’

아니나다를까 단양자는 유지에 쌓인 책을 그 안에 넣었다. 잠시 후 바위가 겹쳐지자, 잘렸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메워졌다.

“제게 볼 일은 다 끝나셨는지요?”

단양자가 빙긋 웃었다.

“가기 전에 자네를 보고 싶었어.”

남추는 표정을 굳혔다.

“설마?”

“그래, 내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네.”

“하면 고향으로 가시는 겁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단양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자가 천릉곡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유선관으로 갈 생각이야. 자네는 어디로 가려는가?”

남추는 도를 거둔 후에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감숙성에 사마외도가 들끓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마교 쪽에서 무언가를 획책하고 있는 듯하더군요. 그쪽으로 가 볼 생각입니다.”

남천휘는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남추 정도라면 마교와 어우러질 만했다.

다만 무슨 일인지 궁금했을 따름이다.

한데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뇌리에 울렸다.

◎ 어느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 산동성 유선관(遊仙觀)

- 감숙성 대설산(大雪山)

갑작스런 선택지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VR'의 세상은 남천휘의 선택을 기다리듯 멈춘지 오래였다.

남천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유선관을 택했다.

남추의 과거가 궁금하기는 하나 지금 당장 감숙성으로 향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천 리 밖의 세상은 세외(世外)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조금 겁났다.

‘할아버지 쪽은 나중에 가 볼게요.’

남추가 먼저 이별을 고했다.

“대사형.”

“아무 말 마시게. 가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이 얼마나 멋진 줄 아시는가?”

단양자는 넉넉한 웃음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남추는 한참동안 먹먹한 표정을 짓다가 사라졌다.

‘끝?’

홀로 남은 단양자는 품에서 침통을 꺼냈다.

일견하기에도 영험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자! 이제 천성대침으로 안전장치를 만들어볼까. 아무나 들어와서 가져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혼잣말을 대화처럼 실감나게 중얼댔다.

한데 잠시 후 그의 행동은 남천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푹-

단양자는 앙상한 손가락으로 대침을 꺼내 벽에 박았다. 한 줌의 내공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수십 개의 침을 벽에 꽂아 넣는 광경은 신기하기만 했다.

‘아니, 저 정도면 손가락으로도 바위를 자르겠구만. 왜 애꿎은 할아버지를 오라가라 하는 거야.’

그 때 단양자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래도 가장 아픈 손가락이 다 나은 듯하여 다행이야. 스승께서 지켜보라고 명하신 이유가 있었구만.”

전진교의 교조인 중양자는 무당의 장삼봉, 소림의 달마처럼 신성시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 사람이 할아버지를 아꼈더니 절로 어깨가 으쓱거렸다.

“천괴침은 바위를 녹여 석분을 흩뿌리지. 이렇게 말이야.”

단양자는 침을 박아 넣은 벽에 손을 맞댄 후 경구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양 쪽 벽에서 손을 떼는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치이이이이이-

무언가 갈려나가는 소리와 함께 침이 박혀 있던 구멍에서 먼지가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어! 저건.’

남천휘가 동굴에 발을 들였을 때 피어오른 흙먼지가 분명했다. 점차 주변은 흙먼지로 인해 안개가 피어난 것처럼 혼탁해졌다.

단양자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진다.

그 때 그가 동굴 안쪽의 석탁을 바라보며 손을 모았다.

“욕(慾)을 멀리하고, 치(恥)를 참으며, 자신은 고초를 겪더라도 남을 이롭게 하면 족하지 아니한가. 안 그렇습니까?”

남천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단양자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잖아.’

남천휘는 황망한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단양자를 따라 손을 모았다.

‘그래, 나를 어찌 알겠어? 그냥 석탁을 보면서 기원한 거겠지.’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해.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거 너무 무섭잖아!

흙먼지로 인해 단양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동영상이 종료되었습니다.

◎ 재생 목록에 등록된 잔여 영상은 1 개입니다.

◎ 히든 모드 'VR'이 해제됩니다.

*

“아.”

남천휘가 침음을 흘리는 순간 흙먼지가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남천휘는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으로 인해 자신이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석탁, 석탁을 보자!

남천휘는 단양자에 대한 의구심을 지운 채 흙먼지를 헤쳤다. 한데 두어 걸음도 걷기 전에 경악할 만한 현실을 마주했다.

“진짜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작정을 했나.”

그가 처음 들어왔을 때 흙먼지로 인해 동굴의 내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촉각증폭제까지 사용해서 손으로 살피지 않았던가.

한데 석탁 주변만 흙먼지가 사라진 상태였다.

마치 이제는 출입이 허락된 것처럼 말이다.

남천휘는 숨을 몰아쉬며 바위를 잡았다.

솟아라! 곰같은 내공의 힘이여.

그그극-

오랜 세월 겹쳐졌던 바위의 윗부분이 들리는 순간 ‘VR‘에서 봤던 서책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재이의 알림은 덤이다.

◎ 퀘스트 《천릉곡의 비밀》이 완료되었습니다.

- 보상품이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남천휘는 보상품보다 유지에 쌓인 서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질풍뇌격궁과 수련용 직도에 이어 세 번 째로 획득한 현물이었다.

“어디 한 번 봅시다!”

퀘스트 과정만 보면 최소한 영웅 등급의 물품일 것이 분명했다.

남천휘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럽게 유지를 풀었다. 그 순간 방금 쓴 것처럼 선명한 표제가 눈에 들어왔다.

(마단양천성십이혈병치잡병가)

길다. 길어도 너무 길다.

남추가 천성십이혈법(天星十二穴法)이라 줄여서 부른 이유가 있었던 게다. 남천휘가 책을 펼치려는 순간 재이의 알림이 연이었다.

띠링-

◎ 최초로 전설 등급 아이템을 습득했습니다.

남천휘는 책을 움켜쥔 채 굳어버렸다.

◎ 마단양천성십이혈병치잡병가(馬丹陽天星十二穴幷治雜病歌)에 기록된 내용이 자동으로 저장됩니다.

◎ 특기 ‘점혈’이 등록되었습니다.

◎ 특기 ‘활인’이 등록되었습니다.

◎ 특기 ‘투척’이 등록되었습니다.

◎ 특기 ‘감응’이 등록되었습니다.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단박에 네 개의 특기가 등록된 것도 모자라 알림이 이어졌다.

◎ 비급 ‘천성혈법’이 무공총람에 등록됩니다.

후훗, 이름이 점점 줄어드는 걸 보니 너도 부르기 힘들었구나. 한데 그 때 경악의 종극(終極)을 알리는 한 마디가 더해졌다.

◎ 직업 ‘의원’으로 전직이 가능합니다.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단지 책을 한 권 얻었다고 해서 의원이 될 수 있는 거였던가. 이래서야 자신에게 진료받을 환자들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어, 그런데 나 무적자잖아?’

역시 전가의 보도인 재이가 해결책을 내려줬다.

그것도 기가 막힌 방법으로.

◎ 대상자가 무적자인 관계로 직업 '의원'이 삭제됩니다. 무적자의 기본 권능으로 인해 의원 고유의 능력이 특기로 전환됩니다.

◎ 특기 ‘의술’이 등록되었습니다.

남천휘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머니, 저는 의원이 되었어요.

참 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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