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강철(鋼鐵)의 접촉술사. (3)
지부장과 노인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저, 저 놈이 어디서 약을 팔아? 그리도 재이는 또 뭔데?”
어! 그러네. 재이를 왜 걸었지?
내기에 걸 수 있는 걸 찾다보니 재이까지 생각이 미쳤나보다.
하나 상관없잖아?
이건 질 수 없는 내기란 말이다.
남천휘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지부장이 기습적으로 치고나왔다.
“갈! 혹여 네 말대로 했다가 팔천 냥짜리 도의 날이 상하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질 테냐? 설마 곡부남가의 이름을 믿고 돈이라도 빌려달라는 건 아니겠지. 듣자 하니 가진 건 육천 냥이 전부라던데?”
엇! 급작스런 화제 돌리기.
전문용어로 물타기가 아닌가.
‘아! 치사하게 돈으로 누르려고 하네? 재이야, 어디 돈 나올 구석은 없을까?’
◎ 무작위 보급 상자에서 희박한 확률로 보석이 등장합니다. 현재 인벤토리에 남은 무작위 보급상자의 개수는······.
그건 하지 말자.
무작위보급상자는 고즈넉한 장소에서 달빛과 술 한 잔 기울이며 까야 제격일 터였다.
그렇기에 생각 같아서는 질풍뇌격궁을 떡 하니 내놓고 어깃장을 부리고 싶었다.
이게 가치 600짜리 영웅 등급 무기란다.
본 적은 있냐?
하지만 비장의 한 수나 다름없는 무기를 섣불리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허공에서 장궁을 꺼내는 건 자신의 비밀을 까발리는 행위가 아니던가.
남천휘가 할아버지의 명예나 자신의 몸뚱이라도 내기 판에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그 돈, 제가 낼게요.”
여인이 계산하겠다고 나설 때의 목소리는 언제나 고혹적인 법이다.
하나 남천휘는 인상을 썼다.
‘돌아가면서 한 명씩 나타나고 지랄이야. 괜히 한 마디 했다가 사서 고생이네.’
선행이 선행으로 보답 받는 사회에서 살고 싶었다.
남천휘가 시대의 조류를 걱정하는 사이 지부장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유 소저!”
그가 별채의 입구를 돌아보는 순간 목소리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얼굴은 앳된 기운이 역력했지만, 몸매는 어울리지 않게 풍만한 미녀였다. 한데 단순히 외모만 어여쁜 것이 아니었다. 남천휘와 비슷한 신장과 골격, 거기에 구릿빛 피부까지 활력이 가득했다.
심지어 레벨은 70을 넘긴 고수가 아닌가.
뭐 막 총관이나 군산창고의 도준처럼 지혜 수치가 유별나게 높은 거겠지.
‘아! 그나저나 어지간한 남자는 주눅 들어서 말도 못 붙이겠네.’
그 어지간한 남자가 눈앞에 있더라.
지부장은 여인을 앞에 두고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유 소저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금방 처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하나 여인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쁘게 나가시기에 저도 구경하러 왔어요. 그리고 듣자하니 상황이 참 재밌네요.”
“제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지부장이 주먹까지 불끈 쥐며 말했다.
그러나 여인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지부장의 호언장담을 귓등으로 흘렸다.
“됐어요. 돈 문제가 해결 됐으니 내기는 성사된 겁니다.”
남천휘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손 안대고 코푼 격이다
그는 히죽 웃으며 팔천 냥짜리 도를 뽑았다.
“자! 시작합니다. 딴따라 자라장장!”
저잣거리의 차력사처럼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끝으로 두 자루의 도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어, 어!”
지부장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벌어진 일이다.
챙!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허허, 멀쩡하네. 이놈! 봐라. 멀쩡한 무기를 가지고 장난질이라도 치려는 게냐?”
그러나 여인의 눈 흘김을 받더니 깨갱하며 입을 닫았다.
반면 남천휘는 여유로웠다.
한 번 부딪쳤다고 내구도가 6이나 깎였다.
하나 혹시 모르니 근력을 한껏 활용해 두 자루의 도를 휘둘렀다.
챙!
지부장은 한차례 진저리를 쳤다.
누가 보면 가보가 위태로운 줄 알 지경이다.
남천휘는 내구도를 확인하고 미소 지었다.
‘이번에 깨지겠군.’
그 순간 여인이 뭔가를 아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흐음, 깨지겠는 걸.”
그리고 두 자루의 도가 맞부딪치는 순간 지금까지와 달리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쩡!
접객원은 허공에서 호선을 그리며 튕겨나간 도신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어! 깨졌네. 팔천 냥짜리가 깨졌어!”
그러다 황급히 입을 막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남천휘는 삼천 냥 짜리 도를 내밀었다.
도신은 물론이고, 날에도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러게 감이라니까 왜 믿지를 않아?”
지부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남천휘는 기고만장하여 외쳤다.
“이런 싸구려 불량품이나 팔아먹으면서 우리 아버지가 뭐 어쩌고 어째? 사과 안합니까?”
한데 지부장은 남천휘가 아니라 유 소저를 향해 빌듯이 말했다.
“뭔가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그 순간 만물을 포용하는 대지의 여신처럼 푸근하던 여인의 눈매가 역팔자를 그렸다.
“소협에게 제대로 사과부터 하세요.”
지부장은 그제야 땀을 뻘뻘 흘리며 사과를 했다.
그러더니 다시 유 소저를 향해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저 여자 뭐지? 무진철원주의 딸래미라도 되나?’
하나 그녀는 지부장을 뒤로 한 채 병장기가 진열된 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슬쩍 병장기를 확인하더니 염화철방의 물건만 골라냈다.
‘눈썰미가 대단하네.’
그러고 보면 조금 전 도가 깨지는 것도 예상하지 않았던가. 지부장이 쩔쩔 매는 것을 봐도 보통 여인이 아닌 듯했다.
“소협.”
그녀는 손을 내밀었고, 남천휘는 삼천 냥짜리 도를 건넸다.
챙!
남천휘는 여인이 두 자루의 무기를 맞부딪치는 걸 보며 탄성을 흘렸다. 병장기를 다루는 솜씨가 매우 능숙했다.
‘상인이 아니라 무인이었나?’
쩡!
이번에도 염화철방의 도가 부러졌다.
한데 여인은 부러진 채 튕겨나가는 도의 파편을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재차 병장기를 들어 부딪치기 시작했다.
챙! 챙! 챙! 챙! 쩡! 쩡! 챙! 쩡!
고즈넉하던 별채에 칼부림이라도 난 것처럼 쇳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결국 삼천 냥 짜리 도(刀) 역시 운명을 달리했다.
하나 그 전에 폐기된 병장기가 무려 여섯 자루였다.
물론 모두 염화철방에서 납품한 물건이었다.
철그렁.
여인은 도를 내던졌다.
“흐음, 참 공교롭네. 염화철방의 물건만 이렇게 개판인 이유가 뭘까요? 지부장.”
지부장은 땀을 뻘뻘 흘릴 뿐이다.
흠, 지금 겨울이 아니었던가?
누가 보면 벌써 여름이 온 줄 알겠네.
여인이 지부장에게 줄을 내려줬다.
“집안? 돈?”
어느 쪽을 잡아도 썩었을 것이 분명한 동앗줄이다.
“그것이 처가 쪽 조카가 염화철방의 야공으로 들어갔는데······.”
여인은 손바닥을 내밀며 ‘입 닥쳐!’라는 의지를 전달했다.
“밖에 누구 없나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목석같은 사내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여인이 손을 내젓자, 지부장의 양팔을 움켜쥔 채 호송하듯 끌어냈다.
‘허어, 완전 칼이네. 칼이야.’
여인의 과감한 행동력에 공증원과 접객원은 혈도라도 잡힌 사람처럼 옴짝달싹 못했다.
“그쪽도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요?”
공증을 담당하는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하소연을 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여인은 너무도 흔한 이유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노인마저 내쳤다. 무인들에게 끌려 나가는 모양새가 마치 도살장의 돼지를 연상케 했다.
“소협, 제가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남천휘는 호쾌하기 그지없는 여인의 언행에 휘둘린 듯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일처리가 아주 명쾌하시네요. 제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었던 건가요?”
“납품 비용을 낮추고, 차익을 상납하는 아주 흔한 일이지요.”
허허, 세상 참 무섭구만.
‘이런 게 흔하다니.’
한데 여인은 일을 끝냈음에도 떠날 기미가 없다.
오히려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남천휘를 바라봤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밖에서 듣자하니 태생적으로 화덕을 얻으신 것 같군요. 맞나요?”
남천휘는 화덕(火德)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삼황오제 중 삼황에 속한 신농씨를 달리 염제라 칭한답니다. 흔히 화덕진군이라 표현하지요. 하여 불과 밀접한 야장들에게 화덕이란 불과 철을 조율하고, 양품과 불량품을 골라내는 능력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뛰어난 야장의 감각을 뜻하는 듯했다.
신안(神眼)의 하위호환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인 또한 도가 부러지기 직전에 예상하지 않았던가.
‘시스템을 지닌 건 나뿐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특기가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여인은 부러진 검을 주우며 물었다.
“역시 모르고 계셨군요. 소협의 화덕은 정말 대단해요. 소협이 먼저 염화철방의 물건을 골라내지 않았다면 저도 모르고 지나쳤을 겁니다.”
잠깐! 이거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 걸.
마치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 빚을 갚기 직전의 말투 같지 않은가.
‘말로만 듣던 천하십대병기 같은 걸 주나?’
여인은 부러진 병장기를 스스로 치우며 말했다.
“귀찮은 일을 자처하신 까닭을 물어봐도 될까요?”
남천휘는 헛기침을 하며 속내를 숨겼다.
이럴 때 잘 보여야 더 큰 보상이 오지 않겠는가.
‘웃자. 웃자. 웃어!’
최선을 다해 웃으며 말했다.
“저 분께 너무 감사해서요.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호의를 베푸셔서 물건을 보여주시더군요. 그저 배려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아, 좋았어.
마치 예기(禮記)에서 가르치던 것처럼 예의바른 모습이 아닌가. 하나 줄 걸 두 개 주고 싶을 만큼 기특하게 느껴졌으리라.
아니나다를까 여인은 크게 감탄한 듯했다.
“이름이 뭔가요?”
이 여자야! 그 쪽이 아니잖아!
접객원은 여인의 시선을 받고, 공손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접객당주를 맡고 있는 대운위라고 합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지시했다.
“새 지부장이 올 때까지 임시 지부장을 맡도록 해요. 그 간의 평판을 봐서 정식으로 임명하는 것도 고려해보겠어요.”
접객원은 예상치 못한 승진에 눈을 끔뻑였다.
“가,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는 남천휘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며 감사를 표했다.
하나 남천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보상을 하려면 나한테 해야지!’
그는 여인이 돌아서자, 방긋 웃으며 맞이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자.
무진철원 어딘가에 자신의 선물이 잠자고 있으리라.
“곡부남가에서 오셨다고요. 교분은 없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대인대덕하신 분이 계시다고요.”
응, 그거 우리 형.
여인은 무인처럼 포권을 했다.
“제대로 소개하지요. 무진철원의 감찰단을 맡고 있는 유설옥(劉薛玉)이라 합니다. 뭐 지부장 정도는 갈아치울 수 있는 그런 위치지요.”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절로 풍기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최소한 며칠 전 개망신을 당한 왕대만보다는 훨씬 윗줄이리라. 또한 무진철원의 원주가 유 씨인 걸로 봐서 혈연관계가 분명했다.
즉 엄청 대단한 사람일 터였다.
‘그럼 잘 보여야지.’
남천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남천휘라고 합니다.”
유설옥은 남천휘의 정중한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여인이지만, 규방의 규수가 아니었다.
눈빛은 뜨거웠고, 입가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또한 기골이 장대하고, 온 몸으로 강인한 기세를 흩뿌리지 않던가.
강자였고, 고수였다.
‘한데 묘하게 아름답단 말이지.’
남천휘는 유설옥의 뜨거운 눈빛을 마주하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유설옥의 미색은 상당했다.
게다가 몸에 달라붙는 경장을 걸친 탓에 풍만한지만, 군살 없는 체형이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였다.
마치 든든한 누님 같았다.
“남 소협.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남천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수락했다.
유설옥의 미색에 홀린 것이 아니다. 그저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된 선물이라도 받아야 억울하지 않으리라.
“말씀하세요.”
“염화철방에서 납품한 병장기가 이것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특상품을 취급하는 보고가 따로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 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특상품이라면 최소한 만 냥 이상의 보병(寶兵)을 진열해 놨으리라.
“기꺼이요.”
유설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여멀건 한 것으로 봐서 화덕과 어울리지 않지만, 생긴 것과 다르게 호탕하구나. 오랜만에 괜찮은 사내를 만났어.’
남천휘는 유설옥을 따라가려다 멈칫했다.
갑자기 재이가 알림을 울렸다.
하여 무진철원의 수뇌부와 친해지라는 퀘스트가 완료된 줄 알았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내용이 뒤이었다.
◎ 미녀(美女)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 시스템 상에 등록된 미적 서열을 확인합니다.
그와 동시에 시야 구석에는 검은 막대가 생성됐다.
남천휘는 막대가 하얗게 물드는 것을 보며 재이에게 물었다.
‘미적 서열이 뭐야?’
◎ 대상자의 취향에 따라 정리된 서열입니다.
남천휘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제대로 된 연애도 못해봤거늘 취향은 무슨 취향이란 말인가. 연애라는 글자를 떠올리는 순간 백봉 연하연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만큼 아는 여자가 드물었다.
‘아, 괜히 서글프네. 하연이는 잘 지내나 몰라? 봉황곡의 나쁜 새끼들을 다 죽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짧고, 유일한 여인과의 추억을 되새기는 사이 귀를 지를 듯한 경고음이 울렸다.
《삐이이이이이이.》
《유설옥의 미적 서열은 기준치 이하입니다.》
《히든 모드 ‘미연시’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남천휘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신이 유설옥을 뻥 차버린 듯한 모양새가 아니던가.
‘야! 갑자기 유 소저한테 미안해지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