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생생우동(生生祐動). (2)
가상 현실 속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비천무상도에 관한 기억은 너무도 선명했다. 가상현실에서 얻은 건 하루 이틀의 가르침으로 얻어낼 수 있는 성취가 아니었다. 하나 주변을 둘러봐도 시간의 흐름을 알기 어려웠다.
“아!”
남천휘는 퀘스트 창을 소환했다.
히든 퀘스트를 확인하자 잔여 시간이 떠올랐다.
《남추를 찾아서.》
- 연계 퀘스트 5차가 완료되었습니다.
- 남은 시간은 04: 11: 14입니다.
- 현재 퀘스트 달성률은 97%입니다.
남천휘는 탄성을 흘렸다.
얼핏 헤아렸을 때 백일은 족히 보낸 듯했다.
한데 현실에서 흘러간 시간은 이틀이다.
‘마치 시간을 멈춘 채 정신을 단련하는 방에 들어간 듯했어.’
남천휘는 주먹을 쥐락펴락 했다.
몸과 마음의 괴리감 때문이었을까.
주먹을 쥐는 행위조차 남의 손을 보는 듯 낯설었다.
“휴.”
하나 그러한 감정이 싫지 않았다.
어찌됐든 그가 백일 동안 수련한 비천무상도는 여전히 존재했다. 게다가 달성률 97%라는 건 자신이 히든 퀘스트를 훌륭하게 완수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머지는 뻔하지.’
애초에 히든 퀘스트의 목표는 비천무상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대두동에서 얻어낼 건 모두 얻어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불현 듯 남추에 대한 그리움은 저 세상으로 날려버린 채 뿌듯함이 온 몸을 지배했다. 무언가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긴 듯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 나는 특급 강호인이 될 인재지.”
특급 강호인이 되어 뭘 할지 정한 것은 아니다.
하나 특급 강호인이 된다면 그냥 숨만 쉬어도 남들이 우러러보지 않을까 싶다.
“오늘의 이 기분을 남기고 싶은데······.”
훗날 자서전이라도 쓰려면 이처럼 기념할만한 날을 상징할 무언가가 필요할 터였다.
고사성어(故事成語)같은.
“그래! 이거지!”
성어라면 짧고, 굵게 기억될 것이 분명했다.
아마 대대로 자신의 행적을 추앙하는 신호탄이 되어 주리라.
‘뭐가 좋을까?’
남천휘는 사색에 잠겼다.
제아무리 지혜 수치가 올라갔어도 애초에 없던 지식이 생길 리 만무했다. 결국 남천휘는 소학을 뗀 아이들이나 지을 법한 명칭을 생각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나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남천휘는 나뭇가지를 들어 바닥에 직접 네 글자를 썼다.
생생우동(生生祐動).
“눈앞의 광경이 너무도 생생(生生)하여 움직일(動) 때마다 천지신명의 도움(祐)을 받는 듯하다. 크하! 좋구나.”
남천휘는 수련동의 입구에 새겨진 일진과 팔진의 문답(問答)을 응시했다. 생생우동이라면 저 문답과 격이 맞지 않을까 싶다.
“에잇! 됐다.”
하나 남추의 정명한 눈빛을 떠올리는 순간 차마 행하지 못했다. 남추를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비천무상도를 수련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맞아! 이것저것 엄청 받은 것 같던데.’
비천무상도에 정신이 팔려서 귓등으로 흘렸지만, 수십 번의 알림이 있었던 듯싶다.
“상태창.”
남천휘의 두 눈은 상태창이 열리는 순간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이거 실화냐?”
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네’라고만 하면 돼!
이건 진짜여야 했다.
만약 눈앞의 상태창이 가상현실이라면 오늘 군사와 재이 둘 중 하나는 성불시켜버릴 요량이었다.
《남천휘(南天輝)》
- 소속 : 대두동(大頭洞)
- 호칭 : 추억을 기억하는 자.
- 별호 : 호도(護刀).
- 등급 : 29->39
- VIP : 1등급(잔여 점수 : 27->1020)
- 성소 포인트 : 1500->4100
- 냉기 저항 : 91->92
근력(筋力) : 202 -> 216
민첩(敏捷) : 208 -> 230
체력(體力) : 198 -> 215
지혜(知慧) : 202 -> 271
내공(內功) : 200 -> 740.
- 미 배분 능력치(+25->290)
올라도 너무 올랐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정녕 자신의 스텟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레벨은 10이나 올랐고, 미 배분 능력치는 290이나 됐다.
능력치의 개별 상승 폭도 엄청났다.
그러고 보니 비천무상도의 초식을 구경하는 내내 귓가에서 재이의 알림이 울리지 않았던가. 하나 이처럼 급격하게 상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허허.”
남천휘는 단전이 있는 자신의 아랫배를 매만졌다.
상승 도법인 비천무상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지혜 수치가 오른 것은 그렇다고 치자. 하나 기존에 비해서 세 배 이상 증가한 내공의 양은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아, 꿀렁거리는 봐.”
운기(運氣)를 하는 순간 예전과 달리 노도와 같은 기운이 혈맥을 휘돌았다. 하나 이유도 모른 채 내공을 소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납득이라도 되어야 안심하고 쓰던가 하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엄청난 외침이 들려왔다.
◎ 주군! 감축드리옵니다. 볼 때마다 신수가 훤해지시니 조만간 천하일통의 첫 발을 떼실······.
아! 차라리 할 말만 하는 재이가 그립다.
“그래서 내 내공이 왜 이렇게 늘어난 거지? 단순히 기연을 얻은 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 역시 총명하십니다. 주군께서는 대두동의 유지로서 자격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대두동의 모든 공능을······.
아! 천하의 군사가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그러던 중 드디어 쓸 만한 내용이 튀어나왔다.
◎ 몽산은 빈 곳이 없을 만큼 빼곡한 삼림(森林)을 자랑하옵니다. 그 말은 곧 수목이 원 없이 자랄 만큼 지기(地氣)가 충만하다는 뜻이지요. 게다가 일월의 영기(靈氣) 또한 몽산을 비추니 대자연의 충만한 기운이 절로 모여들 것이옵니다. 천지의 기운은 성스러운 곳을 향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옵니다.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성소라는 거지?”
◎ 그렇사옵니다. 게다가 대두동의 지형은 천혜의 험지이오니 능히 성벽을 쌓고, 양곡을 모은다면 천하일통의 첫발을 떼기에 충분할 터입니다.
남천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선조인 남추를 비롯한 도인들이 동굴을 파고 수행한 까닭은 알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영산이라는 거잖아.’
중원에는 오악을 비롯해 명산이 즐비했다.
하나 명산이라고 해서 누구나 터를 잡는 것은 아니었다. 그 조건이 바로 영기와 지기가 모이는 장소일 터였다. 특히 구대문파가 자리한 산은 예부터 영산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렇다면 구파에 버금가는 땅의 주인이 바로!”
◎ 하나 대두동은 D급 성소이기에 상위 등급과 비교하면 달과 반딧불의 격차라 할 것이옵니다.
아! 이 자식, 때릴까?
산통 깨는 건 너나 재이나 똑같구나.
“그러니까 한 마디로 여기서 운기조식을 하면 내공을 더 많이 모을 수 있다는 거잖아. 그리고 그 장소가 저기 거대 두상의 오른쪽 눈이고.”
◎ 주군의 총명함에 소신은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주군, 주군. 소신의 충언을 듣고 계시는지요?
남천휘는 군사의 헛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태산의 초입에 있는 대화동의 성소에도 내공이 모일까?’
그 때 무시당한다고 여겼는지 군사의 과장된 웃음이 들려왔다.
◎ 허허, 주군. D등급 성소와 E등급 성소는 하늘과 땅 차이옵니다. 그 동네는 터가 구려서 성소 포인트도 제대로 모이지 않사옵니다. 그러니 지금은 대두동에 집중하여 군세를 모으는 편이······.
남천휘는 눈을 끔뻑이며 군사의 말을 끊었다.
“야! 너, 대화동도 관리하지?”
이 놈 보게. 입 닫는 다고 문제가 해결되면 세상에 싸움이 왜 일어나겠냐. 우리가 부처도 아닌데 이심전심 같은 건 도전하지 말자고.
“내가 얻은 성소는 다 네가 관리하는 거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고민을 하는 걸 보니 반쯤 넘어온 것이 분명했다.
◎ 크흠! 천기를 거스르는 건 팔열지옥에 떨어져도 무방한 대죄일 터, 하나 주군에게 목숨을 바친 군사로서 어찌 따르지 않겠사옵니까.
맞군. 맞네.
“대화동에는 별 일 없고?”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군사는 성소 속에서 외롭게 지낸 듯 저 혼자 떠벌리기 시작했다.
‘이거 한 가지는 확실하네.’
대화동의 문제가 없음을 서두로 하여 개선방안과 발전방향은 물론이고, 요새화를 통한 통행료 징수가지 제안하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대두동의 발전방향을 논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재이와 군사가 별개의 존재라는 거.’
다행히 군사는 어수룩하여 재이보다 다루기 쉬웠다.
옆구리만 찔러도 정보 하나쯤은 토해낼 듯한 분위기였다.
‘앞으로 종종 이용해야겠네.’
남천휘는 군사가 시큰둥해질 무렵 말을 건넸다.
“대두동의 퀘스트나 띄워 봐.”
띠리리리리링!
총 여섯 개의 느낌표가 지도상에 표시됐다.
“남은 시간은 두 시진. 달성률 백 프로부터 찍자.”
남천휘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미 퀘스트 내용은 수련동을 찾기 전에 확인하지 않았던가.
두 시진이면 차고 넘쳤다.
동혈을 청소하거나, 아예 막아버림으로서 대부분의 퀘스트가 완료됐다.
남천휘는 마지막 남은 퀘스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 퀘스트는 조금 마음에 들어!”
《옛 선인의 그림자.》
바로 대두동의 분지를 깨끗하게 정리하라는 것이 골자였다. 무릎 어림까지 자란 잡초를 모조리 쓸어내면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다.
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따닥!
그 순간 직도가 양손에 한 자루씩 나타났다.
수련동에 장식되어 있던 직도11호와 직도12호다.
“그래도 한 번 잡아봤다고, 이게 편하네.”
한데 편해도 너무 편했다.
단순히 직도를 쥔 느낌만이 아니었다.
오른손이야 오랫동안 수련했기에 직도를 편하게 쥐었다. 한데 왼손 또한 예전과 달리 익숙함이 느껴졌다.
“특기 펴봐.”
군사 녀석이 좋다고 특기를 펼쳤다.
‘맞아. 쌍수라는 특기가 생겼었지.’
쌍수(雙手) LV:1
- 좌우의 불균형을 통한 제약이 상당 부분 사라집니다.
쌍수가 왜 생겼을까?
물어보나 마나한 질문이었다.
남천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할아버지에게 받은 게 너무 많네요.”
잠시 묵념을 통해 남추에게 감사를 표한 후 무공을 창을 열었다.
《비천무상도》
- 비천과 무상을 위한 도법.
- 3단계 성장형 (비상 단계 진행 중)
※ 비상(飛上), 행공(行空), 비천(飛天).
- 숙련도(10/100). (가치 : 500)
과연 대단한 도법이다.
첫 단계의 가치가 무려 500이라면 마지막 단계의 가치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비천무상도가 백 년 만에 다시 등장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야!”
남천휘는 일갈과 함께 오행군림보의 표식을 밟았다. 동시에 두 자루의 직도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허공을 찢어발겼다.
쉬이이이익-
“어어!”
◎ 주군! 성체를 보존하소서! 갑자기 풀밭을 구르셔서 깜짝 놀랐사옵니다. 괜찮으신지요?
닥쳐! 개망신이니까 제발 쳐다보지 마.
남천휘는 다리가 꼬여서 나뒹군 자세로 한참동안 엎드려 있었다. 잠시 후 슬그머니 일어서며 별 일 없었다는 듯 무릎의 먼지를 털어냈다.
“뭐 등장에 의의를 두는 거지.”
◎ 무슨 말씀이신지?
“닥쳐!”
남천휘는 얼굴을 붉힌 채 잡초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퀘스트 종료를 이각 남긴 시점에서 알림이 이어졌다.
◎ 히든 퀘스트가 100% 달성되었습니다.
- 보상이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다음 날 남천휘는 대두동의 상징인 거대 두상을 먼 발치에서 바라봤다. 바로 대두동의 입구인 자그마한 통로였다.
“할아버지, 조만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를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수련만은 이곳에서 할 요량이었다.
잠시 후 재이의 알림이 연이어 울렸다.
《남천휘가 영역을 벗어났습니다.》
《특기 ‘유지’와 ‘탐지’가 해제됩니다.》
《성소는 대기 모드로 전환됩니다.》
《주변 대기를 끌어 모아 자동으로 성소 포인트 적립을 시작합니다.》
여전히 대두동 밖은 안개가 자욱했다.
하나 남천휘의 표정은 부처라도 된 듯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완전 달라진 모습에 다들 깜짝 놀라겠지?’
불현 듯 대두동 안에서 군사의 애절한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착각이겠지.
뭐가 됐든 착각일 거야.
남천휘는 콧노래를 부르며 몽산을 내려갔다.
그렇게 안개가 서서히 옅어질 무렵이었다.
“······.”
콧노래가 멈췄다.
다음으로 발길도 멈췄다.
남천휘는 저 멀리 하늘로 쏘아진 화살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삐이이이이이-
소리가 나는 화살, 명적(鳴鏑)이다.
“저건 또 뭐야?”
*
토굴의 내부는 악취가 가득했다.
소변과 대변의 냄새는 물론이고, 시체 썩은 냄새까지 뒤섞인 채 후각을 마비시켰다.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조차 살 수 없는 장소.
“우웩!”
아이 한 명이 헛구역질과 함께 검붉은 토사물을 한 움큼이나 쏟아냈다. 피와 내장이 묘한 비린내를 일각 정도 퍼트렸을 때였다.
경련을 일으키던 아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형, 무서워.”
다섯 살이나 됐을까 하는 아이는 형을 안은 채 경련을 일으켰다.
형이라고 해서 뭐가 다를까.
여덟 살이나 됐을 법한 소년은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애써 웃으며 말했다.
“걱정 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걸까? 종우랑 명석이는 죽었을까? 형, 우리도······.”
형은 동생의 경련이 더욱 심해지자, 허리춤을 들썩였다. 그리고 이내 고소한 향이 풍기는 고기 조각을 꺼냈다.
“입 벌려.”
형은 혹여 냄새라도 퍼질까 고기 조각을 동생의 입에 쑤셔 넣었다.
동생은 우물거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달달한 향이 섞인 육포를 먹은 덕에 마음이 진정된 듯보였다.
“형, 형. 이게 뭐야?”
형은 어둠 속에서 히죽 웃었다.
“며칠 전에 만난 그 잘생긴 형아가 준 거야. 너도 기억나지? 관제묘에서 소나기 피할 때.”
“응, 기억나.”
동생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형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거 양치 아재가 그러는데 이거 엄청 비싼 육포라는 거래. 꼭꼭 씹어 먹어.”
동생은 비싸다는 말에 입을 열심히 오물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안정이 되어서인지, 힘에 부쳐서인지 잠이 들었다.
형은 동생을 품에 안고 쓰다듬으며 읊조렸다.
“잘 될 거야. 누군가 우리를 구하러 올 거야. 걱정하지 마. 우리는 잘 될 거야.”