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무적무한(無籍無限).
39, 무적무한(無籍無限).
혈랑회주는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다.
불과 반나절 전만 해도 이백여 명이 넘는 무인들이 즐비했던 장소였다. 그보다 몇 배는 많은 양민들이 노역을 하면서 비명을 질렀던 장소였다.
하나 은신처는 고요했다.
추수철 메뚜기처럼 늘어진 시신들을 보고 있자니 거대한 묘지에 온 듯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이게 도대체······.”
당황한 것은 혈랑회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눈을 끔뻑이며 넋을 놓았다.
그 때 나직한 침음이 들렸다.
혈랑회주는 황급히 몸을 돌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산인.”
산인(山人)이라는 표현은 속세를 등졌거나, 산중에서 구도하는 승려나 도인을 의미했다.
하나 곤륜산인(昆崙山人)이라 불린 노인의 첫 느낌은 이빨을 잔뜩 드러낸 짐승 같았다. 실제로 백호의 가죽을 배자로 삼아 둘렀고, 햇볕에 검게 탄 얼굴은 흉터가 가득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곤륜산인의 한 마디에 혈랑회주와 수하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곤륜산인은 그런 혈랑회의 무인들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생존자를 찾아보라.”
무인들은 사면령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빠르게 흩어졌다.
“혈인검.”
혈랑회주는 자신의 별호가 거론되는 순간 다시 한 번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곤륜산인의 목소리는 가기처럼 부드럽고, 잔잔했다. 하나 그의 진면목을 알기에 섣불리 자세를 풀지 않았다.
“명하십시오.”
곤륜산인은 뒷짐을 진 채 혈랑회주를 지나쳤다.
회주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산인을 뒤따랐다.
“우리가 야인이 된 게 팔 년이던가?”
“그렇습니다.”
“오래도 됐군.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등지고, 어둠 속에서 버러지들을 모아 칼을 갈았어. 그렇게 만든 게 삼회, 삼방, 사당이야.”
혈랑회주는 말을 아꼈다.
삼회(三會), 삼방(三幇), 사당(四黨).
저마다 산동성 내외에 흩어져 활동했지만, 본류는 한 몸이었다. 곤륜산인의 지휘 아래 때를 기다렸던 암중지검(暗中之劍)이었던 것이다.
곤륜산인의 목소리에 노기가 섞였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그렇다면 비공회와 살류방, 흑살당이 전멸했다는 뜻이군.”
삼회는 회주 휘하 소속원들이 모두 대업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삼방은 수장들만 대업에 동참했다. 그리고 사당은 그저 온갖 악인의 욕심을 채워준 후 언제고 칼받이로 활용할 요량이었다.
그렇기에 비공회의 전멸은 뼈아팠다.
퍼퍼퍽!
널브러져 있던 시신들이 갈가리 찢기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겨우 잦아들었던 피 냄새가 자욱하게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곤륜산인이 결국 참다못해 노기를 드러낸 게다.
“이곳은 신공부를 하루아침에 무너트리기 위한 전진 기지였어. 완성이 코앞이었거늘! 용서할 수 없다. 누가 됐든 이 꼴을 만든 놈을 찾아와. 팔다리는 잘라도 좋아. 숨만 붙여서 끌고 오라. 내가 갈가리 찢어서 개먹이로 줄 테니.”
찾지 못한다면 회주가 개먹이로 주어지리라.
그 때 부회주가 황급히 달려왔다.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혈랑회주는 요즘 들어 쓸데없는 소리가 버릇인 부회주의 등장을 반겼다.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곤륜산인과 독대하는 건 두려웠다.
“가자!”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은신처의 내부였다.
비공회와 살류방의 무인들이 떼죽음을 당한 곳이다.
그러나 그들이 관심을 가진 건 후원의 절벽이었다.
“혈조옹!”
비공회주의 시신은 철시에 박힌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곤륜산인이 두 사람을 지나쳤다.
파팟!
몇 걸음만으로 절벽을 박찬 그가 철시와 함께 비공회주의 시신을 품고 내려왔다. 같은 절정의 반열이라고 해도 천양지차의 무위였다.
“흠, 묘하군.”
곤륜산인의 중얼거림에 혈랑회주도 동의했다.
“이 친구가 이런 표정을······.”
죽는 그 순간까지 겁에 질린 표정이라니.
“전멸보다 이게 더 신경 쓰이는군. 구파의 고수라도 이렇게는 못 만들어. 혈조옹을 두렵게 만들려면 사마외도의 악귀 정도는 되어야겠지.”
그 때 부회주가 회주에게 귀엣말을 했다.
혈랑회주는 즉시 다가와 말을 건넸다.
“화살을 보아하니 짚이는 바가 있습니다.”
“흉수를 알겠는가?”
“일전에 보고했던 궁귀가 아닐까 싶습니다.”
곤륜산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태산의 초입에서 우리 일을 방해했던?”
“그렇습니다. 그 때 놈이 쐈던 죽창과 철시의 길이가 비슷합니다. 대궁을 사용하면서 이 정도의 무위를 지닌 자가 두 명이나 동시에 나타날 리 없습니다.”
“그 때 누가 의심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궁귀와 곡부남가 셋째의 동선이 조금 겹쳤습니다.”
혈랑회주의 말에 곤륜산인은 뾰족하게 갈린 어금니를 드러냈다.
“조사해봐. 뭐라도 나오겠지.”
“하면?”
곤륜산인은 손을 내저었다.
“혹여 궁귀라는 놈이 상천을 노리는 거라면 신공부보다 그쪽이 먼저다. 그러니 관계된 자라면 무조건 확보해서 정보를 캐내도록 하게.”
혈랑회주도 표정을 굳혔다.
상천은 그들의 뿌리를 가리키는 음어가 아닌가.
상천마저 무너지면 그들은 돌아갈 곳이 없다.
“놈을 주시하겠습니다.”
곤륜산인은 혈랑회주와 낭인들을 떠난 후 은신처의 입구를 무너트렸다.
“쯧, 결국 학관을 노려야 하는가.”
그마저 이내 모습을 감췄고, 은신처는 완전한 무덤이 되었다.
*
꿈을 꾸었다.
구름은 오색으로 물들었고, 시냇물은 술로 채워졌다. 누군가 부채를 살랑이며 더위를 몰아내줬고, 손만 뻗으면 선계의 과수라는 천도(天桃)를 딸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다.
마치 신선이 된 듯했다.
그러고 보니 부채를 흔들어주는 존재가 재이였다.
재이는 볼을 붉히며 해맑게 웃었다.
- 저도 좋았습니다.
좋았다니 다행이네.
부드러운 목소리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응, 그런데 뭐가 좋아?
아리따운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사내답지 않게 질척거리며 계속 뭐가 좋은지 물었다.
그런데 내가 네 얼굴을 어찌 알지?
너 누구세요?
하나 재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느껴졌다.
이 꿈은 결코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뭐지? 뭐냐?
“도대체 뭐가 좋았던 거야?”
남천휘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하나 이내 손사래를 치며 벌컥 소리를 질렀다.
“아씨! 깜짝이야.”
그도 그럴 것이 정신을 차리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큰 바위 얼굴이 아닌가. 할아버지의 흔적처럼 여겼지만, 이런 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좀 아니잖아.
크흠, 서로 배려 좀 합시다.
남천휘는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살폈다.
그래, 이곳은 대두동이다.
널따란 분지의 주변은 동혈로 가득했고, 겨울임에도 따스한 햇볕이 가득했다. 평온한 장소에 앉아 있으니 혼절하기 전 적들을 상대했던 것이 마치 꿈만 같았다.
◎ 꿈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남천휘는 머릿속에 울린 재이의 한 마디에 화들짝 놀랐다.
‘잠깐! 어디서부터 들은 거냐?’
재이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기에 더욱 초조했다.
설마 꿈을 꾸면서 얼굴이라도 붉혔던 걸까?
그리고 도대체 뭐가 좋았다는 걸까?
묻지 않았다.
개꿈을 꾸면서 시시덕거리는 사내로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에는 화제를 돌리는 것이 최고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재이가 시간을 표기했다.
‘하루 종일 뻗어 있었군.’
남천휘는 이제 버릇처럼 상태창을 열었다.
《남천휘(南天輝)》
- 소속 : 대두동(大頭洞)
- 호칭 : 추억을 기억하는 자.
- 별호 : 호도(護刀).
- 등급 : 39
- VIP : 1등급(잔여 점수 : 1020)
- 성소 포인트 : 4100
- 냉기 저항 : 92
상태창을 확인하는 순간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맙소사!”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그대로였다.
수백 명의 적을 물리치고, 수백 명의 양민을 구했거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능력 수치마저 그대로다.
아니, 아직 피로가 남았는지 팔 할 정도만 회복된 상태였다.
“기절하기 전에 보상이 엄청 들어오지 않았냐?”
◎ 시스템 거부로 인한 페널티가 적용됐습니다.
- 삭제된 보상 품목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남천휘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세상에 줬다 뺏는 놈이 제일 나쁘다던데.
이미 없어진 걸 확인해서 무엇 하랴.
속만 쓰리지.
하나 이내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협박까지 무시했는데 그 정도면 다행이지 않냐?”
남천휘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렀으니 재이의 권고를 무시했던 미안함도 상쇄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남은 건 없고?”
◎ 페널티 외에 보상품이 존재합니다.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 의리는 생길 때도 됐잖아.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보급창을 열었다.
하나 보급창 역시 모든 물품이 그대로였다.
오직 한 가지만 숫자가 늘었다.
- 자수정x1937
◎ 척살 대상은 자수정 1개로, 구조 대상은 자수정 2개로 치환됐습니다.
아! 그래서 이렇게 많이 늘었구나.
한 번에 너무 늘어났더니 값어치가 떨어져 보일 지경이다.
남천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수정을 살폈다.
《자수정》
- 현재 등급으로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 VIP 3등급 이상.
※ 레벨 제한 : 50
“그나저나 다른 건 회수했으면서 이거는 왜 준 거야? 나 좋으라고 놔둔 거 아니지?”
남천휘의 칭얼거림에 재이는 전가의 보도로 대응했다. 현재 대상자의 수준에서는 정보 제공이 불가능하단다.
“그래! 한다. 해. 내가 집에 돌아가면 미친 듯이 수련을 해서 오십 레벨을 찍고야 만다!”
◎ 대상자의 현재 레벨은 39로 기간과 임무 대비 성장 예정치의 62%에 해당합니다.
※ 조금 더 분발해주세요.
야! 분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째 비율이 더 떨어졌잖아?”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가 71%였으니 일할 가까이 하락한 셈이다.
“열두 시진 내내 경험치 약 빨고 수련을 하면서 쌍코피라도 몇 번 흘려줘야 만족할 거냐?”
◎ 쌍코피 34회에 성장 예정치를 정상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가능합니다.
남천휘는 재이의 놀림 같은 한 마디에 울컥했다.
하나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너 지금 농담한 거냐?”
◎ 시스템은 정확한 사실 적시를 추구합니다.
그렇지? 아니지.
그럴 리가 없다.
재이가 농담이라니.
소혜가 진짜 개구리로 변하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한데 갑자기 시스템 운운하는 까닭은 뭐란 말인가.
설마 말 돌리는 건가?
남천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개꿈을 꿨더니 자신도 모르게 재이를 사람처럼 대하려는 것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양 손으로 뺨을 후려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상현실을 겪었던 장소에 있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잡념이 너무 많아지는 듯했다.
“이 정도 쉬었으면 됐겠지. 슬슬 돌아가자.”
◎ 귀가 경로를 탐색 중입니다.
남천휘는 재이가 정보를 검색하는 사이 성소 포인트를 활용했다. 대두동 밖의 안개를 더욱 강화했고, 입구에는 간단한 진법을 펼쳐 놨다. 약초꾼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구를 지나친 채 왔던 길로 돌아가리라.
잠시 후 지도에 집으로 돌아가는 최단 경로가 표시됐다.
남천휘는 대두상을 보며 손을 모았다.
“할아버지. 다시 올 게요. 잘 쉬었다 갑니다.”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하나 천성은 속일 수 없나보다.
“혹시 대두동 내에 숨은 보물이나 남은 퀘스트 없어?”
◎ 군사에게 확인하세요.
그러네. 그러고 보니 그 떠벌이는 어디 갔냐?
재이의 설명이 이어졌다.
성소의 주인인 유지가 되는 순간 군사가 자동 소환되나, 두 번째 방문부터는 유지의 부름에만 응한다는 대답이었다.
남천휘는 대두상을 돌아봤다.
“흐음, 아니겠지. 아닐 거야.”
만약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면 가상현실 속에서 남추가 알려줬으리라.
“집에 가자!”
대두동을 벗어난 후 관제묘에 들렀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 남천휘는 관우의 위패 앞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향을 대신해 태운 잎사귀의 흔적.
그리고 먼지가 살짝 내려앉은 육포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아! 기분 이상하네.”
남천휘는 빠르게 서쪽으로 향했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집에 가고 싶었다.
경공까지 펼치며 내달린 끝에 해가 지기 전 곡부남가의 정문을 마주했다.
“어?”
소혜가 손깍지를 긴 채 초조한 듯 입구를 오가고 있었다. 그녀는 남천휘를 보자마자 볼을 부풀리며 달려왔다.
“공자님, 어디를 다녀오신 거예요? 그 옷은 뭐고요? 사람들이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소혜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울먹거린다.
고개를 드니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하지 않은가.
남천휘는 빙긋 웃었다.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듯했다.
“비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