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무적무한(無籍無限). (3)
남천휘는 인상을 썼다.
하나 재이가 그런 것에 겁먹을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결국 남천휘는 떼를 쓰듯 빠르게 말을 건넸다.
“저번에 아이템 빼앗아갔잖아! 그 때 벌칙은 끝난 거 아니었어?”
◎ 강탈이 아니라 회수입니다.
◎ 그 외에도 특정 기능에 대한 비활성화가 페널티로 부과됐습니다.
- 재활성화까지 14일 남았습니다.
남천휘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 내가 잊고 있었네.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는 아주 불친절한 동료라는 걸!”
무쌍 모드 당시 함께 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배신감은 배가 됐다.
‘치사한 것! 그럴 거면 그렇게 말하지나 말지.’
재이가 남천휘를 달래듯 알려줬다.
◎ 능력치와 아이템, 특기는 유지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너무 고마워서 입에서 눈물이 다 나오려고 하네.
남천휘는 연무장 밖에서 한 차례 토악질을 한 후 돌아왔다.
가상의 적을 상정한 후 직도를 겨눴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
없으면 없는 대로 수련을 해볼 요량이다.
한데 머리와 몸으로 초식을 기억하고 있음에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젠장! 겁나 불편하네.”
이래서 천상의 이기가 무서운 법이다.
있다 없으니까,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답답했다.
남천휘는 창해일성소를 떠올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우리 동네 만두 가게에는 아저씨가 잘생겼네.”
쉭! 쉭!
어제 비가 왔기 때문일까.
연무장은 흙먼지 없이 깨끗했고, 발은 얼음 위를 달리듯 자연스럽게 미끄러졌다.
“대머리 반질거리는 것이 정말로 잘생겼네.”
두 자루의 직도가 쉴 새 없이 교차하며 칼 그림자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온 동네 과부들이 너도나도 힐끔힐끔힐끔.”
콧노래가 점차 사그라졌다.
숨이 찬다.
체력이 생각보다 많이 떨어졌다.
이상하다. 연초는 피우지 않았는데.
‘대신 술을 마셨지. 아! 이제 머리도 아픈 것 같아.’
그 때 재이가 충고하듯 알림을 띄웠다.
◎ 수련의 효율이 기준 이하입니다.
- 체력 회복에 집중하세요.
- 소소한 임무를 수행하여 경험치를 획득하세요.
생각해주는 척 하기는!
그래봤자 정작 무슨 일이 생겨도 물어봐야 답해줄 거잖아.
치사하고, 더러워서 수련한다.
그렇게 반 시진 남짓 수련을 했을 때였다.
비천무상도와 오행군림보의 숙련도가 상승했다는 알림이 들려왔다.
남천휘는 술 냄새가 나는 듯한 땀을 닦으며 무공창을 열었다.
《비천무상도》
- 비천(飛天)과 무상(無常)을 위한 도법.
- 3단계 성장형 (비상 단계 진행 중)
※ 비상(飛上), 행공(行空), 비천(飛天).
- 숙련도(24/100). (가치 : 500)
《오행군림보》
- 공간을 강탈하는 패도(覇道)적인 보법.
- 공간을 선점하는 변환(變幻)적인 보법.
- 내공의 소모가 극심할수록 위력을 발휘함.
- 4급 성장형 (난해 단계 진행 중)
- 숙련도(35/100). (가치 : 400)
남천휘는 숙련도를 확인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표식 없이 자신의 힘으로 이뤄낸 성과였다.
그렇기에 기쁨은 배가됐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게 잘못되지 않았어!’
한데 그 순간 뜬금없이 알림이 울렸다.
띠링-
◎ 자신의 의지로 역경을 돌파했습니다.
- VIP 포인트 +200점이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남천휘는 두 줄의 문구가 시야에서 완전히 흩어질 때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퀘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기가 발동한 것도 아니다.
한데 역경은 무엇이고, 200포인트는 또 뭐란 말인가. 이유 없이 주어진 보상에 무슨 정신이 얼떨떨했다.
약은 약사에게, 시스템은 재이렷다.
“이거 뭐야?”
◎ 전직으로 인한 특수 보상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조만간 밥 한 끼 합시다.’라는 것처럼 감정 없는 한 마디였다.
남천휘는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나 전직했냐?”
◎ 네.
“언제?”
대두동에 돌아왔을 때란다.
“그거 꿈 아니었어?”
그 다음부터 꿈이었단다. 그리고 퀘스트 ‘진삼국무쌍’이 전직의 마지막 단계였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그럴 수 있다.
애초에 전직은 비공개로 진행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느 순간부터 대상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평가하고, 퀘스트와 수련의 성취도에 따라 적합한 직업을 선별한다고 했다.
그러니 비밀리에 진행된 것쯤은 이해할 수 있다.
하나 끝났으면 끝났다고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 재이야, 나 마음에 안 들지?”
◎ 1차 전직 최종 단계에서의 선택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시스템의 합리적인 권고를 무시하면서까지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였기에······.
흠, 일단 변명은 아닌 것 같다.
마치 지난번에 하지 못한 걸 이제 와서 마무리 짓는 느낌이었다.
남천휘는 진심을 담아 질문했다.
“야! 진지하게 물어보자. 너는 왜 얘기를 안 해주냐? 어차피 물어봤을 때 대답할 수 있으면 해줄 거잖아. 전직이 숨길 일도 아닌데 왜 먼저 얘기를 하지 않은 거야?”
◎ 시스템은 특급 강호인으로서의 승급을 최종 목표로 합니다. 특급 강호인이란 단순히 주어진 명령에 따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스템은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실행할 수있는 특급 강호인으로서의 성장을 보조합니다. 그렇기에 성장에 개입할 뿐 방향을 정하지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무미건조한 대꾸였다.
마치 재이가 아니라 처음 인스톨 당시 들려왔던 알림으로 돌아간 듯했다.
뒤이어 재이의 확고부동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 시스템은 선택과 결정,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남천휘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전민들을 구하러 갈 당시 시스템은 몇 번이나 퇴각을 권고하지 않았던가.
하나 남천휘가 그것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상황에서 활용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결국 재이는 최선을 다한 게다.
남천휘의 투덜거림이 어리광처럼 느껴질 만큼 재이는 할 도리를 다 한 셈이다.
‘쳇! 그래도 예전에 선택하라고 해놓고선 시간이 지나니까 멋대로 실행한 적도 있잖아.’
◎ 기본 실행 문제는 시스템이 담당합니다.
철두철미해서 좋겠다.
남천휘는 재이의 입을 막을 방도를 궁리하다가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알았다. 알았어. 네 말이 다 맞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특급 강호인이라는 호칭이 지닌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강호에서 흔히 통용되는 무공의 수준은 절정과 초절정, 그리고 절대지경이다. 하나 재이는 30레벨을 기점으로 판별되는 절정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초절정도, 절대지경에도 해당하리라.
그러니 특급 강호인은 단순히 강함의 척도로 사용되는 용어가 아닐 터였다.
그래서였을까.
절정보다 전직이라는 말에 더 큰 흥미가 일었다.
“좋아! 그래서 나는 뭐가 된 거지?
그 순간 낯익은 외침이 들려왔다.
그 사람이다.
튜토리얼을 끝내고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에 발을 들였을 때 일장연설을 했던 사내였다.
《강호에 발을 들였을 때 호언장담했던 웅심은 추풍의 낙엽처럼 쓸려나갔고, 첫 눈처럼 깨끗했던 마음은 속세에 찌들어 빛을 잃었도다.
아! 강호의 사내여.
어느덧 의(義)와 협(俠), 도(道)와 법(法), 명(名)과 권(勸), 전(錢)과 정(情)에 이끌려 초심을 잃었구나.
이제 속세의 얽히고설킨 인연이라는 명목의 족쇄를 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남천휘라고 합니다.
그나저나 이런 걸 해주려면 전직하자마자 해줬어야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련하느라 지친 상태에서 뭘 어쩌라는 건지.
한데 사내의 외침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심장을 뛰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귀로 듣고 있음에도 절로 상상하게 됐다.
사내는 그 여운을 즐길 시간을 준 후 우렁찬 일갈을 내뱉었다.
《하나 아직 늦지 않았구나.
협객(俠客)이라면 의협의 길을 갈 것이고,
유자(儒者)라면 옛 선인을 따라가기에 바쁘리라.
마졸(魔卒)은 수라의 길을 개척하고,
사귀(邪鬼)는 욕망의 노예로 전락할 지니,
상인과 의생은 각기 전낭과 활인을 꿈꿀 뿐이다.
하나 아직 잊지 않았구나.
그 모든 것을 잃었어도 하나만은 놓지 않았구나.
칼(刀).
버림받고, 이용당하고, 배신당했어도.
강호행의 첫 걸음을 함께 했던 한 자루 칼만은 여전히 함께였다.
싸우고, 버텼으며, 또 싸웠다.》
‘지금 쓰는 건 그 때 그 칼이 아닌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수많은 광경이 뇌리를 스쳐갔다. 죽을 때나 마주한다는 주마등이 현실로 일어난 것이다.
‘내가 했던 거잖아?’
토끼장을 헤집고, 연하연을 만지작거리며, 죽창을 걸어 활을 쏘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백여 명의 적을 향해 두 자루의 직도를 늘어트린 채 돌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하늘의 명마저 저버린 채 굳건한 의지를 동아줄 삼아 이겨냈다. 그런 그대의 앞날을 재단하는 건 오만(傲慢)이자, 무지(無知)일 것이다.
길을 가는 것도, 길을 만드는 것도.
모두 당신의 의지로 행해지리라.
백 명이, 천 명이, 아니 온 세상이 아니라고 해도 스스로 그렇다고 여긴다면 망설이지 마라. 속세의 그 어떤 족쇄도 비상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 적(籍)이 없는 자에게 한계란 없다!
그러니 무적무한(無籍無限)이라.
- 적(敵)이 없으니 홀로 군림할 뿐이다.
그러니 무적군림(無敵君臨)이라.
무적자여!
다시 한 번 첫 보를 내딛어라!》
남천휘가 자신도 모르게 되뇌었다.
‘무적자.’
보편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
즉 정사마(正邪魔)라는 일반적인 구분법에서 탈피한다는 의미리라.
곧이어 등장한 재이의 부연설명은 남천휘의 예상을 확신으로 만들어줬다.
◎ 대상자가 무적자(無籍者)로 전직했습니다.
- 직업 '무적자'는 적이 없기에 직업의 제한도 없습니다.
- 향후 특정 직업만이 습득 가능한 특기와 비책에 대한 제약이 사라집니다.
- 선형(線形) 승급 체계가 그물 형으로 전환됩니다.
- 승급 체계의 자유도가 대폭 강화됩니다.
- 향후 보상은 VIP 포인트와 자수정으로 일괄 지급됩니다.
남천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직업 제한이 풀리고, 특기의 제약도 사라졌다.
그 말은 곧 협객만이 얻을 수 있는 특기도 획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또한 마졸만이 얻을 수 있는, 사귀만이 얻을 수있는 특기까지 모두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다익선인가.’
사람들을 구하고, 상까지 받은 듯했다.
지금까지의 페널티가 기억에서 사라질 만큼 기분이 좋았다.
띠링-
《전직 평가》
- 진행률 : 100%
- 등급 : S
재이의 한 마디가 축하인사처럼 들렸다.
◎ 무적자로 전직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부드러운 목소리 탓이었을까.
불현 듯 꿈에서 봤던 미녀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크흠!”
남천휘는 직도를 보급창에 돌려보낸 후 포권을 했다.
이번만은 재이에게, 시스템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특급 강호인이 되는 그 날까지 함께 하기를 기원하고자 했다.
하나 사람 마음이 어디 뜻대로 되던가.
재이의 무미건조한 알림이 이어졌다.
◎ 페널티로 인해 전직 보상은 삭제되었습니다.
- 삭제 아이템 목록을 확인하시겠습니까?
포권(包拳)의 방식은 이렇다.
왼손은 펴고, 오른손은 주먹을 쥔다.
그리고 오른 주먹을 왼 손바닥에 가져다 대면 완성이다.
참으로 쉽지 않은가?
남천휘는 포권을 한 상태에서 오른 주먹을 비튼 채 내질렀다. 왼손바닥을 통과한 오른 주먹이 허공을 향해 솟구쳤다.
“이거나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