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지금 너는 나를 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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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얼마를 쏟아 부었을까?’
용봉평의 수많은 건물 중 가장 화려한 곳은 바로 백인대였다. 백인대(百人臺)는 백 명의 후기지수가 올라가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넓었다.
‘저들은 또 어떻게 불러 모았을까?’
무대 주변에는 천여 명의 관중으로 가득했다.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기대감으로 가득한 표정만 보면 저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것이 분명했다. 이로서 신공부가 용봉쟁투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명분을 알 수 있었다.
공정성.
그로 인해 삼정의 후계자는 고결함과 청렴함을 겸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삼정을 물려받고 산동 강호를 지배하겠지.
“시끄럽네.”
남천휘는 백인대를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이것이! 오십칠 호! 우용진의 검이다! 강호의 모든 폐단을 베고, 악적을 말살하리라! 누구든 오라! 내 불타는 검이 용납하지 않는다!”
혜소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러다 결국 입을 막고 소리 없이 웃기 시작했다.
“쿠쿡. 저 소협은 만담에 재주가 있군요.”
아니야. 쟤는 영웅 흉내를 내는 거라고.
웃기려는 게 아니야.
진지하다고!
‘웃긴 건 사실이지만.’
남천휘는 우용진을 보며 한 숨을 흘렸다.
후기지수 오십칠 호인 우용진은 버리는 패다.
백인대에 올라서 되도 않는 무용을 뽐내는 것만 봐도 확실했다.
‘너도 참 안쓰럽구나.’
저 자라고 해서 꼴사나운 걸 모를까.
하나 자신을 이곳까지 밀어올린 사문을 위해서 수치심을 참고 떠드는 것이리라.
반면 이미 소개연의 방식을 알고 있던 후기지수들의 장기는 달랐다. 온갖 잡기와 명쾌한 언변을 자랑하며 자신을 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너는 뭘 할 거야?”
남천휘는 혜소에게 물었다.
지난 밤 도둑질에 실패한 이후 처소로 돌아왔을 때 헤소가 맞이했다. 기왕 보물을 놓쳤으니 혜소라도 잡을 생각에 긴 대화를 나눴다.
그 결과 서로를 편히 대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나이는 남천휘가 많았다.
하여 혜소는 하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제가 산천을 떠돌다가 우연히 구도자에게 식욕을 억제하는 도정무를 배웠지요.”
남천휘는 혜소의 설명을 듣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도정무라면 도가의 체조가 아닌가.
중이 되겠다고 승복을 걸쳤으면서 장기는 도가의 체조를 하겠단다.
‘그 놈의 우연히는 끊이지를 않는군.’
“도정무라면 최소한 저 후보의 만담보다는 인기를 끌지 않을까요?”
아니야. 그리고 만담도 아니야.
“형님은 준비를 하셨습니까?”
남천휘는 가슴을 두드렸다.
옷 안에 아무 것도 없지만, 든든했다.
“우승한다고 했잖아. 기대해라.”
나는 믿어. 재이만 믿어!
◎ 매크로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 1차 설정 아이템은 1번부터 30번까지입니다.
- 2차 설정 아이템은 31번입니다.
‘좋았어. 이제는 느긋하게 구경이나 하자.’
그 때 엄청난 체구의 사내가 무대에 올랐다.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용봉쟁투는 후기지수 간의 무대였다.
한데 사내의 얼굴은 일견하기에도 이립을 훌쩍 넘긴 듯하지 않은가.
심지어 수염까지 숭숭 난 것이 산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조카를 응원하러 왔나?’
그 때 혜소가 천인공노할 한 마디를 내뱉었다.
“헉! 저 사람이 열여섯이랍니다. 맙소사, 아미타불이로군요.”
군중 역시 사내를 보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사내는 오만한 표정으로 관중을 바라보며 외쳤다.
“십육 호! 검배표국의 오분이다! 표물을 운행할 때면 산적이랍시고 튀어나와서 통행료를 내놓으라고 하는데! 경고합니다. 산적은 뚝배기 깹니다. 그리고 의뢰 비용을 한 푼이라도 깎으려고 핑계를 대거나,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진짜 뚝배기 부십니다. 전해주세요! 참고로 뚝배기는 머리입니다.”
남천휘를 비롯한 후기지수들을 눈을 끔뻑이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저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관중 역시 오분의 패기 가득한 외침에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한데 오분이 이내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러니 검배표국을 많이 애용해주십시오! 신속! 정확! 검배표국입니다.”
탈락할 걸 예상하고 표국을 홍보하려는 걸까?
남천휘는 혀를 찼다.
저래서야 오던 손님도 발길을 돌릴 터였다.
“저 사람, 진심으로 저러는 걸까요?”
“그냥 미친놈이야. 신경 끄자.”
“예.”
그렇게 오분은 보무도 당당하게 무대를 내려갔다.
하나 무대를 내려가는 순간 무인들에게 이끌려 장내에서 사라졌다.
“하하하, 젊음이란 예측할 수 없기에 젊음이라지요. 크흠! 다음은 사십육 호요!”
남천휘는 무대에서 들려온 외침에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신공부에서 발급한 번호표가 꿰매져 있다.
47번.
백 명으로 따지자면 나름 앞 순위였다.
하나 임의로 배포한 번호표였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무엇보다 단계를 지날 때마다 순위에 따라 번호표가 배정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소개연이 끝난 후 배정받을 번호가 진정한 순위가 되리라.
“사십육 호! 벽개방의 양인수라고 합니다! 본 방의 보법은 산동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자부합니다. 직접 보시지요!”
양인수라는 녀석은 일견하기에도 원숭이를 방불케 하는 몸놀림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의자와 궤짝을 비롯한 구조물을 배치해놓고 신명나게 신법을 펼쳤다.
“와아아아!”
확실히 관중은 말보다 행동에 반응했다.
크고, 화려할수록 환호성이 컸다.
마침내 청도문의 소문주인 초류혁이 등장했다,
그는 첫눈처럼 새하얀 백의를 걸쳤다.
잠시 후 온 몸을 흑의로 감싼 무인들이 등장했다.
이내 한 명과 열 명의 싸움이 펼쳐졌다.
비록 합을 맞춘 시연(試演)에 불과했지만, 실전을 방불케 했다. 심지어 몇몇은 칼에 맞고 피를 흘렸을 정도였다.
‘하, 저 새끼 보게.’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초류혁의 쾌검은 대단했다.
쾌검의 달인은 조상보다 훨씬 빨랐다.
아마 더 신묘한 재주를 지녔음에도 관중의 눈높이에 맞춰서 조정을 했을 터였다. 그리고 십여 명의 무인을 다치지 않게 제압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나 시각적 효과를 위해 일부러 상처를 입힌 게다.
그것이 남천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징글징글한 놈들이네.’
그 후에도 꼴불견이 이어졌다.
잘 해도 꼴불견, 못 해도 꼴불견.
어찌된 것이 순번도 번갈아이어졌기에 잘하는 녀석들은 관중들에게 더욱더 쉽게 각인됐다.
그리고 황보세가의 소가주인 권무악 황보장천이 나섰다. 그는 두터운 석비를 다섯 개나 연이어 격파했다. 그리고 권기를 흩뿌리며 철판에 깊숙한 자국을 남겼다.
관중의 환호성이 극에 달했다.
혜소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남천휘를 바라봤다.
이제 남천휘가 나설 차례였다.
“다녀올게.”
근장(斳長)이라는 자가 후기지수를 소개했다.
그는 신공부에서 초빙한 변사로 보통 경극에서 무대의 배경이나 사건의 흐름을 설명하는 사람이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장내의 분위기가 오르락내리락했을 정도였다.
하나 그 역시 신공부의 입김이 닿았을 것이다.
능수능란하게 진행을 하면서도 ‘버리는 패’가 등장하면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었다.
“곡부남가의 삼남! 남천휘!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부잣집 셋째 아들입니다! 도법과 신법이 수준급이군요. 과연 수려한 용모만큼이나 훌륭한 무위를 지녔을지 기대가 됩니다!”
아니나다를까 관중은 남천휘에게 멋진 모습을 기대하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네.’
기대치가 낮을 때 예기치 못한 재주를 선보인다면 만족감은 배가 되리라.
그가 무대에 오르는 순간 알림이 울렸다.
띠링-
퀘스트가 발동했다.
《첫 인상이 끝 인상.》
- 소개연에서 10위 안에 진입하세요.
- 7할 이상의 관중에게 주목받으세요.
- 5할 이상의 관중에게 탄성을 끌어내세요.
보상은 자수정 500개와 평판 증가였다.
또한 새로운 호칭이 등록된단다.
‘좋았어! 할만하다.’
남천휘는 지난 밤 용봉쟁투를 보조하는 하인들에게 몇 가지 물품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인벤토리 안에 잠들어 있었다.
그가 단상 위에 오르자, 관중의 시선이 집중됐다.
하지만 유명 무가의 후기지수들에 비하면 주목도가 낮았다.
“남천휘라고 합니다. 우승하러 왔지요.”
몇몇은 관심을 보였고, 대부분은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 한 번 재주를 보여 보라는 듯 얕잡아 보는 시선이다.
남천휘는 품이 넓은 상의에 손을 넣었다.
그가 꺼낸 건 은자였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인 은자가 햇빛을 밭고 번쩍거리자, 관중의 시선이 집중됐다.
“돈입니다.”
남천휘는 오른손으로 상의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면이잖아.”
“탈은 뭐하려고?”
남천휘는 빙긋 웃은 후 가면을 썼다.
여전히 오른손은 가면의 아랫부분을 잡은 상태였다.
그 순간 왼손에 있던 은자가 관중석을 향해 날아갔다.
노인이 용케 은자를 낚아챘다.
그는 은자를 깨물더니 헤죽 웃으며 진짜임을 밝혔다. 하나 사람들은 노인과 은자가 아닌 남천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새 남천휘는 쥐 가면이 아니라 소 가면을 쓰고 있었다.
“변검?”
“한 장만 썼다가 바뀐 거잖아. 저게 변검이야?”
변검(變臉)은 천극(川劇)의 한 부분으로 관객이 눈치 채지 못하게 가면을 바꾸는 기예였다. 하나 보통 수십 장의 가면을 겹쳐 쓴 후 눈치채지 못하게 한 장씩 벗는 것으로 기예를 펼치지 않던가.
“자네 봤는가?”
“글쎄다. 은자에 정신이 팔려서······.”
남천휘는 관중의 소란을 즐기듯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엄지와 검지 사이에 은자가 끼워졌다.
팅-
"오! 어디서 나타난 거지?"
"저 후기지수는 좀 다른 듯하군."
"마음에 드는 걸? 특별한 재주를 지녔어."
재차 은자가 허공을 날았다.
그 와중에도 은자를 받기 위해 용을 쓰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역시 돈이 시선 끌기에는 최고지.’
그리고 남천휘의 얼굴을 덮은 가면은 우면(牛面)에서 인면(寅面)으로 바뀌었다.
그 순간 알림이 울렸다.
◎ 7할 이상의 관중에게 주목받았습니다.
- 퀘스트 1차 조건이 달성됐습니다.
이거야 말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남천휘는 단상을 내리찍으며 손가락을 폈다.
쿵 소리와 함께 어느새 네 개의 은자가 손가락 사이에 자리했다. 그리고 호랑이 대신 토끼 가면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이내 네 개의 은자가 허공을 날았다.
묘면(卯面)은 진면(辰面)으로 바뀌었고, 은자가 번쩍일 때마다 온갖 가면이 등장했다.
십이지신에 대한 가면을 끝으로 신화에나 등장하는 온갖 형상이 이어졌다. 제천대성과 저팔계를 시작으로 관운장과 악비처럼 영웅의 가면이 등장했다.
“대단하다!”
“빨라!”
"어째서 저런 후기지수가 알려지지 않은 거야?"
관중석은 아예 난리가 났다.
단순히 무위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신묘한 재주가 아닌가. 심지어 각자 응원하는 후기지수가 있던 사람들마저 남천휘의 이름을 연호했다.
‘좋아!
남천휘는 수백 명이 내지르는 환호성에 퀘스트 2차 조건이 달성되는 알림마저 귓등으로 흘렸다.
그만큼 사기가 고양된 것이다.
‘이십칠!’
얼굴을 감싸고 있던 가면이 인벤토리로 되돌아갔다.
왼 손에 쥐고 있던 십여 개의 은자가 재차 관중석을 향해 비산했다.
곧이어 이십팔이라 외치는 순간 스물여덟 번째로 매크로가 되어 있던 가면이 손바닥에 잡혔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얼굴을 감쌌다.
◎ 1차 설정의 잔여 아이템은 2 개입니다.
이제 남은 가면은 두 개다.
그 말은 곧 남천휘가 서른 번의 변검을 성공하기 직전이라는 뜻이다. 상석에 앉아 있던 명숙들은 물론이고, 삼정에서 파견 나온 고수들조차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로는 성에 안차지!
이 몸은 우승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거든.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남천휘는 서른 개의 가면을 쓰는 순간 나직이 읊조렸다.
‘삼십일!’
그 순간 상의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둘기가 쏟아져 나오듯 서른 개의 가면이 동시다발적으로 흩뿌려졌다.
남천휘의 두 손에는 천하도와 제일도가 쥐어져 있지 않은가.
‘박자 다오! 소리 최대로!
창해일성소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쌍도가 만들어낸 도영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리고 서른 개의 가면이 갈가리 찢긴 채 꽃가루처럼 비산했다.
관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철컥.
남천휘가 납도하는 순간 들려온 작은 마찰음이 벼락처럼 전해졌다. 동시에 점혈을 당한 것처럼 침묵하던 천여 명의 관중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
그 날 저녁 천여 명의 선택으로 순위가 결정됐다.
남천휘는 8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