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오늘밤 주인공은. (1)
47, 오늘밤 주인공은.
용봉쟁투의 순위는 오롯이 명숙과 관중에 의해 결정된다. 삼정에서 초빙한 이백여 명의 명숙은 일인당 다섯 표의 가치를 지녔다. 천여 명의 관중은 각기 한 표를 행사했다.
그러니 총투표 수는 이천이다.
한데 한 사람 당 마음에 들거나, 응원하고 싶은 후기지수를 다섯 명까지 적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결국 후기지수들은 일만 표를 인기에 따라 나눠 가졌다.
그 결과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다.
“일 위는 신공부로군요.”
신풍수사를 비롯한 실무진은 대자보를 바라봤다.
일 위부터 구십팔 위까지의 순위가 적혀 있었다.
황보세가의 ‘황’이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공부에서 개최했으니 그럴 법도 하지요.”
그 말처럼 소개연을 통해 결정된 일 위는 철면호협 공태량이다. 그리고 이 위는 권무악 황보장천, 삼 위는 초류혁이 차지했다.
실무자들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순위를 살폈다.
어찌됐든 저마다 기억에 남거나, 응원했던 후기지수가 있지 않던가. 다만 삼정의 눈치를 보느라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남몰래 속으로 자신의 선택과 관중의 선택을 비교했다.
“생각지도 못한 후기지수들이 많군요.”
청도문의 ‘흑’은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신공부의 ‘공’이 흑을 다독이듯 말했다.
“그래도 점찍어줬던 우리 쪽 후기지수들의 순위는 높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고요.”
흑이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다.
신풍수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더 공정해보이지 않소이까?”
실무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정의 무인들은 투표에서 철저하게 배제됐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함이다.
관중은 그런 삼정의 결정을 반겼고, 응원했다.
하나 실상은 달랐다.
어차피 명숙을 초빙한 건 삼정이고, 관중들은 삼정의 땅에 사는 사람들이지 않던가.
눈치껏 알아서 삼정의 후계자를 찍었을 게다.
그 결과가 일위부터 삼위까지의 순위였다.
다만 다섯 명을 뽑을 수 있으니 한두 명 정도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기지수를 선택했다.
남천휘가 팔 위까지 오를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
신풍수사는 섭선을 살랑이며 말했다.
“여러분.”
삼정의 실무자들이 시선을 모았다.
“윗분들은 용봉쟁투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팔 위와 십 위, 십육 위에 오른 후기지수를 포섭하세요. 세 명이니 한곳씩 나눠가지면 되겠군요. 그 아래 순위는 조금 더 살펴본 후 결정하도록 합시다. 어찌됐든 능력 있는 후기지수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사 위는 어쩌시겠습니까?”
신풍수사는 사 위에 적힌 세 글자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제연평의 여아가 이처럼 대단할 줄은 몰랐어요. 아니, 이처럼 대단하게 변할 줄 몰랐다고 할까요. 참으로 어여쁘게 성장했더군요.”
“크흠, 미모로만 따지자면 발군이더이다. 그러니 별 시답지 않은 재주로 사 위까지 차지한 것 아닙니까?”
“확실히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 포섭할 수 있을까요? 제연평에서 보낸 계집이잖습니까.”
실무자의 말에 신풍수사는 검지를 세웠다.
“쉿, 여인의 과거는 묻지 않는 법입니다. 태량과 안면이 있으니 그 쪽을 통해 줄을 대겠소. 여러분은 백인검무에 집중해주세요. 소개연에 이어 백인검무까지 성황리에 끝낸다면 산동강호는 용봉쟁투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될 겁니다.”
신풍수사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삼정의 실무자는 서로를 마주보며 표정을 굳혔다.
신풍수사가 별다른 질책을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어찌하겠소?”
황보세가의 ‘황’은 저돌적이다.
그렇기에 계획을 세우는 것에 서툴렀다.
신공부의 ‘공’은 판을 잘 짠다.
“삼정의 후계자를 최상단에 올렸습니다. 소기의 성과는 이룬 셈이지요. 몇몇 방파가 불만을 드러내겠지만, 이제 시작이잖소. 관문이 이어질수록 후기지수들의 서열이 정해질 거요. 그러니 일단은 다독여줍시다. 어차피 용봉쟁투는 계획대로 진행될 테니까.”
청도문의 ‘흑’은 협조적인 성격이 아니다.
“신공부와 황보세가는 만족스럽겠지. 하나 청도문은 아니외다. 우리 쪽 방파 중 삼십 위 밖으로 밀려난 게 셋이요. 삼정이 함께 흥하자고 시작한 용봉쟁투가 아닙니까? 그러니 백인검무는 청도문의 초 소협을 중심으로 진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명숙들에게 넌지시 언질을 합시다.”
그들이 이처럼 여유로운 까닭은 어떤 변수가 나타나도 최소한의 득표를 자신했기 때문이다.
흑은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 보니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흐르더이다.”
“하하! 재자가인이 한 자리에 모였잖소. 도홧빛 분위기 정도는 이해해줍시다.”
신공부의 공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라도 용봉쟁투를 즐기게 합시다. 그래야 향후 탈락하더라도 용봉쟁투의 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지 않겠소이까?”
몇 마디의 잡담이 오갔다.
“그럼 이만.”
세 사람은 어딘가 찜찜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흥! 끝까지 남천휘에 대한 논의는 없군.’
공의 속마음이다.
‘설마 나만 못 알아본 건 아니겠지? 에잉! 고작 변검술 따위를 신경 써야 하다니. 그깟 잔재주를 파헤쳐서 무엇 하나? 격 떨어지게.’
황의 불편한 속내였다.
‘만약 그런 재주로 암기를 던진다면? 남천휘의 주공은 도법이라 했지만, 신공부가 넘겨준 자료를 믿을 수는 없지. 뭐가 됐든 놈은 청도문의 손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야.’
흑의 자부심이었다.
“하하하! 그럼 백인검무 때 봅시다.”
“이렇게 된 이상 백일인 검무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세 명이 자진 하차하지 않았소이까? 그냥 백인검무라 합시다.”
시답지 않은 인사를 끝으로 세 사람은 처소로 돌아갔다. 그들이 다시 모일 때는 백인검무의 성공을 자축하는 자리가 될 터였다.
*
남천휘는 팔 위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쯧, 기분 묘하네.’
하지만 그것은 비단 그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대자보 앞에 모인 후기지수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다. 좋아서 날뛰는 자도 있었고, 주변 눈치를 살피며 애써 감정을 억누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인상을 쓰며 욕을 했고, 인상이 순한 소년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어, 저 여자애는 운다.’
여아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어깨를 들썩였다.
뭐였더라?
아! 시문에 능하다며 시를 읊었던 여자애다.
제아무리 용봉쟁투가 다양한 기재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대부분의 후기지수는 무공을 익혔다. 그러니 무공이 아닌 쪽으로 뽑힌 후기지수들의 순위는 하위권이다.
이대로라면 다음 관문에서 탈락이 확정되리라.
‘이제 저 녀석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챘겠지?’
이곳에 모인 용봉은 제각기 한 지역, 또는 한 동네에서 알아주는 방파의 제자가 아닌가. 그러니 양민의 시선쯤은 개의치 않고 자랐을 터였다. 혹여 성질이 더러운 연놈은 양민을 괴롭혔을 수도 있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는 관중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무지렁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니.’
‘자존심 상하네. 그냥 돌아가 버릴까?’
이것은 가장 철없는 자들의 속마음이다.
하나 대부분의 후기지수들은 용봉쟁투의 잔혹함을 알아버렸다.
용봉쟁투는 공정하다 했다.
일견하기에 그런 듯하다.
하나 기회가 주어질 뿐 애초에 출발선이 달랐다.
삼정과 그들의 속한 후기지수는 이미 소개연을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았던가.
그 결과가 순위였다.
그리고 저 순위를 바꾸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리라.
‘저들을 이기는 건 불가능해.’
‘쳇! 이미 짜놓은 판이었던가.’
‘기대를 한 내가 등신이지. 이제 어쩐다?’
대부분의 후기지수가 이 단계에 머물렀다.
하나 몇몇 특출한 자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 그리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을 찾아냈다.
‘이건 기회다 삼정과 삼정의 후계자들에게 점수를 딸 수 있는 기회야!’
‘차라리 저들과 친분을 다져놓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정답이야.’
삼정은 다음 대에도 산동성을 쥐락펴락 할 셈이다.
그 첫 걸음이 후계자의 소개였다.
용봉쟁투는 그들이 강호에 첫 선을 보이는 자리였던 것이다. 중소방파의 후기지수들은 그들을 돋보이게 만들 장식에 불과했다.
몇몇 후기지수들은 장식으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당장 삼정의 후계자가 머무는 처소 주변을 배회했다.
유백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누구냐?”
날 선 물음에 유백천은 눈을 끔뻑였다.
“일도방의 유백천이야. 삼십삼 위지. 초 소협은 안에 계신가? 소개연에서 삼위하신 걸 축하드리고 싶은데 말이야.”
하나 문을 막아선 후기지수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유백천으로서는 생전 처음 당해보는 수모였다. 일도방의 영역에서 그는 왕처럼 지냈다. 아비의 위세를 등에 업고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젠장! 저 놈은 십팔 위를 한 모인적이니 뭐라 할 수도 없고······.“
게다가 모인적은 초류혁의 친우로 유명했다.
“돌아가. 류혁은 아무나 만나지 않아.”
유백천은 미간을 좁혔다.
“나 삼십삼 위야.”
백 명 중 삼십삼 위면 상위권이다.
하나 모인적은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저었다.
“청도문과 연을 맺고 싶으면 이십칠 위인 적순태를 찾아가라. 그가 을급을 관리할 거야.”
유백천은 인상을 썼다.
“을 급이라니?”
“모르는가? 훗, 삼십삼 위면 모를 만도 하겠네. 일 위부터 이십 위까지는 갑급이다. 이십일 위부터 사십 위까지는 을급이고. 그렇게 갑을병정의 급이 정해졌으니 돌아가서 네게 어울릴 만한 녀석들과 놀아.”
모인적의 축객령에 유백천은 수치심을 금치 못했다.
하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모인적을 보며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건넸다.
“네가 보냈다고 해도 될까?”
모인적의 이름을 팔고, 친분을 다지고 싶다는 의미였다.
유백천은 모인적이 고개를 끄덕이자, 희희낙락하여 자리를 떴다. 이제 그는 을급에 속한 채 자신보다 낮은 순위의 후기지수들에게 위세를 부릴 것이 분명했다.
모인적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읊조렸다.
“일도방 유백천, 삼십삼 위.”
그러자 문 안쪽에서 짜증 섞인 한 마디가 들려왔다.
“여섯 명인가? 생각보다 적은 걸. 신공부와 황보세가 쪽은 어때?”
“애들을 보내놨어. 삼경 전에 움직이는 놈들을 파악할 거야. 걱정하지 마. 아직 상황파악을 못하는 놈들이 많아서 그래. 어수룩한 놈들은 많을수록 좋잖아?”
그러자 내부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여전히 음산하기만 했다.
“팔 위한 그 새끼, 내 밑에 둬야 해. 그 놈한테도 사람을 붙여. 지켜봐야겠어.”
후기지수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재밌는 건 남천휘의 처소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후기지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형님은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되셨군요. 아무래도 갑급이기 때문일까요?”
혜소의 순위는 정급(丁級)으로 팔십오 위였다.
하나 그는 용봉쟁투에 참가한 것만으로 이미 소기의 성과를 이뤘다. 그렇기에 순위에 상관없이 용봉쟁투를 즐겼다.
반면 남천휘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팔 위라는 성적으로 인한 희비는 잠시였다.
어차피 백파도 남추의 쌍도를 얻기 위해 우승을 결심하지 않았던가.
‘이제 첫 관문을 넘어선 거니까.’
오히려 다음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백인검무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다.
왕대만의 정보에 의하면 백인검무는 한 마디로 대규모 검진(劍陣)이다.
백 명이 동시에 펼치는 검진.
저마다 기재라 불렸던 후기지수들이 일제히 진법을 펼친다면 그만한 장관이 없으리라.
‘생각처럼만 된다면 말이지.’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겹쳐지지 않는 법이다.
일단 후기지수의 숫자는 구십팔 명이 전부였다.
또한 저마다 사용하는 병장기가 달랐고, 심지어 학자나 가무에 재주가 있는 자는 무공 자체를 익힌 적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제아무리 쉬운 검진이라고 해도 하루 이틀에 숙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분명 삼정의 후계자를 비롯해 소속 방파의 후기지수들은 어느 정도 검진을 숙지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검진은 일사불란하게 펼치지 않으면 하지 않느니만 못할 터였다. 불협화음은 재능의 차이가 아니라 공정성을 의심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용봉쟁투의 오점으로 남겠지.
‘어떻게 뒤통수를 쳐야 잘 쳤다고 소문이 날까?’
남천휘는 처소를 나섰다.
일단 백인검무가 펼쳐질 백인대를 살펴봐야 할 듯했다. 다행히 후기지수들은 교류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저들을 보고 있자니 백인백색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개중에는 여인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자신을 피력하는 자도 있었다. 한데 놀라운 건 여인 또한 그렇게 접근하는 사내를 마다하지 않았다.
‘용봉쟁투는 개뿔, 용봉교접이겠군.’
남천휘는 혀를 차며 백인대로 향했다.
그는 백인대에 오르는 순간 미간을 좁혔다.
먼지 없이 깨끗하던 백인대가 아니던가.
한데 누군가 낙서를 한 것처럼 백인대 위는 난잡하게 선이 그어진 상태였다.
‘설마 이건?’
남천휘는 선을 따라 발을 내딛었다.
걸음이 늘어날수록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몇 바퀴나 백인대를 맴돈 후에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 이런 거였냐?”
“그게 뭔지 저도 알 수 있을까요?”
남천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던 백인대의 입구에 한 여인이 존재했다.
달빛을 등진 모습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팔 위지요?”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쪽은 사 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