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오늘밤 주인공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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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류혁의 오만함은 정평이 나 있었다.
청도문주가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후기지수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게다.
초류혁은 평정을 가장하여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마치 남천휘가 일등으로 나선 것에 아무 감흥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엿 됐다.’
‘저 새끼가 눈치도 없이 튀어나가네.’
‘우리한테 불똥이 튀지는 않겠지?’
후기지수 중 눈치가 빠른 자는 남천휘와 초류혁을 번갈아봤다.
반면 공태령은 제 방에서 독서를 하듯 표정 변화 없이 비급을 살폈고, 황보장천은 입을 막은 채 어깨를 들썩였다.
분위기가 한껏 가라앉았다.
후기지수들은 초류혁을 힐끔거리며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그것은 무사부도 마찬가지였다.
“어, 자네 이름이?”
남천휘는 피식 웃으며 옷자락을 들었다.
가슴에 수놓은 팔(八)이 도드라졌다.
“팔 호입니다.”
“아! 그래. 한데 정말 다 외웠는가?”
“네.”
“수련을 빼먹으려는 걸 수도 있으니 한 번 펼쳐보겠는가?”
어째 없었던 조건이 붙은 듯했다.
하나 문제될 것은 없다.
남천휘에게 있어서 백인검무의 난이도는 소혜의 볼을 부풀리는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백인검무의 자세는 보법을 기반으로 구성됐다. 무기를 휘두르고, 팔을 뻗는 자세를 제외하면 모두 발의 위치와 방향을 그렸을 뿐이다.
한 마디로 무무혁명을 책으로 보는 듯했다.
“지금 할까요?”
남천휘가 자신만만하게 나서자, 무사부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일견하기에도 상부에서 오늘 일어날 일에 대해서 지시를 받은 듯했다. 한데 갑자기 남천휘가 튀어나왔으니 당황스러웠으리라.
‘그건 당신 사정이고.’
남천휘는 후기지수들을 보며 자세를 바로 했다.
후기지수들의 시선이 꽂혀든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렬한 시선을 꼽자면 단연 초류혁이다. 그는 자세만 바로 했을 뿐 눈에서 불을 토해냈다. 자신이 돋보여야 할 순간을 빼앗겼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것도 네 사정이고.’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울렸다.
◎ 적대적 기운이 감지됐습니다.
- 적의와 살의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시 불굴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오호! 이것 봐라.
불굴은 곧 평정심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니 적의와 살의를 마주할수록 숙련도가 올라간다는 뜻이 아닌가.
S등급 특기의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기회였다.
남천휘는 노골적으로 초류혁을 바라봤다.
‘더 열 받아라.’
아니나다를까 초류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변에 사람만 없었다면 벌써 칼을 뽑고, 덤벼들었으리라.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피식 하는 입매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우리 자주 보자. 네 덕 좀 봐야겠어.’
무사부가 재촉했다.
“크흠!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돌아가게.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까.”
어른의 사정이란 참으로 씁쓸하구나.
안쓰럽지만, 이쪽도 사정이 있는 지라.
남천휘는 시야 상단의 막대를 살폈다.
이미 하얗게 물든 채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VIP 3등급의 핵심인 회회회판이 업데이트 됐다는 표시였다.
◎ 회회회판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주변을 물리세요.
-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곳을 추천합니다.
이것이 바로 남천휘가 손을 번쩍 들고 나선 까닭이다. 본래 그가 두각을 드러내고자 했던 시기는 명숙들 앞에서 백인검무를 펼칠 때였다. 그랬다면 갑작스런 신성의 등장으로 꽤 이목을 끌었으리라.
하나 회회회판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컸다.
어차피 용봉쟁투를 통해 얻어낼 건 ‘칠야도’와 ‘창월도’가 전부였다.
스릉-
남천휘가 쌍도를 뽑자, 예기치 못한 시선이 꽂혀들었다.
철면호협 공태령이 관심을 보인 게다.
강호의 무기는 십팔반 병기를 필두로 수백 종에 이르렀다. 그 중 쌍도는 익히기도 어렵고, 제대로 활용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렇기에 공태령은 자신처럼 쌍도를 펼쳐든 남천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했다.
‘신공부의 도법이 아무리 대단해도!’
비천무상도(飛天無常刀)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쇄애애애액!
남천휘의 도법은 유려했다.
빠르고, 현란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남천휘의 존재감이 후기지수들의 머릿속에 각인됐다. 직접 상대하지 않는 한 위력을 가늠하기란 불가능할 터였다. 하나 쌍도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모습만 봐도 범상치 않았다.
타탓!
남천휘가 몸을 띄웠다.
연무장에 내려서기까지 열두 번의 도영이 번뜩였다.
그리고 잠시 후 이백팔십 개의 자세를 끝낸 남천휘가 납도하는 것으로 시연을 끝냈다.
“어떠신가요?”
무사부는 눈을 끔뻑였다.
며칠 동안 비급의 자세를 숙지한 그로서도 흠잡을 곳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크흠, 잘했네. 따로 수련을 하거나, 후기지수들을 도와줘도 좋아.”
후기지수 중 몇몇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모두 삼정의 밑으로 들어가지 못한 변두리 방파의 제자들이다.
‘저 자도 제 세력을 만들려고 할 테니······.’
‘이 기회에 친분을 다져놓자.’
한데 남천휘의 행보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럼 소집이 있을 때까지 쉬다 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백인대를 떠나는 것이 아닌가.
황보장천은 그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혼자 날뛰는 놈이라면 신경 쓸 필요가 없지.’
남천휘는 처소로 돌아왔다.
곡부남가였다면 즉묵노주와 육포를 준비해놓고 여유롭게 회회회판의 위력을 즐겼으리라.
‘여기에도 있지!’
그는 손가락을 튕겨 술과 안자를 준비했다.
인벤토리만 있으면 어디서든 곡부남가다.
남천휘는 시야 좌측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좌측에는 상태창과 퀘스트를 비롯해 하위 목록에 대한 명령어가 나열되어 있다. 반대편에 지도와 현재 활성화된 특기가 자리한 것을 보면 확실히 복잡했다.
한데 상태창과 퀘스트 사이에 떡 하니 회회회판이라는 목록이 생성된 상태였다.
‘따로 나와 있을 정도면 엄청 대단한 걸 텐데······.’
회회회판(回回回版)이라는 이름만 보면 저잣거리의 야바위꾼들이 사용하는 돌림판을 연상케 했다.
‘일단 실행.’
◎ VIP 시스템 ‘회회회판’이 실행됩니다.
- 돌림판 실행을 위해서는 자수정이 필요합니다.
※ 현재 소유한 자수정은 5200개입니다.
- 돌림판 1회 비용은 자수정 ‘300’개입니다.
남천휘는 눈을 부릅떴다.
‘한 번에 삼백 개?’
한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지금까지 모은 자수정으로는 20번도 돌릴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 상세설명을 원하십니까?(Y/N)
어쩐지 자수정을 너무 퍼준다 싶었다.
이제 헛되이 자수정을 소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세 설명을 원하는 순간 재이의 알림이 이어졌다.
◎ VIP 3등급으로 특수, 희귀, 일반 보상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희박한 확률로 ‘영웅’ 물품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 10회 연속 실행을 선택할 시 한 번의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자수정 3000개로 11회 실행 가능)
- 금일부로 하루에 한 번 무료로 회회회판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잔여 시간 : 23:57:34)
‘야! 확률이라니? 그게 얼만데?’
재이는 대답을 회피하며 회회회판의 실행을 알렸다.
◎ 회회회판으로 감각이 전이됩니다.
그 순간 온 세상이 까맣게 물들었다.
‘야! 임마.’
답이 없다.
이제는 녀석의 행동 습성이 눈에 보였다.
성소에서 군사가 되었으니 여기서는 다른 것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그 때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시야 밖에서 들려온 발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이쪽으로 오는 듯했다.
탁탁탁탁.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야 밖에서 걸어 들어온 건 인형이다.
하나 어린 아이들이 헝겊에 짚을 넣어 꿰매 만든 평범한 인형이 아니었다.
‘저거 사람이야?’
머리와 몸뚱이의 비율이 똑같은 저것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인형치고는 그림을 그린 것처럼 이목구비가 선명했다.
머리카락은 한데 모아서 붉은 끈으로 묶었다.
흰 상의에 남색 하의를 입은 인형이 아장아장 거리며 시야 중앙까지 걸어왔다.
- 휴.
허허, 지금 한 숨을 쉰 거냐?
그 순간 인형이 남천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서워! 귀엽지만, 너무 무섭잖아!
‘이 빌어먹을 회회회판아.’
한데 인형이 눈을 깜빡이며 말을 건넸다.
- 계속해서 무언가를, 특별한 것을 찾고 있어.
경극이냐? 일인 경극인 거냐?
- 너는 어때? 너도 무언가를 찾고 있니?
남천휘는 한 숨을 흘렸다.
이쯤 되면 어울려주지 않는 한 경극이 평생 동안 이어질 듯했다.
‘그래, 찾고 있어.’
그 순간 까맣던 시야가 밝아졌다.
동시에 형형색색으로 칠해진 거대한 원형판이 나타났다. 돌림판의 중앙에서 뻗어 나온 선이 영역을 나눴다.
어느 곳은 넓고, 어느 곳은 좁다.
뻔하다.
좁은 곳에 걸리면 좋은 아이템을 주고, 넓은 곳에 걸리면 나쁜 아이템을 주겠지.
‘뭐야? 평범한 도박이잖아.’
한껏 치솟았던 기대감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런데 인형이 남천휘를 보며 방긋 웃으며 물었다.
- 찾아 줄게. 너의 이름은?
사용자 등록 같은 건가.
‘내 이름은 남천휘.’
남천휘가 이름을 말하자 시야 가운데 두 개의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11회 연속 3000〉 〈1회 300〉
‘일단 한 번만 해 볼까?’
그 순간 인형이 어디선가 활과 화살을 꺼냈다.
화살을 활시위에 걸더니 남천휘를 보며 헤죽 웃는 것이 아닌가.
- 천휘 친구. 회! 회! 회! 판! 큰 소리로 외쳐주세요.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남천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이제야 재이가 회회회판의 실행을 위해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곳을 추천한 까닭이 이해됐다. 한데 남천휘가 입을 닫고 있는 이상 인형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결국 남천휘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회회회판.’
그 순간 돌림판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했다.
그리고 인형이 활을 쐈다.
텅-
아!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될까.
돌림판이 느려질수록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남천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돌림판을 주시했다.
‘아······.’
돌림판이 완전히 멈추는 순간 인형이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 아! 천휘 친구. 숫돌 열 개가 나왔네요. 축하해요. 회회회판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남천휘의 서늘한 한 마디가 흘려 나왔다.
‘야! 너 재이지?’
대답 대신 다시 한 번 실행 여부를 묻는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남천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숫돌의 등급은 ‘희귀’였다.
일반이 아닌 것은 다행이지만, 자수정 270개의 보상으로 성에 찰 리 없지 않은가.
아니, 무엇보다 숫돌 같은 건 필요 없다고!
‘괜찮아. 어차피 처음이잖아.’
잠시 망설였다가 연속 실행을 선택했다.
특기 상재를 발휘하지 않더라도 열 번 값으로 열한 번을 돌리는 쪽이 이득일 터였다.
그 순간 인형이 어디선가 화살을 꺼냈다.
이번에는 열한 발이다.
‘뭐야? 한 번에 쏘는 거였냐?’
- 천휘 친구. 회! 회! 회! 판! 큰 소리로 외쳐주세요.
이 짓도 하다보니 느는구나.
회회회판을 읊조리는 순간 열한 발의 화살이 동시에 허공을 날았다.
타다다다다다다닥!
화살이 꽂힌 채 미친 듯이 회전하는 돌림판.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맞잡은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영웅, 영웅, 영웅, 영웅!’
하나 돌림판이 멈추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열한 발의 화살 모두가 넓은 곳에 꽂혀 있음을 말이다. 아니나다를까 인형이 열한 번의 알림을 쏟아내며 축하했다.
- 아! 천휘 친구. 회회회판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너무하잖아! 전부 쓰레기만 나왔어!’
그러자 인형이 타이르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 그것 또한 운명.
그렇게 돌림판이 몇 번이나 돌아갔다.
남천휘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재이의 알림을 귓등으로 흘렸다.
◎ 자수정 부족으로 회회회판이 해제됩니다.
남천휘는 처소의 창문을 열며 환기를 시켰다.
찬바람을 온 몸으로 마주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인벤토리의 자수정을 확인했다.
‘백 개 남았네.’
5200개였던 자수정이 바닥을 드러내는 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이래서 사람이 도박에 빠지면 패가망신한다는 말이 있는가 보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읊조렸다.
‘딱 한 번만 더 했으면 영웅 등급이 뜰 것 같았는데······.’
응? 이거 왠지 익숙한 광경이다.
근래에 비슷한 상황에서 혼잣말을 하지 않았던가.
남천휘는 그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이거 칼에 주문서 바를 때랑 똑같아!’
두 손을 내려다봤다.
어느새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혹시 나 도박에 잘 빠지는 성향인 건가?’
남천휘는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볼 일이 끝난 이상 다시 백인대로 돌아가려는 게다.
한데 그는 문을 여는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