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소년, 어른이 되어라. (1)
36, 소년, 어른이 되어라.
눈은 펑펑 내렸고, 차곡차곡 쌓였다.
그 덕에 남천휘는 산중턱에 갇힌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이미 명적은 기억에서 지운 지 오래였다.
‘사냥꾼이 동료에게 신호라도 보내고 있겠지.’
남천휘 역시 초겨울에 토끼 열 마리를 잡은 적이 있지 않은가. 비록 토끼장 안의 토끼였지만, 몽산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엽사들과 동질감을 느꼈다.
“훗! 겨울 사냥은 쉽지 않아. 친구들!”
남천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저들의 건투를 빌었다
깊은 산 중, 사방에는 눈이 가득하다.
이런 곳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는 호사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땅 주인 정도 되면 좀 누려도 되잖아?”
남천휘는 널따란 바위에 앉아 몽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삼백 개의 봉우리와 삼백 개의 골짜기가 존재한다는 말처럼 시야 끝까지 준험한 산세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한데 온통 하얗게 물든 산세를 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낯선 감정이 느껴졌다.
자연의 위대함, 또는 인간의 무력함.
뭐가 됐든 자신이 이룬 것이 마냥 초라하게 여겨지는 광경이 아닌가.
이래서 중이나 도사가 산에 사는 듯했다.
“하아, 시라도 한 수 짓고 싶기는 한데······.”
능력이 없기에 포기했다.
하나 시를 읊지는 못해도 노래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게다가 부를 줄 아는 노래가 두 곡밖에 되지 않으니 고민할 이유도 없다.
답은 당연히 창해일성소였다.
“박자 줘봐! 소리는 은은하게.”
연주와 함께 발밑에 표식이 나타났다.
하나 보법을 수련할 목적이 아니지 않던가.
남천휘는 표식을 무시한 채 흥얼거렸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악곡이었기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물론 가사는 바꿨다.
노인네가 안빈낙도하겠다며 부르는 노래를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청년이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따스하던······.”
박자를 맞추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가 나타났다.
남천휘가 예전에 만두로 유명한 삼립당(三立堂)에 들러 사놨던 음식이다.
육포하면 천품육포, 만두하면 삼립만두.
그만큼 유명한 만두다.
“크하! 내가 만두를 산속에서 먹을 줄이야.”
만두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뜨끈한 기운이 몸 안에 퍼졌다. 차를 마실 때에도 느꼈지만, 냉기 저항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열기가 존재했다.
‘역시 사람은 배를 채워야한다니까.’
그가 인벤토리의 숨겨진 묘용을 발견한 건 우연의 산물이었다. 오랜만에 인벤토리를 열고 아이템을 정리했을 때였다.
땀에 젖은 수건이라는 이름의 아이템이 존재했다.
그제야 수련을 하다가 실수로 넣어놨던 것을 떠올렸다. 한데 다시 꺼낸 수건은 방금 넣은 것처럼 퀴퀴한 땀 냄새를 풍겼고, 짜면 땀이 흘러내릴 만큼 축축했다. 인벤토리의 원리는 모르겠지만, 넣어놨던 그대로의 물건이 나타난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게 어디 한두 가지더냐?’
어차피 물어봐도 답해주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러니 그냥 즐기기로 했다.
그 결과 한 겨울에 깊은 산속에서 방금 우려낸 듯한 차를 마시고, 방금 쪄낸 듯한 만두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일 먼저 술을 넣었어야 해!”
남천휘는 입맛을 다시며 찻잔을 기울였다.
한데 풍광을 보며 시간을 때우는 건 확실히 지루했다. 맛있는 것을 먹고, 흥겨운 노래를 불러도 공허할 따름이다.
‘역시 산은 나랑 안 맞는 듯.’
산에서 사는 건 백 년 후로 미뤄야 할 듯했다.
남천휘는 만두를 입안에 욱여넣은 후 인벤토리를 열었다.
예전가 달리 풍성한 아이템이 주인을 반겼다.
이 또한 할아버지의 선물이었다.
《보급창》
- 무기강화주문서x8
- 갑옷강화주문서x5
- 적선단x11, 벽선단x6, 녹선단x5
- 고급 적선단x1, 고급 벽선단x1
- 오감 증폭제x3
- 축복받은 확인서x7
- 숫돌x11, 수련용 직도x12
- B급 보도(寶圖)x1.
- B급 무작위 보급 상자x2.
- C급 무작위 보급 상자X5
- 경험치 3배 비약(1시간)x1
- 경험치 2배 비약(3일권)x3
- 경험치 1.5배 비약(1일권)x5
- 육포 조각x35,
- 만두(매운 맛)x3 만두(기본 맛)x2
- 다구 일체x1, 찻잎(한 근)x2
- 수통(온수 2되)X3
- 자수정x300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아! 만두 먹어 그럴 수도 있고.’
어쨌든 대부분의 아이템의 보유 개수가 늘었다.
심지어 회복제의 상위로 보이는 고급 물약까지 생겼다. 무작위 보급 상자야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아이템이다. 게다가 경험치 비약까지 종류 별로 구비했으니 이쯤 되면 특급 강호인이 될 일만 남은 듯했다.
“아! 벌써부터 막 강해지는 것 같아!”
하나 그 중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건 히든 퀘스트의 달성률 100% 보상을 받은 자수정(紫水晶)이다.
달성률에 따라 보상이 달라진다고 했으니 이것이야 말로 얻어낼 수 있는 최고의 물품일 터였다.
‘그런데 그냥 값비싼 보석은 아닌 것 같아.’
설명만 봐도 단순히 재화나 장식품으로 사용하라고 준 건 아닌 듯했다.
《자수정》
- 현재 등급으로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 VIP 3등급 이상.
※ 레벨 제한 : 50
남천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을 살폈다.
하나 결국 포기한 채 한 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찜찜한 물건이야.’
메인 퀘스트보다 중요하다는 히든 퀘스트의 보상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도움이 될 물건은 분명했다. 한데 보면 볼수록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불길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은 없다.
하나 마치 멀쩡한 사람을 노예를 만들 것 같은 악마의 기운이 느껴졌다.
‘일단 두고 보자고.’
남천휘는 불길한 느낌을 애써 기억에서 지웠다.
풍광 좋고, 맛 좋은 음식을 앞에 두고 쳐져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기분 전환에는 보물찾기가 제격이지!”
남천휘는 ‘B급 보도’를 앞에 두고 싱글벙글했다.
이미 30레벨을 넘겼으니 축복받은 확인서만 바르면 보물지도를 만나게 되는 셈이다.
가짜일 리 없는 진짜 보물지도!
이것이야 말로 꽝 없는 으뜸 패가 아닐까 싶다.
남천휘는 묘한 기대감을 품고 양손을 비볐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삐이이잉-
저 멀리 우거진 삼림에서 화살이 솟구쳤다.
또 명적(鳴鏑)이다.
하늘을 뚫을 것처럼 치솟던 화살이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졌다.
“흐음.”
첫 명적보다 가까웠다.
남천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지혜 수치 271의 감이 발동했다.
저것은 사냥꾼들이 짐승을 몰기 위한 신호가 아님을 말이다.
◎ 대상자 또래의 성인 중 소학을 독파한 남성의 평균 지혜 수치는 300입니다.
남천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물어봤어.”
그는 명적이 치솟은 쪽으로 걸음을 내딛으며 변명을 하듯 중얼거렸다.
“다 그렇게 공부만 하니까 안 되는 거야. 산과 들을 뛰어놀면서 몸과 마음을 건강히 해야지. 죄다 방안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하니까 강호인끼리 칼로 안 싸우고, 말싸움이나 하는 거잖아. 강호가 이래서야 되겠어? 엉! 피가 튀고, 욕설이 난무하는 진짜 강호는 어디에 있는 거냐고?”
재이가 뭐라고 대답을 하는 듯했다.
하나 남천휘는 파진악의 연주 소리를 최대한까지 끌어올린 후였다. 그리고 손을 귓가에 댄 채 재이를 향해 조롱의 한 마디를 건넸다.
‘뭐라고? 공부만 중시하는 바보라서 안 들리는데.’
*
눈으로 보던 것과 직접 걷는 건 달랐다.
“눈이 뭐 이리 많이 왔어!”
남천휘는 발목까지 파묻힐 만큼 쌓여 있는 눈을 보며 투덜거렸다.
고수가 되면 풀 위를 뛰거나, 물 위를 건널 수 있을 터였다. 하나 고수가 아닌 그로서는 눈이 있으면 밟고, 길이 막히면 돌아가야 했다.
“그나저나 나도 이제 절정인 거냐?”
남천휘의 현재 레벨은 39다.
비천무상도를 깨우치면서도 레벨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지 않았던가.
◎ 절정이 내기발현(內氣發現)의 경지를 의미한다면 현재 대상자는 절정이 아닙니다.
아! 왜?
“내 레벨이 안 보이냐?”
조상이나 왕망의 레벨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30레벨을 절정의 기준으로 삼았다.
31이나 34에 절정이 된다고 하면 이상하잖아?
하나 재이는 단호했다.
◎ 절정에 오르기 위한 최소한의 레벨은 30이 맞습니다. 하나 대상자는 전직 퀘스트를 거치지 않으면 더 이상의 성장이 불가능합니다.
전직(轉職)이라면 새로운 직업을 준다는 의미였다.
“그럼 내 이전 직업이 뭔데?”
◎ 백수입니다.
남천휘는 인상을 썼다.
하여간 주변에 있는 것들이 죄다 사람 마음에 대못을 박아버리니 짜증만 배가됐다.
“그럼 전직하기 위한 조건이 뭔데?”
◎ 전직 퀘스트는 특급 강호인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요 단계입니다. 그렇기에 달성 조건은 비공개를 원칙으로 합니다.
그럴 줄 알았다.
차라리 어영부영 대답이라도 하는 군사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나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일전에 조상이 북풍대의 부대주인 벽추를 평가할 때였다. 작은 깨달음만 있어도 능히 절정에 오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도 뭔가 깨달으면 되겠지.’
남천휘가 재이의 콧대를 꺾을 방안을 궁리하던 중이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이곳에서 발자국을 발견했다.
분명 명적을 쏜 자들일 터였다.
남천휘는 슬쩍 무릎을 굽혔다가 펴는 것만으로 나무 위에 올랐다. 수목 자체가 워낙 빼곡했기에 나무 위로 걸어다니는 편히 훨씬 수월할 듯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남천휘는 투덜거리며 옆 나무의 가지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렇게 나아가기를 수십 걸음.
드디어 목표를 발견했다.
상대는 세 명, 레벨은 각기 21, 22, 34였다.
한데 저들 중 한 명의 머리 위에 표시된 레벨은 연한 다홍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나쁜 놈들이네.’
당연히 34가 제일 나쁜 놈이고.
남천휘는 더 살필 것도 없이 나무 아래로 몸을 날렸다.
“당신들 뭐야?”
보통 놈들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남천휘가 말을 거는 순간 한 놈이 유려한 몸놀림으로 검을 뽑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쉬이익!
남천휘는 가볍게 한 걸음 물러선 후 미간을 좁혔다.
34 레벨의 적이 수하들을 향해 눈짓을 했다.
“이런 곳에 사람이라니. 쯧! 죽여라.”
“존명.”
이 새끼들 보게.
어차피 처음부터 죽이려고 했잖아!
‘그러니 자비를 논하지는 말자!’
남천휘는 자신을 향해 거리를 좁히는 적을 보며 먼저 달려들었다. 비약적으로 상승한 능력 수치로 인해 몸놀림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21 레벨의 검은 가볍게 흘렸고, 22레벨의 검은 직도를 뽑음과 동시에 내리쳤다.
쩡!
남천휘는 적의 검을 두 동강 낸 후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가치 180의 수련용 직도란다!”
물론 그 와중에 재차 달려드는 21 레벨의 얼굴을 도면으로 후려쳤다.
콰직!
도신의 넓적한 부분으로 얼굴을 얻어맞은 적이 피를 흩뿌리며 튕겨나갔다. 22레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다가 명치를 얻어맞고 허물어졌다.
남천휘는 두 호흡 만에 적을 쓰러트린 후 재이를 향해 윽박을 지르듯 물었다.
“이래도 내가 절정이 안 된다고?”
그 순간 34레벨이 몸을 돌렸다.
상대가 안 된다고 여긴 듯 도주하려는 게다.
하나 이쪽은 오행군림보의 성취가 난해 단계에 이른 고수였다.
‘절정은 아니지만.’
파팟!
남천휘가 눈 위를 밟고 뛰었다.
그 순간 일 장의 거리를 한 호흡에 좁혔고, 금나수를 펼치는 적의 빈틈을 노려 뒷목을 낚아챘다.
“올 때는 네 마음대로였지만, 갈 때는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