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오늘밤 주인공은. (5)
《전음》
- 상대방을 지정해서 목소리를 전할 수 있습니다.
- 사용 가능 거리는 3m입니다.
※ 사용횟수에 따라 전음 거리가 늘어납니다.
남천휘는 상태창의 특기 목록에 등록된 전음(傳音)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음이란 뜻처럼 소리를 전하는 능력이다.
하나 단순히 많은 내공을 지녔다고 해서 발휘할 수 있는 공능이 아니었다. 구파오가와 같은 명가나 초절정에 준하는 고수, 또는 특별한 심법을 익힌 자들에게만 허락된 신의 영역이 아니던가.
신공부를 통틀어도 전음을 펼칠 수 있는 고수는 열 명이 채 되지 않으리라.
‘후기지수 중에도 없겠지? 없을 거야.’
점혈법은 꾸준한 수련을 통해 습득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펼치는 것도 방비하는 것도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하나 전음은 그렇지 않았다.
타인 모르게 전음을 펼칠 수 있다면 그 효능은 무궁무진할 터였다.
A급 특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좋았다.
게다가 쓰면 쓸수록 거리가 늘어난다는 말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하아, 오늘은 운이 좋구나.”
회회회판을 통해 영웅 등급이 연달아 나올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남천휘는 재이와 회회회판에 감사하며 읊조렸다.
‘쓰레기 백 번 줘도 좋다는 말은 취소야. 이해하지? 진심은 아니었어.’
아무리 고마워도 아닌 건 아니었다.
남천휘는 무료 실행권 지급 시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하루 가까이 남은 잔여 시간을 보고 있자니 아쉽기만 했다.
‘좋아! 자수정을 모으겠어!’
지금 이 순간만은 레벨 업보다 자수정이 더 끌렸다.
자수정 만 개라면 영혼을 팔겠어요.
‘잠깐! 그래봤자 30번이면 끝이잖아.’
남천휘는 회회회판의 불합리한 구조에 관해 한참동안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던 중 처소의 입구를 통해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후기지수가 있었다. 병급에 사내라는 걸 제외하면 기억에도 없는 후기지수였다.
“무슨 일이야?”
남천휘의 말에 후기지수는 헛기침을 하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염운이라고 해. 병 급 오십이 위.”
“그런데?”
염운은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오홍방에서 왔어. 너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곡부남가와 거래하던 방파야.”
이 새끼 봐라.
눈빛만 봐도 구린내가 풀풀 풍기기 시작했다.
“가문끼리 인연도 있으니 부탁을 좀 하려고.”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 뭔데?”
“내 순위를 보면 알겠지만, 조금 아슬아슬하거든. 네가 제일 잘하니까 나 좀 가르쳐줄 수 있을까?”
염운은 남천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부탁을 하러 온 사람이 보일 법한 태도였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밖을 힐끔거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무엇보다 염운은 초류혁의 계파였다.
‘드디어 놈이 움직였네.’
계보를 읽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아무리 용봉평이 넓다 해도 후기지수들의 활동반경은 비슷했다. 게다가 뜻 맞는 놈들끼리 우르르 몰려다니니 구도를 파악하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남천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대꾸했다.
“좋아.”
밑밥을 깔았다고 여긴 걸까.
염운은 한결 나아진 표정을 말을 덧붙였다.
“한데 나랑 비슷한 처지의 녀석들도 있어서 말이야.”
“불러봐.”
기다렸다는 듯 세 명이 들어섰다.
모두 병급의 후기지수였다.
“백인검무를 가르쳐달라고?”
남천휘의 말에 능글맞게 생긴 녀석이 나섰다.
“그래, 내일 명숙들 앞에서 선보여야 하잖아. 자신이 없더라고. 같은 정파의 후기지수들끼리 도와주면 안 될까? 사례는 할게.”
아이쿠! 이게 왠 떡인가.
어차피 백인검무 첫 날 초류혁의 뒤통수를 친 이상 놈과 척을 진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러니 오늘 놈들의 수작질을 회피한다고 해도 더 지독한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리라.
그러니 초장에 밟아주는 것이 나을 듯했다.
한데 사례까지 한다니 이 어찌 횡재가 아니겠는가.
“좋아. 너희들의 사문이 어떻게 되지?”
그들은 무가 두 곳과 상단, 그리고 표국의 제자였다.
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너, 너는 백 냥, 너는 삼백 냥, 너는 이백 냥.”
네 명의 후기지수들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사례를 한다는 말은 당연하게도 남천휘를 꾀여내기 위한 밑밥이었다. 어차피 일을 끝내면 평생 다시 볼 상대가 아니지 않던가.
“속성으로 가르쳐줄게. 싫으면 그냥 가도 돼.”
후기지수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그들은 모두 모인적의 밀명을 받고 나선 길이다.
물론 모인적은 대놓고 남천휘를 해하라 하지 않았을 게다. 그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후기지수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줬겠지.
“자, 잠깐 상의 좀 해도 될까?”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네 명은 이내 머리를 맞댔다.
‘어쩌지?’
‘뭘 어째. 그냥 주자. 어차피 조금 있다가 빼앗으면 돼. 놈을 으슥한 곳으로 유인하기만 하면 된다고.’
‘초류혁과 직접 줄을 댈 수 있는 기회야.’
‘나 돈 없는데?’
염운의 말에 누군가 인상을 썼다.
그러나 나중에 꼭 갚으라는 말과 함께 은자 백 냥짜리 전표를 건넸다.
잠시 후 남천휘의 손바닥 위에는 은자 육백 냥 상당의 전표가 놓였다.
어린 것들이 평소에도 거금을 들고 다니다니.
곡부남가의 재력이 양민들의 상상을 뛰어넘어도 진짜 돈 있는 놈들을 당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뜯어낼 수 있을 때 양껏 뜯어내자.
“돈 받은 만큼 확실해 해줘야 해.”
“당연하지.”
남천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우리 조용한 곳으로 갈까?”
후기지수들은 잠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들이 유인을 해야 하거늘 이상하게 한 발씩 늦는 기분이다.
“그, 그럴까.”
누군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낯을 좀 가리거든. 조용한 곳으로 가자.”
그러더니 대뜸 앞장을 선다.
후기지수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뒤따랐다.
‘어떻게 조져버릴까?’
남천휘는 작금의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혜 수치를 올리려면 독서를 해야 했다. 하나 경전을 펴기만 하면 수마가 찾아와 괴롭히지 않았던가. 그 때마다 남천휘를 구원한 것이 영웅담이다.
‘창천마객이라는 책이 참 재밌었지.’
작금의 상황은 영웅담에서 흔히 보던 광경이다.
착한 주인공이 나쁜 놈들을 의심하지 않고 따라갔다가 곤경에 처하는 그런 장면인 것이다.
‘그 책에도 나오더만.’
그렇다면 이것은 주인공이 한 번쯤 거쳐 가야 할 관문과도 같은 시련이 아닐까.
‘오늘밤은 주인공은 나다!’
한데 저 멀리서 예기치 못한 사람이 등장했다.
천수련이 폴짝폴짝 뛰면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오호!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나는 개똥이 딱 나타나네.’
평소의 그였다면 천수련을 보는 순간 인상을 썼을 것이다. 이미 소혜와 같은 부류임을 깨닫는 순간부터 귀찮아진 상태였다. 아마 그녀가 찾아왔을 때마다 돈을 받았다면 후기지수들이 건넨 은자 육백 냥은 푼돈처럼 여겨졌으리라.
어쩌면 그녀는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로워서 달라붙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60을 넘긴 호감도가 증거였다.
재이의 설명에 의하면 미연시 대상자의 호감이 80을 넘기면 모드가 발동한다고 했다.
연하연의 경우 호감도 100을 찍고 미연시가 발동하지 않았던가. 하나 그것은 히든 모드가 해금될 시에만 해당하는 조건이라더라.
그래서 아쉬웠고, 조금 더 조심했다.
천수련의 호감도가 80을 넘기지 않도록 언행에 신경을 썼다. 하나 그녀에게 오늘 연극의 중요한 배역을 맡겨야겠다.
남천휘는 조금 전에 획득한 전음을 펼쳤다.
특기 ‘전음’이 활성화되는 순간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천수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녀는 길가에 멀뚱히 선 채 남천휘와 후기지수들이 지나치는 걸 지켜봤다.
“왕대만을 불러오라고?”
남천휘가 전음을 펼칠 줄 안다는 사실에 표정을 굳혔고, 왕대만이라는 이름에 한 번 더 인상을 썼다.
백인검무를 수련할 때마다 괜스레 거드름을 피우며 오가는 명숙이 아니던가. 기름진 눈매로 힐끔거리는 통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이 돋기도 했다.
‘왕대만은 싫지만······.’
천수련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지금껏 자신이 부탁하는 입장이었거늘 남천휘가 처음으로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가.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우라는 스승의 당부가 아니었더라도 기쁘게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개똥이야?”
하나 그녀의 의문과 달리 발걸음은 가벼웠다.
*
남천휘가 후기지수들을 이끌고 간 곳은 연무장 외곽의 공터였다. 구릉과 맞닿았기에 입구만 막으면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다.
남천휘는 일부러 공터 안쪽으로 향했다.
이미 네 명의 후기지수 중 한 명은 슬그머니 빠진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장소가 바뀌었으니 동료들을 데리러 갔을 게다.
‘몇 명이나 오려나?’
남천휘는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확신했다.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초류혁은 절대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다.
남천휘는 며칠 동안 지속적으로 놈을 도발했다.
하나 놈은 표정의 변화조차 보이지 않았다. 백인검무 첫 날부터 느꼈지만, 놈은 남의 시선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했다.
왕대만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철면호협 공태령에 대한 자격지심이 원인이다.
같은 삼정의 후예지만, 평가는 극과 극을 달렸다.
공태령은 후기지수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초류혁은 운 좋은 졸부의 자식에 불과했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기는 해.’
어쨌든 초류혁이 이 자리에 올 일은 없다.
그가 나타나는 순간 남천휘와 동격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누가 멱살이라도 잡고 끌어내지 않는 한 오늘 마주할 일은 없을 터였다.
남천휘는 느긋하게 후기지수들을 바라봤다.
‘42, 44, 33.’
참 고만고만한 레벨이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에게는 꿈의 경지인 절정이 길가의 돌멩이처럼 흔하지 않은가.
남천휘는 혀를 찼다.
‘너희 같은 것들이 절정이라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기껏 해야 더 많은 내공을 운용하고, 검기를 쓰는 정도겠지.
하나 효율적이지 못한 내공의 운용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맞지 않는 검기는 이쑤시개를 휘두르는 것보다 못할 것이다.
“누구부터 가르쳐줄까?”
남천휘의 말에 후기지수들은 눈치를 봤다.
그 때 누군가 공터로 걸어들어오며 서늘한 한 마디를 흘렸다.
“누가 누구를 가르쳐?”
동시에 여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지 한 명도 모르겠다.
남천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녀석들은 겁을 먹었다고 여겼나 보다.
“오늘 우리가 네게 예의와 법도를 가르쳐 줄 거다.”
경박하게 나불거리는 놈의 머리 위를 살폈다.
이름 : 유백천(Lv:49)
소속 : 일도방.
순위 : 용봉쟁투 33위.
언제 통성명을 했던가?
남천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탄성을 흘렸다.
간담회 당시 돌아가면서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던가. 그 때 들었던 이름이 시스템에 자동으로 등록된 듯했다.
‘알아둬도 쓸모없는 이름이네.’
놈은 신기할 만큼 잡스러운 성격인 듯했다.
다른 놈들은 어떤가 보자.
가장 레벨이 높은 녀석은 64였다.
‘적순태.’
적순태는 청도문에 줄을 댄 을급 후기지수를 관리했다. 모인적은 아니었지만, 초류혁에게 타격을 입힐 만큼 쓸 만한 녀석이다.
놈이 턱짓을 했다.
그러자 여덟 명의 후기지수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지더니 포위망을 구성했다.
유백천은 도를 휘휘 돌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야! 백인검무 때마다 제 집처럼 날뛰던 놈이 갑자기 조용해졌네. 변두리 방파에서 상경했으면 구경이나 하고 갈 것이지. 네깟 놈이 후기지수랍시고 까부는 꼴을 언제까지 지켜볼 줄 알았더냐?”
남천휘는 유백천의 도발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애들은 싸우면서 하차하는 법이지.》
- 적대감을 표출하는 대상들에게 포위당했습니다.
- 총 아홉 명의 공세를 무력화한 후 탈출하세요.
- 보상: 자수정 1000개.
여기까지였다면 나올 만 했다고 여겼으리라.
오히려 자수정 천 개에 환호성을 질렀겠지.
한데 추가 조건을 확인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 이이제이(以夷制夷).
- 적의 주공으로 적을 격파하세요.(0/10)
- 보상 : 자수정 2000개.
한 마디로 검은 검으로, 주먹은 주먹으로 처리하라는 뜻이다.
‘나한테 갑자기 왜 이래?’
재이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사이.
유백천은 남천휘가 겁먹었다고 여겼는지 잰걸음으로 달려들었다.
“일단 꿇어! 이 새끼야!”
남천휘는 유백천이 지척에 이르는 순간 상체를 휘돌렸다. 다섯 손가락을 모아 뾰족하게 만든 후 유백천의 손등을 찍었다.
콰직!
손뼈가 으스러진 듯?
공수입백도의 묘리를 펼쳐 유백천의 도를 빼앗았다.
그리고 활짝 열린 놈의 가슴을 향해 도를 내리쳤다.
띠링-
《적의 주공으로 적을 격파했습니다.(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