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오늘밤 주인공은. (8)
*
흑은 탁자를 내리치며 외쳤다.
“모인적을 방출하라니요!”
하나 공과 황은 느긋했다.
“서산노옹이 강력하게 청원하고 있소. 용봉쟁투의 공명정대함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외다.”
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인적은 초류혁의 수발을 들기 위해 청도문에서 직접 선별한 녀석이외다. 놈이 방출당하면 초류혁은 날개를 잘리게 되는 셈이오.”
이번에는 황이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말했다.
“그러게 왜 독을 써. 그것도 하필 서산노옹의 동생을 죽게 만든 독이라며?”
공이 탄성을 흘렸다.
“허허! 이거 서산노옹과 모가장의 싸움이라도 벌어지려나.”
“다행히 당시 독을 쓴 놈은 오래 전에 잡아 죽였답니다. 어찌됐든 모가장에서 몰래 쓰는 독이 원인이었으니 서산노옹도 참을 수 없었던 거지요.”
흑은 두 사람을 찢어발길 듯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빌어먹을!’
이 일은 이제 흑의 손을 떠난 문제였다.
오히려 초류혁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고 마무리되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용봉쟁투가 한참인 시기에 모인적의 방출은 뼈아팠다.
‘상황이 참 거지같이 돌아가는군.’
이럴 때 신풍수사라도 있었다면 타개책을 찾아낼 수 도 있었으리라. 하나 그는 일이 터진 직후부터 연공을 핑계로 외인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빌어먹을 정파 새끼들!’
그 때 공이 창밖을 힐끔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슬슬 관중들이 들어왔겠군요. 자! 백인검무나 구경하러 갑시다.”
흑은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관중이라니!”
“아! 제가 얘기 안했던가요? 오늘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무사부의 말에 의하면 백인검무는 이미 완성됐다는군요. 그러니 명숙들 앞에서 선보이느니 관중을 불러놓고 제대로 시연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관중들의 의중에 따라 서열을 정리하기로 했잖소. 또한 어제 일을 덮으려면 더 큰 화젯거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합시다.”
공은 황과 옷매무새를 매만지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럼 먼저 가겠소이다.”
홀로 남은 흑은 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거 계획을 앞당겨야겠군.”
그는 다소 몽롱한 눈빛을 흘리며 처소를 떠났다.
머릿속에는 백인검무나 용봉쟁투가 아닌 제 삼의 무언가로 가득했다.
*
텅 비어 있던 의당(醫堂)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하나 별채에 따로 위치한 병실은 조용했다.
“왔냐. 못 일어나서 미안하다.”
초류혁은 병상에 누워있는 모인적을 내려다봤다.
양 손목에 감은 면포가 붉다.
양 다리에는 부목을 댔고, 사이사이에 고약을 잔뜩 붙여놓은 상태였다.
그는 친우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 있으면 사람이 올 거다. 그들을 따라 돌아가.”
모인적은 눈을 부릅뜬 채 더듬거렸다.
“뭐, 뭐라고?”
초류혁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진 하차해. 부상을 핑계로 대면 사람들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다.”
모인적은 한순간 고통이 사라진 듯했다.
그 만큼 초류혁의 말은 충격적이다.
“말도 안 돼! 내가 가면 어디를 가냐? 류혁아. 나 모인적이야. 네 친구, 모인적!”
하나 모인적의 뜨거운 눈빛은 금세 사그라졌다.
초류혁이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마치 뱀 앞의 쥐처럼 경련을 일으킬 뿐이다.
“미안한데 내가 지금 속으로 말한 건가?”
“류혁아.”
“들었다면 하차해. 이미 모가장에도 인편을 보냈다.”
“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 손발처럼 뭐든 다 했잖아.”
“아니야. 손발은 잘라내면 죽어. 그런데 너는 손발이 아니잖아. 사람이잖아. 부모도 있고, 집도 있는 사람. 그러니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모인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부모와 가문을 거론하는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 새끼가······.’
하나 욕설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였다.
“알았다.”
초류혁은 그 말을 듣고 난 후에야 의당을 벗어났다.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에서 분노를 엿보기란 불가능할 터였다.
그런 그를 흑이 맞이했다.
“계획을 앞당길 거야.”
초류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백인검무는 아니겠지요?”
“아무래도 장소를 제대로 택해야 하니까. 조만간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돼.”
“부탁이 있습니다.”
흑은 표정을 지웠다.
지금도 초류혁으로 인해 큰 손해를 보지 않았던가.
게다가 청도문의 대계 또한 수정이 불가피했다.
하나 그가 초류혁을 편히 대한다고 해도 소가주임은 변함이 없지 않은가.
“뭔데?”
“남천휘. 그 새끼를 공태령과 같은 조에 넣어주세요.”
“함께 처리해달라는 거냐?”
“안 됩니까?”
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음 관문 때 같은 조에 넣어주마. 대신 남천휘는 잊어. 너는 장차 산동성을 지배해야 할 사람이다. 그리고 네가 할 일은 잘 기억하고 있겠지?”
초류혁은 가느다란 혀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목격자를 잔뜩 만들어 놓겠습니다. 남천휘에게 잘 배워뒀거든요.”
*
백인검무는 낮과 밤에 걸쳐 두 번 진행됐다.
본래 명숙들 앞에서만 시연하기로 했던 백인검무였다. 한데 갑자기 관중을 불러들이려니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 백여 명 남짓한 관객이 전부였다.
어차피 지난밤에 있었던 사건을 묻기 위해 급히 진행된 일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백인검무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한데 호응이 예상 외로 컸다.
“어머! 이건 꼭 다시 봐야해.”
“너, 너무 멋있어!”
남천휘를 습격했던 모인적을 포함한 후기지수 열 명이 제외된 상태였다. 그러나 여든여덟 명의 후기지수가 검무를 펼치는 순간 빈 공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 나도 검법을 익힐 거야.”
“네 덩치로 저걸 하면 개백정이지. 그나저나 며칠 연습한 것치고는 너무 화려한 걸. 대단하잖아!”
정오를 기점으로 용봉평 주변으로 소문이 퍼졌다.
용봉쟁투는 이미 소개연부터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았던가. 근처에서 머물던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용봉평으로 모였다. 그 와중에 지난 밤 있었던 후기지수 간의 다툼은 화젯거리조차 되지 않은 채 흘러갔다.
이제 어둠이 밝음을 열심히 밀어내는 시간이 됐다.
사위가 어둑한 가운데 용봉평 입구를 지키던 무인이 물었다.
“몇 명이나 들어갔어?”
용봉평 입구에서 입장객을 확인하던 학사는 장부를 확인한 후 탄성을 흘렸다.
“사, 사천 명입니다.”
무인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소개연보다 네 배가 늘어났다.
게다가 소개연 때 모은 관중의 대부분은 억지로 끌려온 자들이 대다수였다. 한데 불과 며칠 사이에 네 배의 인원이 알아서 모인 게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누군가 돈으로 매수했다고 보기에는 인원이 너무 많았다.
학사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낮에 선보인 백인검무가 대호평이었답니다.”
“그래도 그렇지.”
“그 중에서도 갑급에 속한 후기지수들은 아예 사적으로 쫓아다니는 관중이 있을 만큼 유명합니다. 외모만 보고 쫓아다니는 무리지요.”
“그들이 많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텐데.”
무인의 부정에 학사는 입꼬리를 올렸다.
“서열 팔위인 남천휘가 대박을 쳤습니다.”
“뭐라?”
“아마 삼분지 일은 남천휘를 보러오지 않았을까 싶군요. 낮에 백인검무를 펼칠 때 저도 잠깐 봤습니다. 한데 얼굴에서 빛이 나더군요. 백인검무를 위해 태어난 줄 알았습니다. 아마 보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형님! 얼굴에 뭐라도 바르셨습니까?”
남천휘는 무복을 걸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혜소는 슬쩍 다가앉으며 말했다.
“얼굴에서 윤이 나요. 옥을 갈아서 바르면 그렇게 된다는데······.”
남천휘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옥을 갈아서 된 게 아니라 옥이 되었단다.’
그는 시야 상단을 살폈다.
《내공 흡수가 진행 중입니다.》
- 잔여 시간은 03:22:19입니다.
지난 밤 돌림판을 통해 얻은 십 년의 내공을 흡수하는 중이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자연지기가 뭉쳐들어 내공을 늘렸다.
한데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공능이 발견됐다.
바로 무균실이다.
처음에는 뜻도 모르고 귓등으로 흘렸던 설명이다.
하나 재이의 설명을 재차 확인하는 순간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
대상자의 주변에 존재하는 온갖 탁기가 밀려나고, 강제로 청정한 구역을 생성했단다. 오악의 가장 영험한 곳도 이 정도는 아닐 터였다.
‘무균실에서 살고 싶다.’
남천휘는 자신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연하연이나 소혜의 손보다 부드럽지 않을까 싶다.
“형님, 나가셔야지요?”
“응, 잠깐만.”
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동경을 꺼냈다.
피부는 옥을 갈아 만든 조각처럼 매끄럽고, 반짝거렸다. 그 뿐 아니라 혈색은 최상이었고, 눈은 수정처럼 맑았다. 어쩐지 지나가는 여인들이 얼굴을 붉히거나, 추파를 던지더라.
‘이 정도면 최소한 산동에서는 최고가 아닐까?’
◎ 대상자의 외모 서열은 상위 2%에 해당합니다.
- 장점은 장신과 피부, 눈동자, 혈색입니다.
- 단점은 비율, 그리고 장신에 비해 하체가······.
닥쳐! 하지 마. 이 잔인한 것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혜소는 남천휘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자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형님,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남천휘는 인상을 쓴 채 콧김을 뿜었다.
“진실의 몽둥이에 복부를 얻어맞았어. 짜증난다.”
혜소는 영문 모를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즈음 밖에서 후기지수들의 소집령이 내려왔다.
남천휘는 전쟁터에 나서는 장수처럼 결연한 표정을 보였다.
“가자! 다 부숴버리겠어.”
잘 생긴 놈들은 다 죽어야 해!
이미 사위가 어둑하다.
그렇기에 백인대 주변에는 횃불이 가득했다.
한데 백인대가 평소와 달랐다.
본래 열 개의 청석을 열 줄로 늘어놓아 백 명이 올라가서 활개를 쳐도 될 만큼 넓었다.
그러나 지금의 백인대는 좁다.
다섯 개의 청석이 네 줄로 깔려 있다.
그 위에 갑 급에 속한 스무 명의 후기지수가 자리했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백인검무의 시작을 알렸다.
남천휘는 자세를 취한 눈을 가늘게 떴다.
때마침 퀘스트가 생성됐다.
백인검무를 통해 관중의 칠 할 이상의 환호성을 끌어내란다.
‘누워서 떡 먹기네.’
이미 오전 백인검무를 통해 관중의 반응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폐부를 가득 채운 바람이 입을 통해 흘러나가는 순간 대갈일성이 터져 나왔다.
“갑!”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너무 청아했다.
이 또한 무균실의 위력이리라.
그리고 남천휘의 신호를 시작으로 스무 명의 후기지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동시에 재이의 알림도 들려왔다.
◎ 특기 ‘무희’가 활성화됩니다.
- 춤 선이 조금 더 명확하게 전해집니다.
무희는 본래 무무혁명에서만 해당하는 특기였다.
하지만 백인검무를 수련하면서 레벨이 오르더니 검무를 펼칠 때에도 활성화됐다.
‘좋아!’
첫 시작은 권각법(拳脚法)으로 오와 열을 맞췄다.
남천휘는 정중앙에 위치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나 검무가 이어질수록 상위 서열의 춤사위가 공간을 장악했다. 나머지는 부외자가 된 것처럼 단조로운 자세를 펼쳤다.
“을!”
그 순간 갑급의 후기지수들이 병장기를 뽑았다.
동시에 남천휘가 몸을 띄웠다.
그가 좌측을 향해 손을 내뻗는 순간 북소리가 진동했다. 그러자 작은 무대가 우측에서 나타나 좌측으로 움직였다. 본래 있던 무대와 합쳐지는 순간 기다란 무대가 완성됐다.
남천휘는 다시 중앙으로 이동했다.
갑급과 을급이 뒤섞인 가운데 검과 도가 불빛을 받아 번쩍였다.
관중의 함성을 뚫고 병이라는 일갈이 들려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뒤에서 작은 무대 두 개가 움직였다. 그 위에는 병급과 정급의 후기지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렇게 네 개의 작은 무대가 합쳐져 본래의 백인대가 완성됐다.
검무가 이어질수록 갑급의 후기지수가 돋보였다.
그들을 중심으로 검진을 짰고, 그들을 시작으로 검진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남천휘는 그야말로 군계일학의 신위를 보였다.
불빛을 받아 음영이 진 얼굴은 평소보다 호쾌한 기상을 전했다.
촤라라라라라라락!
수십 번의 칼질을 끝으로 백인검무를 마무리 할 때가 다가왔다.
정급이 무릎을 꿇고 앉아 사방을 경계했다.
그리고 그들이 무릎걸음으로 무대를 빠져나가는 순간 병급이 자세를 낮춘 채 몸을 휘돌려 매서운 검세를 선보였다. 그리고 을급이 절초를 펼치며 하나의 원을 만들었다.
“타핫!”
갑급의 무인들이 무대 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미 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들이기에 제법 멋들어진 보법으로 장관을 이뤘다.
이제 남은 건 남천휘와 삼정의 후계자였다.
공태령과 황보장천, 초류혁이 몸을 띄우는 순간 사방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그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관중들이 상당수였다.
제각기 절초를 선보인 후 그들이 내려앉았다.
그 때 남천휘가 백인검무의 끝을 알리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양 손에 쥔 직도가 허공을 날았다.
한데 놀랍게도 남천휘의 두 손에는 여전히 직도가 들려 있지 않은가.
쉭쉭쉭쉭!
명숙들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엉덩이를 들썩였다.
남천휘는 몸을 뒤집으며 수련용 직도를 인벤토리로 회수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몸을 뒤집는 순간 요대에 길게 늘어진 띠가 펄럭거렸다.
휘리리리리릭!
여기까지 원래 백인검무의 마무리다.
그야 말로 보법의 고수나 선보일 법한 묘기였다.
하나 남천휘는 이 상태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오늘밤 주인공은······.’‘
그는 거꾸로 떨어지는 중이다.
미리 보급창에 넣어두었던 장검을 꺼냈다.
콰직!
장검으로 무대를 찍는 순간 검신이 부러질 것처럼 휘어졌다. 하나 장검이 휘어졌다가 다시 펼쳐졌을 때 남천휘가 재차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러더니 장검 위에 가볍게 내려서는 것이 아닌가.
‘나야.’
때마침 떨어진 두 자루의 직도를 받아내는 순간 관중의 환호성으로 인해 용봉평 전체가 들썩였다.
‘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