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오늘밤 주인공은. (2)
사 위의 외모는 빛났다.
머리카락과 피부는 흑백의 대비가 명확했다.
그로 인해 이목구비의 또렷함은 배가됐다.
그 뿐인가?
허리께까지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상체와 하체를 절묘하게 나눴다.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 아랫배에 가져다 댄 상태였다. 물론 소매에 가려졌기에 모았다는 건 예상일뿐이다.
‘뭐가 됐든 상관없잖아?’
사 위의 맑은 낯빛은 녹빛 상의마저 선명하게 만들어줬다. 허리춤의 흰 요대와 담비의 털로 만든 배자까지 어느 것 하나 어우러지지 않는 것이 없다.
하나 아쉬운 점을 억지로 찾아내자면.
‘아! 흙탕물이 튀었네.’
땅은 늦은 오후에 내린 진눈개비로 인해 진흙탕이다. 그러니 그녀가 수상비나 초상비의 신위를 보이지 않는 한 물이 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터였다.
하나 점점이 튄 자국이 안타까웠다.
‘다시 보니까 밋밋한 녹의의 강조점처럼 보이네.’
아! 생각할수록 칭찬만 하게 된다.
아마 구십팔 위를 했던 소녀를 앉혀놓고 여인을 묘사하게 하면 최소한 삼십 계단은 순위가 상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여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큰 눈매가 웃는 순간 호선을 그렸다.
소혜의 개구리처럼 마냥 크기만 한 눈매와는 전통과 품격이 달랐다.
그래, 저게 바로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지.
이것이 사 위와 소혜의 눈높이다.
“사실은 그쪽이 더 사 위 같은 걸요?”
남천휘는 여인의 칭찬에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사 위였다면 소저는 일 위가 됐겠지요.”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소개연에서 검무(劍舞)를 췄다.
하나 단순히 검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느리고, 단순했다. 그러나 여인의 아름다운은 검무로 인해 극대화됐고, 관중은 홀린 것처럼 표를 던졌다.
삼정의 실무자들마저 그렇게 여기지 않았던가.
하나 남천휘는 달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재이가 다르게 만들었다.
그는 낮에 있었던 소개연을 떠올렸다.
당시 여인이 검무를 펼치는 순간 시스템이 발동했다.
◎ 비천무상도와 동일 계열의 검법을 발견했습니다.
◎ 특기 ‘불굴’, ‘신안’, ‘집중’이 발동합니다.
◎ 절예(絶藝)를 엿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특기 세 개가 동시에 발동하더라.
무엇보다 비천무상도와 동일 계열이라는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VR’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비천무상도는 분명 도가 계열의 도법일 터였다.
그녀의 검법 또한 도가 계열의 무공이리라.
어찌됐든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남천휘는 단순히 여인의 미색에 홀린 관중과 달리 시선을 집중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오감증폭제까지 사용하지 않았던가.
그 결과 지혜 수치가 50이나 올랐다.
또한 특기 ‘집중’의 레벨도 상승했다.
무엇보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비천무상도의 숙련도가 올랐을 정도였다.
백봉 연하연의 검법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30이 상승했다. 하나 남천휘는 그 때보다 성장했고, 여인의 검무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느렸다. 그러니 여인의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웃고 있다 해서 허술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순위는 상관없지요.”
여인이 배시시 웃으며 내뱉는 한 마디로 인해 마치 훈풍(薰風)이 부는 듯했다.
“동감입니다.”
하늘 아래 귀천(貴賤)이 어디 있을까.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가야 할 인간이 아니던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있기에 인(人)이라고 하더라.
어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
◎ 비유가 옳지 않습니다.
- 무지의 소치로 인해 지혜 수치가 1 하락합니다.
※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는 진 나라 때 난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이 농민을 부추길 때 언급한 말로······.
유익하고, 교육적인 한 마디가 심장을 후벼 팠다.
앞으로 재이를 문사부라고 불러야겠다.
‘는 개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산통 깨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남천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크흠, 곡부남가의 남천휘라고 합니다.”
발성 좋았어. 어투 좋았어.
십 점 만점에 십 점이다.
여인은 미소를 풀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아무리 강호인이라 해도 남녀가 유별했다.
특히 명가의 여인이라면 더더욱 몸가짐을 조심해야 할 터였다.
‘탈락할 때 탈락하더라도 통성명 정도는 괜찮잖아?’
남천휘의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여인은 귀밑머리를 넘기며 살짝 목례를 했다.
“제연평의 추천으로 참가한 천수련이라고 합니다. 아! 그리고 정말 잘 봤어요.”
아름다운 미소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천수련은 소매에서 손을 빼더니 자신의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변검술이요. 그처럼 신묘한 재주는 처음 봤어요. 소협 덕분에 오늘 안계를 넓혔네요.”
소매 속에서 드러난 그녀의 손은 빙기옥골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천수련은 희고, 고운 손을 흔들면서도 미소를 유지했다.
남천휘가 천수련의 고혹적인 몸짓과 손짓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였다.
◎ 특기 ‘불굴’이 발동합니다.
- 심리 상태가 급변하는 것에 주의하세요.
어라? 이것 봐라.
남천휘는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불굴이 발동됐다.
그 말은 곧 평정심이 흔들린다는 뜻이다.
‘단순히 예뻐서?’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리라.
하나 그렇지 않을 경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그런데 백인대에서 뭘 발견하셨던 건가요?”
남천휘는 자신이 발견한 걸 순순히 털어놨다.
어차피 천수련의 무위라면 자신이 발견할 걸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으리라. 그러니 먼저 패를 뒤집어 빚을 지우는 편이 나았다.
- 상대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라.
- 빚을 진 자는 제안을 거절 할 수 없다.
- 그러니 빚부터 지워라.
막 총관이 술주정을 부릴 때마다 부르짖던 상재의 기본이었다.
“아! 맙소사! 설마 그럴 리가요.”
천수련은 탄식했다.
그녀가 남천휘를 불신한 것은 아니다.
그저 진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리라.
그녀는 가볍게 발을 굴러 백인대 위에 올랐다.
타탓.
옷자락이 살랑거리지 않았다면 원래부터 백인대 위에 있었던 것처럼 신묘한 보법이다.
“여기부터인가요?”
남천휘는 백인대의 중앙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인대 위를 수놓은 수십 개의 선은 한 마디로 백인검무를 위한 동선(動線)이다.
“이런 식으로 후기지수들을 경쟁하고, 대립하게 만들다니. 옳지 않아요.”
천수련은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한 숨을 흘렸다.
그 모습이 참으로 고혹적이다.
하나 처음만큼 평정심을 흔들지 못했다.
“남 소협은 어찌 하실 건가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용봉쟁투의 불합리함을 타파하기 위해 한 몸 불사르고 싶어졌으리라.
하나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한테 손해는 아니네요.”
“아······.”
“저는 우승할 겁니다.”
천수련은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어색한 웃음으로 한 마디로 건넸다.
“좋은 결과 있으시기를 기원할게요.”
“천 소저도요.”
남천휘는 물색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천수련은 목례를 한 후 몸을 돌렸다. 어째 돌아가는 발걸음이 조금 빨라진 듯했다.
“후.”
남천휘는 시리도록 내리꽂히는 달빛을 한 몸에 받으며 불꽃같은 한 숨을 내쉬었다.
“호감도가 많이 떨어졌겠지? 미연시가 발동하지 않았을 만 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 중요한 건 칠야와 창월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니? 재이야.
◎ 천수련의 호감도는 하락하지 않았습니다.
‘엇, 올랐다고?’
하나 오르지도 않았다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야? 계속 웃었잖아. 손짓도 그렇고. 나한테 관심 있어 보이던데?”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 천수련은 미연시 모드의 적용 대상입니다.
- 대상자에 대한 천수련의 호감도는 처음부터 변동이 없었습니다. 지속적인 만남과 배려하는 대화를 통해 호감도를 끌어올리세요.
※ 현재 호감도는 30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호감도 30이란 수치는 꽤 미묘했다. 상인과 손님 사이에서 평범하게 발견되는 수치가 아니던가.
덤을 하나 얹어주면 31 정도는 될 수 있겠지.
“그럼 나한테 눈웃음 친 건?”
그러자 재이가 다시 한 번 심장을 후벼 팠다.
◎ 얼굴 근육의 변화만으로는 호감도가 상승하지 않습니다.
*
날이 밝자마자 후기지수들은 백인대에 모였다.
용봉쟁투 서열 팔십오 위인 혜소는 하인이 건네준 무복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황의(黃衣)의 등 부분에 대문짝만하게 글자를 새겨놨다.
정(丁).
후기지수들을 둘러보니 육십일 위 이하로는 모두 같은 무복을 지급받은 상태였다.
“허허.”
혜소는 삼정의 후계자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일견하기에도 값비싼 비단으로 지은 무복을 지급받았다. 심지어 등에 새겨놓은 갑(甲)은 금빛 수실을 사용했다.
이십일 위부터 사십 위의 복색도 나쁘지 않았다.
청의를 걸친 그들의 등에 을(乙)이 새겨졌고, 사십일 위부터 육십 위까지는 녹의에 병(丙)을 수놓았다.
한데 후기지수들의 분위기가 묘했다.
을급의 후기지수는 갑급을 부러워했고, 정이나 병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마치 하루아침에 후기지수들 사이에 신분이 생긴 듯했다.
혜소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을 만드는 신공부나, 좋다고 시시덕거리는 후기지수들까지. 어느 것 하나 좋아 보이지 않아.’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날이 청명했다.
하나 인세는 화려할 뿐 오욕으로 인해 진창을 구르는 것처럼 여겨졌다.
‘동생만 찾으면 주인 없는 산을 찾아봐야겠어.’
초목근피로 연명하더라도 사람 없는 세상이 더 편안할 듯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남천휘를 바라봤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힌 채 신공부가 있는 방향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형님도 화가 나셨구나.’
그가 보는 남천휘는 전형적인 영웅의 재목(材木)이다. 옛 일을 들어보면 협객의 기상이 가득했고, 부유한 사람답지 않게 호의와 배려에 익숙했다. 저런 사람이야 말로 용봉쟁투의 우승자로 어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우리 형.’
자랑스러웠다.
남천휘는 혜소의 뜨거운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집중했다.
‘천! 수! 련!’
순진한 청춘의 열정을 희롱하다니.
불현 듯 맹목적이던 연하연의 다부진 눈빛이 뇌리를 스쳤다.
이래서 조강지처가 좋다는 말이 있는가 싶다.
‘건강하지?’
봉황곡의 일이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날 찾아올 테니.’
무사부가 주변을 살피더니 외쳤다.
“무복을 걸쳤으면 각 급별로 집합하라.”
남천휘와 혜소는 눈인사를 주고받은 후 자신이 있어야 할 무리로 향했다.
갑 급이 앞 열이고, 정 급은 후미였다.
무사부는 하인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그러자 그들은 방금 엮은 듯한 새 책을 후기지수들에게 나눠줬다.
“백인검무의 형이 담긴 비급이다. 각 급에 따라 외워야 할 자세가 다르다. 지금 바로 확인하도록.”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갑 급의 경우 검무의 시작부터 끝까지 백인대 중앙에서 움직여야 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외워야 할 자세는 무려 이백팔십 개에 이르렀다.
“갑 급에 오른 후기지수라면 외우기에 무리는 없으리라. 명심하도록! 포기는 없다. 부족하다면 부족한대로 무대에 올라야 해! 너희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진이다! 그 후에 평가를 하겠다. 평가에 따라 등급을 재조정할 수도 있으니 열과 성을 다해 수련하도록 하라. 알겠는가?”
갑 급의 후기지수들은 어려울 것 없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 대다수는 이미 비급을 외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반면 하위 등급으로 갈수록 울상을 짓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들이 익혀야 할 자세는 백여 개에 불과했지만, 한 시진 안에 숙지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향후 진행 과정을 간략하게 알려주마. 이틀 동안 자세를 집중 수련하고, 삼일 째 되는 날부터 등급 별로 동선을 맞출 것이다. 그리고 닷새가 되는 날 명숙들 앞에서 단체 검무를 시연한다. 자!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다. 모두 시작하라!”
후기지수들은 서책에 얼굴을 파묻을 것처럼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서열 이 위인 황보장천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황보세가의 특성 상 몸을 쓰는 것을 즐겨하던 그였다. 그렇기에 한 번 쓰고 버릴 검무의 대형에 집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집안의 힘을 통해 비급을 숙지해놓은 상태가 아니던가.
‘당장 일어나서 권법 수련이나 하러 가고 싶지만······.’
그는 고개를 슬쩍 돌려 초류혁을 바라봤다.
황보세가의 실무자인 ‘황’이 말하길 이번 백인검무는 초류혁을 위한 무대라 했다. 그리고 다음 관문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 위로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금은 초류혁이 멋들어지게 일등으로 떠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일각 후 일어난다고 했지.’
그는 입맛을 다시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약식으로나마 권장법을 수련하려는 게다.
‘지루하군.’
그렇게 일각 쯤 보낸 듯싶다.
때마침 초류혁이 책을 덮는 것이 아닌가.
그는 구겨진 무복을 매만졌다.
일등으로 떠날 때 최대한 멋있게 보이기 위함이다.
‘병신 같은 놈이 허세를 부리기는.’
황보장천도 책을 덮었다.
초류혁이 떠나면 곧바로 따라나설 셈이다.
한데 그 순간 예기치 못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다 외웠습니다.”
후기지수 구십팔 명의 시선이 집중됐다.
남천휘는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가도 되지요?”
그 때 후기지수 중 누군가 박수를 치며 외쳤다.
“역시! 초 소협입니다. 벌써 다 외우셨다니······. 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